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나는 표사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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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오해했군· 고작 애송이 표사 하나 잡는데 손까지 쓸 일이 무엇이냐· 대신 이것으로 잡아주마·”
백백곡주가 상의 아래로 손을 쓱 집어넣더니 허리춤에 감아둔 가느다란 쇠사슬을 철겅철겅 풀었다·
이어 쇠사슬의 끄트머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척! 하고 얼음장에 묵직하게 박히는 것은 어른 주먹만 한 쇠뭉치였다·
“유성추 (流星錯)!”
유성추 중에서도 쇠뭉치에 못이 숭숭 박혀 있는 저것은 낭아추였다·
한 손에 추려 잡은 쇠사슬의 길이는 어림잡아도 삼(三) 장·
함부로 들어갔다가 저 쇠뭉치에 머리라도 찍히면 그 자리에서 터지며 즉사할 것이다·
어디 머리뿐이겠나· 배에 맞으면 구멍이 뚫리고 다리에 맞으면 그대로 뼈가 박살날 것이다·
이화원에서 황자충을 상대할 적에도 궁수의 철전을 빌려 쓰기에 당연히 공권박투 즉 맨손 싸움의 고수인 줄 알았다·
한데 유성추라니!
그것도 쇠못이 박힌!
“아니 그런 걸 왜 숨기고 다니십니까?”
“그럼 이 흉한 걸 드러내 놓고 다니리?”
“그건··· 그렇네요·”
“죽을 준비는 되었느냐?”
“선공은 당연히 양보해 주시겠지요?”
쩡!
나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도끼로 얼음을 힘껏 내리찍었다·
도끼날을 백백곡주가 서 있는 방향과 일직선이 되게 해서·
하지만 얼음은 딱 도끼날만큼만 패이고 그 사이로 호숫물이 쑴붕쑴붕 올라왔을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쭈르륵 흘렀다· 이거 뭔가 내가 생각한 것과 그림이 다르다·
순간 내가중수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내 단전에 30년 추정의 공력이 있음도 생각났다·
“이젠 내가 공격해도 되겠지?”
백백곡주가 유성추를 질풍처럼 돌리는 한편 종종걸음을 치며 달려왔다·
나는 천무진경의 운용법에 따라 도끼에 구성의 공력을 담아 다시 한번 힘껏 내리쳤다·
꾸웅 쩌저저적!
번개 자국 같은 금이 삼 장이나 쭉 뻗어 나갔다·
실금이 아니라 완전히 쪼개진 금이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얼음장이 푹 꺼졌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나부터 발아래가 허전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발작적으로 귀영무의 보법을 펼치며 물러났다·
순간 유성추가 날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유성추는 갑자기 튕기듯 되돌아가며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리곤 ‘핑!’소리를 내며 얼음장을 완전히 관통해 들어갔다·
백백곡주는 쇠사슬을 힘껏 잡아당기며 꺼져 가는 얼음장에서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다·
그 바람에 나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삼 장으로 다시 좁혀졌다·
대경실색한 나는 또다시 도끼로 바닥을 힘껏 찍었다·
꾸웅 쩌저저적!
여지없이 얼음장이 깨지며 백백곡주의 신형이 무너졌다·
나는 한발 앞서 옆으로 쓰러지듯 상체를 눕히며 도망쳤다·
척 척!
고작 두 걸음을 옮겼을 때 빗나간 유성추가 또 얼음을 뚫고 들어갔다·
백백곡주는 발목 아래가 흥건하게 젖었으나 이번에도 쇠사슬을 당겨 무사히 빠져 나왔다·
유성추로 내 몸의 일부를 노리고 실패하면 얼음장에 박아 몸을 빼고 또 회수해 내게 쏘아 보내는 세 가지 동작이 마치 하나의 동작처럼 빠르고 민첩했다·
나 역시도 얼음장을 깨고 유성추를 피하고 도망치기를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 했다·
안 그러면 내가 먼저 빠지거나 유성추에 맞아 죽을 테니까·
몇 번 해보니 이것도 요령이 생겼다·
선 자리에서 얼음을 깰 때와 달리 빠르게 달리면서 깨니 빠져나오기가 수월했다·
물론 신발에 못편자를 붙여 귀영무의 보법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이 모든 걸 가능케 했다·
백백곡주에게는 유성추가 그것을 대신했다·
“유성추가 쓸모가 많군요!”
“시끄럽다!”
“꼭 두꺼비 혓바닥 같습니다·”
“닥쳐라 이놈아!”
