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나는 표사다(1) (무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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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에서 취선루로 오는 길은 열 곳이 넘는다·
나는 그중에서도 저잣거리를 가로지르는 길을 택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저잣거리는 사실 말을 타고 달리기가 매우 불편하면서도 위험했다·
대신 가장 빠른 길이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도록 한참을 달렸다·
과연 북적이는 사람들 너머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질주해오는 천룡표국의 표사들이 보였다·
그 숫자가 무려 열 명이나 되었다·
“비키시오!”
“비키시오!”
멀리서부터 두 명의 표사가 번갈아 가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길을 터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과 표사들은 사람을 짓밟거나 들이받는 법이 일절 없었다·
“멈추시오!”
나는 길 한복판으로 뛰어들며 양팔을 크게 벌렸다·
한데도 표사들은 말을 달려오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난 천룡표국의 이정····”
목구멍이 찢어지도록 외쳤지만 열 필의 말들은 양쪽으로 쫙 갈라져서는 쏜살같이 지나쳐 버렸다·
“···룡이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히기도 했지만· 저들은 내가 역용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까맣게 모른다·
아마 질주를 방해하는 미친놈 정도로 여긴 모양이다·
“이런 망할!”
저 말들을 추적해 가기란 불가능했다·
이대로 취선루로 돌아가서 얘기를 전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저들이 도착하는 순간 남궁소소가 다 얘기해 줄 테니까·
결국 나 혼자라도 이화원으로 달려 가야 한다·
하지만 경공도 모르는 내가 십 리를 달려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그 순간 번쩍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역참!”
어느 도시든 역참은 사람의 왕래가 가장 잦은 곳에 설치되어 있다·
지금도 모퉁이를 돌면 바로 역참이 한 곳 나온다·
***
안개에 잠긴 이화원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디에서도 살수의 침입이나 격전의 징후는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담벼락을 타고 넘어 들어가자 상황이 돌변했다·
진왕의 사병과 남경상단의 무사들이 곳곳에 널브려져 있었다·
한데 여전히 격전의 흔적은 없었다· 심지어 쓰러진 사람들 모두 피를 흘리지도 않았다·
재빨리 한 사람의 목에 손을 대보니 맥이 느리긴 했어도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몇 명을 더 살펴보았지만 똑같았다·
마치 전부가 미혼산(迷魂散-수면제)에라도 당한 것처럼 의식만 잃었을 뿐 목숨은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순간 갑자기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의식이 몽롱해지며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뭐지? 내가 한 일이라곤 안개에 잠긴 장원으로 뛰어든 것뿐인데·
“독무(毒霧)!“
강호엔 온갖 기괴한 재주를 부리는 자들이 있다· 그중에는 기문진법에 능하여 안개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거두는 자들도 있다는 얘길 들었다·
이런 안개에 독연(毒煙)을 섞으면 독무가 된다·
독무는 적은 양의 독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오염시켜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오랜 시간 호흡하며 폐에 축적하지 않는 이상 살상력까지 지니긴 어렵다·
때문에 독무는 모르고 당하면 속수무책이지만 미리 알기만 하면 수건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는 것만으로도 한 식경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다·
문제는 나는 몰랐다는 것이다· 게다가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숨까지 가쁘게 몰아쉬었고·
“빌어먹을!”
