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곳곳에 고수가 있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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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부르셨다고요?”
두소부가 내게 물었다·
새벽부터 천룡표국으로 끌려오다시피 한 무림맹 후기지수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국주님으로부터 마두의 호송을 지원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룡 공자께서 직접요?”
“혹시 제가 성에 안 차십니까?”
“그럴 리가요· 충분합니다·”
“다행이군요·”
“한데 이 새벽에 무슨 일로?”
“슬슬 출발해야죠·”
“지금 말입니까?”
“표국에는 눈도 많고 입도 많습니다· 바깥에는 그 눈과 입을 사려는 사람들로 즐비하고요· 그들이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예상치 못한 길로 가야 합니다· 짐은 다들 챙기셨겠지요?”
세 사람은 끙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다 두소부가 목소리를 착 가라 앉히고는 말했다·
“일을 잘 해보려는 정룡 공자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신경을 쓸 것까진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모든 건 제가 결정을 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두소부의 눈에 비친 나는 의욕만 앞서는 무림초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진왕과 그 가족을 구했다는 소문도 들었을 테지만 그 한 번의 일로 자신들이 오랜 시간 나에 대해 듣고 내려온 평가가 바뀌진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하시죠·”
“제 말을 알아들으신 것 맞지요?”
“호송의 책임자는 두소부 공자이시고 우리는 지원만 한다· 표왕부로부터 이렇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충분히 숙지하고 있고요·”
“다행이군요·”
“다만 지원의 범위를 명확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표행이란 그 자체가 전부 지원입니다· 표주가 함께 간다고 해서 다를 게 없고요·”
“말과 마차를 관리하는 것 표국의 오랜 경험을 살려 지름길을 안내하는 것· 우리를 대신해 교대로 번을 서는 것· 이 세 가지만 열심히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한데 지름길은 잘 아십니까?”
“우리 표국에서만 쓰는 정밀 지도가 있습니다·”
“잘 됐군요·”
“정말 그 세 가지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그거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딱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이제 세 가지 부분에서만 지원을 해주면 된다·
반면 그 이상의 도움이 필요할 때 두소부는 내게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 한다·
‘새벽부터 설친 보람이 있네·’
그때 가불염과 세 명의 사내가 작은 마차 두 대를 끌고 왔다·
하나는 말에게 먹일 콩과 식량을 비롯해 여정에 필요한 집기들을 실은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쇠창살로 만든 맹수의 우리가 실린 마차였다·
사실 이건 부득불 무림고수들을 운송할 일이 있을 때 쓰기 위해 천룡표국에서 특별 제작한 것이었다·
당연히 쇠창살과 자물쇠는 인간의 힘으로 구부리거나 부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또한 뼈와 근육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축골공(縮骨功)의 고수들을 고려해 창살의 간격이 닭장보다 더 좁았다·
지푸라기가 잔뜩 깔린 우리 안에는 한 노인이 몸 곳곳에 쇠사슬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백발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덮었는데 그 모습이 작고 구부정한 체구와 어우러져 꼭 늙은 원숭이가 우리 안에 갇혀 있는것 같았다·
실제 이 노인의 별호도 용모와 비슷했다·
‘백발노성 !’
그에 대해서는 온갖 괴소문이 떠돌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였다·
사부를 죽이는 기사멸조의 죄를 저질렀다는 것과 금단의 마공을 익혀 무수한 무림인들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것·
손속이 잔인한 거야 그렇다 쳐도 사부를 죽이는 패륜으로 말미암아 그는 흑도와 백도 모두로부터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여기 있습니다·”
가불염이 크고 복잡하게 생긴 열쇠를 건네주었다·
나는 열쇠를 한 손에 받아들고는 보급품 마차를 끌고 온 세 사람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역시 저들입니까?”
“십칠각의 표사로 지원한 사람들 중 마지막 삼차 관문까지 모두 통과한 사람은 이들이 전부입니다·”
삼차 관문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다·
애장산 절벽을 한 식경 안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것 달리는 말에서 뛰어 내렸다가 다시 달려가 그 말을 잡아탈 것 가불염을 상대로 오십 초 이상 버틸 것·
한데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무사가 이백서른두 명의 지원자들 중에 고작 이들 세 명이었다·
중간쯤에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아서 이름도 물어보고 얼굴도 익혀 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
“이제부터 가 표사께서는 십칠각의 수석 표사입니다· 내가 없는 동안 전 장궤와 의논하여 주루를 관리하는 의뢰부터 하나씩 맡도록 하세요· 주루의 명단은 전 장궤에게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하면 이들은?”