나는 무공의 격차를 실감했다· 이런 자를 만약 땅 위에서 만나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장담하건대 단 한 방으로 배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능력으로 말미암아 유성추가 날아오는 게 또렷이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 그 어떤 위력적인 무공초식도 허릿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허리를 받쳐주는 것은 단단한 땅을 딛고 선 다리다·
한데 빙판 위인지라 백백곡주의 다리가 불안정한 것이 유성추의 속도를 느리게 하는 첫 번째 이유였다·
거기에 내게 공력이 생기면서 이능력이 조금 더 강해진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공력은 곧 몸놀림의 빠르기와도 직결된다·
그렇다면 백백곡주가 유성추를 박고 쇠사슬을 잡아당기는 순간을 한번 노려볼 만하지 않을까?
펑!
또다시 유성추가 얼음을 파고들었다· 순간 나는 쇠사슬을 잡아당기며 얼음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백백곡주를 향해 냅다 돌진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런 미친놈이!”
변칙적인 공격에 깜짝 놀란 백백곡주가 좌장을 힘차게 뻗어왔다·
손이 닿기도 전에 엄청난 장력이 몰아쳤다·
순간 내 두 발이 나도 모르게 유령처럼 움직였다· 부지불식간에 수백 번 반복해 수련한 귀영무의 보법 중 한 식이 펼친 것이다·
나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장력을 타고 넘었다·
이어 급박하게 방향을 꺾으며 발끝으로 백백곡주의 발목을 슬쩍 걷어찼다·
쿵! 소리와 함께 백백곡주의 신형이 너무나 쉽게 무너져 버렸다·
그 순간 나는 ‘척!’ 하고 오른발을 찍어 멈춘 다음 뒤로 번개처럼 돌아섰다·
동시에 쓰러진 백백곡주를 향해 도끼를 힘차게 내리쳤다·
“죽엇!”
백백곡주는 실로 괴물이었다· 찰나의 순간에도 그는 유성추의 쇠사슬을 양손에 잡고 당기며 자신의 가슴으로 떨어지는 도끼날을 막았다·
한데 그게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내려찍는 도끼의 힘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공력을 무리하게 주입해 당긴 쇠사슬이 그만 ‘깡!’ 하고 끊어져 버린 것이다·
쇠사슬의 희생으로 도끼의 힘을 대부분 죽였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재빨리 대여섯 장 밖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벌떡 일어난 백백곡주는 두 개로 끊어진 유성추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이면 추가 달린 쪽의 길이가 채 반 장이 안 됐다·
더는 유성추로 나를 공격하는 것도 먼 곳의 얼음에 박아서 빠져나오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혓바닥이 잘렸군요·”
“닥쳐라!”
분기탱천한 백백곡주가 쇠뭉치를 내게로 던졌다· 빠르기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머리끝이 쭈뼛 서며 이능력이 자동으로 발동됐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점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도끼를 뻗어 막았다·
꽝!
굉음과 함께 유성추에 맞은 도끼의 옆면이 내 가슴을 때렸다·
막강한 힘을 견디지 못한 나는 무려 삼 장이나 날아간 다음에 떨어졌다·
대포알에 맞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한순간 숨이 턱 막히며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았다·
“쿨럭쿨럭!”
하늘이 한 바퀴 핑 돌고서야 겨우 기침을 하며 숨을 다시 내뱉을 수 있었다·
노인네가 쇠뭉치에 엄청난 공력을 담아 던진 모양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백백곡주가 내게로 걸어오며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몸을 벌떡 뒤집고 일어났다· 이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쇠뭉치부터 발로 툭 차서 얼음 구멍으로 처넣어 버렸다·
“맞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척 척 척 척!
나는 백백곡주와 대여섯 장의 거리를 유지한 채 크게 원을 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 장 간격으로 얼음장을 꽝꽝 깨트렸다·
그때마다 번개 같은 금이 백백곡주를 향해 쩍쩍 뻗어 나갔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백백곡주가 열심히 보법을 펼쳤다·
그러나 짧은 보폭으로 달리는 그가 얼음을 척척 찍으며 질주하는 내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내게서 탈출하기 위해 백백곡주는 사력을 다해 달리기도 하고 방향을 틀기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내가 도끼로 찍어대는 금에 가로막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가 딛고 선 주변의 얼음장이 철퍽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 와중에도 백백곡주는 몸을 스스로 쓰러뜨리며 질풍처럼 뒤집어 도는 것으로 아직 무너지지 않은 쪽 얼음 위를 구르며 타고 올라왔다·
“선배 님 그건 나려타곤이 아닙니까?”
“제발 입 좀 닥쳐라!”
나려타곤 게으른 당나귀가 바닥을 구른다는 뜻이다·
체면을 아는 무림인이라면 절대로 쓰지 않는다는 수법이다·
“그럼 입 닥치고 계속하던 일 하겠습니다·”
꿍 쩌저저적!
