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첫 단독임무(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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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하시겠소?”
“주시면요·”
앉으라는 말인데도 그녀는 가만히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집무실을 구경했다·
나는 그녀를 세워놓고 부젓가락으로 화로를 뒤적인 다음 찻물을 다시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이름이 뭐요?”
“어차피 가짜인데 무슨 상관이에요·”
“그건 그렇군·”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동안 물이 끓었고 나는 찻물을 찻잔에 부었다·
보기만 해도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날도 추운데 어서 드시오·”
“오늘은 따뜻했어요·”
“따뜻하다면서 목도리는 왜 한 거요?”
“말을 타고 달리면 추워서요·”
“그러니까 내 말이·”
“방금 날도 추운 데라고 하지 않았나요? 날은 분명히 따뜻했어요· 다만 내가 말을 타고 달리는 바람에 추웠던 거지·”
“내가 실언을 했소· 어서 드시오·”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쳐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충 넘어가긴 틀린 것 같다·
그래도 오늘은 웬만하면 져 주자·
그녀가 자리에 앉으면서 모피 목도리를 풀었다·
그러자 사슴처럼 희고 가느다란 목이 드러났다·
여자의 얼굴이란 묘해서 목이 드러났는데 입술 아래의 점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역용을 할 때마다 점은 왜 꼭 찍는 거요?”
“역용은 얼굴에 기문진을 펼쳐놓는 것과 같아요· 점은 일종의 진축이죠· 자기 자신을 역용할 때는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진축이 필요하고요·”
“그렇게 진지한 이유가 있는 줄은 몰랐소·”
“난 매사에 진중해요· 누구와는 달리·”
“그때 취선루에서 있었던 일은 미안하게 됐소· 잘 아시다시피 그땐 사정이 워낙 급했소·”
“알아요· 이해하고요·”
“진심이오?”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에요·”
말을 속 좁은 사람 아니라고 하면서 집무실을 들어온 이후 아직까지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여긴 처음 들어와 보네요·”
그녀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구경이라도 하려는 듯 뒷짐을 쥔 채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데요·”
“아무것도 없어서 그럴 거요· 필요한 집기들도 채워야 하고 표사도 고용해야 하고 나중에 와보면 오히려 좁다고 느낄 거요·”
“돈 들어갈 일이 태산이군요·”
“태산까지는 아니고·”
“악착같이 모으셔야겠어요·”
“열심히 모으고 있소·”
“열심히만 해서 되나요· 인정사정없이 모아야죠· 필요할 땐 동료도 속이고 뒤통수도 치면서요·”
“그때 은전 얘기는····”
“그런 얘기 이제 그만 하죠·”
“그것 때문에 온 것 아니었소?”
“그것 때문에 왔다고 하면 사과 말고 귀하가 할 게 더 있나요? 하지만 난 사과 같은 거 별로 받고 싶지 않아요·”
“왜?”
“어차피 또 사기일 테니까·”
“무슨 사기씩이나·”
“귀하가 고용한 표사가 은 백 냥짜리 의뢰를 받아와서는 귀하에게 열 냥짜리라고 속인 후 나머지 아흔 냥을 중간에서 슬쩍하면 뭐라고 하실래요?”
“그건 사기요·”
“그게 귀하가 내게 한 짓이에요·”
“천룡표국에서는 장궤가 은 백 냥짜리 의뢰를 받고는 사람들에게 열 냥짜리라고 속인 후 나머지 아흔 냥을 중간에서 가로채면 어떻게 되죠?”
“치도곤을 친 후 쫓아내오·”
“치도곤은 몇 대나 치죠?”
“오십 대 정도요·”
“그게 귀하가 내게 한 짓이에요·”
“그건 지나친 비약이오· 금전은 은전 열 냥의 가치가 있으니 비유를 하려면 은 열 냥 중 한 냥으로 얘길 해야지 백 냥에 열 냥으로 얘기하면 내가 무슨 대단한 사기라고 친 것 같잖소·”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법이에요·”
“그래서 지금 바늘도둑에게 치도곤을 치겠다는 거요?”
“이것 보라지· 반성하는 기미는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무슨 사과를 하겠다고·”
“소저가 서운해하는 건 충분히 알겠소· 하지만 일을 너무 침소봉대하여····”
“풉!”
남은 한참 심각하게 말하는데 갑자기 손으로 입까지 가리면서 웃는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오늘 보니 이 여자 웃으면 눈이 반달 모양으로 바뀐다·
이 와중에도 그게 예쁘다·
“왜 웃는 거요?”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모습이 재밌어서 해본 말인데 너무 열심히 변명을 해서요· 그렇게 미안해할 거면서 왜 날 속였대요? 평생 안 들킬 줄 알았나?”
“그럼 아무렇지도 않은 거요?”
“나랑 비무나 한번 하실래요?”
“갑자기 말이오?”
“오초 접어 줄게요·”
“싫소·”
“십초 접어 줄게요·”
“싫소·”
“왜요?”
