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첫 단독임무(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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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을 나온 나는 개인 거처로 가서 변복을 했다·
그런 다음 종일 항주 유흥가를 돌며 뒷골목과 흑도방파들의 사정을 탐문했다·
그 결과 내가 아는 전생의 기억과 한 치도 어긋남 없이 흘러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지금 항주 유흥가에서 단연코 화제가 되는 것은 최근 흑도방파 두 곳 사이에서 벌어졌다는 전쟁이었다·
방도라고 해봐야 쉰 명 안팎의 작은 방파들이었지만 사람들이 여럿 죽어 나가면 한동안 항주 유흥가가 진동한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표국으로 돌아온 나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장삼을 재촉해 다시 유흥가로 향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월성교·”
“또 그 늙은 거지 만나시려고요?”
“말조심해· 거지라니·”
“어제도 지나는 길에 한 냥이나 적선했는데요·”
“물론 거지가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월성교옹(져星橋鏡)이라고 불러드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월성교의 노인이라는 뜻이지 뭐긴 뭐야·”
“훨씬 있어 보이네요·”
“지금은 비록 걸인의 삶을 살고 계시지만 왕년에는 방귀깨나 뀌던 분이야· 그리고 거듭 말하는데 내가 월성교옹을 만나러 다니는 거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돼· 알지?”
“그거야 물론이죠· 한데 거지를 아니 월성교옹을 뵈려는 게 아니라면 월성교에는 왜 가시는 겁니까? 이렇게 옷까지 깨끗하게 차려입으시고요·”
“월성교 구역에 주루가 몇 개나 있는지 혹시 알아?”
“어디까지 금을 긋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충 스무 개 정도 됩니다· 거기다 술을 곁들여 파는 반점들까지 합치면 쉰 곳은 족히 넘을 걸요·”
“그럼 월성교 구역에서 다른 주루 열 곳과 맞먹는 매출을 혼자 올리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어딘지는 알고?”
“녹원루잖습니까요·”
“제법이네·”
“사공자님을 따라 항주 유흥가를 섭렵한 세월이 거짓말 조금 보태면 십 년입니다· 또 물어볼 것 있으시면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그럼 녹원루 매출의 구 할을 사실상 혼자 벌어들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군지는 알겠어?”
“당연히 매소옥이겠지요· 항주 삼대 미녀 중 한 명이자 항주 제일의 예기(藝波)인 매소옥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려고요·”
“바로 그 매소옥을 만나러 가·”
“예에?”
“왜 그렇게 놀라?”
“한동안 잠잠하시더니 또 왜요?”
“한동안 잠잠했으니까·”
월성교 구역에 돈 많은 풍류객들이 몰리는 건 녹원루가 있기 때문이고 녹원루가 돈을 쓸어 담는 건 매소옥이 있기 때문이다·
녹원루는 월성교 주변뿐만 아니라 유흥의 도시라는 항주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급 주루였다·
원래 고관의 작은 별장이었던 녹원루를 어느 부유한 상인이 사서 지금의 주루로 키웠다·
하지만 매음이나 일삼는 싸구려 홍루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여전히 녹원루라는 고아한 이름을 고수했다·
단지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녹원루에는 술을 나르는 시비는 있을지언정 따르는 기녀는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매소옥은 바로 그 녹원루에서 칠현금을 전문으로 타는 예기였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솜씨가 경지에 이른 데다 신비로운 용모까지 어우러져 인기가 실로 대단했다·
때문에 그녀를 보겠답시고 절강성 전역에서 돈을 보따리째 싸들고 찾아오는 풍류객들이며 시인 묵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매음을 하지도 않고 술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단지 칠현금을 연주하는 것만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매소옥은 항주에 있는 모든 주루와 기녀들의 전설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지·”
“예?”
“혼잣말이야·”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수일 내로 그녀는 항주에서 홀연히 증발해 버린다·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남궁소소가 한 말 때문에 떠올렸지만 정확한 시기는 각서에 날짜를 써 준 덕택에 기억해 냈다·
전생에서 내가 그녀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건 그녀도 나도 꽃 같은 청춘이 모두 지나간 십여 년 후의 어느 날이었다·
소주로 표행을 다녀온 쟁자수가 대뜸 물었다·
“자네 매소옥 기억나나?”
“매소옥? 녹원루의 매소옥?”
“그래 그 유명한 매소옥·”
“매소옥이 왜?”
“죽었대·”
“뭐?”
“얼마 전 태호의 호숫가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더라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남루한 옷차림에 곱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더군·”
“어쩌다가?”
