88화· < 문파를 옮겨라(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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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생각보다 빨리 내렸다·
야밤에 피풍의를 입고 아름다운 여자와 비를 맞으며 걷자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면서 기분이 묘했다·
”무슨 생각해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소·“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죠·”
“하고 싶은 말?”
“지금 당장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려고 하는 말은 전부 가짜예요· 사소한 것이라도 하고 싶은 말이 진짜죠· 오늘은 진짜만 듣고 싶네요·”
“그래도 잘 모르겠소·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여자와 나란히 걷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것도 이렇게 젊은 여자와·”
“나이는 내가 두 살 많지 않나?”
“물론 그건 그렇지·”
“혹시 지금 나 먹이는 건가요?”
“천만에 그나마 소저가 이 몸뚱어리보다 두 살이라도 많아서 다행이오· 믿지 않겠지만 난 소저가 지금보다도 딱 열 살 정도만 더 많았으면 좋겠소·”
“차라리 가만히 계세요· 수습할수록 이상해지니까·”
“그러게 말을 할 줄 모른다니까·”
“나랑 돈 계산할 때는 혀에 기름칠을 한 것처럼 잘도 하더니만·”
“그러는 소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소?”
“할아버지께 받게 될 금전 열 냥 중 일 할은 제 것이에요·”
“피차일반이구먼· 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픽 하고 웃었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려는 가짜 말도 하고 싶어서 하는 진짜 말도 다 필요 없다·
중요한 건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
남궁소소의 안내를 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호수가 나타났다·
인적이 끊어져 적막한 밤에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그렇게 좋은 줄 예전엔 몰랐다·
“수서호예요·”
그제야 남궁세가의 장원 동쪽이 수서호와 붙어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남궁소소 덕분에 마주치진 않았지만 아마 중간에 적지 않은 경계 무사들의 관문을 지났을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지금 뒤쪽 십여 장밖에는 남궁소소를 암중에서 호위하려는 것인지 나를 감시하려는 것인지 모를 고수 이십여 명이 은신술을 펼치며 따라오는 중이었다·
“밤중이라 전경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군·”
“그래서 볼 수 있는 것도 있잖아요·”
“무얼?”
“빗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그때 빗소리를 뚫고 어디선가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봄비 되어 내리니 만물이 소생하는구나·
바람 따라 몰래 밤에 찾아와 소리 없이 세상을 촉촉이 적시네·
들길은 구름이 깔려 캄캄한데 강 위에 뜬 조각배에는 등불이 깜빡이고·
날이 밝으면 비에 젖은 붉은 꽃을 보리니 금관성에도 꽃들이 활짝 피었으리라·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에 누군가 곡을 붙여 부르고 있었다·
곡도 곡이지만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았다·
우리는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소리가 난 쪽으로 걸었다·
놀랍게도 노랫소리는 호수 위에 떠 있는 배에서 나는 것이었다·
배가 있는 곳은 호숫가로부터 그리 멀지 않아서 잠시 후에는 도른도른 말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보아하니 차양 아래 등불을 밝혀 놓고 몇 사람이 모여 앉아 자기들끼리 뱃놀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노래는 함께 온 악기(樂波)가 한 곡조 뽑은 것이고·
“이런 밤에 뱃놀이라니· 우리보다 더 극성인 사람들도 있군·”
“여긴 남궁세가의 경내와 맞닿은 곳이라 외부인들이 함부로 오는 법이 없어요· 아무래도 남궁세가에 묵고 있는 손님들 같아요·”
“손님들끼리 호수에 배를 띄우고 악기를 불러다 놀 수도 있는 것이오?”
“곳곳에서 주연이 벌어지고 있으니 여흥을 위해 악기와 악공들의 출입은 허용한 걸로 알아요· 호수는 남궁세가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뭐라 할 처지가 아니고요·”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좀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알았으면 우리가 먼저 배를 타고 놀 걸 하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고·
노래는 금방이 끝이 났고 이제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의 말을 함부로 엿듣는 것은 실례인지라 우리는 그만 돌아서 가려 했다·
바람결에 미세하게 실려 오는 말이 귓속을 파고들지만 않았다면·
“가장··· 걸림돌은··· 뇌검···”
뇌검이라는 한 마디에 나와 남궁소소는 걸음을 뚝 멈추었다·
자세히 듣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내공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남궁소소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내공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대책이 있으십니까?”
