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백 명의 호송단(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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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발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는 백호 가죽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였음에도 불구하고 흡사 산을 마주하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현 무림맹주이자 뇌검 남궁무룡과 함께 천하십검의 수좌 자리를 다툰다는 설산신검 장초풍·
나는 지금 전생에서 전설로만 들었던 일대검호와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막사 안에는 사마옥 팽문룡 설인탁 그리고 남궁소소도 있었다·
그러나 장초풍은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주었다·
기문진을 탈출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나와 남궁소소 특히 내 덕분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네와 남궁소소가 유령처럼 석벽을 뚫고 나타나 환수들을 모조리 격퇴하며 자신들을 이끌었다고 하던데·”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환수들과 싸워서 이긴 것밖에 없습니다· 나머진 남궁 소저가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었습니다·” 맹주의 시선이 남궁소소에게로 옮겨갔다·
“아무래도 자네가 설명해야 할 것 같군·”
“한동안 기문진식을 공부한 적이 있어 우연히 구곡미혼진이라는 걸 알아냈습니다· 이후 총군사님께서 북두천구를 세워주신 덕분에 방위를 살피고 귀문(鬼門)을 찾을 수 있었고요·”
“그런 다음엔?”
“귀문을 뚫고 들어가 생존자들과 조우했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귀문을 넘나들며 생존자들을 찾아다녔고 그들과 함께 검진을 짜고 환수들을 격퇴하며 밤새 구곡을 모두 통과했습니다·”
“생존자들을 찾아다녔다고?”
“그렇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돕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것 같아서요·”
장막 안에 한동안 뜨거운 침묵이 흘렀다·
남궁소소가 지금이야 천룡표국의 객원표사이지만 한때 무림맹 용봉지회의 후기지수였다·
그런 그녀가 옛 동료들을 구하는데 무슨 구차한 이유들이 필요하겠나·
“귀문은 어떻게 뚫고 환수는 어찌 격퇴했는가?”
다시 장초풍이 물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남궁소소는 지금 내가 입은 용린신갑의 안쪽에 마교의 기문진을 무력화시키는 부적이 그려져 있는 줄 안다·
한데 용린신갑의 존재는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했었다·
내가 용린신갑을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그 파장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녀는 맹주에게도 거짓말을 할까?
하면 뭐라고 둘러댈까?
“그건 이 표사가 한 일이라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남궁소소는 내게로 간단하게 공을 넘겨 버렸다·
덕분에 장초풍 사마옥 팽문룡 설인탁까지 전부 나를 쳐다보았다·
허를 찔린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장초풍과 사마옥은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무림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거물들이었다·
어떤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도 두 사람을 완벽하게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말을 해야하나?
그때였다·
“파진복마검(破陣伏魔刻)을 익혔나?”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사람은 설인탁이었다·
파진복마검이라는 말에 장초풍과 사마옥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설인탁이 설명을 덧붙였다·
“항주의 천목산에 선광사(善光寺)라는 큰 절이 하나 있습니다· 천룡표국의 이종산 국주께서 바로 그 선광사의 오랜 속가제자이시지요·”
장초풍의 말이 이어졌다·
“선광사에 파진복마검이라는 비기가 존재함은 나도 알고 있었소· 하지만 그 귀한 검맥이 천룡표국으로 흘러 들어간 줄은 몰랐구려· 파진복마검이라면 귀문을 뚫고 환수를 격퇴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이종산이 선광사의 속가제자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바 선광사는 승려들이 귀신을 잘 쫓는다는 것 외에는 그저 크기만 한 절에 불과했다·
단순히 크기로만 따지면 소림사를 능가할 것이다·
한데 그곳에 나도 모르는 검맥이 있었던 모양이다·
무림맹주까지 인정하는 것으로 보아 보통의 검맥이 아닌 듯했다·
진(陣)을 부수고 마(魔)를 무릎 꿇린다는 이름부터가 일반적인 검법과 달리 방술(方術)의 냄새가 물씬 난다·
어쩐지 이종산 같은 거물이 이름 없는 절의 속가제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더라니·
더 캐고 보면 여기에도 어떤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해도 딱 필요한 순간에 설인탁이 그걸 언급한 것은 너무나 공교로웠다·
장초풍은 비로소 모든 의문이 가신 듯 나와 남궁소소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고생이 많았네· 두 사람 덕분에 후기지수들을 비롯해 혈검대의 무사들까지 수십 명이 목숨을 구했네·”
“표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칭찬 몇 마디로 넘어갈 일이 아닐세·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게· 무림맹의 맹주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 주지·”
“징벌을 면해주시는 건 어떨지요?”