“그것까진 모르지· 다만 얼어 죽기 전까지도 다 낡아빠진 칠현금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조금 더 알아보았더니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저곳으로 팔려 다니며 십여 년을 비참하게 살았다고 한다·
아무리 꽃청춘이 지나갔다고 해도 서른두세 살이면 요절을 한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힘을 이용해 그녀의 인생 경로를 바꿔 주기로 했다·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겠지만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었다·
구태여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전생에서 그녀가 내게 베푼 작은 친절 때문이다·
어느 겨울날 길을 가던 나는 갑작스럽게 쏟아진 비를 피해 커다란 수양버들 아래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잎이 다 떨어진 수양버들이 무슨 비를 막아주겠나·
그래도 쌩으로 맞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뛰어들었을 뿐이다· 안 그러면 얼어 죽을 것 같아서·
한데 수양버들 아래는 먼저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그림에서나 나올법한 미녀와 두 명의 칼잡이였다·
그림 속의 미녀는 커다란 우산을 쓰고 있었고 칼잡이들은 기름 바른 삿갓에 짚으로 엮은 도통이를 쓰고 있었다·
겨울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에게 그림 속의 미녀는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쓰실래요?”
“예?”
“같이 써요·”
“괘 괜찮습니다·”
“같이 써요·”
“가까이 있으면 냄새가 심하게 날겁니다·”
“···?”
“아 아니 저 말입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하역장에서 짐을 나르다 오는 바람에 몸에서 쉰내가····”
“같이 써요·”
나는 그녀가 그 유명한 녹원루의 예기 매소옥이며 두 명의 칼잡이는 그녀를 호위하는 무사들이었음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건 이 몸뚱어리의 주인인 이정룡이 아니라 전생의 나 조연생과 관련된 일이었다·
이번 의뢰를 맡는 동안만큼은 다시 조연생이 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녹원루에도 자주 들락거렸냐?”
“기억이 안 나십니까?”
“전혀·”
“아직도 호수에 뛰어든 후유증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요·”
“자주 들락거렸군·”
“허구한 날 들락거리셨죠· 초저녁에 들어갔다가 새벽녘에 나오시는 일도 흔했고요· 녹원루는 공자님께서 가장 많이 들락거린 주루 중 한곳입니다·”
“내가 뭐 더럽게 놀고 그러진 않았지?”
“그거야 소인은 모르죠·”
“언제는 평판이 좋았다더니?”
“평판이야 좋았죠· 온갖 변태에 미치광이들이 득실대는 항주 유흥가에서 사공자님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다만 좀··· 만만해 보였다고나 할까·”
순간 나는 전생에서 이정룡을 두고 천룡표국의 쟁자수들이 호구 등신 반푼이라고 수군거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이정룡에게 그런 말을 듣게 해준 세계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녹원루는 아시다시피 우리 천룡표국의 복룡당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사공자님께서 가시면 복룡당에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들어갔다 나와야지·”
“어떻게요?”
“사람들을 최대한 적게 마주쳐야겠지·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좀 쥐여주어서 입단속도 시키고·”
“그럼 문지기 입단속부터 시키십시오·”
“그거야 당연하지·”
***
“천룡표국의 사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아!”
녹원루에 도착하자마자 문지기가 대문을 활짝 열고는 안쪽에다 대고 모두가 들릴 수 있도록 고함을 지르는 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라 문지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문지기는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순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삼이 옆에 있다가 전낭에서 동전 두 냥을 얼른 꺼내 주었다·
그러자 문지기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다시 문 앞을 지키러 나가 버렸다·
“하 저 미친놈이!”
“그러니까 제가 문지기 입단속부터 시켜야 한다고 했잖습니까? 아까는 당연하다고 하셔 놓고는·”
“저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
“원래 공자님께서 오시면 늘 저렇게 했습니다·”
“아니 왜?”
“공자님께서 좋아하셨으니까요·”
“내가?”
“예·”
“대체 왜?”
“바로 저것 때문에요·”
장삼이 주변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로 마주 보고 선 삼 층 전각이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창문으로부터 아름다운 연주들이 쉴새 없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한데 모든 연주가 갑자기 뚝 그쳤다· 그리고 일제히 창문이 열리면서 남녀가 앞다투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예기들로 보이고 남자들은 연주를 들으며 술을 마시러 온 풍류객들인 것 같았다·
창문마다 대여섯 개씩 얼굴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꼭 둥지에 들어앉은 제비새끼들 같았다·
“이걸 내가 좋아했다고?”
“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대체 내가 왜 이런 걸 좋아했지?”
