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가자· 무림맹으로(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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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당사자인 나와 백발노성도 그리고 중독을 당한 채 쓰러져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모두 입을 닫았다·
침묵을 깬 것은 백발노성이었다·
“너 같은 놈은 살다살다 처음 본다·”
“노사께서도 평범하시진 않습니다·”
“언제는 노인장이라고 하더니·”
“의뢰인이시니까요·”
“아직 수락하지 않았다·”
“수락이 아니라 의뢰입니다· 노사께서 제게 무림맹까지 안전하게 호송해 달라고 의뢰를 하는 것이지요· 수락은 제가 하는 것이고요·” “내가 의뢰인이라면 후기지수들은 무엇이냐?”
“저들도 의뢰인입니다·”
“이중으로 받아먹겠다?”
“이중으로 의뢰를 요청하신 건 노사이십니다만·”
백발노성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조건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이제부터는 말 안장에 편안히 앉아서 가게 해 줄 것· 잠을 잘 땐 모닥불 곁 제일 따뜻한 자리를 내 줄 것· 끼니마다 술과 고기를 챙겨 줄 것·”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이런 산중에서 끼니마다 술과 고기를 무슨 수로 갖다 바칩니까? 장강을 건널 때 마차를 버리는 바람에 닭도 다 삶아 먹었는데요·”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그러면서 나를 노려보는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어떻게든 관철하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금전 천 냥은 확실히 있는 겁니까?”
“누가 보면 내가 먼저 준다고 한 줄 알겠군· 염려 마라· 네 놈이 약속을 지킨다면 틀림없이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좋습니다· 제가 양보하지요·”
“양보란 말 쓰지 마라!”
“알겠습니다·”
“계약이 성립된 것이냐?”
“그렇습니다·”
저만치에서 ‘아아!’ 하는 소리가 연달아 흘러나왔다·
이견과 삼견이 놀라서 감탄성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액수가 무려 금전 일천 냥이다· 여기에 앞서 후기지수들이 지불하기로 한 금전 이백 냥도 있었다·
표행만 성공시킨다면 나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는 셈이었다·
말은 않지만 후기지수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짐작하건대 후기지수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은 내가 백발노성에게서 배우기로 한 무공 때문일 것이다·
“거기 호리독사 듣고 있소?”
“왜 그러십니까?”
“보급품 중에 여분의 등잔기름도 있소?”
“앗!”
내 말뜻을 알아들은 호리독사가 대답은 않고 감탄성부터 내질렀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술렁임이 느껴졌다·
“있나 보군·”
“석관 아래를 보시면 붉은색 칠을 한 항아리가 있을 겁니다· 등잔불도 밝히고 필요하면 횃불도 만들 겸 넉넉히 가져다 놓았지요·”
과연 술항아리들 사이로 붉은 칠을 한 항아리가 보였다·
나는 유등의 독기름을 전부 평범한 기름으로 바꾸었다·
최소한 석실 안이 더는 독기운으로 오염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군백에게 물었다·
“이러면 도움이 좀 되겠습니까?”
“잠혼독의 유증(油蒸)이 석실에 가득 차서 완전하게 해독을 하려면 깨끗한 공기로 바뀌어야 해요· 그때까진 운기행공으로 증세를 어느 정도 개선할 수는 있겠지만 정룡 공자처럼 불침의 수준으로 밀어낼 순 없을 거예요·”
“어쩔 수 없지· 모두 건투를 빕니다·”
원래 사람들은 입구를 향해 달려 나가다가 쓰러졌다·
그 바람에 전부 석실의 입구와 연결된 계단 아래 이런저런 모습으로 엎어져 있는 상태였다·
나중에 짐짝처럼 들려 온 일견과 두소부 역시 앞서 쓰러진 사람들 사이로 던져 졌고·
반면 백발노성은 석실의 가장 안쪽 모퉁이에서 새우처럼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나는 백발노성의 앞으로 가서 정좌를 하고 앉았다·
“이제 가르쳐 주십시오·”
“뭘?”
