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나는 표사다(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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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살수집단이 노상에서 공주를 납치하려 하고 왕이 머무는 별장까지 침투해 왕과 왕비를 겁박한 일은 보통 큰 사건이 아니다· 소식을 들은 항주부 지부대인 왕인탁은 관병 수백 명을 이끌고 가서 이화원을 둘러쌌다·
그는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태산같이 했다·
왕인탁 못지않게 똥줄이 탄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이화원의 소유주이자 남경상단의 단주인 노지량이었다·
그는 하필 자신의 별장에서 진왕과 왕비가 횡액을 당할 뻔하자 식겁을 한 나머지 천룡표국을 찾아왔다·
이종산은 황자충에게 미뤘고 황자충은 다시 나와 상의해 보라며 또 미뤘다·
항주의 늙은 독사를 상대하는 데는 내가 제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금전 이백 냥을 더 주겠네·”
“갑자기요?”
“당장 표사를 두 배로 증원해 주게·”
“그건 안됩니다·”
“돈이 모자란가?”
“돈은 충분합니다·”
“한데 왜?”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무얼?”
“진왕 전하께서 이화원을 떠난다고 하셨습니다·”
“뭐!”
“정말 못들으셨나 보군요·”
“혹시 다른 정원으로 옮기신다든가?”
“북경으로 돌아가신답니다·”
“북경? 왜?”
“글쎄요·”
“혹시 그 자객들 때문인가?”
노지량은 그제야 약간 안심하는 눈치였다·
“말씀으로는 추위를 피해 항주로 왔는데 항주가 오히려 더 추워서 북경으로 돌아가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거야 대외적으로 하는 말씀이신 거고· 더는 조용히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신 모양이군· 아무래도 황족들 사이에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데····”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나저나 내 년에도 항주로 피한을 오실지 모르겠군· 이번에 그런 일까지 겪었으니·”
노지량은 자신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까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사 그동안 진왕비라는 뒷배를 믿고 밀무역을 잘 해 먹었는데 갑자기 왕비가 나 몰라라 해버리면 장사 접어야 할 수도 있다·
“걱정 마십시오· 진왕께서 항주의 고즈넉한 풍광을 좋아하시니 내년에도 틀림없이 오실 겁니다·”
“그럴까?”
“그게 이화원이 될지는 모르지만요·”
“뭐?”
“말씀하신 것처럼 이화원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지 않습니까? 왕비마마께서 재수가 없다시며 다른 장원을 고집하실지도 모르지요· 진왕전하는 왕비마마를 아끼는 마음이 지극하시니 당연히 들어드릴 것이고요·”
“자네가 잘 좀 말해주게· 듣자 하니 왕비마마께서 자네에게 머리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고 하던데·”
“헛소문입니다·”
“나 남경상단주 노지량일세· 항주에서 일어나는 일 치고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것 같은가? 이렇게 하세· 만약 내 년에도 진왕전하와 왕비마마께서 이화원을 찾는다면 내 그땐 금전 삼백 냥으로 계약을 하겠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뭐라고 한마디에 진왕전하 내외께서 이화원으로 오고 말고를 결정하시겠습니까? 그건 지나친 비약이십니다·”
“만약 항주로 피한을 오신다면 왕비마마께서는 분명 자네와 천룡표국에 호위를 맡기려 하실 걸세· 그때 자네가 안전상의 이유로 이화원을 추천한다면 마음이 쏠리시지 않겠는가?”
상계의 늙은 독사라서 그런지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간다·
“그건 좀 그럴 듯하군요·”
노지량이 전낭 하나를 쓰윽 밀어 놓는다·
“이게 뭡니까?”
“자네가 금을 좋아한다고 해서 조금 준비해 보았네· 참고로 내 앞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겸양 같은 거 떨 필요 없네· 통하지도 않고·” 슬쩍 눈을 내리깔고 보니 한주먹에 꽉 찰 것 같은 것이 금전 열 냥쯤 되겠다·
나는 전낭을 도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이 돈은 그때 받도록 하겠습니다·”
“어째서?”
