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공주의 호위무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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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유생으로 역용을 하자고요? 게다가 공주마마는 남자로요? 말도 안 돼· 도대체 누가 그런 발상을 한 거죠?”
“황룡당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소·”
“황룡당주님은 무림의 경험도 많으실 텐데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대화 중에 즉흥적으로 나온 말씀이었을 것이오·”
“그래서 정룡 공자 생각은 어떤데요?”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소·”
유생으로 역용 하자는 말이 그렇게 이상한가?
“그건 그렇고· 여기 모인 분들이 전부인가요?”
“그렇소· 다들 인사들 하시오·”
비도술(飛刀) 비조(飛爪) 철편(鐵鞭) 연검(軟劒)을 잘 다룬다는 표사 네 명이 남궁소소에게 자신들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인사한 연검의 고수는 다름 아닌 가불염이었다·
연검은 허리춤에 감아 두었다가 급할 때 펼쳐 쓰는 낭창낭창한 검으로 사실 가불염의 성명병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가불염이라는 인간 자체가 필요해서 내가 고집해 끼워 넣었다·
“표사는 총 다섯 분이라고 들었는데요?”
“나도 함께 갈 거요·”
“정룡 공자도요?”
“공주마마께서 나도 꼭 함께 가야 한다고 지목을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소· 사실 항주의 요릿집들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공주마마께서 지목을 하셨다고요?”
“그렇소·”
그건 그렇고 내가 조장인데 왜 자꾸 남궁소소가 질문을 하지?
나는 또 왜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하고 있고·
“좋아요· 그럼 이제 제 소개를 하겠어요· 모두 아시다시피 전 공주마마와 여러분의 역용과 변장을 책임진 남궁소소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양진풍이라 불러 주세요· 공주마마께도 그렇게 소개할 거고요·”
“알겠소·”
“그런데 여러분의 몸은 누가 봐도 유생의 그것이 아니에요· 험상궂은 얼굴은 역용으로 어찌어찌 꾸민다고 해도 떡 벌어진 어깨며 대들보 같은 허벅지를 무슨 수로 감출 수 있겠어요?”
표사들이 자신들의 몸뚱어리를 살펴보다 죄지은 사람들처럼 움츠러들었다·
“항주에 차를 사러 온 소상인으로 위장하겠어요· 공주마마는 성별까지 바꾸진 않고 단지 지금보다 열 살 정도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단주로 만들 겁니다· 무리한 역용은 오히려 고수의 눈에 띄기 십상이에요· 나머지 표사들은 전부 단주를 따르는 짐꾼으로 위장해드리고요·”
“좋은 생각이오·”
“정룡 공자는 호위무사예요·”
“다른 사람은 다 짐꾼인데 왜 나는 호위무사요?”
“호위무사가 한 명은 있어야 자연스러워요·”
“그런데 그게 왜 나냐는 거요·”
“칼 든 모습이 제일 어색하고 삼류 같아 보여요· 코딱지만한 상단주가 일류고수를 호위무사로 거느리면 이상하지 않겠어요? 반면에 다른 표사들은 칼을 들면 고수티가 확 나서 안 돼요·”
“···!”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보던 특무조 여섯은 자정이 되자 미리 정해놓은 으슥한 산속 관제묘에서 만났다·
그리고 밤새 남궁소소의 도움을 받아 상인으로 역용과 변복을 했다·
잠깐 눈을 붙인 후 새벽이 되자 남경상단주가 운영하는 차상점으로 갔다·
그곳에는 밤새 황자충이 표사로 위장해 빼돌려 놓은 공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단주님을 모시게 될 행수 양진풍입니다·”
“단주라고요?”
“이제부터 공주마마께서는 소주의 청화다상(靑話茶商)이라는 상단에서 차를 사러 온 차상인입니다·”
“유생보다 훨씬 낫군요·”
“단주라는 말을 입에 붙이기 위해 지금부터 공주마마라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고요· 단주님께서도 절 부르실 때 양 행수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더 궁금한 것이 있으신가요?”