“이런 일은 본래 저희 같은 표국이 전문이지요· 결국 표국들의 싸움이 될 것이니 제 아무리 뇌검이라고 하셔도 별다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상대는 귀계와 암투가 난무하는 무림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팔순의 노강호입니다· 만만히 보아선 안 될 것입니다·”
“한 달 전에 이미 모든 답사를 끝내고 구체적인 계획안까지 마련했습니다· 반드시 도화곡주(桃花谷主)의 마음을 사로잡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나야 이름과 얼굴만 빌려줄 뿐이고 양가장의 장주께서 기대가 아주 크십니다· 이번 일만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화양표국(華陽鏡局)에 섭섭지 않은 사례를 할 것입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뇌검을 시작으로 도화곡주 양가장 화양표국까지 등장했다·
나와 남궁소소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궁유룡이 연관된 게 확실한 이상 예의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질척거리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기운까지 안으로 갈무리했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양가장은 같은 무림맹의 맹방인데다 남궁세가와는 사돈지간이 되고 싶어 하는 걸로 압니다· 한데 구태여 이렇게 암중에서 일을 꾸미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예?”
“무림세가의 혼례는 절대 두 사람만의 만남일 수가 없습니다· 가문과 가문의 정략적인 결합이지요· 한데 상대 가문이 간절히 원하는 걸 내가 가지고 있다면 조금 더 쉽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그 바람에 말소리가 완전히 묻혀 버려 아무리 내공을 끌어 올려도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
남궁소소가 나를 돌아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자는 거요?”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예요·”
“소저는 짐작 가는 거 없소?”
“다들 쉬쉬 하셔서 나도 자세히는 몰라요·”
“뭔가 알긴 아는구먼·”
“도화곡주께서 무언가 아주 중요한 물건을 어디론가 옮기시려는 것 같아요· 한데 무슨 이유에선지 남직예성의 내로라하는 무림문파들이 각자 표국을 앞세워 그 일에 뛰어들었고요·”
“할아버지께서도 관심이 있으시고요?”
“그러신 것 같아요·”
“무엇 때문인지는 정녕 모르겠소?”
“전혀요·”
눈치를 보아하니 남궁소소는 정말로 까맣게 모르는 모양이었다·
한데 나는 사실 도화곡주가 옮기려고 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한 달 후쯤 대별산 도화곡에서 무림을 경동시키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게 남궁세가와도 연관이 있었을 줄이야·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생각이오?”
“당연히 그래야죠·”
내 생각엔 아무래도 남궁유룡이 이종산과 두 명의 의형제들을 자신의 팔순 잔치에 초대한 진짜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
남궁유룡의 팔순 잔치는 검소한 그의 삶과 달리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것들을 다 떠나서 축하객들이 너무 많았다·
거기에 더해 자리를 빛내줄 귀빈 또한 많았고·
무림맹의 사절단을 이끌고 온 총군사 사마옥은 시작에 불과했다·
팔순 잔치가 열리는 당일에는 남직예성의 내로라하는 무림방파의 명숙들과 독보강호 하는 고수들이 찾아왔다·
축하사절단까지는 아니었지만 소위 구대문파로 일컬어지는 산중문파들과 오대세가 등에서도 표국을 통해 축하 서신과 정성껏 준비한 선물들을 보냈다·
무림맹의 대원로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검호(劍豪)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종산과 함께 항주에서부터 가져온 보마를 선물했다·
그러자 남궁유룡은 내게 전날 비무의 우승 상금으로 약속했던 금전 열 냥과 패왕궁을 주었다·
창룡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종산이 내게 말했다·
“패왕궁은 뇌검께서 아끼신 물건이라고 들었다· 지금 당장은 당기기 어렵겠지만 훗날 요긴하게 쓰일 것이니 잘 간직하고 있거라·”
남궁소소에게 이미 물어봤다·
패왕궁이 얼마나 좋은 물건이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백련정강으로 만들어 최소 육십 년의 내공이 있어야만 당길 수 있는 강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당장도 쭉쭉 당길 수 있을 것이다·
패왕궁과 함께 철전 백 발도 함께 받았는데 나중에 조용한 곳에 가서 한번 쏴볼 작정이었다·
이종산은 내가 북해투왕에게 무공을 배웠다는 것까진 알아도 천지령의 천년진기까지 얻은 줄은 까맣게 몰랐다·
천년진기가 백년공력으로 전환되는 과정 중에 있고 벌써 칠십 년의 공력까지 얻은 줄은 더더욱 모르고·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까?”
“무얼 말이더냐?”
“제가 북해투왕께 무공을 배운 것 말입니다·”
“그를 이미 만났다·”
“예?”
“네가 월성교를 자주 찾는단 얘길 듣고 숨겨 둔 떡이라도 있나 싶어 한번 가 보았지· 그랬더니 생각지도 않았던 용이 한 마리 웅크리고 있더군· 그 용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 주었느니라·”
“그렇게 순순히요?”
