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마침내 남궁세가로(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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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벅차올랐다·
가장 큰 난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북해투왕이라는 존재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줄이야·
이종산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천룡표국 앞에 똥을 싸놓고 도망간 개의 족보까지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그였으니까·
중요한 건 그가 묵과하기로 결정했다는 거다·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뇌검의 의제라는 것까지 알았으니 더욱 지지해 줄 것이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남궁소소와 예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지·
“그럼 저는····”
어른들끼리 할 얘기도 있다고 했겠다·
나는 조용히 인사를 하고 빠지려 했다·
한데 말을 본격적으로 하기도 전에 인기척과 함께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남궁세옥의 호위무사인 동천이었다·
가주부에도 전속 무사들이 있었는데 왜 그가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그는 남궁유룡을 향해 절도 있게 군례를 취하고는 말했다·
“무림맹에서 축하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맹주께서도 어지간하시군· 오래 산 것이 무슨 대수라고 축하 사절단까지 보내시고· 나는 오늘 밤 천룡표국에서 오신 세 분과 술로 자웅을 겨루어야 하니 무림맹 손님들은 자네가 맡으시게·”
남궁유룡이 그러면서 아들 남궁중백을 바라보았다·
“욕은 뱃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술은 표국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대천룡표국을 이끌어 가는 세 분이시라면 분명 적수를 찾기 어려운 술고래들이실 겁니다· 소자가 아버지를 돕겠습니다·”
그러면서 남궁중백은 공을 다시 아들인 남궁세옥에게로 넘겼다·
“무림맹에서 오신 손님들은 네가 잘 대접하거라·”
“알겠습니다·”
남궁세옥이 대답했다·
그는 노인네들과 술을 마실 수 없게 된 것이 다소 아쉬운 모양이었다·
창룡검 남궁세옥의 저런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없었던 나는 속으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잘됐다·
남궁세옥이 나갈 때 슬그머니 묻어서 나가야겠다·
그때 동천이 뜻밖의 말을 했다·
“사절단을 이끌고 오신 분이 사마옥 총군사님이십니다·”
“뭐?”
“뭐?”
남궁유룡과 남궁중백 부자가 동시에 깜짝 놀랐다·
갑작스러운 이름의 등장에 천룡표국의 세 노인네도 매우 당황한 눈치였다·
“지금 어디에 계신가?”
“총관께서 영접하고 계십니다·”
누가 오든 무림맹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것만으로도 남궁세가에서는 소홀히 할 수 없다·
하물며 무림맹 직계서열 두 번째에 해당하는 총군사 사마옥이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왔다면·
좀 전까지 다른 일정일랑 전부 제쳐두고 밤새 술을 마시자던 남궁유룡은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종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 자웅은 다음에 겨루도록 하시지요· 저희는 이만 돌아가 쉬도록 하겠습니다·”
남궁유룡은 즉답을 피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보더니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세 분이 빠지시면 안 될 듯하외다· 총군사께서 진짜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노부가 아니라 국주인 듯싶으니까요·”
“저를 어찌하여?”
“그건 만나서 직접 얘기를 들어 보시는 게 좋을 듯하외다· 만약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하셔도 좋소이다· 하면 소가주와 손자를 보내 총군사를 대접케 하고 이 늙은이는 예정대로 오늘 밤 세 분과 한바탕 일전을 치러야겠소이다· 껄껄·”
남궁유룡은 사마옥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고는 부담감이 훨씬 줄어든 모양이었다·
이종산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곽석산과 손지백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세 사람의 눈빛은 나와 남궁소소를 짝지어 보려던 순진한 노인네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험난한 강호에서 수십 년을 싸우고 살아남은 맹수들이 무언가 냄새를 맡았을 때의 서늘하고 예리한 눈빛이었다·
사실 사마옥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나 역시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는 무림맹 대원로인 남궁유룡를 지렛대 삼아 천룡표국의 입맹을 권유하기 위해 왔을 것이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천룡표국은 이미 두 차례나 무림맹 입맹을 거절한 바 있다·
전립성에게 들은 바로는 이종산은 함께 강을 건널 수는 있으나 같은 배를 탈 수는 없다고 했다·
무도(武道) 그 자체가 목적인 무림문파들과 칼을 수단으로 부의 축적을 추구하는 표국은 애초부터 정체성이 다른 것이다·
반면 무림맹의 입장에선 천하의 지리와 정보를 꿰뚫고 있는데다 절강성의 패자인 천룡표국이 정말 탐나는 세력일 수밖에 없다· 이번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남궁유룡이라는 큰 변수가 있는 데다 사마옥도 이번만큼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집으로나 무공으로나 이종산도 절대 만만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강호의 고수들 사이에 떠도는 말이 있었다·
천하십검에 한 자리가 나면 반드시 들어가야 할 인물이 있는데 바로 표왕 이종산이라고·
다만 놀라운 것은 이종산이 남궁유룡의 팔순 잔치에 참석할 것을 알아차린 무림맹의 정보력이었다·
가만 남궁소소가 불었나?
