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호원표사(3)
——————–
안개가 내려앉은 겨울 강은 고즈넉했다·
나룻배 한 척이 얼음을 쩍쩍 깨트리며 도강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힘에 부치는지 채 십 장도 나아가지 못 하고 돌아와 버렸다·
나는 황자충과 함께 포구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황룡당의 표사 다섯 명이 대기 중이었다·
옆에는 튼튼한 마차와 말도 충분히 준비해 놓았다·
“오늘은 정말 한겨울이라도 된 것 같군· 어제만 해도 출렁이던 강물이 하루 사이에 이렇게 얼어버릴 줄이야·”
“초겨울 날씨는 조석으로 달라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왕께서 정말 이 포구에서 하선하실 것 같은가? 항상 배를 대는 포구는 여기서 십 리 정도 아래에 있는 양촌(陽村) 포구이네만·”
“양촌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곳의 강물은 볕이 좋아 해마다 사흘 정도 늦게 업니다· 한데 보시다시피 밤사이 얼음은 여기서부터 이미 얼어버려 배를 더 운항하기가 어려운 처지고요·”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정말 대단한 통찰력일세· 자네를 칭찬하면서 새삼스럽다는 말을 하게 될 날이 오다니· 허허·”
“밤사이 기온이 너무 떨어져 새벽에 한 바퀴 돌아 보았을 뿐입니다· 통찰력이라뇨· 가당치 않습니다·”
“그럴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통찰력이지· 금룡표국과 남경상단은 그것도 모르고 지금 양촌포구에서 눈이 빠져라 대기 중이라고 하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여기서 이화원까지는 불과 십 리· 아무리 천천히 가도 한 식경 이상은 끌지 못할 겁니다· 그 안에 진왕과 왕비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한 식경 안에 무슨 수로 차라리 자객이라도 나타나서 우리가 멋지게 퇴치해 준다면 또 모를까·”
“나타날 수도 있지요·”
“혹시 무얼 알고 하는 소린가?”
“예?”
“요즘 장로회의에서 자네가 하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아무래도 따로 정보를 받는 곳이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그렇게 보이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귀한 정보들을 훤히 꿰고 있으니 어찌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나? 처음엔 총표두님을 의심했었네· 한데 청룡당주는 아무래도 자네가 하오문과 손을 잡은 것 같다더군·”
“하오문이라고요?”
“자네가 근 십 년을 하오문의 터전에서 그들과 부대끼며 살았기 때문이네· 자네의 신분과 숨겨둔 능력을 생각해 보면 끈을 만들어 두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지·”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죽은 이정룡은 기루와 노름방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장삼의 말을 들어보면 다른 부잣집 공자들처럼 진상짓을 부리지 않아 기녀들과 어깨들도 아주 좋아했단다·
미래지식을 아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때가 많다·
그럴 때 하오문의 손을 빌릴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다·
시간이 나면 하오문과 접촉해 봐야겠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줄 알았던 이정룡의 인맥을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청룡당주 유지평이 이렇게 사람을 도와주는구나·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일전에 북경에 갔을 때 황실 돌아가는 사정이 복잡하여 왕야들께서 몸을 사린다고 하더군요· 그때 진왕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도 들었습니다·”
“이것 보라지· 분명히 누군가 있다니까·”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한 식경은 너무 짧네· 가장 좋은 건 왕비를 구워삶는 것인데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먼저 하문하시기 전에는 함부로 말을 붙여볼 수가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진왕께서 이 포구에 내리시기만 해도 금룡표국과 달리 작은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우리에게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알았네· 나도 최대한 애를 써보겠네·”
사실 자객들은 진짜 나타난다· 심지어 그들은 진왕이 양촌포구가 아닌 이곳에서 하선할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짐작하건대 거사 날짜를 정해놓고 계속 동선을 추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이 어디에서 몇 명이 나타나는 지까지 알고 있다·
다만 이걸 황자충에게는 자세히 말해줄 수가 없다·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해줄 도리도 없을뿐더러 자칫하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생에서는 진왕의 사병들이 절반 정도 목숨을 잃는 끝에 자객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이번 생에서는 아까운 희생을 최대한으로 줄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천룡표국이라는 변수로 말미암아 자객들이 작전을 취소해서도 안 된다·
해서 일부러 다섯 명밖에 데려오지 않았다·
대신 전부 일류고수들인 표두들로 하여금 평범한 표사 복장으로 갈아입게 했다·
표두 한 명이 표사 세 명과 맞먹을 정도의 무력을 지녔으니 실제로는 열다섯 명 정도의 표사들을 이끌고 온 셈이었다·
거기다 황자충이라는 절정의 고수가 있다· 일초반식도 모르지만 힘은 엄청나게 센 그러나 조절이 전혀 안 되는 나도 있고·
“배가 오고 있습니다·”
척후를 살피러 갔던 가불염이 돌아와 말했다·
표두들을 전부 황룡당에서 차출해 오면서도 나는 가불염을 끼워 넣었다·
계획의 다소 세밀한 부분까지도 사전에 알고 나를 보조해줄 그러면서도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쩍쩍 얼음 깨는 소리와 함께 두 척의 배가 안개를 뚫고 나타났다·
배가 워낙 큰 데다 얼음까지 깨트리며 오다 보니 속도가 말도 못하게 느렸다·
예상했던 대로 배는 포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다 십여 장을 앞두고 갑자기 뚝 멈추었다·
선수의 갑판으로 갑옷 차림에 창검을 든 무인들이 우르르 나타나 우리 쪽을 살폈다·
진왕의 사병들이었다· 난데없이 도검으로 무장한 무인 대여섯 명이 말을 탄 채 포구에 버티고 있으니 경계를 하는 것이다·
“대낮에 어떤 자들이 칼을 들고 서 있는가!”
