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마침내 남궁세가로(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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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과 경향대운하가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양주(揚州)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상업 도시였다·
그 명성은 아직도 빛을 잃지 않아 강남의 물자를 강북으로 운송하는 주요 거점 역할을 했다·
남궁세가는 봄꽃이 만발한 수서호(癌西湖)를 끼고 거대한 궁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정문 앞에서부터 이미 말과 마차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뇌검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 남직예성 전역에서 상방과 무림문파 사람들이 선물을 싸 들고 찾아온 모양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초대했다고?”
“그럴 리가요· 뇌검께선 원래 겸손하고 검소하신 분으로 어떤 경사에도 좀처럼 누군가를 초대하는 법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귀신같이 알고 몰려올 뿐이지요·”
“온다고 다 들여 보내주시면 그게 그거 아닌가?”
“오백 년 전 양주에 뿌리를 내린 개파조사께서 유언을 하셨답니다· 어렵게 무림세가의 문턱을 넘으려는 사람들은 무언가 곡절이 있는 것이니 함부로 걸음을 막지 말라고요· 이후 이유불문하고 멀리서 온 손님을 박대하지 않는 것은 남궁세가의 오랜 전통이 되었답니다·”
대장궤 손지백과 총표두 곽석산의 대화였다·
걸음을 막지는 않았지만 쉽게 들여 보내주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장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일일이 신분을 확인받는 중이었다·
이를 위해 수십 명의 무인들이 동원 되었다·
“어떻게 할까요?”
“총표두가 가서 슬쩍 기별을 넣어보시오·”
손지백의 말을 이종산이 받았다·
“번거롭게 하지 말고 잠깐 기다리도록 하지요·”
“존명·”
이종산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결정한 이후 손지백은 이종산의 말이라면 끔뻑 죽었다·
줄은 모두 네 개였고 우리는 가장 왼쪽 줄에 섰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초대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줄을 서려는 이유를 나는 어느 정도 짐작할 것 같았다·
이종산은 지금 뇌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겸손을 보이려는 것이다·
표국의 국주이기 이전에 그도 한 명의 걸출한 검사였다·
내가 명표를 동경하듯 어쩌면 그도 뇌검을 동경할 지도 모르겠다·
무심결에 옆줄을 보니 비단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열서너 살가량의 여자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그녀가 마찬가지로 격식을 갖춰 입은 중년인에게 물었다·
“뇌검께서 그렇게 대단한 분이신가요?”
“뇌검께서도 대단하시지만 남궁세가 또한 대단하지· 천하 오대 무림세가 중 한 곳인 남궁세가는 그동안 수많은 협행들을 해왔단다·”
“어떤 협행들을 해왔지요?”
“양민을 괴롭히는 흉신악살들을 제거하고 사나운 마적들을 토벌했으며 대기근이 든 해에는 구휼미를 아낌없이 풀었지· 최근에는 동해에 상륙해 약탈을 일삼던 왜구 삼백 명을 뇌검께서 단 열 명의 고수들을 거느리고 가셔서 궤멸하신 일도 있단다·”
“우리 매염방(梅鹽常)이 안전하게 상방을 운영할 수 있는 데는 남궁세가와 같은 무림문파들의 헌신이 있기 때문이었군요·”
“불행하게도 남궁세가와 같은 무림문파는 그렇게 많지가 않단다· 그래서 남궁세가와 뇌검께서 이렇게 존경을 받는 것이고·”
가만 매염방이라고?
그렇다면 저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바로··· ·
나는 너무 놀라서 잠시 숨을 골랐다·
10년 후 저 아이는 양주 최고의 미녀가 된다·
더불어 상계의 거물이 되어 매염방을 남직예성 최고의 상방으로 만들어 놓는다·
지금에야 아는 사람이 드물겠지만 그녀는 상리(商理)와 이재(理財)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양주 구석에서 서른 명 정도의 일꾼들을 거느리고 소금을 파는 작은 상방의 딸에 불과할 것이다·
가끔씩 이렇게 전설이 될 인물들을 스치듯 만날 때면 내가 지금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순간 여자아이가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넋 놓고 여자아이를 구경하다 눈이 딱 마주친 나는 얼른 고개를 딴 곳으로 돌렸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끌다가 눈알만 슬그머니 굴려 옆을 돌아보니 여자아이는 그때까지도 나를 보고 있었다·
“다 봤거든요·”
“오해하지 마시오· 난 단지····”
“·····?”