“여기서만큼은 환영받고 대접받는 것 같았으니까요·”
어느새 창가에 얼굴을 내민 예기와 풍류객들은 어림잡아도 백 명이 넘을 것 같았다·
나와 장삼은 졸지에 마희단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망했군·”
“그만큼 사공자님께서 유명해지신 겁니다· 전시와 회시의 장원급제에 화조신옹에게 잡혀갔다 온 일이며 최근엔 진왕전하와 공주마마를 구해드린 일화까지····”
“알았으니까 그만해·”
“매소옥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예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이리 많으니 작은 실수라도 했다가는····”
“그것보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어야 해?”
“나올 때가 됐는데·”
그때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 사내가 점소이 둘을 대동하고는 잰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비단옷으로 몸을 감은 것이 꽤 높은 신분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자님·”
중년인이 내게 꾸뻑 인사를 해왔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눈치를 챈 장삼이 얼른 중년인을 향해 이름까지 부르며 머리를 조아렸다·
“염화상 총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원래 몸종들은 이런 거물에게 인사를 건네는 법이 없다·
감히 인사를 주고 받을만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삼이 이러는 건 순전히 나를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중년인이 의아한 얼굴로 장삼을 보았다·
내가 얼른 말했다·
“염 총관께서 직접 나오실 것까지야·”
“그간 반가운 소식들은 듣고 있었습니다· 늦었지만 경하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것보다 어디로 좀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염화상은 함께 온 점소이 둘에게 일렀다·
“옥명각(玉鳴閣)으로 모실 것이다· 한 명은 주방으로 가서 천룡표국의 사공자님께서 오셨다고 이르고 한 명은 설향과 청비에게 가서 천룡표국의 사공자님 모실 준비를 하라고 이르라· 서둘러라·”
“예·’
“예·”
그러면서 장삼에게도 말했다·
“자네도 함께 가서 술 한잔하며 기다리시게·”
“감사합니다· 총관님·”
장삼이 점소이 둘을 따라 쏜살같이 사라졌다·
조용히 들렀다 가긴 애초에 글렀다·
녹원루는 바깥에서 볼 때와 달리 제법 넓은 정원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는 오래된 연못이 있었는데 수양버들 늘어진 풍경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연못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모두 네 개의 삼 층짜리 전각이 있었다·
그중 한 곳에서 예사롭지 않은 음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칠현금을 연주하고 거기에 맞춰 피리를 부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들었다·
염화상은 말과 행동이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곡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어떻습니까?”
“끝내주는군요·”
“···?”
나도 답답하다· 전생에 글은 좀 읽었어도 음악이나 악기에 대해서는 뭐 아는 게 있어야 그럴 듯하게 말을 하지·
“두 사람 다 보통 솜씨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피리를 부는 이는 해청이라는 늙은 악공입니다· 소주에까지 가서 한 달을 설득한 끝에 거금을 주고 데려왔지요· 지금 매소옥과 음률을 맞춰보는 중입니다·”
드디어 나왔다 매소옥· 전생에서 딱 한 번 본 그녀를 무려 삼십여 년 만에 다시 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매소옥을 만나고 싶습니다·”
“지금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음률을 다 맞출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그 정도 소양은 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아니라 오늘은 선약이 가득 차 있습니다·”
“선약요?”
“비단 오늘뿐만이 아닙니다· 매소옥을 만나시려면 최소 석 달 전에 예약을 해두셔야 합니다· 비용은 무조건 선불이고요·”
“석 달 전에 라고요?”
“그렇습니다·”
“인기가 그 정도입니까?”
“예전에도 그랬습니다만·”
지금 염화상의 입장에서는 내가 살짝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뻔질나게 드나든 만큼 누구보다 녹원루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제야 장삼이 지나가는 말로 ‘매소옥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잠깐 보는 것도 안 되겠습니까?”
“모두가 그런 부탁을 합니다만 한 번도 성사된 적이 없습니다· 사공자님이라고 하시어 예외가 될 순 없습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당장 그녀를 만나서 의뢰를 받아내야 한다·
한데 잠깐 얼굴이라도 보려면 석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니·
“방법이 없겠습니까?”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게 무엇입니까?”
“선약한 사람들에게 동석을 부탁하시는 겁니다·”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로군요·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생면부지인 저를 끼워주겠습니다·”
“오늘 선약한 분들은 공자님께서도 잘 아시는 분들입니다·”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요?”
“마침 저기 오시는군요·”
염화상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뒤를 돌아보니 다섯 명의 젊은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과 모피 옷으로 한껏 멋을 낸 그들은 이병룡과 그의 친우들 즉 항주에서 내로라하는 무림문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그중에는 두 명의 아리따운 여자도 있었는데 바로 수향문의 조영영과 용무관의 진금봉이었다·
일전에 백선반점에서 만났던 이병룡과 그의 친우들을 이곳 녹원루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한데 조영영은 또 왜?
‘갑갑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