“귀빈들이 계속해서 찾아올 텐데 저희가 가주님을 밤새 독차지할 수야 있나요· 허락해 주신다면 총군사님을 뵙는 자리에 저희도 동석 했으면 합니다·”
“국주 혹여라도 노부의 체면을 생각해 원치 않는 수를 두지는 마시오· 국주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 남궁세가는 천룡표국의 바람막이가 되어 줄 것인즉·”
사마옥은 애초 남궁유룡의 도움을 받아 이종산을 어떻게든 압박하려 했을 것이다·
한데 돌아가는 분위기로 미루어 두 사람이 쿵짝이 맞아서는 사마옥을 삶아 먹을 것 같다·
“가주님의 호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가서 총군사를 모셔오게·”
동천이 절도있게 인사를 한 후 나갔다·
나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사마옥이라면 내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꼼짝없이 기다리다가 동석을 하게 생겼다·
그때 남궁세옥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동천의 말이 가주부로 오기 전 소소를 한참 찾았다고?]
[그렇습니다·]
[왜?]
[할 말이 있어서요·]
[지금 창룡전에 있다는군·]
[거길 왜?]
[가서 만나 볼 텐가?]
[나갈 수가 있어야지요·]
[그건 내가 해결해 주지·]
갑자기 남궁세옥이 내게 물었다·
“자네 괜찮나?”
“예?”
“엉덩이에서 피가 나네만·”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지를 주먹만 한 크기로 적시고 있었다·
남궁세옥이 이종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정룡은 상처를 다시 살펴보아야 할 듯합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라고 하고 내일 따로 총군사님을 뵙고 인사를 올리도록 하면 어떨는지요?”
이종산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게 하거라·”
“감사합니다·”
나는 어른들에게 차례로 포권지례를 올린 후 물러났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남궁세옥에게 조용히 묵례를 보냈다·
남궁세옥이 한쪽 눈을 살짝 찡긋해 보였다·
꼿꼿한 자세로 여유를 부리는 그 모습이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었다·
***
창룡전은 나와 세 노인이 도착했을 때 남궁세가에서 내어준 전각이었다·
다른 방문객들이 머무는 벌집 같은 객방들과 달리 작은 정원까지 딸린 창룡전은 조용하고 고풍스러웠다·
입구에 도착하니 곳곳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세들이 느껴졌다·
그중에 어떤 것들은 저절로 신경이 곤두설 만큼 날카로웠다·
남궁소소를 암중에서 호위하는 고수들이었다·
나를 향했던 기세들은 얼굴이 잘 보이도록 횃불 아래로 들어서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창룡전하고도 공용 공간인 다원으로 향했다·
호수 쪽으로 크게 창을 낸 다원은 창룡전에 머무는 귀빈들이 찾아온 손님을 맞을 때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문 앞에 이르니 안으로부터 도른도른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 수만 물러 줘·”
“안 돼요·”
“좀 물러 줘·”
“벌써 아홉 번째라고요·”
“열 번 채우면 되겠네·”
“불리할 때마다 물러 주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오죽하면 그러겠어· 나도 한번 이겨보자·”
“험험·”
인기척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오십여 평이나 되는 넓은 공간을 남궁소소와 은약빙이 몽땅 차지하고 앉아서는 바둑을 두고 있었다·
깜짝 놀란 은약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주뼛거리기만 했다·
알고 보면 나랑은 고작 대여섯 마디를 나눈 사이에 불과했다·
“은 소저가 여긴 어쩐 일이시오?”
“그게····”
“엉덩이에서 피를 흘리며 가는 걸 봤대요·”
불쑥 끼어든 사람은 남궁소소였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자객들이 왜구였다는 소문이 쫙 퍼졌어요· 무림인들 말이 왜구들은 수리검에 극독을 바르는 경우가 많아 귀하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대요·”
“···?”
“그래서 걱정이 되어 의각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만나 주지도 않고 가주부로 도망치듯 가버렸다면서요?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도망치듯 가버렸다고는 안 했는데····”
은약빙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모기만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모른 척하고 말했다·
“미안하오· 그런 줄도 모르고·”
“저 저는 괜찮아요·”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소· 독도 없었고·”
“무사님들에게 들었어요·”
“걱정해 줘서 고맙소·”
“별말씀을요·”
“한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소?”