“이 공자님의 친우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하더니 친구분도 정말 잘 생기셨네요· 무슨 말씀인지 다 이해했어요· 이제 역용을 시작해주세요· 빨리 나가고 싶어요·”
알아서 의자에 착 앉는 공주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양진풍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양진풍이 공주에게 물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마치 오늘이 제 생일인 것 같아요· 여러분은 저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오신 분들이고요· 그래서 다들 정말 고마워요·”
그러면서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담는다·
평생을 공주로 살아온 사람의 위엄과 여염집 방년 여자아이의 풋풋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솔직히 말해 아무리 돈벌이로 하는 일이지만 저 어린 여자아이의 나들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고생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한데 잔뜩 상기된 얼굴을 보자니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나라면 평생 저택에 갇혀 지내야 하는 공주 따위는 억만금을 줘도 싫을 것 같았다·
10년 만에 찾아온 맹추위라고 했다· 서호에 얼음이 얼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서 서호가 어는 걸 처음 봤다고도 했다·
추위를 피해 항주로 왔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한데도 올해 스물일곱 살의 청화다상 상단주 임청화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부슬부슬한 여우털목도리에 폭 싸여 있는 얼굴에서 좀처럼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양 행수 어디를 먼저 갈까요?”
“이 호위에게 한번 하문해 보시지요· 그가 소싯적에 항주 유흥가를 제법 섭렵했다고 하니 요릿집도 잘 알 것입니다·”
“이 호위 항주에는 어떤 요릿집이 유명하죠?”
“세상 그 어떤 산해진미도 배가 부르면 의미가 없는 법이죠· 일단 항주의 명물인 악왕묘 단교 뇌봉탑 영은사 구경부터 먼저 하시지요· 그런 다음 서호가 바라다보이는 취선루(醉仙樓)에서 교자(餃子-만두)에 소홍주 한 잔씩을 곁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교자라고요?”
“그렇습니다·”
“그건 너무 흔한 음식 아닌가요?”
“아무리 맛있어도 교자보다 못하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본래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깃드는 법입니다· 단주님·”
“교자는 나도 이미 잘 만드는데····”
“물론 단주님께서 만드신 교자도 일품이지요· 하지만 백 리만 가도 물맛이 바뀐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천 리 밖에 있는 교자의 맛은 당연히 크게 다를 것입니다·”
그래도 썩 내키지 않는지 단주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네가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내가 물으려는 순간·
“좋아요· 이 호위가 그렇게까지 추천하시는 거라면 점심은 가볍게 교자로 시작하도록 하죠·”
모든 여행이 그렇지만 절대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호기심 많은 청화상단주의 발걸음을 예정대로 재촉하기에 항주는 볼거리가 너무 많은 도시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길거리 마희단(馬戱團)의 무술공연이었다·
각각의 기예를 지닌 십여 명의 무인들이 나와서 차례로 자신들의 재주를 펼쳤는데 이건 솔직히 무림의 고수가 와서 봐도 재밌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자나 되는 칼을 입속에 넣고 커다란 망치로 머리 위에 올려놓은 벽돌을 깨고 펄펄 끓는 가마솥 속에 구경꾼들이 동전을 던져 주면 그걸 맨손으로 건져내는 묘기가 재밌지 않으면 도대체 뭐가 재밌겠나·
그중에서도 청화상단주가 가장 좋아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커다란 뱀이었다·
마희단에 한 명씩은 꼭 끼어있는 약 장수가 동정호에서 잡은 이무기라며 두꺼운 이불에 싸놓고는 약팔이를 하는 내내 이따금씩 보여 주는데 몸통이 어른 팔뚝만 했다·
남만에서 흔하게 보이는 대망사(大蟒蛇)를 잡아다 이무기라고 사기 치는 것이다·
이 추운 날 저 뱀이 얼어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취선루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서호에서도 가장 한갓진 곳에 위치한 작은 반점이었다·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고 낡은 단층에다 탁자라고 해봐야 띄엄띄엄 놓아둔 열 개가 전부였다·
아니나 다를까 안으로 들어가자 한창 점심때인데도 반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열서너 살가량의 어린 점소이가 반색을 하며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가 이 호위가 말한 취선루인가요?”