“미리 받으면 빚이 됩니다· 고작 열 냥에 발목을 잡히고 싶진 않습니다·”
“계산 한 번 철두철미 하군·”
“상대가 상대이시니까요·”
독사가 누굴 물려고·
***
“진왕전하께서 예왕(諸王)에게 심각한 타격이 될 수 있는 치부책을 가지고 있으셨답니다· 예왕이 그동안 왜국 왕실과 은밀히 통교를 해왔는데 놀랍게도 진왕전하께서 왜와 밀무역을 하는 남경상단에 사람을 심어두고 오랜 세월 관찰해 왔다고 하더군요·”
진왕을 배웅 나온 길에 이을룡이 이갑룡에게 슬쩍 귀띔하는 말이었다·
틀림없이 외가에서 알아낸 정보일 것이다·
지금 이화원에는 이종산이 자식들은 물론 총표두와 오당의 당주 그리고 대장궤까지 전부 끌고 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종산은 총표두와 황자충만 데리고 오려 했다·
한데 지부대인과 남경상단주가 대동하고 온다는 관병과 무인들의 숫자를 듣고 청룡당주 유지평이 조언했다·
“항주의 늙은 여우와 독사가 잔재주를 부리는군요· 자칫하다간 피는 천룡표국이 흘리고 소문과 평판은 엉뚱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겠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한 첫 번째 이유가 소문과 평판 때문임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유지평의 한 마디는 모두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해서 예정에 없던 이갑룡 을룡 병룡 오당 당주 대장궤가 모두 동원되었다·
유지평의 말을 빌리자면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을 최대한 화려하게 꾸려 이번 일을 주도한 곳이 어디까지나 천룡표국임을 모두가 확실히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비록 하루일망정 나의 부탁으로 공주를 함께 호위했던 남궁소소도 와 있었다·
곁에는 마지막에 나타나 백백곡의 살수들을 일망타진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남궁세옥도 있었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진왕이라는 간판이 필요하다고 해도 너무 노골적이라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도 결국 그 대열에 끼어 세 명의 형들과 함께 말석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런데····
“남궁세옥 옆에 있는 여자 남궁소소 맞지?”
“그렇다고 합니다·”
“남궁소소가 저렇게 예뻤었나?”
“예사로운 미모가 아니라는 말은 들었지만 오늘 보니 설부화용(雪廣花容)이라는 말을 어떨 때 쓰는 것인지 알겠군요·”
이갑룡과 을룡의 조그마한 대화였다·
여기에 이병룡이 역시 자신들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갑룡 형님은 남궁세옥 공자와 친우가 아니십니까? 한데 그동안 남궁소소를 한 번도 못 보셨습니까?”
“7년쯤 전에 잠깐 봤었지· 허구한 날 마상무예를 수련하다 떨어져 얼굴에 멍을 달고 사는 말괄량이였었는데 오늘 보니 어느새 숙녀가 다 됐군·”
“저도 남궁소소와 친합니다만 오늘 본 모습이 그중 가장 아름답습니다· 항주 삼대미녀고 뭐고 하나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요·”
“훗 미친놈·”
이을룡이 실웃음을 흘리며 쏘아붙였다·
“왜 또 그러십니까?”
“네가 부끄러움을 알면 지금 정룡을 옆에 두고 남궁소소랑 친하다는 말이 나오느냐? 아예 형님께 남궁소소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지그래?”
이병룡은 이번에도 찍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지난번 월성교의 기루 건으로 둘이서 정보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잘 지내는 것 같더니만 다시 틀어진 모양이었다·
“다들 조용히 해라·”
이갑룡의 낮은 호통에 을룡과 병룡도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도 세 사람은 저마다의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질투 분노 시기 부러움 등등의 감정들이 읽힌다·
나의 활약이 두드러지다 못해 압도적이다 보니 이제는 슬슬 두려워하는 눈빛도 느껴지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만히 남궁소소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눈처럼 하얀 모피 옷을 입고 엷게 화장까지 한 상태였다·
내가 봐도 오늘따라 유난히 힘을 준 티가 났다·
‘안 꾸몄을 때가 더 예쁜데·’
그건 그렇고 남궁소소는 왜 아까부터 나와 눈을 한 번도 안 마주치는지 모르겠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피하는 게 아니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뭔가 어긋나긴 어긋났는데·’
짚이는 바가 있다· 취선루에서 남궁세옥이 나타났을 때 남궁소소가 혼줄이 나는 걸 보면서도 혼자 내뺐다·
사정도 있고 이유도 있었지만 그래도 섭섭한 건 섭섭한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랬으니 얼마나 얄밉겠나·
‘취선루에 가서 교자라도 먹자고 할까? 맛있어 하는 것 같던데·’
그때 진왕과 일가족이 나왔다· 일가족이라고 해봐야 왕비와 공주가 전부지만·
세 사람은 처음 항주에 나타날 때처럼 두꺼운 털옷을 입었는데 그렇게 우아하고 단란해 보일 수가 없었다·
특히 부슬부슬한 모자에 폭 싸인 왕비와 공주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답고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남궁소소가 오늘 입은 옷도 왕비와 공주의 옷을 빼닮았다·
진왕은 왕비와 함께 황자충 이종산 노지량 지부대인 순으로 작별 인사를 고하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나의 옆에는 이갑룡 을룡 병룡이 있었었지만 진왕과 두 명의 여자는 모두를 지나쳐 내 앞에 섰다·
“올해 나이가 몇인가?”
