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명표를 만나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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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개봉의 저잣거리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남궁소소의 옆모습에서도 찬바람이 쌩쌩 불었고·
‘어떻게 한다?’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역풍만 맞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그녀의 기분을 먼저 풀어 주어야 한다· 일단 생색부터 조금 내고·
“전낭엔 얼마나 들어 있었소?”
“은전 열 개에 동전 서른 개 정도요·”
“횡재했군·”
“네?”
“훔쳐 간 놈 말이오·”
“돈은 고마웠어요·”
“오히려 내가 고맙소·”
“뭐가요?”
“나 때문에 탕국물을 부은 거 알고 있소·”
“그렇게 생각해요?”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소·”
“무례를 못 참은 것뿐이에요· 꼭 귀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어도 화를 냈을 거예요· 물론 내가 잘 아는 귀하가 당해서 조금 더 화를 낸 측면도 있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그럴 수 있소·”
“무슨 뜻이에요?”
“솔직히 우리가 좀 많이 가까운 사이잖소· 어려운 표행도 두 번이나 함께 했고· 마음도 잘 통하고 손발도 척척 맞고·”
“그렇게 생각해요?”
“소저는 안 그렇소?”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데·”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옛 연인이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놈과 친한 걸 보면 누구라도 배가 아플 것이오· 물론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른 문제지만·”
남궁소소가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었다·
“옛 연인이라뇨?”
“황보중악과 소저 말이오·”
“제가 왜 그의 연인이라는 거죠?”
“아까 그랬잖소· 얼굴이 반반해서 만났는데 도량이 벼룩 등짝만큼 좁아서 헤어졌다고·”
“제가 언제 얼굴이 반반해서 만났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말을 어떻게 연인 사이로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아니란 말이오?”
“황보 선배는 제가 무림맹에 몸 담았을 당시 속해있던 조의 조장이었어요· 한데 언젠가부터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면서 집착을···· 내가 이런 설명을 왜 하고 있지· 아무튼 전 황보 선배와는 사권 적 없어요·”
“이상하다· 내가 듣기엔 그런 어조였는데·”
“정 못 믿겠으면 용봉지회 후기지수들에게 물어보든가요·”
“뭘 물어보기까지나·”
그때였다·
삭풍에 볼이 발개진 남궁소소의 뒤쪽으로 십여 명의 괴인들이 말을 타고 등장했다·
하나같이 죽림을 쓰고 암녹색의 피풍의를 통일해 입었는데 등에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을 메고 있었다·
맨 앞에는 용문(龍門)이라 적힌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용문표국(龍門標局)!”
하남과 이웃한 산동에 근거지를 둔 표국이었다·
어찌나 신출귀몰한 지 빠르기로는 용문표국을 따를 곳이 없다고 들었다·
방향으로 미루어 무림맹으로 가는 것 같았다·
저들도 내일 있을 입찰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명표 설인탁이 이끄는 유성표국에 이어 산동을 대표하는 용문표국까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일 있을 입찰을 준비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소저 나를 좀 도와주시오·”
“뭘요?”
“무림맹에서 모종의 물건을 어딘가로 호송하기 위해 표국 세 곳과 계약을 맺기로 했소· 그 표국을 뽑는 입찰이 내일 있는데 표사가 세 명 이상이어야만 참가할 수 있소· 다시 한번 천룡표국의 객원표사가 되어 주시오·”
“혹시 은전 열 냥을 준 게····”
“그건 순수한 내 성의오· 친구가 타지에서 전낭을 잃어버렸다는데 은전 열 냥도 빌려주지 못한 데서야 말이 되겠소?”
“아깐 갚지 말라면서요·”
“갚지 마시오·”
“대신 객원표사가 되어 주고요?”
“그래 주면 고맙고·”
“그게 그거잖아요·”
“풍운표검 설인탁이라는 사람을 아시오?”
“절정의 고수인데다 사대명표 중 한 명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무림맹에 있을 당시 맹에서 의뢰한 일을 하기 위해 온 것도 여러 번 봤고요·”
“그도 입찰에 참여할 것이오· 나는 그와 함께 정정당당하게 한번 경쟁을 해보고 싶소· 내게는 다시 오기 힘든 기회가 될 것이오·”
“귀하가 명표와 경쟁할 일은 없을 거예요·”
“물론 배우는 자세로 임할 거요·”
“그게 아니라· 명표와 그가 이끄는 유성표국은 내일 입찰에 참여하지 않아요· 그래도 표행에는 무조건 함께하겠지만·”
“어째서?”
