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백 명의 호송단(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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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에 휩싸인 야영지는 흡사 거대한 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구름 속에서는 끊이지 않고 천둥번개가 치고 있었다·
아홉 명의 술법사들이 흔드는 요령 소리가 기문진 속에서는 천둥번개로 변하는 것이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술법사들의 요령 소리가 무언가에 부딪히고 있었다·
누군가 구곡미혼진 속에 또 다른 기문진의 기둥을 세운 탓이었다·
“곤방(神方)의 삼곡(三谷)에 있습니다·”
“벌써 삼곡까지 갔단 말이지·”
“삼곡이 한계일 겁니다·”
“방심하지 마라· 그는 무림맹 총군사다·”
“명심하겠습니다·”
“통문(通門)을 만들어라·”
“통문을 만들어라!”
흑산적웅이 삼뇌의 명을 받아 크게 외쳤다·
요령을 흔들던 술법사들 중 한 명이 품속에서 부적을 꺼냈다·
그가 주문을 외운 후 휙 날리자 부적은 천둥번개가 치는 안개 속으로 무섭게 빨려 들어갔다·
순간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안개에 시커먼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튀어 나왔다·
도검을 뽑아 든 채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그들은 사마옥과 팽문룡 그리고 혈검대의 무사 다섯이었다·
사마옥을 그림자처럼 호위하다가 통문이 만들어지면서 한꺼번에 뛰어나온 듯했다·
“죽여 버리겠다!”
삼뇌를 발견한 팽문룡이 미친 소처럼 돌진했다·
삼백의 말 탄 무인들이 일제히 도검을 뽑아 들었다·
그 기세에 놀란 팽문룡이 우뚝 멈춰 섰다·
“물러서게·”
사마옥이 묵직하게 말했다·
팽문룡이 어금니를 빠드득 갈며 뒤로 물러났다·
삼뇌가 사마옥에게 말했다·
“재밌는 걸 만들었더이다·”
“밥값은 해야지 않겠습니까?”
“목숨값을 밥값으로 치르려고 하면 쓰겠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지요·”
“지금 당장 성물을 넘기지 않으면 술법사를 진속에 투입해 북두천구를 없애 버리겠소이다· 단언컨대 진속에 갇힌 이들은 한 식경을 버티지 못할 것이오·”
“성물을 드리면 최소한 기문진을 없애 주셔야 저울이 맞는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도 귀맹의 맹주를 붙잡아둘 것이 필요하지 않겠소이까? 아시다시피 피차 시간이 그리 많지 않소이다·”
삼뇌의 협박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지금도 위험한 상황에서 북두천구조차 없다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참혹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건네드리게·”
“총군사님!”
“어서·”
팽문룡이 마지못해 품속에서 한 자가 조금 못 되는 대나무 통을 꺼내어 휙 던졌다·
흑산적웅이 허공에서 낚아챈 다음 사인교 위의 삼뇌에게 공손히 갖다 바쳤다·
“횃불을 가져와라!”
횃불을 든 자가 가까이 왔다·
사인교를 맨 장한들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인교가 횃불 아래에 위치하면서 주변이 밝아졌다·
삼뇌가 뚜껑을 열고 사슴 가죽으로 싼 무언가를 꺼낸 다음 자신의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러자 거무죽죽한 대나무 가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마다 글씨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그것은 놀랍게도 죽간(竹簡) 다발이었다·
다만 죽간을 묶은 가죽끈 즉 위편이 죄다 사라지고 없었다·
“진품이 맞군·”
“누구라고 속이겠습니까?”
“한데 왜 위편이 없는 것이오?”
“천 년도 더 된 물건입니다· 삭아 없어져도 몇 번은 없어졌겠지요· 제 손에 들어왔을 때도 그런 상태였고요·”
“새로 묶지 않았소?”
“몇 년을 매달렸지만 순서를 알아낼 수가 있어야지요·”
“죽간의 개수는 모두 열여덟·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가 나옵니다· 순서를 알면 천하를 경동시킬 마공비급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모르면 그저 상징적 가치만 있는 성물에 불과할 뿐이지요· 건투를 빕니다·”
비록 물건은 빼앗겼지만 전설로 전해지는 그 본연의 힘과 공능까지 빼앗기진 않았다·
사마옥은 일단 이걸로라도 위안 삼았다·
물론 삼뇌에게 죽간의 순서를 알아볼 혜안이 있다면 모든 게 끝장이지만 말이다·
다행히 현재로선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다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척후를 살피던 마교의 잔당 하나가 돌아왔다·
“무림맹주가 이끄는 첫 번째 지원대가 반 각 전에 칠량협곡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지금쯤이면 절반은 왔을 겁니다·”
“다른 곳은?”