“스물둘입니다· 전하·”
“한데 형님들이 모두 미혼이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그렇군·”
그러면서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왕비가 옆에서 ‘음음’하고 살짝 헛기침을 하고서야 진왕이 눈빛을 거두었다·
“고마웠네·”
“편안히 다녀오십시오· 전하·”
“다녀오라고?”
“기회를 주신다면 내 년에도 소생이 전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그땐 이번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아무렴 내 항주에 와서 자네에게 호위를 맡기지 않으면 누구에게 맡기겠나· 하지만 절대 자네가 모는 마차는 타지 않을 것이네·”
“죄송합니다· 전하·”
진왕은 내 어깨를 친히 두어 번 두드려 준 후 왕비에게 시간을 양보해 주었다·
왕비의 작별 인사는 담백했다·
“북경으로 표행을 오는 길이 있으면 진왕부(强王府)에도 들러 주겠어요? 동행한 표사들과 함께 와도 좋고요·”
“꼭 그리하겠습니다· 마마·”
다음엔 공주 차례였다· 그녀는 비단 보퉁이에 곱게 싼 용린신갑을 건네주며 말했다·
“잘 쓰고 돌려 드려요·”
“결과적으로 필요 없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쓸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죠· 저야 이것 때문에 안전했겠지만 생채기라도 났으면 얼마나 물어주어야 할지 모르잖아요·”
“네?”
“아바마마께 들었어요· 본래는 하오문의 물건인데 하루 빌리는 데만 무려 금전이 한 냥씩이나 드는 귀물이라고요?”
순간 나는 머리끝이 쭈뼛 서며 자동으로 남궁소소가 있는 쪽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남궁소소와 눈이 마주쳤다·
한데 그녀의 눈동자에 두 개의 횃불이 켜져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건 제 선물이에요·”
공주가 손바닥만한 비단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나중에 풀어 보세요·”
“감사합니다· 공주마마·”
정원엔 수많은 인사들이 있었지만 진왕이 직접 말을 걸고 작별 인사를 한 사람은 고작 열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진왕에 이어 왕비와 공주까지 나서서 작별 인사를 한 사람은 황자충과 나 둘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왕비로부터 진왕부에 초대받고 공주에게 선물까지 받은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특히 내가 왕비에게 진왕부로의 초대를 받는 순간부터 이종산을 필두로 천룡표국 수뇌부의 눈동자가 모두 흔들리고 있었다· 지부대인 왕인탁과 남경상단주 노지량 역시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많은 사람들이 황족과의 인맥을 자랑하지만 안사람 격인 왕비에게 직접 초대를 받는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거야말로 인맥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신경은 온통 남궁소소에게 쏠려 있었다·
좀 전엔 눈동자만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더니 지금은 콧구멍에서 김도 펑펑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닌가?
겨울이라서 원래 그런 건가?
‘아 신경 쓰이네·’
이윽고 진왕과 일가족이 탄 두 대의 마차가 관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화원을 떠났다·
장내가 대충 정리되었을 때 남궁세옥이 남궁소소를 이끌고 이종산에게로 왔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국주님·”
“반점에서 자네의 공이 컸다고 들었네·”
“동생을 데리러 갔다가 우연히 조금 거들었을 뿐입니다·”
“내 아들 녀석이 남궁세가의 귀한 영애를 두 번이나 꼬여내 위험에 처하게 했네· 그 바람에 자네는 물론이거니와 왕장(王丈-너의 할 아버지)께도 면목이 없네·”
“구태여 따지자면 정룡보다 두 살이나 많으면서도 무작정 따라나서고 본 망아지 같은 제 동생의 불찰이 더 클 것입니다·”
점잖게 예의를 차리지만 결국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잠깐만 남궁소소가 나보다 두 살이나 많다고?