사마옥이 불쑥 말했다·
“두 사람은 일전에 맹의 비고를 허락 없이 침범한 일 때문에 호송이 끝나는 즉시 곤장 스무 대씩을 맞기로 되어 있습니다· 허나 지금에 이르러 공이 과를 크게 덮었으니 맹주님께서 없던 일로 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팽문룡도 이때다 싶었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둘이 합하면 곤장 마흔 대이고 마침 두 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한 맹도들도 마흔 명 대이니 얼추 맞는 듯합니다·”
“맹주의 권한으로 두 사람에게 내려진 곤장형을 철회토록 명하겠습니다· 총군사께서는 집법당에도 고하고 사후를 살펴 주시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와 남궁소소는 동시에 포권지례를 올렸다·
남궁소소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묵은 체증이 비로소 내려가는 모양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형틀에 엎으려 물곤장 맞을 생각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니 기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좀 달랐다·
사람 목숨이랑 곤장이랑 같은 저울에 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두 사람이 한 일에 비하면 작은 일이지·”
그러면서 장초풍은 한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수염을 쓸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정도로 입을 싹 닦을 모양이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면 그 대화가 지나가 버리기 전에 일단 다리를 걸어 놓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막 말문을 열려는 순간 인기척과 함께 휘장이 홱 걷히며 혈검대의 무사 하나가 들어왔다·
팽문룡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총군사님을 뵙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팽문룡은 사마옥을 돌아보며 표정으로 허락을 득한 후 말했다·
“들여보내라·”
혈검대의 무사가 나가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들어온 이는 어처구니없게도 호리독사였다·
나와 남궁소소는 깜짝 놀랐다·
저 인간이 여태 안 보이다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 나왔지?
사마옥이 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호리독사는 주변을 살피며 쭈뻣거리기만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을 해도 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자리에 내가 믿지 못할 사람은 한 명도 없네· 편하게 이야기해도 좋네·”
호리독사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사슴 가죽으로 싼 무언가를 꺼내더니 사마옥의 앞으로 쓰윽 밀어 놓았다·
그걸 보는 순간 장초풍 사마옥 팽문룡의 얼굴이 꺼멓게 죽었다·
반면 나와 남궁소소와 설인탁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사마옥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슴 가죽을 풀었다·
그러자 거무죽죽한 색깔에 가지마다 글씨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죽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초풍 사마옥 팽문룡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앉은 자리에서 필쩍 뛰어오르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내가 혈검대와 후기지수들을 이끌고 기문진을 무사히 탈출했을 때에도 저 정도로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저 죽간들이 무엇이길래·
“이걸 어떻게···?”
“훔쳤습니다·”
“언제?”
“어젯밤에요·”
“자세히 말해보게!”
“어젯밤 사달이 벌어졌을 때 저는 야영지 외각의 바위틈에 숨어 있었습니다· 총군사님께서 제게 내리신 특명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서요·”
특명은 무슨 얼어 죽을· 물건을 훔쳐 어떻게든 곤장을 안 맞으려고 그랬겠지·
“그러다 마교도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무작정 합류를 하기보다는 외곽에서 도울 방법이 없나 하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한데 벼락처럼 기문진이 발동하면서 모두 갇혀 버리지 뭐겠습니까?”