“상대의 단전을 더듬는 공부 말입니다·”
“지금?”
“딱히 할 일도 없잖습니까?”
“나는 운기행공을 안 한다더냐?”
“어차피 쇠사슬에 묶여 있는데 해독은 해서 무엇 하시려고요· 그리고 당소저의 말을 들으니 잠혼독이라는 것이 몸만 무겁게 할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싫다면?”
“말 안장에 앉아 편안히 가셔야지요·”
“날강도가 따로 없군·”
“원래 의뢰를 하실 때는 표비의 절반을 먼저 내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야 양측이 함부로 취소할 수 없게 되면서 비로소 계약이 성립하는 것이지요·”
“됐고· 그동안 어떤 무공들을 익혔느냐?”
“우연한 기회에 좋은 스승을 만나 보법과 권각법을 사사했습니다· 제가 가장 공들여 수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외 가문비전의 내공심법인 천무진경을 비롯해 검법 신법 곤법 금나술 벽호공 암기술 등을 틈나는 대로 익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법과 권각법을 제외하면 신통치 않습니다·”
협상이었든 협박이었든 어느 한 분야의 대가로부터 절기를 사사하는 순간이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상세하게 말했다·
물론 시간을 느리게 흐르도록 만드는 이능력은 뺐다·
그건 무공도 아니거니와 말을 해준다 한들 믿지도 않을 것이다·
“전음입밀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가능합니다·”
“보통의 무인들이 익히는 무공 중 내공의 고하에 따라 성취가 절대적으로 좌우되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느냐?”
“신법과 전음입밀이라고 들었습니다·”
“한데 이미 육십 년의 내공을 하단전에 쌓고도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전음입밀이 기(氣)에 소리를 실어 보내고 회수하는 음공(音功)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망혼소 역시 음공이다·]
백발노성의 말이 갑자기 전음으로 바뀌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한데 타인의 단전을 더듬어 보는 공부가 음공이었다고?
[이름이 망혼소입니까?]
[그렇다·]
[망자의 휘파람 소리라니·]
[한번 보겠느냐?]
음공이라는 말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내공을 귀에다 집중한 탓인지 귀뚜라미가 우는 것 같은 이명만 살짝 울릴 뿐이었다·
소리는 엉뚱한 곳에서 났다·
촤아아 하며 석실 안에 있던 수백 수천 마리의 귀뚜라미 떼가 일제히 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이 흡사 석실 안 작은 세계에서 전쟁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소나기가 그치듯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바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짐승이나 미물들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혹시 제 귀에서 이명이 울린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뭣? 이명이 울렸다고?]
얼마나 놀랐는지 백발노성은 중독을 당해 쓰러진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실성한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정말이냐?]
[그렇습니다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 놈은 정말 여러모로 이상한 인간이구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내공이야 기연을 얻어서 그렇다 쳐도 짐승도 아니면서 망혼소를 들을 수 있다고?]
[그게 망혼소였습니까?]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망혼소를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째서요?]
[듣지 못하게 태어난 아이는 커서도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다· 망혼소를 익히는 것도 이와 같다· 먼저 듣지 못하면 소리를 낼 수가 없는 법이다·]
[그것도 그렇겠군요·]
[이명이 울리려면 족히 일 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거늘· 아무래도 기연이 네 놈의 몸을 한두 가지 바꾼 게 아닌 것 같구나· 대체 무엇을 먹은 것이더냐?]