“오방(五方)이 모두 막혔습니다·”
“모두 천중산으로 들어간다!”
두두두두·
삼뇌를 시작으로 삼백여 명의 마교도들이 일제히 말을 달렸다·
천중산의 지세를 이용해 천라지망을 뚫으려는 것이다·
“천둥번개가 사라졌습니다·”
팽문룡이 말했다·
그의 말처럼 요령 소리가 사라지자 꾸르릉 대던 안갯속의 천둥번개도 동시에 사라졌다·
“좋은 일이 아닐세· 진 속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암흑천지가 펼쳐지고 있을 테니까·”
“하면?”
“간솔을 모아 횃불을 만들게· 서둘러 빈틈을 찾아야 하네· 맹주님께서 도착하시는 즉시 대법을 펼칠 수 있도록·”
무림맹주 장초풍이 백여 명의 무인들을 이끌고 야영지에 도착했다·
다른 사백여 명에 이르는 타격대는 삼뇌가 이끄는 마교 잔당들을 쫓아 천중산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깜깜한 밤인데다 천라지망에 빈틈이 생기면서 얼마나 잡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애초 놈들의 발목을 잡고 있어야 할 혈검대가 기문진에 갇혀 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전체 백 명 중 놈들을 따라 간 간자와 여기 있는 일곱 명을 제외한 호송단 전부가 기문진 속에 갇혔습니다·”
“성물은?”
“넘겨 주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로군요·”
“삼뇌가 나타났습니다·”
“그 노마가 살아 있었단 말이오?”
“저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당할 수밖에 없었겠군·”
“삼뇌라는 이름 뒤에 숨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일을 수습한 후 문책을 달게 받겠습니다·”
“일단 맹도들을 구하고 봅시다·”
“삼뇌가 직접 아홉 명의 술법사들을 동원해 강력한 구곡미혼진을 펼쳐 놓았습니다· 북두천구를 세워 놓았으니 반 시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반 시진 이후에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계획은?”
“구곡미혼진은 구방(九方)에 아홉 개의 외축을 세웁니다· 그중 하나를 파괴하면 한 식경 정도 통문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한 식경 이후에는?”
“다시 사라져 버리지요·”
“외축을 파괴하는데 필요한 공력은?”
“최소 삼갑자로 추정됩니다·”
“기회는 한 번밖에 없겠군·”
“무거운 짐을 지워드려 죄송합니다·”
“시작합시다·”
안개의 한쪽 가장자리에 누군가 관솔가지를 엮어 만든 횃불 두 개를 꽂아 놓았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장난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작은 돌탑이 하나 있었다·
스릉!
장초풍은 돌탑을 향해 걸어가며 허리에 찬 장검을 거침없이 뽑았다·
검신에 비친 횃불이 어지럽게 일렁거렸다·
기문진을 강제로 부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외축을 파괴해 결계의 벽에 임시로 구멍을 내거나 내축을 무너뜨려 진을 전부 날려 버리거나·
두 가지 모두 강력한 폭약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같다·
한데 폭약이 없어도 가능한 경우가 있다·
엄청난 내공을 지닌 고수가 강기로 인위적인 폭발을 만드는 것이다·
“후우····”
작은 돌탑을 바라보며 선 장초풍이 긴 숨을 토해냈다·
아래로 늘어뜨린 검은 잠시 후 있을 격전을 감지했는지 벌써부터 징징 울어댔다·
올해 나이 여든 살 초절정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그들의 경지를 설명할 길이 없어 극초절정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천하십검 그 수좌 자리를 다툰다는 일대검호의 가공할 기세에 사람들은 십여 장 밖으로 물러났다·
마침내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발을 앞으로 한 걸음 가볍게 딛고 상체를 살짝 비틀고 아래로 향했던 검이 천천히 솟구쳤다·
그 모습이 흡사 풀숲을 기어 온 사자가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도약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오른발을 태산처럼 무겁게 내디뎠다·
동시에 밤하늘을 향해 솟구쳤던 장검이 벼락을 치며 떨어졌다·
꾸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막강한 폭압이 엄습해 주위에 있던 횃불과 모닥불을 날려 버렸다·
모든 소리를 집어삼켜 버린 적막이 뒤를 이었다·
이윽고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을 때 장초풍은 아궁이 속처럼 붉게 달아오른 안갯덩어리 앞에서 장검을 꼬나쥔 채 의연하게 서 있었다·
“맹주님을 호위하라!”