놀고 있네 · 적들이 너무 많은 걸 보고 슬그머 니 도망갈 궁리를 하느라 합류를 하지 않았겠지·
그러다 갑자기 기문진이 발동해서 모두 갇혀 버리자 아예 꽁꽁 숨어버린 거고·
”그리고 마교의 잔당들이 천중산으로 퇴각해 갈 때 저도 슬그머니 섞여 들어갔습니다· 복색도 기세도 제각각인 것이 딱 봐도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놈들 같더라고요· 그런 놈들은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숨어들기도 쉽지요·”
마교도들과 함께 도망칠 생각이었겠지·
그때 함께 빠져나가지 않으면 무림맹의 천라지망에 걸렸을 테고 나중에 배신자로 낙인 찍혔을 테니까·
“기회만 보며 따라가고 있었는데 마침 전투가 벌어지더니 사인교를 멘 가마꾼 중 한 놈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지 않겠습니까? 해서 발로 놈의 등짝을 밀어 버린 후 제가 얼른 사인교의 한쪽을 잡았습니다·”
이때쯤엔 마교의 잔당들과 함께 천라지망에 갇혔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슬슬 다시 이쪽으로 넘어 올 준비를 했을 것이고·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척하며 사인교를 계곡에 처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에따 모르겠다 하고 삼뇌와 함께 굴렀지요· 그때 슬쩍 해서는 냅다 도망쳤습니다·”
“수고했네· 정말 수고했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정도가 아닐세· 진정 큰 공을 세웠네·”
“약속하신 곤장은····”
“당연히 면제해 주어야지·”
“감사합니다·”
“총군사 이렇게 되면 사실상 작전은 모두 성공한 것이 아닙니까? 애초의 목적대로 마교의 잔당들도 소탕하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성물도 도로 찾았으니 말입니다· 껄껄·”
“맹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달랑 세 명에 불과한 천룡표국의 표사들이 망할뻔한 호송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하하·”
“천룡표국을 일 순위로 넣어야 한다며 우리 두 늙은이를 설득했던 설 표두의 공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이를 말씀입니까· 그리고 다시 여정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우리를 칭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설인탁을 칭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천룡표국의 공을 인정해 주니 나로서도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을 마흔여섯 명이나 구한 대가가 고작 곤장 면제라는 게 여전히 성에 안 찼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그때쯤 나는 호리독사가 훔쳐 온 저 죽간본이 문제의 성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도망치려다가 다시 물건을 훔쳐 이쪽으로 붙은 게 거의 확실하지만 모른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천룡표국의 객원표사로서 그가 세운 공이 워낙 크니까·
한편 나와 남궁소소 그리고 설인탁까지 죽간본에 관심을 가지자 사마옥이 장초풍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누었다·
장초풍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마옥이 말했다·
“아직 여정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맹주님 말씀처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는 여러분께 호송하는 물건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러면서 그는 죽간본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한가운데 펼쳐 놓았다·
“전설에 따르면 오래 전 공자님께서 직접 간추리고 엮은 고대의 비경기서가 여덟 권 정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같이 신비한 힘을 일으키고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라고 하는데 이 죽간본도 그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죽간본에 빽빽하게 새겨진 글자를 보니 일단 내 몸속에 각인된 그 고대의 부적과 동일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부적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면 부적의 비밀에 관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벌써부터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궁소소가 사마옥에게 물었다·
“신비한 힘이란 어떤 걸 말하는 것인가요?”
“우주의 질서를 벗어나거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자연적인 것들일세· 그 때문에 마공비급으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고·”
“공자님께서는 괴력난신(怪刀亂神)이라 하여 괴이한 힘이나 귀신에 관한 것들은 평생 말하지 않으신 것으로 압니다만·”
“그러니 더욱 사람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지· 전설이 사실이라면 괴력난신을 멀리했다고 알려진 공자님께서도 책으로 엮어 혼자 볼 정도였으니 말이야·”
“무림사에서 그 비경기서 중 하나라도 손에 넣고 익힌 사람이 실제로 있었나요?”
“지금은 맥이 끊어졌지만 여러 이적들을 행한 것으로 알려진 천마성교의 전대 교주들이 세 권의 비경기서들을 대대로 익혔다고 하네· 수많은 마교절학들의 뿌리 또한 비경기서들이고·”
천마성교의 전대 교주들이 익혔고 마교절학들의 뿌리가 되었다는 말에서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들이 익혔거나 익혔다고 전해지는 무공들 중 인간의 폭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술법으로 강시를 부리거나 기문진을 펼쳐 환수가 나오게 하는 것도 그 못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한데 왜 가죽끈을 묶지 않은 것입니까?”
“몇 년을 매달렸지만 순서를 알 수가 없었다네·”
“만약 순서를 알면 어떻게 됩니까?”
“순서를 안다고 해서 당장에 어떻게 되는 건 아닐 것이네· 다만 삼뇌가 이 죽간을 기필코 손에 넣으려고 했던 이유는 알 수 있겠지· 내가 알고자 했던 것도 그것이었고·”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남궁소소 조차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보았다·
“자네가 무슨 수로?”
“자세히 보시면 죽간마다 정체불명의 먹선이 두세 개에서 대여섯 개씩 불규칙적으로 찍혀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것들은 어떤 복잡한 문양의 일부분인 듯합니다· 그리고 그 문양을 제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고요·”
내 몸속에 각인된 부적이 구체적인 문양으로 발현한 것은 딱 두 번이었다·
처음 환생 후 백선객점에서와 화조신옹에게 잡혀가던 중 어느 동굴에서·
그러나 지금도 대충은 비슷하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충격으로 말미암아 워낙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그려져 있는 걸 조합하는 거라면 훨씬 쉬울 것이다·
나는 죽간에 찍힌 저 먹선들이 그 부적과 똑같은 문양의 조각들이라고 확신했다·
“그 문양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가?”