“오향장육과 검남춘 한 병을 요구하더군·”
망할 놈의 노친네 같으니라고·
나한테는 자신의 정체를 떠벌리고 다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거라는 둥 갖은 협박을 다 하더니만·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먼 길을 가려는 사람에게는 본래 말 못 할 사정들이 많은 법이다· 앞으로도 개의치 말고 스스로 길을 찾아가거라· 나는 지금처럼 알아서 뒤를 캘 것인 즉·”
문득 내가 몰래 말을 사서 목장을 운영하는 것도 아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함부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괜히 건드려서 의심만 사면 곤란하니까·
나는 화제를 돌렸다·
“총군사님과는 얘기가 잘 되셨습니까?”
“무슨 말을 나눴을 줄 알고·”
“입맹을 강권하시지 않던가요?”
“어떻게 알았느냐?”
“무림맹의 총군사께서 아버지를 뵈러 올 이유가 그것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나름 추리를 한다고 한 것인데 세 노인은 이제 이 정도로는 놀라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얘기를 잘 나눈 것이더냐?”
“모두를 불편하지 않게 하면서 우리의 뜻을 관철해야겠지요· 하지만 쉽지는 않으셨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어째서?”
“설마하니 총군사님께서 대의에 동참해달라는 식의 순진한 말로 표왕을 설득하려 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분명 무서운 패를 가지고 오셨을 것 같습니다만·”
그제야 세 노인이 조금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종산이 다시 물었다·
“그 패가 무엇인지도 알겠느냐?”
“제가 만약 무림맹 총군사라면 맹방들 중 몇 곳과 천룡표국 사이의 장기 계약을 주선해 주겠다고 하겠습니다·”
곽석산과 손지백이 눈이 동그래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확히 간파한 모양이 었다·
“총군사님을 제법 잘 아는구나·”
“제가 총군사님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단지 아버지를 잘 알기 때문이지요·”
“나를?”
“총군사님의 입장에서 상대가 가장 원하는 것 중에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그럴 듯하군요·”
“어쩐지 귀신 같더라니·”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곽석산과 손지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다시 이종산이 말했다·
“네 말처럼 총군사님께서는 무림세가 다섯 곳과의 10년에 걸친 장기 계약을 성사시켜 주겠다고 제안하셨다· 모두 천룡표국의 분타가 진출한 도시에 있는 무림세가들이었지·”
“다섯 곳이나요?”
“한데 전제가 틀렸다·”
“예?”
“총군사님께서는 천룡표국의 무림맹 입맹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대신 너를 달라고 하시더구나· 군사부에서 10년 정도만 데리고 있으면서 쓰고 싶다시며·”
“예에?”
깜짝 놀란 내 모습이 재밌는지 곽석산과 손지백은 이제 대놓고 낄낄 웃었다·
“아니 왜요?”
“아마도 총군사께서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하셨던 것 같더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들 중 과연 상대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저를 팔아넘기시려고요?”
“너는 중원 전역에 있는 무림문파의 후기지수들 중 누가 무림맹 총군사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아 보았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무림맹은 명문대파의 제자들과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의 10년은 분명 나를 큰 무림인으로 성장하게 할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남궁세옥도 20대 시절의 대부분을 무림맹에서 보내며 경륜과 식견을 쌓았다고 들었다·
그러나····
“무림맹에서 10년을 구르는 건 명표가 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전 계속 솔잎을 먹겠습니다·”
“10년 후의 네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있느냐?”
“명표가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천룡표국에서의 네 자리는?”
지금 추세대로라면 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갑룡 을룡 병룡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그들의 대단한 외가들과 전쟁을 벌인다는 뜻이다·
단순한 비유로서의 전쟁이 아니다·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살기 위해 세 명의 형제들을 죽여야 할 수도 있다·
이종산은 지금 내게 형제들과 골육상잔을 벌이지 않으면서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제게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절대로요·”
“알겠다· 이 일은 다시 묻지 않겠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항주행은 며칠 미루기로 했다·”
“혹시 도화곡의 일 때문입니까?”
“그걸 어떻게?”
곽석산과 손지백은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어젯밤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들은 이야기를 모두 전해 주었다·
다만 노인네들이 쓸데없는 기대를 하지 않도록 남궁소소와 우중산책 중이었다는 얘기는 쏙 뺐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이종산이 말했다·
“양가주가 배후에 있는 줄은 몰랐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뇌검께서 내게 도움을 청하셨다· 엄청난 돈과 명성이 걸려 있고 보면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기회이지·”
“하면 천룡표국도 뛰어드는 겁니까?”
“일단은 남궁세가의 고문자격으로 오늘 밤 도화곡주와의 회동에 참석해 보기로 했다· 너도 함께 가 볼 테냐?”
“도화곡주께서 지금 남궁세가에 와 계십니까?”
“그렇다고 하는구나·”
“무조건 참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