“비무를 핑계로 날 죽일 것 같소·”
“밖으로 나간 다음 내 신분을 밝히고 천룡표국의 표사와 쟁자수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귀하에게 비무를 요청하는 방법도 있어요·”
“그럼 난 끝장이오· 이제 겨우 조그마한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귀하에게 개 맞듯이 맞으면 누가 십칠각에 표사로 오겠소?”
“실컷 때려 주려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되겠네·”
“늦었지만 소저의 몫은 챙겨 주겠소·”
“십칠각의 총자본금이 얼마죠?”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요?”
“비밀인가요?”
“금전 오십 냥쯤 되오·”
“또 거짓 말하는 거 아니에요?”
“누가 보면 내가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줄 알겠소·”
“생각보다 가난하군요·”
“이제 시작이다 보니·”
“돈 들어갈 데가 한두 푼이 아닐 텐데· 집기들이야 그렇다 쳐도 표사랑 쟁자수를 고용하는 데 큰돈이 들어갈 거예요· 특히 표사들은·”
“돈도 돈이지만 실력 있는 표사들을 구하는 게 중요하오· 하긴 실력 있는 표사들은 비쌀 테니 이것도 결국 돈 문제이긴 하군·”
“회시에 급제하고 받은 상금들은 다 어쨌어요? 듣자 하니 땅도 몇만 평이나 받았다고 하던데·”
“땅은 쓸모없는 황무지라 팔려고 내놓았고 돈은 사정이 있어서 다른 곳에 묻어놨소· 그리고 그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돈이오· 용처도 사적으로만 쓸 것이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정 주고 싶으면 내 몫의 돈은 나중에 돌려줘요· 십칠각에 투자하는 셈 칠게요·”
“아니오· 내가 주고 싶어서 그러오·”
“혹시 내가 바깥에 얘기하고 돌아다닐까 봐 그러는 건가요? 천룡표국의 사공자가 내게 금전을 은전으로 바꿔서 사기 치려 했다고?”
“아니오· 그런 거·”
“그럼 됐어요· 대신 나중에 명표도 되고 당주도 되고 하면 십칠각이 커진만큼 몇 배로 돌려주셔야 해요·”
“정말 내가 명표가 될 거라고 믿는 거요?”
“물론이죠· 그때 동굴 속에서도 말했잖아요· 언젠가 귀하가 꿈꾸는 것처럼 명표로 이름을 날릴 거라고· 지금은 그 확신이 더 강해졌어요· 귀하는 꼭 명표가 될 거예요·”
가슴 한쪽이 짜르르 울렸다·
이렇게 지혜롭고 배려심 깊은 여자를 상대로 돈 몇 푼 더 처먹겠다고 사기를 친 내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왜 대답이 없어요?”
“꼭 그렇게 하겠소·”
“이번엔 믿어도 되겠죠?”
“물론이오·”
“만약 또 거짓말을 하면요?”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그래도 하면요?”
“나 이정룡은 천하의 개자식이오·”
“그럼 여기에다 좀 써주세요·”
그러면서 남궁소소가 품속에서 아무것도 씌어있지 않은 백지를 한 장 꺼내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이게 뭐요?”
“지금부터 내가 불러주는 대로 써주기만 하면 돼요· 천룡표국의 십칠각주 이정룡은 남궁소소로부터 금전 반 냥을 투자받았다· 이는 총 자본금의 일(一) 푼에 해당하는 액수이므로 언제든지 이 각서를 내밀면 비율만큼의 축적된 이익을 분배해 주겠다· 신유년 십이월 보름 이정룡·”
나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파악하고 받아들이느라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말인즉슨 각서를 써달라는 건데··· 생각할 것도 없이 당했다·
“설마 방금 내뱉을 말을 주워 담지는 않겠죠? 그러면 진짜 개자식 되는 거예요·”
“몇 배가 이 비율을 말하는 것이었소?”
“내가 분명 십칠각이 커진 만큼이라고 했을 텐데요· 귀하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고요·”
“아깐 화난 게 아니라더니?”
“지금도 화나지 않았어요·”
“그럼 이건 뭐요?”
“골탕 먹은 게 약올라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꼭 음흉한 마두랑 싸워서 진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나는 무엇이든 지고는 못 사는 성미거든요·”
그러면서 남궁소소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빼더니 약간의 먹물과 붓까지 들어있는 휴대용 필묵통 꺼내 옆으로 놓았다·
“문방사우는 여기도 있소만·”
그러면서 나는 탁자의 한쪽에 놓여 있는 붓걸이와 연적함을 가리켰다·
옆에는 표단(鏡單- 표국에서만 쓰는 계약서)을 쓰기 좋도록 알맞은 크기로 잘라 정갈하게 쌓아둔 종이도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요·”
“준비가 철저하구려·”
“누굴 속이는 건데 대충할 수 있나요·”
“이렇게 독한 여자인 줄 몰랐소·”
“한 번 더 불러줄까요?”