“부적처럼 보였습니다·”
“어디서 보았나?”
“항주에는 몇 대에 걸쳐 내려온 고서점들이 즐비합니다· 십수 년 동안 과거 준비를 하면서 그 책방의 책들은 죄다 섭렵한 것 같습니다·
그때 어떤 고서의 말미에서 아까 말씀하신 내용들과 함께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서 또 다른 죽간본을 운송하던 중에 불에 타죽었고 그게 내 몸속 어딘가에 화인으로 새겨졌고 천룡표국의 넷째 아들로 환생을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다행히 두 사람은 내가 향시와 회시에서 연달아 장원을 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믿는 눈치였다·
그 정도로 문장이 뛰어나려면 안 읽어본 책이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읽은 고서들 중에는 공자가 남겼다는 비경기서에 관한 기록도 한 두 장쯤은 있을 법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부적이라면 매우 복잡한 문양일 텐데· 그걸 아직도 기억한다고?”
“워낙 신기해서 수 차례 보고 눈에 담았습니다· 또한 그때 본 부적은 좌우가 대칭되는 것이었습니다· 죽간이 모두 열여덟 개니 어느 쪽이든 아홉 개만 어찌어찌 맞추면 나머지는 쉬울 겁니다·”
“이 표사만 남고 나머진 모두 나가 주시게!”
사마옥이 갑작스럽게 축객령을 내렸다·
팽문룡 설인탁 남궁소소 호리독사는 졸지에 쫓겨나고 말았다·
잠시 후 막사 안에는 장초풍과 사마옥 그리고 나만 남게 되었다·
장초풍과 사마옥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굳어 있었다·
특히 사마옥은 눈까풀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몇 년을 매달리고도 맞추지 못한 죽간본의 순서를 내가 이 자리에서 맞출 수 있다고 하니 허탈감이 심장을 강타한 것이다·
“해 보시게·”
장초풍이 말했다·
오늘 들어본 그의 음성 중 가장 낮고 묵직했다·
두 사람이 초조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죽간을 하나씩 집어 순서를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내 기억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엔 위치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대여섯 번 정도 실패를 했다·
그렇게 초반 다섯 개를 맞추자 부적의 문양이 형체를 잡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나뭇가지가 뻗어 나가듯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아홉 개를 맞추었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다·
나머지는 정확히 대칭되는 점들만 찾아 순서대로 놓으면 되었으니까·
마침내 완벽한 순서의 죽간본이 만들어졌다·
“다됐습니다·”
순간 내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부적의 열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 강도가 마치 환생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처음 발현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용린신갑을 밀착해 입은 탓에 그때처럼 옷에 불이 붙거나 빛이 새어 나오진 않았다·
다만 자동으로 이능력이 발동되면서 시간이 평소에 비해 열 배 정도는 느려진 것 같았다·
하마터면 시간이 그대로 멈추었다고 착각할 뻔했다·
한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간본에 갑자기 저절로 화르륵 하고 불이 난 것이다·
“어어!”
대경실색한 장초풍이 황급히 손을 뻗어 죽간본을 덮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불은 조금도 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사마옥이 찻물을 재빨리 끼얹고 내가 깔고 앉은 양가죽으로 덮은 다음 발로 꾹꾹 밟아도 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죽간은 점점 활활 타오를 뿐이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돼!”
그때부터 나와 장초풍과 사마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죽간본이 불타는 걸 옆에서 지켜 보아야만 했다·
잠시 후 나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죽간 하나하나가 불에 타 사라질 때마다 거기에 적힌 글귀들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러자 마치 예전부터 내가 외우고 있던 문장인 것처럼 머릿속에 콕콕 박혀 들어왔다·
물론 이건 내게만 보이는 현상이고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내 몸속에 각인 된 부적의 영기(靈氣)가 지나치게 강하여 저걸 흡수해 버리는 것 같았다·
불에 타는 것은 그 과정에서 필요한 어떤 전환의 절차인 것이고·
그렇게 열여덟 개 죽간이 모두 내 머릿속에 화인(火印)처럼 새겨졌을 때 바닥에 놓여 있던 진짜 죽간들은 죄다 새까맣게 타서 재만 남았다·
나와 두 사람은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특히 잔뜩 흥분한 얼굴로 완성된 죽간본 보기를 기다리던 두 노인은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