‘그럼 누난데·’
어쩐지 처음에 이병룡 일당과 어울려 다니더라니· 슬쩍 남궁소소를 돌아보니 갑작스러운 남궁세옥의 폭로에 얼굴이 시뻘게지고 있었다·
그때 이갑룡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자네는 이리 예쁘고 현숙한 동생을 왜 망아지라고 부르는 것인가· 아무리 오라비라도 말이 좀 심한 것 같네· 하하·”
“어려서부터 말들과 함께 뛰어노는 걸 좋아해 할아버지께서 망아지라고 부르기 시작하셨는데 그게 그만 내 입에도 붙어 버렸네· 실제로도 망아지 같은 구석이 있고·”
“오라비가 동생을 놀리는 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애칭이었군· 우애 깊은 오누이 사이가 보기 좋네· 하하·”
“갑룡은 너도 일전에 본 기억이 있겠지?”
남궁세옥이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질문의 형식이지만 어서 예의를 갖추라는 은근한 암시였다·
“갑룡 오라버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라버니?”
“세옥 오라버니의 친우이시니 당연히 오라버니라고 불러드려야지요· 저보다 나이도 한참 많으시고요·”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던 이갑룡의 입이 빠르게 좁혀졌다·
이건 옆에서 내가 봐도 남궁소소가 좀 심했다·
이갑룡의 나이가 올해로 서른이고 남궁소소가 스물넷이니 고작 여섯 살 차이 밖에 안 나는데·
남궁세옥이 다시 이종산과 곽석산에게 말했다·
“실은 이 녀석이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결례를 무릅쓰고 잠시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면서 남궁소소를 돌아보았다·
남궁소소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이종산과 곽석산에게 차례대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지난번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소녀가 작은 재주를 믿고 감히 무림의 까마득한 선배님들을 속인 것도 모자라 타 문파인 천룡표국의 표행에까지 함부로 따라갔습니다· 어리석게도 할아버지와 오라버니께 혼이 나고서야 저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자네를 꼬드겨 나를 속여 달라고 부탁한 진짜 범인이 따로 있음을 내 모르지 않네· 오히려 그 일로 자네가 겪은 고초를 내가 무엇으로 보상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먼·”
“국주님····”
“천룡표국은 자네에게 두 번이나 신세를 졌네· 내 이를 잊지 않을걸세· 그리고 혹 표국의 다른 일들이 궁금하거든 언제든 또 찾아주게· 단 이번엔 진짜 구경만일세·”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탓하지 않아줘서 나도 고맙네·”
슬쩍 고개를 들어 이종산을 바라보는 남궁소소의 얼굴에 오늘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그런 남궁소소를 바라보는 이종산의 얼굴에도 온화함이 가득했다·
‘누가 보면 부녀지간인 줄 알겠네·’
예전 일이 매듭 지어진 듯하자 남궁세옥이 품속에서 노란 괴황지 봉투를 내밀었다·
옆에서 그걸 본 곽석산과 손지백이 두 눈을 번쩍였다·
“이게 무엇인가?”
“할아버지께서 국주님께 전해드리라는 초청장입니다· 동생에게 사과도 드릴 겸 직접 찾아뵙고 전해드리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녀석이 용기를 내지 못한 모양입니다· 해서 오늘 뵌 김에 제가 전해드리는 것입니다·”
“왕존께서는 내게 무림의 까마득한 선배이시자 어렸을 적부터 동경하던 분일세· 예전에도 몇 번 뵌 적이 있으나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었지· 내 어찌 그런 분의 초청을 거절하겠나· 일간 시간을 정해 꼭 찾아뵙도록 하겠네·”
“할아버지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남궁세옥은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번째로 보는군· 나는 자네의 첫 번째 형님이신 갑룡의 벗이기도 하니 말을 편하게 놓아도 되겠지?”
묵직하면서도 짧게 끊어지는 음성· 게다가 당당함까지·
좀 전에 이종산을 대할 때의 공손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물론입니다· 선배님·”
“소소를 잘 부탁하네·”
“네?”
“둘이 친우가 된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나는 무림인이라 남녀유별을 따지는 고루한 사람은 아니네· 다만 이 녀석이 여자의 탈을 쓰고 천방지축에다 호기심이 많아 무엇이든 일단 꽂히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버릇이 있네· 고집도 아주 세고·”
확실히 그런 면은 조금 있더군요·
놀란 남궁소소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남궁세옥에게 전음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아마 ‘친구는 무슨 친구요· 그만하시고 빨리 가요·’라고 얘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지혜롭지요·”
“음?”
“저는 남궁 소저처럼 지혜로우면서 굳건한 의지를 가진 후기지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여자는 더더욱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