“····”
“왜 말이 없으세요?”
막상 말을 하려고 보니 딱히 변명할 게 없다·
우연히 얘기를 들었고 내가 아는 이름이 나와서 시선이 갔을 뿐이다·
그때쯤엔 여자아이의 아비도 이종산과 우리 쪽 사람들도 대화를 듣고 관심을 기울였다·
자칫하면 작은 오해가 시비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여자아이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두 분의 대화가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다 그만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소저께 사과를 드립니다·”
내가 너무나 정중하게 나오자 오히려 여자아이가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그녀도 얼떨결에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사과를 하시라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내 잘못이니 사과를 하는 게 맞습니다·”
“예를 갖춰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가 훈훈하게 풀리자 이종산과 여자아이의 아비가 서로를 향해 가볍게 웃으며 묵례를 주고받았다·
“혹시 강남분이신가요?”
“항주에서 왔습니다·”
“전 양주 토박이예요·”
“그렇군요·”
“공자님도 남궁세가가 처음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쥐방울만한 놈한테 공자님 소리를 들으니 살짝 오글거린다·
사실 나도 웬만하면 평대를 했을 텐데 상대가 워낙 어리다 보니 오히려 더 깍듯해진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십여 명의 인물들이 또각또각 말을 타고 나타났다·
원래 양주의 수서호 북쪽 호반을 지날 땐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라는 무림의 금언이 있었다·
뇌검과 남궁세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인물들은 그런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정문 앞까지 말을 탄 채 다가왔다·
한데 선두에 선 사내가 예사롭지 않았다·
건장한 체구에 출중한 기세도 기세지만 용모가 숨이 막힐 정도로 빼어났다·
곳곳에서 나직한 감탄성들이 흘러나왔다·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젊은 선남선녀들이 많았는데 특히 여자들이 한숨도 아니고 앓는 것도 아닌 이상한 소리들을 냈다·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 빽 하고 소리쳤다·
“창룡검이다!”
“창룡검 남궁세옥?”
남궁세옥라는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부터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검술의 천재라느니 불과 서른 살에 북무림을 떨어 울리는 신진고수가 되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저분이 바로 그 유명한 창룡검 남궁세옥 공자님이세요·”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에 곁을 돌아보니 여자아이가 정수리가 훤히 보일 정도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양주의 내로라 하는 무림세가와 상방의 젊은 여자들치고 그를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해요· 하지만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더라고요·”
“왜요?”
“검술을 수련하느라고요·”
“그렇군요·”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어떻게든 그와 안면을 트도록 하세요· 양주에서는 창룡검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거든요·”
이 얘기를 해주려고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나 보다·
여자아이는 나와 어른들이 남궁세가주에게 눈도장을 찍어 무언가 도움을 얻으러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그녀와 매염방이 그런 입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문전성시를 이루는 걸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평소 명분이 없어 남궁세가의 문턱을 넘기 어려웠던 상방과 무림인들에게 뇌검의 팔순 잔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실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방문객들 중에 한껏 차려입은 선남선녀가 많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아마 저들의 목적은 남궁세옥과 남궁소소를 만나 어떻게든 인맥을 쌓는 것일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여자아이를 돌아보니 뭔가 좀 짠했다·
그녀 역시 다른 젊은 여자들처럼 한껏 차려 입었지만 남궁 남매와 교분을 쌓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때였다·
“워!”
남궁세옥이 황급히 말을 멈추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이어 말 고삐를 수하에게 던지듯 주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아는 사람이 있나봐요·”
깜짝 놀란 여자아이가 목구멍을 쥐어짜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남궁세옥은 바로 우리 일행 앞으로 와서는 더없이 공손하면서도 기품있는 동작으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남궁세가의 장자 남궁세옥 국주님과 두 분 장로님을 뵙습니다·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왕림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남궁세옥 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온 십여 명의 무사들 또한 남궁세옥과 서너 걸음 떨어진 뒤쪽에 서서 절도있게 포권지례를 해왔다·
“어찌 그쪽에서 오시는가?”
“저도 항주에서 지금 막 도착하는 길입니다·”
“그런 줄 알았으면 함께 올 걸 그랬군·”
“미리 알았더라면 제가 천룡표국으로 세 분을 모시러 갈 걸 그랬습니다·”
천룡표국이라는 한 마디는 좌중에 태풍을 몰고 왔다·
조금 전 남궁세옥이 등장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큰 웅성거림이 번져갔다·
“천룡표국의 국주라면····”
“설마 표왕 이종산?”