사병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큰 소리로 물었다·
“이 몸은 항주 천룡표국에서 온 황자충이라고 하오· 왕야께 옛 친구가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시오·”
친구라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저 조금 아는 사이일 줄 알았더니 친구라는 말을 쓸 정도로 가까웠다고?
“어떻게 된 겁니까?”
“큰 기대 말게· 오래전 금의위에 있을 당시 진왕께서 머물던 궁을 일 년 정도 호위한 적 있네· 그때 당신을 벗처럼 대하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잠시 객기를 부려본 것이네·”
어쩌면 진왕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오늘의 운수를 점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잠시 후 앞쪽에 있는 배의 선실에서 부슬부슬한 모피옷을 입은 사십 줄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체구에 못생긴 얼굴 하지만 황족답게 귀티가 좔좔 흘렀다· 드디어 진왕이 등장한 것이다·
“황 노야가 나를 보러 왔다고?”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이런 진짜 황 노야잖소·”
“신 황자충 진왕 전하를 뵙습니다!”
황자충은 그 자리에서 무릎까지 꿇으며 넙죽 엎드리는 것으로 황족에 대한 예를 갖췄다·
“진왕 전하를 뵙습니다!”
나와 표사들도 우렁차게 외치며 절을 올렸다·
무장을 하고 나타난 무리가 적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자 선실에서 두 명의 여자가 더 나타났다·
두 여자 모두 두꺼운 모피옷에 눈처럼 하얀 여우털로 목을 감쌌는데 복장도 복장이지만 용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옛친구를 가까이서 봐야겠다· 빨리 배를 대라!”
잠시 후 배가 포구에 닿았고 진왕의 사병 사십여 명이 장수의 인솔하에 우르르 내렸다·
뒤를 이어 진왕과 두 명의 여자가 차례로 내렸다·
뒤쪽의 표두들 사이에서 ‘아아!’ 하는 신음이 미세하게 새어 나왔다·
가까이에서 본 두 여자는 용모는 충격적이었다·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첫 번째 여자는 얼굴이 백옥처럼 투명한 데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저 여자에 비하면 조영영과 남궁소소는 야광주 앞에서 얼쩡대는 반딧불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두 번째 여자는 첫 번째 여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새털같은 귀밑머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포구 전체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졌다·
정적을 깬 것은 황자충이다· 그가 두 여자를 향해 또다시 대례를 올렸다·
“왕비마마와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나와 표사들도 자동적으로 예를 갖추었다·
“왕비마마와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진왕이 그의 비를 아끼는 마음이 지극해 어지간한 청은 전부 들어준다고 해서 속으로 비웃었다·
그런데 오늘 직접 진왕비를 보니 솔직히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딸의 나이를 생각하면 서른 중반은 되었을 텐데 실로 불가사의한 미모였다·
어머니의 아름다운 용모에 비하면 공주는 오히려 평범했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주근깨도 많고·
하지만 나는 왠지 어리고 순수한 얼굴의 공주가 더 귀엽고 예뻤다·
‘전생에서 나도 결혼에 성공했더라면 저만한 딸이 세 명은 있었을지도· 빙당호로라도 하나 사주고 싶다·’
순간 공주와 눈이 딱 마주쳤다· 공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황 노야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왕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올 줄 어떻게 알고요?”
“간밤에 기온이 갑작스럽게 떨어지면서 운하 곳곳이 얼어붙었습니다· 하여 아무래도 양촌 포구까지 못 가시고 여기쯤에서 하선하실 듯싶었습니다·”
“한데 금룡표국과 남경상단 사람들은 어찌 안 보이는 것입니까?”