“소소 언니께서 여기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며 데리고 와주셨어요· 죄송해요· 약속도 없이 제멋대로····”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좋다고 하셨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긴장하고 있던 은약빙의 얼굴이 봄비 맞은 목련꽃처럼 활짝 피었다·
남궁소소와 언니 동생 하게 된 게 그리 좋은지 눈에서 아주 꿀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치 보지 말고 앉아· 여기 언니 집이야·”
남궁소소가 은약빙에게 말했다·
그러자 은약빙이 내게 말했다·
“선배님도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선배님?”
“또 만나면 말씀을 놓기로 하셨잖아요·”
“그건··· 그렇지·”
대답하면서 슬그머니 옆을 돌아보니 남궁소소는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시 뵈면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할지 몰라 한참 고민했어요· 오라버니 선배님 공자님 중에 어떤 게 좋으세요?”
“선배님으로 하지·”
“네 선배님·”
은약빙이 말갛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남궁소소는 여전히 바둑판에다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약빙아·”
“예 언니·”
“혹시 앞으로 나이 많은 아저씨가 친하게 지내자면서 접근해도 절대로 넘어가면 안 돼· 알았지? 그게 다 개수작이거든·”
“개수작요?”
“보통은 우리 어디서 만난 것 같지 않냐며 접근을 해와· 그런 다음에는 차를 마시자 그러고 밥을 먹자 그러고 술을 마시자고 그래· 그런데 가끔 이 범주를 벗어나 약간 어리숙해 보이는 방식으로 접근을 해오는 자들이 있어· 그런 자들은····”
“그런 자들은요?”
“고수야· 완벽한 연기지·”
은약빙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작고 오종종한 치아가 하얗게 보이도록 웃더니 말했다·
“고마워요· 언니· 명심할게요·”
“그럼 한 수만 물러 줘·”
“좋아요·”
“역시 착해·”
은약빙이 바둑판에서 먼저 흑돌을 하나 집어 들었고 뒤이어 남궁소소가 백돌을 집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궁소소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눈으로 바둑판을 아주 뚫어 버릴 것 같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아홉 번이나 수를 물리면서까지 바둑을 두었지만 단 한 번도 은약빙을 이기지 못한 것 같았다·
나이도 열 살이나 많은 데다 나름 유가문파를 세우겠다며 수많은 경서를 독파한 남궁소소 입장에선 얼마나 약이 오를까·
‘좀 도와줘 볼 꺼나?’
형세를 보아하니 귀나 변에 포석도 깔지 않고 중앙에서부터 곧장 세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른바 중원쟁탈전이다·
톡!
톡!
마침내 남궁소소가 백돌을 낙점하자 은약빙이 기다렸다는 듯이 흑돌로 단을 쳤다·
톡!
남궁소소가 소심하게도 허리에서 갑자기 가지를 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거기다 놓으면 안 되지!”
“왜요?”
“바둑은 결국 누가 더 많은 집을 짓느냐의 싸움이오· 초장부터 맥을 이어가는 데만 급급해서는 귀와 변의 광활한 땅을 모두 잃게 된단 말이오·”
“이거 오목인데요·”
“약빙아 뭐해 빨리 둬·”
“끝났는데요· 언니·”
“앗 아아!”
남궁소소는 깜짝 놀라더니 돌연 나를 돌아보며 면박을 주었다·
“뭐예요· 정신없게 하는 바람에 또 졌잖아요·”
“진 걸 보고 내가 말한 것이오만·”
“나도 알아요·”
“대체 몇 번이나 진 거요?”
“두 식경 동안 한 번도 못 이겨 봤어요·”
“그건 밖에서 들었소·”
“벌써부터 매염방의 회계장부를 맡아 관리한다더니 수계산이 아주 보통이 아니에요· 못 당하겠어요·”
“내가 복수해 주오?”
“어른 둘이서 교대로 덤비자고요?”
“그건 좀 그런가?”
“지면 망신이고 이겨도 손가락질 받아요·”
“아깝다· 오목은 내가 천룡표국에서 제일인데·”
“두 분은 꼭 다정한 오누이 같아요·”
“말도 안돼!”
“그건 아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은약빙의 말에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은약빙은 활짝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벌써 가려고?”
“잘 뒀어요· 소소 언니·”
“나도 심심하지 않고 좋았어·”
“저기····”
“다음에 또 놀러 올 거지?”