“그는 초빙된 사람이니까요·”
“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명표는 이미 수백 차례의 표행을 통해 그 실력이 증명된 사람· 구태여 무림맹에서 그를 시험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표행해 관한 한 오히려 그의 지혜를 빌려야 할 형편이다·
“더욱 잘됐군· 반드시 입찰에 성공해 명표와 함께 표행을 해야겠소· 분명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이오·”
“남은 자리는 두 개에 불과해요·”
“하나라도 입찰에 참여할 것이오·”
“유명한 표국에서 난다긴다하는 표사들을 데리고 왔을 거예요· 그들과의 경쟁에서 무슨 수로 이기려고요?”
“소저는 어떻게 그런 사정을 다 아시오?”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 일부가 호송단으로 참여한다고 들었어요· 그들이 이야기 해줬고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라 하면?”
“황보중악 악도광 두소부 양조광 당군백까지요·”
“그렇군·”
“계획은 있나요?”
“고수는 차고 넘치니 무공을 보진 않을 것이고 결국 표사로서의 역량과 경력을 살피겠지· 밤새 철저히 준비를 할 것이오· 한데 첫 번째 문제는 역시 표사의 숫자요·”
“그렇게 명표와 함께 일해보고 싶어요?”
“무림초출의 젊은 검사가 천하십검 중 한 명과 함께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면 어떨 것 같소? 거기다 거액의 돈까지 벌고·”
남궁소소는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돈 보다는 명성이에요· 무림맹에서 수십 명의 고수를 동원한 것으로도 모자라 명표까지 고용한 호송건에 동참했다는 명성· 모두 그걸 노리고 온 거라고요·”
“알고 있소·”
“심사는 총군사님이 직접 보시되 명표께서 동석 하시어 보조해 드리는 형식으로 진행될 거예요· 우리는 총군사님의 눈에도 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명표의 마음도 사로잡아야 해요· 자신 있어요?”
“우리?”
“객원표사가 되어 줄게요·”
“정말이오?”
“대신 열 냥을 더 줘요·”
“알겠소!”
“금전으로요·”
“뭐요?”
“싫으면 없던 일로 하고요·”
“금전 열 냥은 인간적으로 너무 큰 액수요· 은전 스무 냥으로 주겠소·”
“듣자 하니 이번 호송건으로 재미 좀 보셨다면서요? 참고로 지난번 귀하의 집무실에서 우리가 한 계약에 따라 그 돈의 일 푼은 제 몫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금전 두 냥도 함께 달라는 거요?”
“금전을 이백 냥이나 받았다고요?”
남궁소소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알고 물어본 것 아니었소?”
“전 이미 외부인이에요· 그런 건 물어봐서도 안 되고 가르쳐 주어서도 안 된다고요· 맙소사· 금전 이백 냥이라니· 달랑 칼 한 자루 들고 정말 돈을 잘 버시네요· 나중에 처자식 굶길 일은 없겠어요·”
한순간 방심했다·
당연히 두소부가 얘기했을 거라 생각했다·
나한테 제대로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해선지 아니면 금전 두 냥이 갑자기 생겨나서 그런지 남궁소소는 아주 싱글벙글이었다·
“금전 다섯 냥· 그 이상은 안 되오!”
“그러죠· 뭐·”
“처음부터 다섯 냥이 목표였군·”
“오늘은 유난히 상대가 안 되네요· 마음이 급해서 그런가?”
“나도 어느 정도는 각오했소·”
“어차피 나갈 돈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 다 알아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또 뭐요?”
“표행을 하는 동안 당군백이랑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나중에 그녀랑 사귈 게 아니라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군백은 내가 아끼는 후배예요· 그녀가 귀하에게 아주 약간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만약 감정을 키웠다가 상처라도 받는다면 나는 귀하를 다시는 보지 않을 거예요·”
“당 소저가 나를 좋아한다고?”
“앞서 나가지 마세요· 군백이 워낙 순수한데다 아직 어려서 생사를 함께한 동료들 사이에 생기는 전우애를 이성적인 감정으로 착각한 거니까· 용봉지회에 파견된 어린 후기지수들이 흔히 겪는 감정의 관문이죠· 저도 그랬고요·”
“혹시 그 대상이 황보중악이었소?”
“그런 사람이 있어요·”
“사권 거 맞네·”
“아니라고요!”
남궁소소는 한순간 ‘빽!’ 하고 언성을 높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무튼 당군백이 겪고 있는 건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거예요· 괜한 기대를 갖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눈치 없이 아는 척도 말고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소·”
“혹시 군백을 좋아하는 건 아니죠?”