사마옥이 일갈을 내질렀다·
지원대로 온 무림맹 타격대의 고수들이 황급히 달려가 장초풍을 둘러쌌다·
그는 지금 단 일검으로 공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만약 절정의 궁수가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강전(强筋)을 날린다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장초풍이 무려 삼갑자에 해당하는 공력을 쏟아부어 한 일은 고작 작은 돌탑 하나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안개의 붉은 기운이 점차 한 곳으로 모이는가 싶더니 돌탑 바로 윗부분에 황소가 드나들 정도의 큰 구멍이 생겼다·
모두가 그 구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른 침을 꼴깍꼴깍 삼키길 한참 한 사람이 초췌한 모습으로 튀어 나왔다·
머리카락은 산발이 따로 없고 옷은 맹수들에게 당한 것처럼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설 표두!”
그는 설인탁이었다·
뒤를 이어 유성표국과 용문표국의 표사들 그리고 혈검대의 무사들이 우수수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세어보니 마흔두 명이었다·
팽문룡이 혈검대의 무사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수백 명의 나찰들과 싸우던 중 갈라졌는데 이후로는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저희는 줄곧 설 대협을 따라왔고요·”
“설 대협을?”
“설 대협과 유성표국의 표사들이 아니었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절반은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겁니다·”
살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전부 설인탁과 유성표국의 표사들에게 다가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바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절정고수인 설인탁과 그의 수하들이 환수들과 싸우며 사람들을 안전하게 이끈 것 같았다·
팽문룡은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 차례 보았지만 설인탁은 실로 명표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표사였다·
그때 설인탁이 사마옥에게로 가서 보고했다·
“북두천구 덕분에 결계의 벽까지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통문이 만들어져 바깥으로 나온 것이고요·”
“고생하셨소이다·”
“맹주님과 총군사님 덕분입니다·”
팽문룡과 설인탁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호들갑 떨며 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것은 아직 쉰 명의 호송단이 저 진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장초풍은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타격대의 호위를 받으며 축이 무너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의 공력을 모두 회복하려면 하루는 운기행공을 해야 한다· 그땐 너무 늦다·
사마옥 팽문룡 설인탁은 자연스럽게 장초풍의 주변으로 모여 검은 구멍을 지켜보았다·
맹주와 함께 온 타격대도 앞서 나온 혈검대의 생존자들도 양 표국의 표사들도 한 걸음 뒤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반 각이 지나도록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습니다· 제가 다시 들어가서····”
“멈추시오!”
“맹주님·”
“구곡미혼진이 어떤 진인지는 이 몸도 잘 알고 있소이다· 통문으로 들어간 자는 절대 앞서 갇힌 자들과 조우할 수 없소· 희생자만 한 명 더 늘어날 뿐·”
“안으로 들어가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팽 대주!”
“하명하십시오·”
“총군사가 경거망동한다면 그 즉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막게· 필요하다면 칼을 써도 좋네·”
“존명!”
사마옥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라고 왜 방법이 없음을 모르겠나· 다만 호송단을 이끈 수장으로서 이대로 지켜만 보고 있자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그랬다· 마침내 한 식경이 지나자 통문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침통한 분위기가 좌중을 집어삼켰다·
혈검대의 무사 서른일곱 명과 용봉지회의 후기지수 열 명 그리고 천룡표국의 표사 세 명이 저 무시무시한 진속에서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동료를 잃었다는 슬픔보다 적에 대한 분노보다 이런 와중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실감이 더욱 사람들을 괴롭혔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반 시진을 훌쩍 넘겼다·
이제는 몇 명이나 생존해 있을까?
생존한 사람이 있기나 할까?
그때 저 멀리 천중산으로부터 함성과 함께 깡깡 칼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깨알 같은 불꽃이 사방에서 터졌다·
산 중턱에서 시작된 함성과 불꽃은 곧 천중산 골짜기 구석구석으로 번졌다·
“천중산에서 전선이 형성된 모양입니다·”
“형세로 미루어 사검대가 놈들을 천라지망에 가두는 데 성공한 듯합니다·”
사검대란 지원병력으로 동원된 다섯 개의 타격대 중 맹주와 함께 온 멸검대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곳을 일컫는 말이었다·
맹주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설 표두는 양 표국의 표사들을 이끌고 야영지를 지키시오· 나머지 혈검대의 생존자들과 멸검대는 즉시 나와 함께 천중산으로 향한다!”
천중산에서의 전투는 새벽이 밝아오고 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장초풍과 사마옥은 포로로 잡은 천마성교의 잔당을 무려 백오십여 명이나 이끌고 야영지로 돌아왔다·
설인탁은 피를 흠뻑 뒤집어 쓴 팽문룡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머릿수만 많았지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습니다· 일부 수뇌부를 제외하고는 충성심도 약했고요·”
“하면?”