고작 한 번을 더 찍었을 뿐이었다· 한데 쩌저적 뻗어 나간 금이 앞서 찍어 놓은 다른 금들과 만났다·
동시에 백백곡주를 둘러싼 주변 삼 장의 얼음이 세 갈래로 쪼개지며 무너졌다·
그 여파는 내게도 미쳤다· 나는 다시 한번 귀영무의 보법을 펼치며 대여섯 장 밖으로 빠르게 물러났다·
“어유 깜짝이야!”
이 지경까지 되자 천하의 백백곡주도 용빼는 재주가 없었다·
그는 무너지는 얼음과 함께 결국 차가운 호숫물 속으로 빠져 버렸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무서운 것이어서 백백곡주는 아직 깨지지 않는 얼음을 찾아 어떻게든 올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계속해서 미끄러지자 지공(指功)을 펼쳐 손가락으로 얼음을 뚫고 박으며 올라오려고 했다·
“더럽게 질기네·”
그때였다·
쒜애액!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상체부터 뒤로 꺾었다·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 화살은 얼음을 타고 끝도 없이 미끄러져 갔다·
“이것들이 진짜!”
고개를 홱 꺾어보니 불과 이십 장도 안 되는 곳에서 궁수와 살수들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살수들은 도검을 뽑아 든 상태였고 궁수는 손을 뒤로 뻗어 전통을 더듬었다·
한데 화살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궁수는 화살 쏘는 걸 포기하고 외쳤다·
“저놈부터 죽여라!”
“어디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시지·”
나는 얼음물에서 빠져나오려는 백백곡주 대신 그들의 주변을 돌며 달렸다·
그리고 삼 장 간격으로 열심히 얼음을 찍어댔다·
대여섯 번쯤 찍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쩌저저정!’하며 반경 수십 장의 얼음이 비명을 질러댔다·
순간 나도 살수들도 그대로 멈추었다·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지며 똥구멍이 간질간질했다·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흐르길 잠시 예의 그 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쩌저정!
“뛰엇!”
나도 모르게 외쳤다· 동시에 나는 빙판을 찍으며 호수 건너편을 향해 질풍처럼 달렸다·
달려가는 와중에도 바닥이 비스듬히 기우는 게 느껴졌다·
등뒤로 흡사 산에서 굴러 내려온 수백 개의 바윗덩어리가 호수로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혼비백산하여 달리길 한참· 소리가 잠잠해진 후에야 비로소 달리길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백 평 넓이의 얼음이 폭삭 주저앉은 가운데 크고 작은 얼음 덩어리들이 수면과 함께 출렁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백백곡주는 물론이고 궁수와 다른 살수들까지 밥알마냥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하마터면 내가 깨고 내가 빠질 뻔했네·”
그때였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호숫가의 갈대숲 쪽에서 들렸다·
잠시 후 이종산이 삼십여 명의 표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약간의 차이를 두고 마차도 한 대 나타났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두꺼운 털옷을 입은 눈부신 용모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충이 부상을 당한 와중에도 왕비를 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왕비도 황자충도 진왕의 생사가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호수 위의 상황을 발견하고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곽석산이 외쳤다·
“밧줄을 준비하라!”
곽석산을 필두로 이십여 명의 표사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호수를 엉금엉금 건너오기 시작했다·
몇몇 표사들은 안장에 걸어둔 밧줄을 챙겨서 왔다·
삐이익!
길게 울리는 호각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엔 마차가 달려간 쪽 호숫가에서도 표사들 십수 명이 우르르 빙판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중이었다·
땅 위에서는 진왕과 공주가 나란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소소와 남궁세옥이 두 사람의 곁을 지키고 있었고·
“어느 쪽으로 간다?”
나는 양쪽을 번갈아 보다 이종산이 도착한 갈대숲 쪽으로 얼음을 척척 찍으며 달려갔다·
호수 가운데가 폭삭 주저앉았기에 한참을 빙 돌아서 가야 했다·
중간에서 곽석산을 만났지만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어긋나며 달렸다·
곽석산이 큰 소리로 내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멀쩡합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 줘야 한다!”
“알겠습니다·”
잠깐 스치며 대화를 나누는데도 모든 표사들의 고개가 나를 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나는 호숫가 갈대숲에 도착했다·
백백곡주와 살수들을 건지러 간 통에 호숫가에는 이종산과 황자충 그리고 몇몇 표두와 표사들만 왕비를 호위하며 남아 있었다·
내가 뭍에 오르자 다들 무슨 괴물 쳐다보듯 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이종산이 물었다· 얼마나 다급한 마음을 안고 달려왔는지 목소리에서 아직도 격정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백백곡의 살수로 위장한 다음 진왕전하께서 타신 마차를 탈취해 얼어붙은 호수로 유인했습니다· 이후 도끼로 얼음을 깨트려 저들을 빠트렸고요·”
“백백곡이라고?”