“전혀 아니오·”
“그럼 됐고요·”
사람들이 표왕의 네 아들을 사형제라 묶어 부르지만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세 명과 나 사이에는 엄연한 신분의 벽이 존재한다· 설사 당군백이 나를 좋아해도 사천당문에서 시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서자를 사위로 맞을 리가 없다·
그건 당문의 체면을 크게 깎는 일이다·
사천당문 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무림세가에서는 모두 그럴 것이다·
나는 되지도 않을 일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실 여자는 관심도 없었고·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전생에선 50년을 살면서 젊은 여자라고는 물건을 살 때 외에는 말도 몇 번 못 붙여 보았다·
한데 지금은 살짝 좋아해 주는 여자도 있단다·
그것도 엄청 귀엽고 예쁜 스물한 살짜리가·
역시 남자도 인물이 좋아야 한다·
“그나저나 나머지 한 명은 어디서 구하죠?”
“이미 구했소·”
“혹시 아까 그 사람?”
“호리독사라고 한때 삼룡채라는 수채에 몸 담았던 친구요· 지금은 손을 깨끗이 씻었고· 백발노성을 호송해 올 때도 함께 했소·”
“흑도가 한 명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일단 소저는 저기 보이는 객점에 가서 기다리시오· 오늘 밤은 객점에서 지새워야 할 것 같소·”
“알았어요·”
남궁소소가 사라지자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저만치 골목 모퉁이에서 호리독사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다짜고짜 손부터 내밀었다·
“예?”
“달라고·”
호리독사는 잠시 한숨을 쉬더니 가죽 전낭 하나를 내밀었다·
한데 어쩐 일인지 전낭이 뒤집혀 있었다·
“왜 뒤집어 놓은 거요?”
“사람들은 손때 묻은 자신의 전낭을 멀리서도 알아보지요· 이렇게 하면 혹시 우연히 제가 꺼내는 것 보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 합니다·”
“치밀하구려·”
“전문분야니까요·”
“일곱 냥 밖에 안 남았는데·”
“술값으로도 썼고 이따 밤에 여자를 한 명 불러 달라고 했는데 선불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공자님께서 아는 분일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일부러 꿍쳐 둔 건 아니고?”
“아 아닙니다·”
“대체 남의 품속에 있는 전낭은 어떻게 빼내는 거요? 그것도 무림 고수의 품속···· 설마 가슴에 손을 넣은 건 아니겠지?”
나는 한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 앉으면서 호리독사의 손모가지를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품속에 있는 전낭을 빼 내는데는 모두 일곱 가지의 기술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그 소저는 전낭을 품속에 넣어두지 않았습니다·”
“하면?”
“허리춤에 있었지요·”
“허리춤?”
“사람들은 전낭에 든 것이 많으면 허리춤에 차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품속에 넣어두면 가슴의 맵시가 망가지기 때문이죠· 멋내기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품속에 있는 돈을 빼내는 게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감을 따는 것이라면 허리춤에 매달린 전낭을 가로채는 건 길가다 담장 밖으로 나온 가지에서 감을 따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더 자세한 건 사문의 비기이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없고요·”
“도로 가져가시오·”
나는 전낭을 돌려주었다· 호리독사가 엉겁결에 전낭을 받아들고는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왜요?”
“이걸 돌려주면 어디서 났냐고 물을 것이고 그럼 당신에게서 빼앗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소· 하면 십중팔구 당신은 당신이 모시던 삼룡채의 채주처럼 손모가지를 잘릴 것이오· 참고로 그녀는 뇌검의 손녀요·”
“예에?”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감사합니다· 공자님·”
“대신 객원표사비는 없소·”
“이를 말씀입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백발노성에게 금전 천 냥을 받기로 했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오·”
“특히 뇌검의 손녀분께 말씀이지요?”
“눈치가 빠르군·”
“원래 이 업종이 손보다는 눈치가 빨라야 하죠·”
***
입찰은 접객당의 넓은 마당에서 공개적으로 펼쳐졌다·
참석한 표국은 무려 서른다섯 곳이나 되었다·
그들은 모두 대나무 끝에 매단 각자의 표기 아래에 모여 총군사와 명표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이미 낙점이 된 유성표국을 제외하면 표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 열 명씩이었다·
알고 보니 최대 열 명까지라는 제한이 있었단다·
표사들은 척 보아도 10년 이상 경력의 중년들이었다·
옷차림은 말할 것도 없고 칼 한 자루 허리에 묶는 매듭에서도 노련함이 느껴졌다·
그에 반해 천룡표국의 작은 삼각 깃발 아래 모인 표사는 나를 포함해 고작 세 명이었다·
거기다 모두 20대였다· 그중에서도 나는 겨우 스물두 살의 무림초출이었고·
공개 입찰이었던 탓에 주변엔 무림맹의 무사들이 잔뜩 몰려와서 구경을 했다·
그들 중에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도 있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끝도 없이 들렸다·
“고작 세 명이서 뭘 하겠다는 거지?”