“외우고 있소·”
“수결에 특히 신경 써 주세요·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용빼는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철면피라고 해도 방금 한 말을 주워 담을 정도로 낯가죽이 두껍지는 않다·
붓을 집어 먹물을 적시고 글을 써 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남궁소소라는 네 글자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깨끗한 새 종이 한 장을 집어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쓰던 붓을 건네주며 말했다·
“남궁소소를 어떻게 쓰오?”
“별로 어려운 글자도 아닌데·”
“한 획이라도 틀리면 무효가 되잖소·”
“이리 줘 봐요·”
남궁소소가 백지 위에 자신의 이름 네 글자를 정성스럽게 써 내려갔다·
성격이 남자처럼 호방해서 글씨도 그럴 줄 알았더니 오히려 아기자기한 맛이 느껴졌다·
“다됐어요·”
“사리가 밝고 분명하다· 좋은 이름이오·”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셨죠· 어딜 가서든 사기 당하지 말고 눈을 똑바로 뜨라고요·”
“이름값 한번 제대로 하는 구려·”
나는 다시 붓을 건네받아 그녀가 쓴 이름을 보면서 나머지 글자들을 전부 채웠다·
마지막으로 수결까지 하고 나자 각서의 작성이 끝났다·
일 푼이면 딱 백 분의 일이다·
이제 나는 그녀가 언제든 이 각서를 내밀면 그때까지 십칠각을 키워서 쌓은 재산 중 백 분의 일을 내놓아야 한다·
전생에서 30년 동안 별의별 놈의 강도를 다 만나보았지만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긴 처음이었다·
남궁소소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각서를 집어 들고는 이리저리 돌려보며 싱글벙글이었다·
“그렇게 좋소?”
“멋진 승부였어요·”
“이건 사기요·”
“귀하가 내게 한 짓도 그래요·”
“알았소· 내가 졌소이다·”
“말 안 해도 알아요·”
“솔직히 소저에게 도움받은 걸 생각하면 별로 아까운 마음도 없소· 다만 나 역시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당했다는 사실에 약이 바짝 오를 뿐·”
“약오른다고 하니까 속이 좀 풀리네요·”
“늦었지만 도와줘서 고마웠소· 특히 취선루에서 소저가 기지를 발휘해 오라버니를 불러주지 않았다면 호위를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끝내지 못했을 것이오·”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 말고 약올라 죽겠다는 말이나 한 번 더 해줘요· 소리까지 지르면 더 좋고요·”
“나도 나지만 소저도 보통은 아니오·”
“그런 말은 오라버니한테 허구한 날 들어요·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단독임무도 맡아야지 않겠어요? 십칠각으로 독립을 한 지가 언제인데·”
“물론이오·”
“의뢰는 좀 들어왔나요? 지금 항주 저잣거리에는 온통 천룡표국과 귀하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던데·”
“많이 들어오긴 했소·”
“어떤 의뢰를 받을지는 정했고요?”
“아직 못 정했소·”
“왜요?”
“표사라곤 달랑 나와 가불염밖에 없어서 큰 의뢰는 맡을 수가 없소· 그나마 둘이서 할 수 있는 것 중에는 딱 꽂히는 게 없고·”
“어떤 의뢰를 맡고 싶은데요?”
“첫 단독임무이니만큼 무언가 의미있는 의뢰를 맡아서 해보고 싶소·”
“돈도 되면 더 좋고요?”
“그거야 물론이고·”
“그런데 지금까지 들어온 의뢰 중엔 없나보군요· 원래 손을 뻗어 딸 수 있는 복숭아는 틀림없이 달지 않은 법이죠·”
“방금 뭐라고 했소?”
“뭐가요?”
“손을 뻗어 딸 수 있는 복숭아는 틀림없이 달지 않다? 그랬군· 그래서 성에 차지 않았던 거야· 알짜배기 의뢰는 표국으로 올 필요도 없이 발 빠른 자들이 다 채가는 법인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서서 뒤돌아보고는 말했다·
“소저를 천룡표국 십칠각의 객원표사로 고용하겠소· 객원표사는 일이 있을 때만 표국에서 임시로 초빙하고 고용하는 표사를 말하오· 집으로 돌아가 있으면 내가 연락을 주겠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제 지난번처럼 위험한 일에는 절대로 끌어들이지 않을 테니까· 그건 내가 싫소· 대신 역용을 해야 하거나 반드시 여자가 필요한 일에만 가끔씩 나서주면 되오·”
“미쳤어요? 내가 왜 객원표사로 일해요?”
“여기 이렇게 소저가 직접 수결을 했잖소· 투자자로서 매달 한 번씩은 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서 객원표사가 되어 주겠다고· 안 그러면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다고·”
그러면서 나는 아까 남궁소소가 스스로 자기 이름을 쓴 종이를 척 펼쳐 보였다·
“거긴 아무것도 안 적혀 있잖아요·”
“그러니까 더 문제지· 여기다 내가 무슨 내용을 써 넣을 줄 알고·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그건 사기예요!”
“소저가 내게 한 짓도 그렇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