어쩌면 먹은 것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십중팔구 부적이 내 몸속에 각인되고 난 이후 생긴 변화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젠 궁금하지도 않았다· 의문을 가져봤자 머릿속만 복잡할 뿐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격기술(激氣術)이 기(氣)를 파도처럼 부딪쳤다가 돌아오는 파장으로 상대의 내공을 가늠하는 것이라면 망혼소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만들어 기(氣) 대신 사용하는 것이다· 상대와 너 사이에 허공이 있기 때문에 격기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승의 공부다·] [혹시 망혼소로도 세상을 볼 수 있습니까? 가령 지금처럼 깜깜한 석실 안에서 유등을 다 꺼버린다면 말입니다·]
[왜 그런 의문을 가진 것이냐?]
[소리가 부딪혀 돌아오는 파장으로 상대의 단전을 더듬어 보는 것이라면 이런 석벽도 소리로 더듬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후우· 네 놈은 정말 여러 번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까마득한 수련의 끝에 그런 경지가 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일 장 안에 있는 인간의 단전을 더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무시하려는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알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실로 엄청난 공부라는 것을· 너 역시 자만하지 말거라· 망혼소를 듣고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보는 것이니라·]
[소리를 본다고요?]
이후로도 백발노성의 가르침은 계속됐다·
하나같이 나로서는 들어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신기한 얘기들 뿐이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소리가 부딪혀 돌아오는 파장을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느끼고 그것을 그림처럼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내가 의문을 표했더니 백발노성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몸에는 물고기도 있고 뱀도 있고 새도 있다· 그것들이 남긴 미지의 감각들을 일깨워야 비로소 망혼소를 제대로 펼칠 수 있느니라·]
머릿속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꾸구궁·
누군가 석벽의 문을 열기 위해 힘을 주고 있었다·
“놈들이 온 모양이다!”
“벌써 아침이라고요?”
놀란 백발노성이 옆으로 홱 쓰러졌다·
나도 입구의 계단 쪽으로 후다닥 달려가서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쓰러졌다·
꾸구구궁!
마침내 석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밝은 빛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유등을 밝혀 놓은 석실보다 바깥이 더 깜깜했다·
아직 한참 새벽인 것이다·
‘그럼 그렇지·’
한데 아침에 온다던 놈들이 왜 갑자기 들이닥치고 난리일까?
석실의 문이 열리고도 놈들은 선뜻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겨울 산속의 찬바람만 세차게 불어 닥쳤다·
[석실 안의 공기를 바꾸려는 거예요·]
당군백의 전음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와 내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자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얼굴 사이에 있는 것이라곤 그녀가 넘어지면서 바닥을 짚은 희고 가느다란 손뿐이었다·
일단 그걸 인지하고 나자 굉장히 어색하고 민망했다·
당군백도 그 민망함을 감추려고 내게 말을 건 모양이었다·
[독은 얼마나 몰아냈습니까?]
[걸을 수는 있지만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대동소이할 거예요·]
[애석하군요·]
[죄송해요· 매번 도움이 못 돼서·]
잠시 후 녹산귀도를 필두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등에 칼을 메고 있었는데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세나 흉성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석실 안을 구석구석 살피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도 발로 건드려 보았다·
심지어 서호삼견은 발끝으로 뒤통수를 돌멩이 차듯 툭툭 차기까지 했다·
“뭐 하는 짓이냐!”
참다못한 이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뻑!’ 소리와 함께 그의 뒤통수에 거센 발길질이 작렬했다·
“이런 죽일 놈이!”
“조용히 해라!”
일견이 버럭 소리쳤다· 그리고는 발길질을 한 사내를 향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얌전히 굴 테니 모욕은 주지 마시오·”
“존성대명이 어찌 되시나?”
“항주 서쌍교방의 서호삼절이오·”
“흑도로군·”
“그렇소·”
“늙은 흑도들이 대갈통을 차이고도 꾹 참는 걸 보니 중독을 제대로 당했군· 석실은 안전하다· 사부님을 모셔와라·”
잠시 후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장한 두 명이 남여(籃與)를 앞뒤로 메고 들어왔다·
남여란 덮개가 없이 의자형으로 생긴 가마를 말한다·
남여 위에는 앙상한 체구에 양 손목과 발목이 모두 잘려나가고 없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얼굴의 가죽은 전부 흘러내려 기괴하기 짝이 없고 머리카락은 백발을 넘어 은발이었는데 그마저도 죄다 빠져 몇 가닥 남아 있지 않았다·
못 해도 백 살은 될 것 같았다·
“사부님!”