“백발노성 호송건을 성공하더니 분수를 모르는군·”
“백발노성을 호송한 친구라면 확실히 실력은 입증한 거 아닌가? 듣자 하니 저 친구 덕분에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하던데·” “여기 모인 표사들 중에 실력 없는 사람이 누가 있으려고· 백발노성 호송건 정도의 경험을 다른 표사들은 수십 차례씩 가지고 있을걸·”
“그나저나 남궁소소는 저기 왜 끼어 있는 거야?”
수군거리는 건 무림맹의 무사들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앉아있는 다른 표국의 경쟁자들이야말로 히죽히죽 웃으면서 노골적인 조소를 보냈다·
“저 세 명은 뭐야?”
“천룡표국의 표사들이라는군·”
“백발노성을 호송하고 왔다는 그 표국?”
“그렇다는군·”
“함께 있는 젊은 미녀는 남궁소소라던데·”
“그 유명한 남궁소소?”
“그렇다니까·”
“그녀가 왜 저기 끼어있는 거지?”
“객원표사라는 모양이야·”
“뭐 하자는 거지?”
“덕분에 구경거리도 있고 좋지 뭘·”
나는 사람들의 시선 따윈 눈곱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건 이미 전생에서 30년 동안 지겹도록 겪었다·
나는 그렇다고 쳐도 남궁소소가 이렇게 의연한 건 의외였다·
고작 스물네 살의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말이다·
그녀가 신경 쓰는 건 오직 입찰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낙점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잘 할 수 있을까요?”
“밤새 준비했으니 잘 할 거요·”
“보란 듯이 낙점되면 좋겠어요·”
“그러게 말이오·”
“긴장돼서 안 되겠어요· 물 한 병 갖고 올게요·”
그러면서 남궁소소는 벌떡 일어나 수군대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둘만 남게 되자 나는 호리독사에게 모기만한 소리로 속삭였다·
“노파심에서 미리 말해두는데 무림맹에서는 절대 무언가를 훔쳐선 안 되오· 만약 그랬다간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내 말 명심하시오·”
“저기···”
“왜 그러시오?”
“이미 훔친 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런 미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끓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누르고는 다시 목구멍을 쥐어짰다·
“이번엔 또 뭘!”
“전낭입니다·”
“무림맹 안에서 전낭을 훔치다니 제정신이오?”
“저도 훔칠 생각까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자들이 사람을 너무 업신여겨서 그만 ‘욱!’ 하는 마음에·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요?”
“조금 전 뒷간을 다녀오는 길에 어제 객점에서 남궁 소저와 함께 술을 마시던 그 후기지수들을 만났지 뭐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저를 알아보고는 뒤통수에다 대고 하다하다 이제는 흑도놈들까지 무림맹을 들락거린다고 하면서 땅바닥에 침을 퉤 뱉더라고요·”
황보중악 일당을 만났나 보다· 호리독사가 나와 함께 있으니 들으라고 일부러 시비를 건 것이고·
그래도 도둑놈이라고 하지 않은 걸 보면 두소부 양조광 당군백이 호리독사의 진짜 내력까진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휴우 그래서 전낭엔 얼마나 들었소?”
“대중없습니다· 은전 열 냥짜리도 있고 닷 냥짜리도 있고 금전이랑 은전이 같이 든 것도 있고요·”
“하나가 아니었소?”
“다섯 개 훔쳤습니다·”
“이런 쳐죽일!”
하마터면 호리독사를 넘어 뜨리고 올라탄 다음 목을 조를 뻔했다·
물건을 지켜줄 사람 뽑는 자리에 와서 되려 물건을 훔치다니 이런 천하에 얼빠진 놈이 있나·
그때 명표 설인탁과 총군사 사마옥이 장내로 들어섰다·
앉아있던 모든 표국의 표사들이 존경의 의미로 일제히 일어나 두 사람을 맞았다·
나는 서둘러 호리독사에게 속삭였다·
“잘 숨기시오· 들키는 날엔 끝장이니까·”
“그건 염려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