“저분이 표왕이었다고?”
“맙소사· 좀 전까지 우리와 함께 줄을 섰는데!”
“아뿔싸· 표왕인 줄 알았으면 인사라도 해볼걸!”
좀처럼 잦아들 줄 모르는 웅성거림 속에서 남궁세옥은 곽석산 손지백과도 일일이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다·
“자네도 잘 왔네·”
“그간 별래무양하셨습니까?”
“백발노성을 무림맹까지 호송했다는 얘기 들었네· 무림맹에서 내가 잘 아는 녀석과 또 다른 표행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게 말입니다· 선배님·”
“미안하네·”
“예?”
“그 망아지 같은 녀석을 데리고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듣자 하니 목숨도 구해주었다지? 어려서부터 워낙 주유천하 하는 걸 좋아해서 그렇다네·”
“···?”
“또 표행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내가 자네를 협박했다고 하게· 그럼 쉽게 강짜를 놓지 못할 걸세·”
잠깐만요· 뭐라고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나는 안된다고 했는데 남궁소소가 강짜를 부려서 어쩔 수 없이 함께 표행을 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마음 고생이 심했으며 그녀의 목숨까지 구해주었다고?
아무래도 남궁소소가 모두의 평화를 위해 사기를 친 모양이다·
한데 천하의 남궁세옥이 이렇게 깜빡 속는다고?
혹시 기만술책인가?
표정을 보면 진심인데·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다·
이쯤 되니 슬슬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남궁소소를 고용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표사도 충분하니····’
그때 장원 안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상앗빛 장포에 청건을 쓴 문사풍의 초로인과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었다·
문사풍의 초로인은 움푹 들어간 눈 위로 검은 눈썹이 기이할 만큼 길게 자랐는데 그 모습이 꼭 치맛자락에 고드름이 매달린 것 같았다·
옛말에 특별한 생김새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했다·
초로인은 이종산의 앞에 이르자 앞서 남궁세옥이 그랬던 것처럼 공손하고 기품있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남궁세가의 총관 좌고학입니다·”
“천룡표국주 이종산입니다·”
“근처를 지나다 귀빈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나오는 길입니다· 어려운 걸음을 해주시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좌고학은 곽석산 손지백과도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노인네들의 인사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얼른 포권지례를 올렸다·
“천룡표국의 십칠각주 이정룡 남궁세가의 총관님을 뵙습니다·”
“자네가 그 유명한 이정룡이로군· 반갑네·”
그 순간 군중이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정룡?”
“천룡표국의 사공자?”
“작년에 있었던 향시와 회시에서 연달아 장원급제를 했다는 그 천재?”
“진왕의 사위가 될 뻔했다는 소문도 있던걸·”
“무공은 변변찮아도 표사로서의 수완만큼은 대단하다더라고·”
“변변찮은 무공도 이류는 된다던 걸·”
확실히 절강성을 벗어나고 보니 호구 등신에 반푼이라는 소리는 안 나온다·
그런데 내 무공이 고작 이류에 불과하다고?
그러고 보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본격적으로 내 무공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이류는 좀 심했다·
문득 객관적인 내 무공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졌다·
한편 신분 확인이고 뭐고 방문객들은 전부 뒤돌아 우리 일행을 구경했다·
방금까지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여자아이는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마른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시지요· 가주님께 소식을 전하라 했으니 지금쯤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좌고학과 남궁세옥이 차례로 말했다·
이종산을 필두로 모두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한참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뒤돌아 걸었다·
그러자 모든 군중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잠시 후 여자아이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발개졌다·
“난 이 정룡입니다·”
“들었어요·”
“소저의 이름은 어찌 되시는지?”
“은약빙이라고 해요·”
“나이는?”
“열네 살이요·”
“내가 아홉 살이나 더 많군요· 다음에 또 만나면 말을 놓아도 될까요?”
“예에?”
“안될까요?”
“아뇨· 돼요!”
나는 은약빙의 벗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
그러나 무림 아니 상계의 선배가 될 수는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표국도 상계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으니까·
‘매염방에서 나오는 표물은 전부 내꺼다·’
나는 은약빙을 향해 가볍게 웃어 주고는 황급히 일행을 따라갔다·
슬쩍 뒤돌아보니 나를 향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는 전부 은약빙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