“정식으로 고용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허리를 꾸뻑 숙여왔다·
지금이야 저렇게 감동해 하지만 진짜 식구가 될 수 있을지는 일을 함께 해봐야 안다·
“매소옥을 호위하는 일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다선초당에서 후견인을 맡기로 했어도 호위는 극구 우리에게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짐작하시겠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가불염과의 볼일이 끝나자 장삼이 살아 있는 닭을 양손에 각 두 마리씩 틀어쥐고 나타났다·
약이 바짝 오른 닭들은 날개를 퍼덕일 수 없자 두 발을 열심히 허공에 대고 놀리는 중이었다·
“잘 골랐겠지?”
“이를 말씀입니까·”
나는 가불염에게 받은 열쇠를 들고 백발노성이 갇혀 있는 마차로 갔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자물통에 열쇠를 꽃아 창살문을 열었다·
무림맹 후기지수 세 명이 깜짝 놀라서 다가왔다·
그러나 팔꿈치에서부터 손목까지만 자유로운 백발노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손뼉을 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넣어·”
“제 제가요?”
“시간 없어·”
장삼은 입술에 침을 바르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닭 네 마리를 우리 안에 휙 던져 버리고는 후다닥 물러났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된 닭들이 홰를 치며 날아다녔다·
그러자 우리 안은 닭털 반 지푸라기 반이었다·
나는 닭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얼른 문을 닫고 다시 자물통을 잠갔다·
기행 같은 내 행동에 후기지수들은 아연실색했다·
여태 가부좌를 틀고 있던 백발노성이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는 노란 광채를 번뜩이며 물었다·
“무슨 짓이냐?”
“이제 막 알을 낳기 시작한 젊은 암탉들입니다· 저희 표국에서 특별히 기르는 종인데 지금부터 석 달까지는 하루에 거의 한 알씩 아무 데서나 잘 낳습니다· 대단한 놈들이죠·”
“그래서?”
“모든 표행이 그렇지만 특히 장거리 표행은 효율성과의 싸움입니다· 첫 번째는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하고 두 번째는 공간의 낭비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한데 이 창살 마차는 공간의 낭비가 극심합니다·”
“그래서 닭장으로 만들겠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내가 이것들의 목을 모조리 비틀어 버리면?”
“내일 아침 계란을 못 드시겠죠·”
“···?”
“황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고충이 적지 않으셨을 걸로 짐작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끔은 닭고기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목격자에 따르면 처음 백발노성이 천룡표국에 나타났을 때 맨발로 말안장에 밧줄로 묶여서 질질 끌려 왔다고 한다·
그렇게 끌려오면서 먹을 거나 제대로 챙겨 줬겠나·
“나와 협상을 하자는 것이냐?”
“무림맹까지는 대략 보름· 가는 동안 노인장께서 먹고 자는 모든 문제가 제 손에 달려 있습니다·”
“협박이로군·”
“당해도 손해볼 게 없는 협박이지요·”
“이름이 무엇이냐?”
“천룡표국 십칠각주 이정룡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상대가 마두이든 흉신악살이든 무림의 까마득한 선배인 것은 확실하니 굳이 인사를 아낄 필요는 없다·
설사 나중에 강물에다 처넣는 한이 있더라도·
“닭 잡는 날은 내가 정한다·”
그러면서 백발노성은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왼쪽 어깨에 닭 한 마리가 올라가 귓구멍을 두어 번 쿡쿡 쪼았다·
하지만 그는 부처라도 된 듯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두소부와 양조광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표정이 어벙벙해졌다·
당군백은 아까부터 얼굴이 벌게지다가 더는 못 참겠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쿡!’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두소부가 내게 물었다·
“한데 다른 표사들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밖에서요?”
“천룡표국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질 않아서요·”
***
“왜구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뭘 그 정도씩이나·”
“청성 점창 당문의 후기지수들을 도와 백발노성을 무림맹까지 호송하는 일이야· 흑도의 형제들이 우릴 보면 뭐라고 하겠어?”
“뭐라고 하는데요?”
“개과천선했다고 손가락질하겠지·”
“그렇다고 우리가 무림맹의 무사가 된 건 아니잖아요· 십칠각주가 하는 말을 들으니 우린 어디까지나 지원조라던데·”
“십칠각주?”
“왜요?”
“호칭이 어째 살짝 존칭이다?”
“돈 주는 사람한테 허구한 날 이름을 부르기가 좀 그렇잖아요· 한두 푼도 아니고·”
“돈만 주면 아무리 어려도 다 존칭이냐?”
“어려도 우리보다 훨씬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렇게 한 번씩 표사질을 하니 쏠쏠하고 좋잖아요· 콧구멍에 바람도 쐬고·”
“잘하면 아예 천룡표국으로 들어가겠다?”
“자리가 있답니까?”
“뭐?”
“농담입니다· 농담·”
이견과 삼견이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한참 앞쪽에서 가고 있던 양조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솔직히 나도 좀 부끄러웠다· 초장부터 이럴진대 나중에 낯이 익고 이견의 입에서 욕이라도 나오기 시작하면 어쩔까 싶고·
나는 옆에 있는 일견에게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돈 받고 하는 일이네·”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뭐가?”