“정말 그래도 되나요?”
“당연하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은약빙은 남궁소소에게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객방으로 돌아가면 고함을 지르며 침상에 뒹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를 보면서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쭈뼛거렸다·
“나는 내일 팔순 잔치가 끝나면 곧장 항주로 돌아갈 거야· 여기 다시 와도 이제 못 봐·”
“그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제가 풍운비룡과 아는 사이라고 말해도 되나요? 그냥 상방 사람들한테 자랑하려고요·”
“풍운비룡이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어?”
“무림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대명표 중 한 분이 천룡표국 이정룡 공자에게 지어주신 별호라고···· 안 되나요?”
“안 될 리가·”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은약빙은 내게도 꾸뻑 인사를 하고는 신나서 돌아갔다·
다원엔 이제 나와 남궁소소만 남게 되었다·
“어깨는 좀 어떻소?”
“괜찮아요· 엉덩이는요?”
“나도 멀쩡하오·”
“피가 나는 것 같은데요·”
“금방 그칠 거요·”
“점점 커지는 것 같은데·”
“언젠가는 그치겠지·”
“그러다 다시 꿰매야 하는 수가 있어요· 겪어봐서 알겠지만 남궁세가의 마비산은 영 신통치가 않아요· 의각의 각주님께서 그걸로 무사들을 길들이시거든요·”
“무슨 뜻이오?”
“생으로 꿰매이기 싫으면 다치지 말라 이거죠·”
“어쩐지· 씨이!”
그때 ‘험험!’ 하고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한데 사람은 들어오지 않고 발걸음 소리만 후다닥 멀어졌다·
문을 열어보니 발아래 한지를 여러겹 붙여 만든 작은 통이 놓여 있었다·
무림인들이 흔히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금창약 통이었다·
남궁소소를 암중에서 호위하는 무사들 중 누군가가 주고 간 것 같았다·
‘쓸데없이 친절하군·’
아니면 경고를 하는 것이거나·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알아서 잘 말하고 행동하라고·
어쩐지 남궁세옥이 대범하게 가서 만나보라고 하더라니
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기왕이면 좀 발라주고 갈 것이지·’
나는 문을 닫은 후 바깥에서 바지 속으로 대충 손을 넣어 상처 부위에 금창약을 치덕치덕 발랐다·
이어 바지를 추스른 다음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됐소·”
“그럼 쉬세요·”
남궁소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려고?”
“늦었으니 가서 자야죠·”
“나랑 달구경 가지 않겠소?”
“갑자기요?”
“갑시다· 달구경·”
“이런 밤중엔 좀 그렇지 않아요?”
“달구경을 낮에 하는 사람도 있소?”
“그게 아니라 구름이····”
그녀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두 식경 전만 해도 별이 쏟아질 것 같더니 지금은 구름만 가득이었다·
“그럼 구름 구경 갑시다·”
“그런 것도 구경해요?”
“풀밭에 누워 달빛을 머금은 구름이 변하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으시시 하고 재밌는지 모르시는구려·”
“싫어요·”
“왜?”
“비가 올 것 같아요·”
다시 창가로 가서 하늘을 자세히 살펴보니 온통 먹구름이었다·
30년 쟁자수 경험으로 볼 때 금방 소나기를 퍼부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나랑 오목이나 두겠소?”
“은약빙이랑 서른일곱 판이나 뒀어요·”
“술은?”
“낮에도 실컷 마셨고요·”
“그렇군·”
그녀의 철벽같은 방어에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이 정도면 그냥 나랑 있기 싫다는 거다·
‘그러면 그렇지·’
그만하자·
더 얘기하면 지분거리는 것밖에 안 된다·
그때 남궁소소가 물었다·
“또 뭐 없어요?”
“무얼 말이오?”
“생각해 둔 게 더 없냐고요·”
“없소만····”
“그럼 빨리 생각해 봐요· 지금까지 다른 여자들과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걸로요·”
“여자들과?”
“어리숙한 척 연기하지 말고요· 안 속아요·”
나는 전생에서 어머니를 빼면 일평생 여자와는 다섯 마디 이상 나눠 본 적이 없는 순수 그 자체인 사람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남몰래 짝사랑했던 여자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절름발이에 추레한 몰골의 나를 남자로 보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내가 여자와 무엇을 해봤겠나·
“산책 갑시다·”
“산책요?”
“비가 올 것 같은 밤에 산책 나가본 적 있소?”
“당연히 없죠·”
“나도 없소·”
“좋아요· 가요·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