“지금 총표두님께서 두들겨 패고 계신 노인이 백백곡의 곡주입니다·”
밧줄을 잡고 물 밖으로 나온 백백곡주가 도주할 틈을 만들기 위해 표사 두 명을 기습해 때려눕힌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로한 곽석산에게 잡혀 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서슬에 놀란 궁수와 다른 살수들은 감히 저항할 생각도 못 하고 한쪽에 오들오들 떨며 서 있었다·
사실 백백곡주도 그렇고 다른 살수들도 그렇고 얼음물 속에서 한참 만에 건져진 터라 제대로 싸울래야 싸울 수 있는 몸이 아닐 것이다·
“네가 대체 무슨 수로 백백곡의 곡주를 잡았다는 것이냐?”
나는 대답 대신 신발 바닥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입이 떡 벌어졌다·
그 틈을 타 나는 초조한 기색의 왕비에게 얼른 말했다·
“왕비마마 진왕전하께서는 마차를 타고 무사히 호수를 건너셨습니다· 하니 안심하십시오·”
“그게 사실인가요?”
“소생이 조금 전 호수 한가운데서 보았사온데 진왕전하께서는 공주마마와 함께 호수 건너편에 나란히 서 계십니다·”
“공주도 함께라고요?”
“그렇습니다·”
“다친 곳은요?”
“없습니다·”
“정말 믿어도 되나요?”
워낙 큰일을 겪어서인지 왕비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때 이종산이 함께 온 호위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 천리경 있지?”
“물론입니다· 국주님·”
“왕비마마께 드리게·”
호위장 가뢰압이 품속에서 천리경을 꺼내 왕비에게 전해주었다·
이종산을 호위하면서 항상 척후를 살펴야 하다 보니 저런 귀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탐난다·’
천리경으로 호수 건너편을 살피던 왕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황자충이 물었다·
“마마 어찌 그러십니까?”
“잘생긴 어떤 무사님께서 내가 천리경으로 자신들을 보는 줄 어찌 알고 옆에 계신 전하께 무어라 말을 전했어요· 그러자 전하께서 공주의 손을 꼭 잡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계시고요·”
아마도 남궁세옥일 것이다· 절정의 고수이다 보니 그 먼 곳에서도 여기가 보이는 모양이다·
황자충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화원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살수가 자네였군· 어리바리하게 왜 저러고 있나 했더니만·”
“아깐 돕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그랬다면 전하를 구할 기회가 없었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썼네·
“당주님도요·“
“어깨를 다친 것 같네만·”
“끄떡없습니다· 저보다 당주님은 좀 어떠십니까? 내상을 입은 것 같았습니다만·”
“나도 끄떡없네·”
“다행이군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말없이 웃었다·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어딜?”
“제 임무는 공주마마를 모시고 안전하게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한데 공주마마께서 아직 바깥에 계십니다· 서둘러 호수를 건너간 다음 공주마마와 진왕전하를 모시고 이화원으로 향하겠습니다·”
“자네 말이 옳네· 이화원에서 보세·”
나는 왕비와 황자충 그리고 이종산에게 차례로 인사를 한 후 다시 호수를 가로질러 돌아가려 했다·
빙판 위를 대여섯 장 정도 갔을 때 왕비가 갑자기 나를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뒤를 돌아보니 놀랍게도 왕비가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당황한 이종산과 황자충 등이 황급히 말에서 내려서는 왕비의 좌우를 호위하며 함께 우르르 빙판 위로 올라왔다·
왕비는 내 앞에 서더니 양손을 모으고는 갑자기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황족은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숙여서도 안 되고 숙일 필요도 없다·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허리가 부러지도록 꺾었다·
“마마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옆에서 나보다 더 놀란 황자충이 물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는 황제도 머리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남편과 딸의 목숨을 번갈아 구해준 은인에게 내가 고개 숙이지 못할 게 무엇입니까?”
“마마····”
“진왕가는 이정룡 공자와 천룡표국에 큰 빚을 졌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몇 배로 갚아드릴 날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머리를 숙였다· 이번엔 천룡표국까지 언급한 터라 이종산과 황자충도 나와 함께 세 방향에서 동시에 왕비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전 이만·”
나는 황망함에 도망치듯 호수를 가로질러 달렸다·
멀어져 가는 이정룡을 바라보며 이종산이 말했다·
“내게는 보고 한마디 없군·”
“이 임무의 책임자는 저니까요·”
“나는 국주외다·”
“질투하시는 겁니까?”
“무슨 그런 말을·”
“저야말로 국주님이 부럽습니다·”
“어째서 말이오?
“저런 아들을 두셨으니까요·”
이종산의 시선이 다시 호수로 향했다· 그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져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