“그렇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하군요·”
실망한 티가 팍팍 난다· 심지어 양 행수조차도 일부러 사람들 눈에 안 띄지 않게 하려고 이런 곳으로 데려온 줄 알고 눈을 찡긋해 보였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10년 후 이 집은 서호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교자 전문 반점이 된다·
지금은 주인이 바뀐 지 얼마 안 돼 아직 솜씨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
나는 단주에게 교자란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더불어 자신이 만든 교자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도 깨닫게 해주고·
나와 단주와 양 행수가 먼저 벽 쪽에 있는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짐꾼들은 가불염의 주도 아래 차가 잔뜩 들어 있는 등짐을 내려놓고 그다음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뒤쪽으로는 벽이 앞쪽으로는 짐꾼 네 명이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척척이다· 이래서 내가 가불염을 어떻게든 데리고 다니는 거다·
“뭘로 드릴까요?”
“교자랑 소홍주로 쫙 깔아줘·”
“교자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다섯 가지 다 골고루 가져와·”
“죄송합니다· 손님· 오늘은 교자가 세 가지만 됩니다· 식재료가 그것밖에 준비가 안 되어서요·”
“그럼 그거라도 갖다 줘· 골고루 먹을 수 있도록 한판마다 이것저것 섞어가지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물론이죠·”
어린놈이 말투 한번 어른스럽다· 참고로 이 아이는 반점의 주인이자 숙수인 왕 씨의 외동아들이다·
“잠깐·”
돌아서 가려는 점소이를 단주가 붙잡았다· 그러고는 전낭에서 동전 열 냥을 꺼내 점소이의 두 손에 쥐여 주었다·
“손님 계산은 후불입니다·”
“이건 그냥 주는 거야·”
“왜요?”
“내 호위무사가 까다로운 부탁을 했으니까·”
뭘 그 정도 가지고 까다로운 부탁까지나· 점소이의 입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양 행수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단주를 곁눈질했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교자 여섯 판이 나왔다·
교자가 먹음직스러워 봐야 교자다· 단주를 비롯해 모두가 별 감흥 없이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고 씹었다· 그리고····
“···!”
“···!”
“···!”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잠시 그대로 씹기를 멈추었다· 생전 처음 보는 교자의 맛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게 정말 교자인가요?”
“어떻습니까? 단주님·”
“쫄깃한 피가 갈라지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육즙의 맛과 향이 일품이에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교자는 처음 먹어봐요·”
“그렇습니까?”
“이 호위가 이리로 가자고 고집을 피운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제가 고집을 피웠었나요?”
“내가 세 번이나 되물었는데도 처음에 했던 주장을 꺾지 않았잖아요· 그런 사람은 처음이에요·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는 빼고요·”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상대는 공주다· 어리고 연해 보여도 그녀의 한마디면 진왕이 움직이고 진왕이 움직이면 자칫 피바람이 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공주를 움직여 피바람을 돈벼락으로 바꿀 것이다· 그래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이고·
“솔직히 좀 멋있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 양 행수가 교자를 먹다 말고 아까보다 훨씬 의아한 표정으로 단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단주는 순진한 척 한마디를 툭 뱉어 놓고는 교자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한 사람당 교자를 세 판씩 시켜서 먹었다·
양 행수와 단주도 뱃속 어디에 그런 공간이 있는지 남자들과 똑같이 세 판을 먹었다· 먹성이 저리 좋을 수가·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숙수가 수건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먹을만 하셨습니까”
“네 정말 맛있습니다· 매일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나요?”
“신선한 재료를 쓰는 것 외엔 특별히····”
질문을 한 단주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점소이에게 동전 열 냥으로 미리 기름칠을 해 놓은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지만 눈치 없는 숙수는 겸손만 떨 뿐이었다· 공주의 욕망을 아는 내가 점잖게 나섰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차 상인입니다· 다른 곳에 반점을 낼 것도 아니고 상단에서 이따금 만들어 먹으려는 것이니 알려줘도 좋은 선에서 한두 가지만 귀띔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뭘 숨기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정말 비법이랄 게 딱히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듣고 싶으시다면····”
“네· 듣고 싶어요·”
“교자의 맛은 소가 절대적으로 좌우합니다· 특히 돼지고기가 들어갈 때는 신선한 고기를 볶거나 찌는 과정에서 누린내 같은 잡내를 잡는 것이 중요하지요·”
숙수는 그 외에도 몇 가지를 더 설명해주었지만 목까지 쭉 빼고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은 단주뿐이었다·
“그런데 차상인들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만?”