하늘이 한 바퀴를 핑 도는가 싶더니 그대로 뻣뻣하게 넘어가 버렸다·
쿵! 하고 등줄기에서 짜르르한 고통이 느껴졌다·
“돌겠네·”
그때였다· 갑자기 하단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덩어리가 튀어나와 전신의 혈도를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 불덩어리가 달리는 길이 내가 지난 한 달여 동안 밤마다 죽어라고 수련했던 천무진경의 운기행공로와 똑같았다·
순간 현기증이 마치 햇볕을 만난 안개처럼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불덩어리가 독기를 몰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데 이 불덩어리는 몸의 심연 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는 부적의 그것이 아니었다·
극음의 성질을 지닌 채 몸 전체에 퍼져있는 천지령의 천년진기도 아니었다·
이건 전에는 없던 기운 즉 공력이었다·
전생에서 표행을 하던 중 뱀에 물린 표사를 치료해 주며 가불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술독을 몰아내는 데는 10년의 공력이면 족하지만 뱀독을 몰아내는 데는 최소 20년의 공력이 필요하다·”
작용기전이 다르긴 하지만 독무의 경우 일반적인 뱀독보다 그 독성이 훨씬 약하다·
그러나 운기행공을 통하지 않고 이렇게 즉석에서 불침(不侵)의 수준으로 몰아내려면 최소 30년 이상의 공력은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이화원에 파견된 표사들은 모두 일류급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력은 사실 30년을 넘기 어려웠다·
그런데 고작 한 달을 운기행공한 내게 30년의 공력이 생겼다고?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한가지 퍼뜩 떠오르는 가설이 있기는 하다·
일반적인 무림인들의 경우 먼저 오랜 시간 운기행공을 통해 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진기를 다시 언제든 발출하고 거둘 수 있는 공력으로 변환해 하단전에 축적해야 한다·
단전을 만들고 내공을 수련한다고 함은 바로 이 두 가지 지난한 과정을 동시에 일컫는 말이다·
한데 나는 이미 천지령의 천년진기가 몸 안에 가득 퍼져있었다·
때문에 가장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진기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만약 부적이 조화를 부려 운기행공하는 동안 나를 둘러싼 주변의 시간이 열 배나 느리게 흐르도록 만들었다면?
그러면 한 달 수련한 것만으로도 20년 30년 공력을 쌓는다는 게 말이 된다·
갑자기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한 것은 운기행공을 할 때마다 고도의 집중상태인 삼매경(三昧境)에 빠져들면서 시간이 어느 때보다 느리게 흐른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겨울이 지나고 봄쯤이면 천지령의 천년진기를 전부 백년공력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화조신옹을 압도하는 엄청난 내가고수가 되는 것이다·
온몸에서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깡! 깡! 깡!
검이 맹렬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서쪽에서 울렸다· 진왕의 거처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칼로 옷자락을 잘라내 입과 코를 틀어막은 다음 서둘러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진왕의 거처로 달려가는 동안 곳곳에서 쓰러진 살수들과 표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살수들은 대부분 칼에 맞아 쓰러진 상태였고 표사들은 반대로 독무에 중독되어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독무 속에서 꺼져가는 의식을 붙잡고 기어이 살수들을 한두 명씩은 베고 쓰러진 것이다·
살수들은 하나같이 황건(黃巾)으로 얼굴 전체를 친친 감은 상태였다·
독무로 인한 독기가 폐로 흡입되는 양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조치다·
그들을 모두 지나쳐 마침내 진왕의 거처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진왕이 기거하는 정원에는 독무가 솜뭉치처럼 군데군데 떠돌기는 하나 거의 보이질 않았다·
나는 우선 할수 있는만큼 숨을 죽인 다음 전각의 모퉁이 뒤에 숨어 안쪽을 유심히 살폈다·
황자충이 세 명의 표두들과 함께 진왕이 머무는 전각의 계단 앞에 버티고 서서 결사 항전 중이었다·
황건으로 얼굴을 가린 다섯 명의 살수들은 마지막 방어선을 뚫기 위해 맹공을 퍼붓는 중이었고·
그동안의 격전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듯 바닥에는 무려 일곱 명이나 되는 살수들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모두 방위를 지켜라!”