“무슨 말인지 아시잖습니까?”
흑도들을 객원표사로 고용했다는 걸 눈치했을 때 세 후기지수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는 한나절이 넘도록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은가?”
“전혀요·”
“하지만 저 친구들은 꽤 신경이 쓰이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자네도 그렇고·”
“제가요?”
“염려 말게· 시비만 걸어오지 않으면 우리도 얌전히 굴 테니까·”
“시비를 걸어오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 당연하지·”
“상대는 청성 점창 당문의 제자들입니다· 개개인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이겠지만 사문이 실로 무시무시합니다· 이런데도요?” “누가 이길지는 싸워봐야 알고 뒷일이 무서워 모욕을 참으면 흑도가 아닐세·”
“어련하시겠습니까·”
“두 번이면 되겠나?”
“예?”
“자네 입장을 생각해 저들이 시비를 걸어도 두 번은 참겠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살짝 쫄은 것 같은데·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는지 모르겠네만 저들이 전부가 아닐걸세·”
“무슨 말씀입니까?”
“무림맹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움직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들었네· 한데 세 명밖에 없다는 것은 두 명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지·”
“백발노성과 싸우다 다쳤을까요?”
“내 생각도 같네· 두 사람은 아마 모처에서 부상을 치료 중일 걸세· 언제까지 백발노성을 붙잡고 있을 수 없으니 세 명이 천룡표국으로 와서 지원을 요청한 것이겠지·”
“다른 근거도 있습니까?”
“백발노성의 발이 피투성이더군· 필시 맨발에 밧줄을 말안장에 묶어 끌고 왔을 것이네· 아무리 흉악한 마두라고는 하나 정파의 후기지수들 답지 않게 잔인한 모습이지· 왜 그랬겠나?”
“복수군요·”
“아마도·”
팔이 부러져도 소매 안에 있는 법이다· 외부인에게는 자신들의 어려움을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세 사람의 신중함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때마침 당군백이 말을 타고 가면서 주변 경치를 구경하느라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이견과 삼견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뚝 그쳤다·
당군백의 예쁜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다·
남궁소소와 조영영 심지어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매소옥까지도 성숙한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가운데 제각각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한데 당군백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귀여운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동물로 치면 여우처럼 생겼다고 해야 하나?
“보아하니 청성의 제자가 다섯 명의 후기지수들을 이끌고 황산으로 간 조장인 듯하네· 그러나 저들 중 가장 상대하기 싫은 사람을 꼽으라면 난 당문의 여자를 꼽을 걸세·”
“저는 그녀와 싸울 일이 없으니 다행이군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항주는 천하의 소문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고 또 천하의 무림인들이 한 번쯤은 거쳐 가는 곳이기도 하다·
서호삼견은 그런 곳에서 수십 년을 버텨왔다·
강호인들 중에 이들만큼 견문이 넓은 사람을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흑도나 사마외도의 고수들을 알아보는 데는·
내가 다른 당에서 표사들을 지원받지 않고 구태여 돈을 조금 더 들여서라도 이들을 또다시 객원표사로 고용한 이유였다·
항주에서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으로 가려면 일단 천목산과 황산을 왼쪽에 두고 곧장 서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간단하게 말해 서북 방향이지 그사이에는 수많은 산과 강과 골짜기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특히 항주에서 장강이 나타나기 전까지 사흘 정도의 구간은 대부분 산악지대였다·
그러나 이런 곳에도 길은 있었다·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나는 전생에서 이 길을 수십 번도 더 지나갔다·
왼쪽 산비탈에 맑은 냇물과 함께 관제묘가 나타났을 때 내가 두소부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저 관제묘에서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해가 아직 한 뼘이나 남았습니다만·”
“비가 올까봐 그렇습니다· 그럼 노숙을 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땅이 젖기 전에 땔감도 미리 모아 두어야 하니까요·”
때아닌 비 얘기에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해가 한 뼘이나 남았지만 강렬한 광채에 서쪽 하늘은 벌써부터 멋진 노을이 질 기미를 보였다·
“비라니· 무슨 소리야· 이렇게 맑은데·”
무엇이든 참견하기 좋아하는 이견의 말이었다·
모두가 이견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무림인이라면 웬만한 관천망기쯤은 다 읽을 수 있다·
그러나 30년 동안 하루에도 대여섯 차례씩 하늘을 살피며 살아온 쟁자수들의 내공에 비하면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다·
“제가 봐도 비가 올 것 같진 않군요·”
두소부는 내 말을 성의 있게 받아 주지도 않았다·
표사랍시고 돌아다니기 시작한 지 서너 달밖에 안 된 내가 무엇을 알겠냐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권유를 하지 않았다·
일단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한 이상 자꾸 토를 다는 건 호송단 전체의 질서과 규율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편하게 자긴 글렀군·“
쏴아아!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대지를 적시기 시작했다·
봄이 오려면 아직 한 달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이 추위에 날로 비를 맞으면 병나기 딱 좋다·
“이랴!”