뜬금없이 질문에 내가 끼어들었다·
“손님들께 이런 말씀을 드린다는 게 좀 그렇습니다만 거기 짐꾼들은 한 달에 얼마씩이나 받을 수 있나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손님이 너무 없어서 아무래도 반점을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당장 일을 쉴 수가 없는 형편인지라····”
이건 전생과 다른 전개였다· 초창기부터 단골이어서 잘 아는데 이 반점이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적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왜요?”
“식재료를 항상 신선한 것들로만 갖다 놓는데 손님이 없어서 걸핏하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남는 게 없어서····”
“여긴 길목이 아니어서 손님이라고는 어쩌다 이곳까지 들어온 서호의 유람객들이 전부일 겁니다· 다시 말해 근처에 살며 끼니를 때우기 위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곳이 아니라는 거죠·”
쓸데없이 자세한 내 분석에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책이 없는 분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걸 아는지 숙수도 말이 없다·
“혹시 반점을 접으려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까?”
“그것이····”
“서호삼견(西湖三犬) 때문이에요!”
어린 점소이가 버럭 외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
“서호삼견의 수하들이 허구한 날 찾아와서 돈도 안 내고 교자를 배 터지게 처먹고 가요· 얼마나 많이 처먹는지 한번 왔다 가면 기본이 교자 서른 판이에요· 흐흐억·”
점소이가 말을 하다가 그냥 울음을 터뜨려 버린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고작 열서너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저런 험한 소리까지 하며 울음을 터뜨릴까·
서호삼견은 나도 좀 안다·
서호 주변에 성업 중인 주루와 기루는 무려 수백 곳을 헤아린다·
먹을 것이 워낙 많다 보니 대형 흑도방파 네 곳이 서호 주변의 유흥가를 분할해 관리하고 있었다·
그중 서쪽을 먹은 곳이 서쌍교방(西雙鮫幇)이라는 곳이었다·
서호삼견은 바로 그 서쌍교방의 칼잡이들이었고·
싼 티 나는 이름과 달리 이놈들은 아무 곳에나 찾아가 협박하고 돈을 뺏는 그런 삼류 주먹패 따위가 아니었다·
제법 크게 놀고 큰 싸움판에서도 간간이 이름이 흘러나오는 나름 항주 흑도들 사이에서는 거물급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놈들의 수하들은 그렇지 않았다· 밑바닥에서 머릿수를 채우는 하급의 흑도들은 자신들의 구역에서 무언가를 처먹을 때 좀처럼 돈을 내는 법이 없었다·
취선루는 수익이 너무 적다 보니 그 정도로 심각한 타격이 되는 것이고·
아마 서호삼견은 이런 사정까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보아하니 그래도 영세한 줄은 알아서 아직은 보호세도 받지 않는 눈치고·
한데 문제는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올가을에 이미 죽었어야 할 서호삼견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거다· 이유는 바로 떠올랐다·
‘화조신옹····’
전생에서 화조신옹은 천지령을 섭취한 후 변복을 한 채 자신이 살던 십만대산으로 향한다·
그 여정 중에 잠시 항주를 거쳐 가는데 그때 시비가 붙어 서호삼견을 비롯해 서쌍교방의 흑도 스무 명을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죽여 버린 후 홀연히 떠난다·
한데 그 화조신옹을 내가 죽여버렸으니 이후 흑도와 백도를 포함해 화조신옹에게 죽었어야 할 사람들 전부가 살아 있는 것이다·
‘이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전개인데·’
그때였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험상궂은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하나같이 칼이며 검 따위를 허리에 찼는데 무기까지 언급할 것 없이 얼굴만 봐도 피 냄새가 철철 났다·
점소이와 숙수가 하얗게 질렸다· 서호삼견이 수하들을 이끌고 온 것이다·
내가 화조신옹을 죽이고 화조신옹에게 죽었어야 할 놈들을 내가 여기서 다시 만난 게 순전히 우연일까?
‘아 찝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