황자충이 천둥같은 일갈을 내질렀다· 지친 표두들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행히 잘 견뎌 주셨구나·’
남은 살수들의 숫자는 다섯· 모든 방어선을 뚫고 들어 온데다 마지막까지 남은 만큼 가장 고강한 자들일 것이다·
저 중에 한 명만 내가 등을 쪼개줘도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방법은 한 가지 저들로 하여금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전혀 경계를 하지 않도록 하면 된다·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나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잠시 후 표두들에게 당한 것으로 짐작되는 살수 두 명이 쓰러져 있는 곳에 도착했다·
한 놈은 칼에 맞아 옷이 잘려나갔고 한 놈은 주먹에 맞았는지 입으로 피를 토하는 바람에 황건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입으로 피를 토한 놈에게서는 옷을 칼에 맞아 죽은 놈에게서는 황건을 취해 내가 입고 둘렀다·
마지막으로 놈들의 손에 쥐여 있는 칼집을 빼앗아 허리에 차고 칼까지 집어 드니 영락없는 살수로 변신했다·
‘나중에 남궁소소를 졸라서 변장술이라도 좀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다·’
변장을 끝낸 나는 다시 진왕의 거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전각 모퉁이를 지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으로 훌쩍 뛰어드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뻔했다·
‘엇!’
아까는 미처 보지 못한 두 명의 인물이 떡 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숨어서 지켜보았던 전각의 바로 앞 벽 쪽에 서 있는 바람에 미처 발견을 못 한 것이다·
‘이런 씨발!’
하나는 초로의 노인이었고 하나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여자는 북방의 유목민들처럼 가죽으로 만든 합당고(合襠褲-좁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바람에 몸의 굴곡이 훤히 드러나서 안 그래도 아름다운 용모가 더욱 돋보였다·
그리고 화살이 가득 든 전통(箭筒)에 거무튀튀한 장궁(長弓)을 들고 있었다·
‘그때 그 궁사!’
진왕이 항주에 도착한 날 내게 무시무시한 화살을 쏘았던 바로 그 궁사였다·
‘여자였을 줄이야!’
초로인은 키가 좀 크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그는 뒷짐을 쥔 채 살수들과 격전을 벌이는 황룡당주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었다·
한데도 그 모습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저 노인이 모든 일을 주관한 두령임을 직감했다·
내가 건물 뒤쪽에서 갑자기 등장하자 궁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를 향했다·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나는 얼른 고개를 절도있게 숙였다·
‘뒤쪽은 모두 정리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처럼 비치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자 궁사의 시선이 가만히 나를 떠나 다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휴우 큰일 날 뻔했네·’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같이 끼어들어서 황룡당주와 표두들을 공격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슬그머니 끼어드는 척하다가 살수 한 놈의 등을 와락 쪼갤 수도 없다·
그렇게 하면 한 명을 더 죽일 수는 있으나 전세를 바꿀 수는 없다·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한 뭐라도 해야 한다·
계속 이렇게 멍청하게 있다가는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펑!
저 멀리 동쪽 하늘에서 굉음이 울렸다· 재빨리 시선을 던져보니 신호용 폭죽이 터져 불꽃을 뿌려대고 있었다·
신호용 폭죽은 문파마다 불꽃이 터지는 모양이 다르다·
저건 내게 너무나 익숙한 그리고 나도 지금 하나 품속에 가지고 있는 천룡표국의 신호용 폭죽이었다·
“국주님께서 오고 계시다!”
황자충이 또 사자후를 내질렀다· 지쳐가던 표두들의 얼굴에 확실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반대로 궁수와 초로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때 궁사가 전통에서 화살을 한때 뽑아 재더니 혼전 중인 황자충을 향해 쏘아버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헛!’
한데 황자충의 몸 어디에도 화살은 박히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혼자서 노련한 살수 셋을 상대로 팽팽하게 싸우고 있었다·
화살은 궁수의 바로 옆에 있던 초로인의 쭉 뻗은 손에 잡혀 있었다·
궁수가 화살을 쏘는 순간 그걸 잡아챈 것이다·
‘미친!’
나는 순간적으로 전의가 상실되는 것 같았다·
저 궁수의 활 솜씨가 어떤지는 익히 알고 있다·
그걸 옆에서 낚아채 버리는 신기라니·
‘대체 얼마나 고수이기에····’
초로인은 달랑 화살 하나를 들고서 갑자기 격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황자충이 허공에 만들어 내는 칼의 그물 속에 슬쩍 찔러 넣었다·
순간 황자충의 칼과 초로인의 가느다란 화살이 맹렬하게 격돌했다·
땅! 따당! 땅땅땅!