명령이고 뭐고 나는 창살 마차를 끌고 곧장 눈앞에 보이는 골짜기 사잇길로 달려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가자 위쪽이 처마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온 절벽이 나타났다·
그 절벽의 아래에 일 장 정도 넓이로 겨우 비가 들이치지 않는 곳이 있었다·
잠시 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를 따라 절벽 아래로 들어왔다·
“귀신이 따로 없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 관제묘에서 묵을걸·”
이견과 삼견이 투덜대며 두소부를 향해 눈을 흘겼다·
자신들도 하늘이 저렇게 맑은데 비가 웬 말이냐고 했으면서·
내가 두소부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묵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죠·”
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우선 절벽의 앞뒤를 따라가며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오십시오· 없으면 나뭇잎이라도· 밤새 추위에 떨기 싫으면 다들 최대한 모아야 합니다·”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이도 어리고 무림 출두도 늦은 내가 부지불식간에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기를 정확히 맞춰서인지 아니면 딱히 시비를 걸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모두 군말이 없었다·
서호삼견은 앞쪽으로 당군백은 뒤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양조광은 눈치를 살피다가 두소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당군백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한 사람은 꼭 백발노성의 곁에 있기로 한 건지 두소부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정확한 판단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에 불과하다·
조력자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을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가 올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올 줄 몰랐습니다·”
“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수시로 바뀌는 하늘의 조화를 어떻게 알겠습니다· 다만 아까 보았을 때는 한 식경만에 동쪽에서 작은 비구름 하나가 빠르게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한 식경만이라고요?”
“관천망기는 첫 번째가 하늘을 보는 것이고 두 번째가 시간을 두고 하늘을 보는 것이다···· 라고 경험 많은 쟁자수들이 말해주더군요·”
나는 살짝 놀라는 듯한 두소부를 뒤로하고 도롱이를 쓴 채 나뭇잎을 뒤적거리고 다녔다·
비가 오면 땅속에 있는 지렁이들은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에 앞다투어 기어 나온다·
그리고 우리가 딛고 선 발아래는 생각보다 많은 지렁이가 살고 있다·
하물며 낙엽이 쌓여 영양분이 풍부한 땅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잠깐 사이에 한 마리만으로도 닭 내장 정도는 꽉 채울 것 같은 지렁이를 수십 마리나 잡았다·
이걸 쇠창살 속에 던져주니 네 마리의 닭들이 신나게 달려들어서 쪼아먹기 시작했다·
“많이 먹고 내일 아침에 두당 한 알씩 부탁한다·”
“여기다 알을 깐다고?”
가부좌를 틀고 있던 백발노성이 실눈을 뜨고 물었다·
그 와중에도 그게 궁금했나 보다·
“그럴 리가요? 이따가 노인장께서 타고 계신 마차 밑에 대나무 발을 친 다음 넣어둘 겁니다· 바닥에는 낙엽을 두툼하게 깔아주고요·” “이런 일에 아주 능숙하군·”
“쟁자수들에게 배웠습니다·”
“이제 뭘 할 것인가?”
“밥 먹어야죠·”
“혹시 벽곡단인가?”
“저는 무림 고수가 아니어서 그런 거 먹고는 보름씩 못 갑니다· 말린 육포와 버섯을 잘게 잘라 넣고 쌀밥을 지을 겁니다·”
그러면서 나는 보급품 마차에서 쇠솥을 꺼내 빗물에 씻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꾀꼬댁!
짧은 비명과 함께 푸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돌아섰더니 닭 한 마리가 백발노성의 손 안에서 모가지를 꺾인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백발노성이 죽은 닭을 툭 던지며 말했다·
“끓여라·”
“누구 마음대로요!”
“닭 잡는 날은 내가 정한다고 했을 텐데·”
“제가 닭을 끓인다고 한들 노인장에게 준다는 보장은 무엇으로 받으시겠습니까?”
“내게는 아직 세 마리의 인질이 있다·”
“영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나는 쇠창살 문을 열어 닭들을 전부 잡아 발목에 줄을 하나씩 묶었다·
그런 다음 두소부에게 건네주며 좀 잡고 있으라고 했다·
이어 말과 분리한 마차를 절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갔다·
그러자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곧장 지붕 없는 쇠창살 우리 위로도 떨어졌다·
“뭐 하는 짓이냐?”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십시오· 고수이시니 얼어 죽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저녁은 없습니다·”
“···!”
“사람을 뭘로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