갑자기 백발노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이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떨리는지 나는 한순간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한데 사부님이라니· 백발노성이 천하의 무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은 이유가 사부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부가 살아있었다고?
“십 년 만에 보는구나·”
“분명 이 손으로 묻었거늘···!”
“누누이 가르치지 않았더냐· 사람을 죽일 땐 반드시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갈라 소생의 여지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너의 그 나약한 심성이 화를 자초했음이야·”
“귀식대법!”
“열흘을 꼬박 네 놈이 묻어준 관 속에 갇혀 있었다· 몸속에 남겨둔 한 줌의 진기로 피를 돌리고 땅속으로 스며드는 빗물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버텼지·”
“어떻게 살아 나오신 겁니까?”
“열흘째 되는 날 무언가 킁킁거리며 땅을 파는 소리가 들리더구나· 멧돼지 무리가 벌레와 두더지를 잡아먹으려고 부드러운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지· 그때부터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렸다· 멧돼지가 피 냄새를 맡고 조금이라도 더 깊이 파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저런 미친 인간을 봤나·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코앞에 있는 당군백도 무섭고 몸서리가 치는지 손가락을 바르르 떨었다·
그 모습이 안타깝고 측은해서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잡아 줄 뻔했다·
“그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심산유곡에 꼭꼭 숨어 있었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제자 놈이 알면 언제 또 찾아와 죽이려 할지 모르니까· 다행히 단전이 녹아 없어지고 사지도 이렇게 불구가 되었지만 머릿속의 무공들은 그대로라 새로운 제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 괴노인은 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인사드려라· 너희의 대사형이시다· 내가 수많은 마공비기와 좌도방문을 가르쳐 주었지만 모질지를 못해 항상 사람 죽이기를 주저했지· 그 바람에 천고의 자질을 지니고도 대성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오늘 이렇게 살아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하나? 크크크·”
웃음소리가 폐부를 후벼 파는 것처럼 섬뜩했다·
강호에 알려진 백발노성의 소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사부를 죽이는 패륜의 죄를 저질렀다는 것과 금단의 마공을 익혀 무수한 무림인들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것·
한데 나는 왠지 이 두 가지 일의 순서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마공을 익혀 무수한 무림인들을 불구로 만든 것이 먼저고 사부를 죽인 것이 나중이라는·
가령 젊은 시절 사부가 무서워 억지로 마공을 익혔다면?
사부의 명령으로 혹은 수련의 일환으로 숱한 무림인들과 생사결을 펼쳤으나 차마 죽이진 못하고 불구로만 만들었다면?
그러다 스스로 강해지자 더는 그렇게 살기 싫어서 사부를 죽여 없애려 했다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고 실제 사실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설사 상상이 맞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고·
그때 갑자기 당군백의 전음이 들려왔다·
[제게 칠점사(七點能) 한 마리가 있어요· 물리면 그 즉시 몸이 굳기 시작하며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목숨을 잃죠·]
[아까 다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놈들이 품속을 뒤지려 하자 곧장 풀어 놓았어요· 지금 석실 안을 조용히 돌아다니고 있고요· 원한다면 한 사람을 지정해 물게 할 수 있어요·]
[이 상태에서 어떻게?]