‘철전(鐵箭)!’
놀랍게도 궁수가 쏜 화살은 강철을 두들겨 만든 철전이었다·
철전은 사실상 작은 창이라고 보면 된다·
‘세상에 저걸 활로 쏜다고?’
싸움의 양상은 황자충의 파상적인 칼질을 초로인이 철전으로 막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한데도 황자충은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반면 노인은 느긋했다·
지칠 대로 지친 황자충에게 초로인은 감당하기 힘든 고수였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초로인은 황자충의 칼이 어디로 어떻게 들어올 지를 매번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까가가강! 쩡!
여느 때와 다른 쇳소리가 울리더니 황자충의 칼이 손잡이 바로 위에서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황자충의 가슴팍에 정확히 꽂히는 초로인의 섬전과도 같은 오른발·
펑!
“허억!”
황자충은 삼 장이나 날아가 석등에 등을 부딪친 후 주저앉았다·
입으로 피를 한 모금이나 토해내는 것이 아무래도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당주님!”
“당주님!”
“당주님!”
세 명의 표두들이 다른 살수들과 혼전 중에도 황자충을 소리쳐 불렀다·
“모두 자리를 지켜라!”
그러면서 황자충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품속에서 단검 두 자루를 꺼내 초로인을 향해 격투의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금의위 출신의 고수가 망나니로 살고 있을 줄은 몰랐군· 기왕 망나니로 살 바에야 당신이 대두령이었으면 좋겠군·”
나는 그제야 초로인이 황자충의 초식을 모두 꿰뚫고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초로인은 말 한마디 없이 황자충을 향해 다가갔다·
더이상은 무리다·
다시 격돌하면 황자충은 초로인에게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나라도 칼을 들고 뛰어들려는 순간·
“멈춰라!”
우렁찬 외침과 함께 나타난 것은 진왕이었다·
그는 전각과 이어진 계단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하얗고 부슬부슬한 모피 옷이 오늘따라 유난히 고급스러워 보인다·
표두들이 살수들의 칼을 떨치고 계단 위쪽으로 일 장이나 물러나면서 싸움이 한순간 중단되었다·
진왕이 황자충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전하·”
진왕이 다시 초로인에게 말했다·
“누가 너희를 보냈는지 잘 알고 있다· 물건은 오래전 북경의 비처에 숨겨두었고 그 장소 역시 나만 알고 있다· 너희가 원하는 건 공주와 왕비의 목숨을 볼모로 내 입을 열게 하는 것이겠지?”
진왕은 잠시 사이를 두며 초로인을 눈으로 꾹 눌렀다·
무공이라고는 일초반식도 모르는 그였지만 대신 어떤 고수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위엄이 있었다·
“한데 나는 왕비를 지키고 싶고 너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는 듯하구나·”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내가 인질로 따라갈 테니 더는 애꿎은 사람을 희생시키지 말라· 하면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도 실패했다고는 말 못 할 것이다·”
그러면서 진왕은 황자충을 돌아보며 말했다·
“황 노야· 왕비를 지켜주겠소?”
“전하!”
“대답을 해야 내가 편히 갈 게 아니오·”
“신 황자충 목숨을 걸고 왕비마마를 지키겠습니다·”
말을 하는 황자충의 어깨가 분노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진왕은 지금 자신을 희생해 아끼는 왕비를 지키려는 것이다·
기왕 왕비를 지킬 바에야 황자충과 표두들의 목숨도 구해주고·
“날씨가 춥다· 어서 마차를 가져오너라·”
진왕이 대답도 듣지 않고 초로인에게 명령했다· 초로인은 표두들과 대치 중인 살수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탈 말도 함께 끌고와라·”
가장 말석으로 보이는 살수 한 명이 마구간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어 초로인은 궁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진왕과 함께 먼저 갈 테니 월주는 수하들을 이끌고 시체들을 모두 처리한 후 따라서 오게·”
“복명!”