“골짜기에 몰아넣고 포위망을 좁혀가자 대부분 투항을 해오더군요· 백여 명 정도를 척살하고 오십여 명 정도가 혼란을 틈타 도주했습니다·”
“아군은?”
“열다섯이 죽었습니다·”
압도적 대승이었다·
게다가 박멸까지는 아니었으나 마교의 잔당들을 소탕한다는 소기의 목적도 사실상 달성한 셈이 되었다·
성물 탈취를 위해 급하게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잔당들과 십 년 넘게 한솥밥 먹으며 집단전을 밥 먹듯이 수련해온 타격대의 격차는 이렇게 컸다·
설인탁은 삼뇌의 행방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를 잡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직도 발동 중인 저 기문진부터 없애도록 만들었을 테니까·
잠시 후 장내가 대충 정리되자 설인탁은 사마옥을 찾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젯밤 맹으로 술법사들을 보내 달라고 전서구를 날렸소이다· 맹주님께서는 네 개의 타격대를 이끌고 오후에 맹으로 떠날 것이오· 나와 멸검대는 이곳에 남을 것이고·”
“결국 그리되었군요·”
“애석하지만 호송단은 여기서 해산해야 할 것 같소이다· 맹의 오랜 친구인 유성표국과 설 표두께는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바이오·”
“저희도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
“아시다시피 진속에 갇힌 이들 중 천룡표국의 젊은 표사가 있습니다· 술법사들이 와서 진을 제거하고 나면 그의 주검을 제가 천룡표국으로 호송했으면 합니다·”
“어째서요?”
“표행 중 다른 표국 표사들의 주검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해당 표국까지 운송해 주는 것이 표사들의 오랜 전통입니다· 하물며 함께 표행을 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우선 수고를 부탁드리겠소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설인탁은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한 후 유성표국의 모닥불로 돌아왔다·
오백여 명의 무림맹 타격대는 기문진 옆에서 다시 야영지를 꾸렸다·
무림인에게 죽음은 그림자와도 같다·
동료가 죽어 나갈 때마다 비통에 잠겨 있기만 한다면 일 년 내내 그렇게 지내야 한다·
사람들은 다시 힘을 냈다·
수십 개의 모닥불을 피우고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
천라지망에 갇혔다가 우연히 잡힌 멧돼지 일곱 마리도 통나무에 끼워 모닥불에 구웠다·
행낭 속에 한두 병씩은 숨겨둔 술도 꺼냈다·
모두 밥과 술과 고기로 전투 후의 피로를 달랬다·
그러던 어느 순간 설인탁은 눈을 크게 떴다·
여기 있어선 안 될 한 사람이 초췌한 모습으로 혈검대의 생존자들과 섞여 술을 마시며 고기를 뜯고 있었다·
“저 사람이 왜 저기 있는 거지?”
“누군데 그러십니까?”
“공령신투의 제자·”
“그는 진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대체 어디에 있다가 튀어나온 거지?”
그때였다·
꾸아앙!
누군가 귓구멍에다 대고 대포를 쏜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야영장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은 적아를 구분할 것 없이 모두 놀라 나자빠졌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안개에 집채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 구멍으로 지난 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당군백 악도광 양조광 두소부 황보중악을 비롯해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다음엔 혈검대의 생존자 수십 명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궁소소와 이정룡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산발에 걸레 쪼가리가 된 옷들을 걸친 것이 거지떼가 따로 없었다·
일부는 땅에 드러눕고 일부는 도검을 바닥에 찍어 기대고 일부는 바위를 찾아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는 호랑이에게 쫓겨 십 리를 쉬지 않고 달려온 사람들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헉헉!”
“헉헉!”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수백 명의 사람들은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처럼 굳어 버렸다·
그 사이 이정룡은 풀린 다리로 휘청휘청 걸어가서는 가장 가까이 있던 누군가의 술 호리병을 홱 빼앗아 마시기 시작했다·
숨도 쉬지 않고 호리병을 모두 비운 그는 ‘꺼어억!’ 하고 용트림을 한 후에야 비로소 중얼거렸다·
“목말라 뒈지는 줄 알았네·”
“무 물을 가져와라!”
팽문룡의 사자후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때부터 벌떼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려가 쓰러진 자들을 부축하고 물을 먹이고 상처를 살폈다·
그 와중에 누군가 외쳤다·
“쉰 명 모두 생환했습니다!”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뒤를 이었다·
“와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