[그건 가문의 비기라 말해드릴 수가 없고요·]
[알겠습니다· 내가 신호를 주면 아까 우리 머리통을 찼던 놈의 발을 물게 하십시오· 신발이 두꺼우니 발목을 물면 더욱 좋고·] [알았어요·]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삼십 년 동안이나 가르친 제자가 백도의 애송이들에게 잡혀가 뇌옥에 짐승처럼 갇혀 사는 꼴을 볼 수야 없지 않겠느냐? 그건 내 얼굴에도 똥칠을 하는 것이지·”
“부디 헛걸음이 아니길 빕니다·”
“마지막으로 내게 할 말이 있느냐?”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아직도 그 심약한 심성을 버리지 못했더냐·”
“부탁드립니다·”
“전에 내가 갇혀 있던 무덤보다 훨씬 넓구나·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니라· 그럼 잘 가거라·”
가마가 다시 들리고 방향을 틀어 입구와 연결된 계단 앞까지 왔다·
그 순간 뒤에 있던 그의 수하인지 제자인지 모를 자가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모두 죽여 입을 봉해라·”
“잠깐만요!”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녹산귀도였다·
“그건 곤란합니다· 이미 저희가 백발노성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만약 후기지수들과 표왕의 아들이 백발노성과 함께 실종되면 저희가 의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앞세운 것이다·”
순간 바깥에서 다섯 명의 칼잡이들이 더 석실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안쪽 구석에는 백발노성과 함께 녹산귀도 일당 네 명이 있었고 입구를 면한 계단 쪽에는 괴노인의 수하들 열한 명이 버티고 서서 대치하는 형국이 만들어졌다·
덕분에 제법 넓다고 생각했던 석실 안이 인간들로 꽉 차면서 더없이 좁게 느껴졌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녹산귀도 너도 죽어줘야겠다·”
“아무리 마두라지만 최소한의 명예조차도 없단 말씀입니까?”
“돈에 칼을 팔고 그 칼로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네 놈이 할 말은 아니지· 뭣들 하느냐·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 없애버려라!” 그때였다·
“헉!”
짧은 비명과 함께 한 놈이 갑자기 주저앉았다·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쓰러진 자를 향했다·
순간 나는 이능력을 발동시켰다· 동시에 누운 상태에서 몸을 벼락처럼 회전하며 앞쪽에 있는 가마꾼의 발목을 걷어차 쓰러뜨렸다·
‘픽!’ 소리와 함께 가마가 앞쪽으로 고꾸라지며 괴노인이 굴러떨어졌다·
그 사이 몸을 벌떡 일으킨 나는 왼팔로는 괴노인의 머리통을 감아 당기고 오른손으로는 운철검을 목에 갖다 대며 금방이라도 그어버릴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모두 움직이지 마!”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괴노인의 제자들이 모두 뒤돌아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하나같이 찢어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중 한 놈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네 놈이 정녕 죽고 싶은····”
나는 운철검으로 괴노인의 왼쪽 귀를 쓱 그어 올려 버렸다·
이어 아랫배 세 군데에 짧은 칼빵을 벼락처럼 놓았다·
쓱! 푹푹푹!
“우 움직이지 마라!”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괴노인이 먼저 목구멍을 쥐어짰다·
그러자 모두가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 사이 칠점사에 물린 놈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는 사지를 바르르 떨고 있었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다·
한편 쓰러져 있던 후기지수들과 서호삼견은 비틀거리면서도 모두 몸을 일으켰다·
나는 당군백을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사람들 이끌고 밖으로 나간 다음 힘을 합쳐 석문을 굳게 닫으십시오· 그리고 내가 다시 열어 달라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열어주면 안됩니다·”
“혼자 어쩌시려고요?”
“남의 무덤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으니 쓰레기들은 깨끗이 청소를 하고 떠나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의일 것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견과 삼견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나갔고 이내 석문이 굳게 닫혔다·
나는 눈앞의 적들을 쓸어보며 말했다·
“녹산귀도 거기 계시오?”
“물론 여기 있네·”
“잘난 척하시더니 꼴이 아주 좋습니다·”
“자네가 내게 당한 것과 같은 이치지·”
“우리 계산은 나중에 따로 하기로 하고 일단 이것들부터 함께 치우는 게 어떻겠소?”