죽은 살수들을 말하는 모양이다· 십중팔구 화골산(化骨散)을 뿌려 시체를 녹여 없애려는 것이다· 일종의 증거인멸이었다·
‘네 놈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다·’
궁수와 나머지 살수들이 우르르 장원 쪽으로 달려갔다·
나도 그들의 뒤를 한 박자 늦게 따라갔다· 그러나 전각의 마당을 빠져나가는 순간 방향을 바꿔 곧장 마구간으로 달렸다·
마구간에도 독무가 퍼졌는지 말이 절반이나 쓰러져 있었다·
앞서 뛰어온 살수는 가장 튼튼해 보이는 세 마리를 골라 두 마리는 쌍륜마차에 연결하고 한 마리는 마차의 뒤에 묶었다·
한데 그 마차가 하필이면 두촌 포구에서 이화원까지 우리가 왕비와 공주를 태우고 왔던 바로 그 철갑마차였다·
나는 놈에게 다급하게 다가가며 외쳤다·
“이것 좀 보십시오!”
“뭔데 그래?”
뻑!
“몽둥이다· 새끼야·”
머리통을 정통으로 맞은 살수는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놈의 키와 덩치가 나와 비슷하다는 건 행운이었다·
놈의 겉옷을 전부 벗겨 내가 입었다·
여기에 차가운 바람에 미리 대비하려는 것처럼 황건으로 눈만 빼놓고는 머리까지 전부 친친 감고 보니 영락없는 놈이었다·
변장을 끝낸 다음엔 마구간 한쪽 구석에 각종 연장들을 놓아둔 곳으로 달려갔다·
말에게 줄 콩도 삶고 편자도 박고 간단하게 마구도 수리하는 이곳은 대형 장원의 마구간이라면 어디에나 붙어 있는 일종의 정비고였다·
나는 정비고에서 얇은 편자 두 개와 가죽을 고정할 때 쓰는 손톱만 한 못 그리고 얇은 가죽끈들을 챙겨 품속에 넣었다·
겨울이라 두꺼운 옷을 잔뜩 껴입었더니 웬만큼 넣어도 티가 안 났다·
이어 솥뚜껑도 하나 집어다 마차 안에다 휙 던져 넣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가득 쌓인 장작더미 사이로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커다란 도끼 한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딱 좋군·”
마지막으로 도끼를 집어다 마차 안에 던져 넣은 후 짚으로 덮었다·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끌고 진왕의 거처로 왔더니 초로인 혼자서 황룡당주를 비롯한 세 명의 표두들과 대치 중이었다·
한데도 전혀 밀린다는 느낌이 없었다· 다행히 궁사와 다른 살수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빨리 전하를 모셔라·”
나는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진왕을 향해 문을 열어주었다·
진왕은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 어느새 전각의 회랑까지 뛰쳐 나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왕비를 잠시 눈에 담았다·
그러다 그녀의 앞을 막아선 황자충과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해준 표두 셋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고마웠소·”
“전하!”
격정을 참지 못하고 뛰어 내려오는 왕비를 표두들이 막아섰다·
마차에 올라타 떠나는 진왕을 향해 황자충이 무릎을 꿇고 외쳤다·
“신이 반드시 모시러 가겠습니다!”
“이럇!”
이히히힝!
진왕을 태운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부석에 앉아서 말 두 마리를 마치 수족처럼 능숙하게 부렸다·
전생에서 절름발이였던 내가 30년 동안 쟁자수로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거였다·
나는 신체적 약점 때문에 표행 중에도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모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동료 쟁자수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었다· 한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 마차를 모는 건 나의 특기가 되어 버렸다·
나는 절름발이 쟁자수에서 글을 아는 쟁자수로 글을 아는 쟁자수에서 다시 마차를 귀신처럼 모는 쟁자수로 사람들에게 불렀다·
절름발이라는 약점을 강점으로 극복한 것이다·
‘진왕은 이제 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