“내가 뭘 해 주면 되겠나?”
“술병을 던져 석실의 유등을 모두 꺼주시오·”
“암흑 속에서 다 같이 뒤섞여 싸우자고?”
“아니오· 나 혼자 싸울 것이오· 귀하는 수하들과 함께 놈들이 백발노성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지켜 주시오·”
“감당할 수 있겠나?”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불리하지만은 않을 것이오·”
퍼퍼퍼퍽!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술호리병이 깨지며 벽에 붙어 있던 등잔들도 함께 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지막 등잔까지 꺼졌을 때 석실 안은 완벽한 암흑의 공간으로 변했다·
괴노인이 말했다·
“이러지 말고 나와 협상을····”
쓰윽!
털썩!
“놈이 사부님을 죽였다!”
“놈을 죽여라!”
놈들이 칼을 앞세우며 달려왔다· 이미 각오를 하고 있던 나는 그 즉시 이능력을 발동시켰다·
동시에 귀영무의 보법을 펼치며 왼쪽 석벽을 타고 달렸다·
이어 놈들의 진영 한가운데로 뛰어들며 운철검을 다섯 차례 긋고 찔렀다·
쓱쓱! 푹푹푹!
“으악!”
“아악!”
“놈이 가운데로 왔다!”
“커억!”
“내가 놈을 찔렀다·”
“나야 이 병신아!”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마라!”
그때쯤 나는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손과 발로 착지하듯 천장을 찍고는 왼쪽으로 튕기듯 꺾어지며 떨어졌다·
그리고 또다시 난사·
쓱! 쓱! 푹푹푹!
슬쩍 칼을 맞은 놈이 질풍처럼 돌아서며 칼을 찔러왔다·
정확히 배의 정중앙을 찔렸다· 그러나 칼끝은 용린신갑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땅!
나는 주먹으로 도신을 쳐서 부러뜨린 후 놈의 목이 있음 직한 곳을 향해 운철검을 바람처럼 그었다·
쓰윽!
“커헉!”
계속해서 놈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운철검을 사방팔방으로 휘둘러댔다·
반면 놈들은 나보다 훨씬 큰 대도를 들고도 함부로 휘두르지 못 했다·
일단 석실이 좁고 자칫하면 아군들을 벨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휘둘러도 아군을 벨 염려가 없었다·
미치광이 살인마라도 된 것처럼 좁은 석실을 누비고 다녔다·
인륜도 도덕도 저버리고 그동안 익혔던 모든 무공을 그 어떤 제약도 느끼지 않고 극한까지 펼쳤다·
긋고 찌르고 차고 치고 꺾기를 한참· 나는 혼자하는 수련이나 대련만으로는 절대 가볼 수 없는 어떤 경지를 느꼈다·
마침내 모든 움직임이 잦아들고 칼질을 멈추었을 때 석실 안은 쓰러진 자들의 신음과 피비린내로 가득찼다·
“괜찮나?”
“귀하는?”
“우린 무사하네·”
“백발노성은?”
“나도 무사하네·”
나는 바닥을 더듬어 칼을 하나 주운 다음 석문 쪽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석실 전체가 울리도록 소리쳤다·
“끝났습니다·”
문이 활짝 열리고 누군가 소나무 가지에 불을 붙여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호리독사였다· 그의 뒤로 서호삼견과 후기지수들이 보였다·
횃불 아래에 드러난 석실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괴노인이 목을 그인 채 쓰러져 죽은 가운데 그와 함께 왔던 열세 명의 사람들은 몸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나뒹굴고 있었다·
내 손과 옷에도 온통 피칠갑이었다·
사람들의 눈은 석실 안을 한참이나 쓸다가 천천히 내게로 모아졌다·
그리고 하나같이 경악스러워 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나는 온몸에서 힘이 빠짐을 느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저 구석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백발노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래도 제가 날강도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