“그들은 본래의 목적지인 양촌포구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양촌은 아직 얼음이 얼지 않아서 운하의 사정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황 노야께서는 어찌 미리 아시고요?”
“저희는 밤사이 기온이 수상하여 새벽에 근처의 운하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나·”
“실은 제가 아니라 모두 이 친구가 한 일입니다· 새벽에 운하를 살핀 것도 왕야께서 타신 배가 이쯤에서 멈출 거라고 예상한 것도요·”
“으음?”
“제가 몸담은 천룡표국주 이종산의 넷째 아들입니다· 당년 회시에 장원급제를 한 후 현재 낙향하여 벼슬이 내려지길 기다리는 중이지요·”
“오호 그래요?”
회시의 장원급제라는 말에 진왕의 눈빛이 달라졌다·
잠시 주변 풍경을 눈에 담던 왕비와 공주도 일부러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인사 올리시게·”
“소생 이정룡 진왕전하를 뵙습니다·”
“자네가 새벽같이 일어나 운하를 살폈다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옵니다·”
“정성을 쏟는 일 중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없지· 정성을 쏟는 일 중에 목적이 없는 일 또한 없고 말이야·”
“···?”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다음 순서는 우리를 이화원까지 호위하는 일일 것 같군· 저 말과 마차는 나와 비와 공주를 태우기 위해 준비한 것이고·”
“그렇습니다·”
“이화원의 보호권 때문인가?”
“···!”
“···!”
나도 황자충도 한순간 머리가 띵 했다·
그걸 간파한 것도 놀랍지만 옛친구를 만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렇게 웃는 얼굴로 면전에서 질러버릴 줄이야·
보통 인물이 아니다· 생긴 것과는 영 딴판이다·
작았던 사람이 갑자기 커다랗게 보인다· 하기사 이러니 다른 왕야들로부터 견제를 한몸에 받지·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보군·”
“전하 실은····”
“그렇습니다·”
내가 황자충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상대가 이미 내 수를 다 읽고 있는데 여기서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해보아야 음험한 사람으로만 비칠 뿐이다·
“솔직하군·”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눈속임을 하겠습니까·”
“당당하기도 하고·”
“전하와 마마님들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모시려는 일입니다· 영광스러운 일이니 당당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금룡표국주가 내게 서신을 보내왔더군· 나와 비가 머무는 동안 이화원의 보호권을 따내려는 표국들의 경쟁이 심하니 부디 옥석을 가려 달라고 말이야·”
금룡표국주가 먼저 손을 썼구나·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진왕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까지 썼을 줄이야·
“옥석은 핑계고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 달란 소리지· 한데 아시다시피 나도 남경상단주에게 신세를 지는 형편인데 말이야· 왕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신첩은 전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촉촉한 목소리가 귀에 착착 감긴다· 이게 정녕 인간의 목구멍에서 나온 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찔하다·
“하하하· 내가 또 왕비의 입장을 곤란케 한 모양이군·”
진왕은 별것도 아닌 일에 소리내어 웃더니 황자충을 돌아보며 거침없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황 노야께서 양보를 하셔야겠습니다· 실은 금룡표국주가 왕비의 외사촌 오라비랍니다· 그가 있는 항주에 와 머물면서 면을 세워주지 않는다면 왕비의 체면은 또 뭐가 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물론 그러시겠지요·”
황자충이 다소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면 안 된다· 금룡표국주를 대하는 왕비의 체면이 있는 것처럼 왕비를 대하는 진왕의 체면도 있다·
특히 진왕은 왕비를 지극히 아끼는 사람· 우선은 왕비 앞에서 진왕의 체면을 확실하게 세워주어야 한다·
“진왕 전하 소생들은 그러한 깊은 사정까지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전하의 말씀을 받들어 저희 천룡표국은 이번 입찰에서 빠지겠습니다·”
“오오 그리 말해주면 고맙고·”
“하지만 기왕에 준비한 말과 마차이오니 이화원까지만이라도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면 두고두고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전하· 추운 날씨에 왕비마마와 공주마마께서 마차를 기다리시다 고뿔이라도 걸리실까 염려됩니다·”
황자충도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가 가져온 마차를 타지 않으려면 사병들이 가까운 역참이나 관청으로 가서 마차를 징발해 와야 한다·
아무리 빠른 말로 달려갔다가 온다고 해도 최소 두 식경은 걸릴 것이다·
“그렇게 하십시다· 내가 황 노야께 이 정도 신세를 지면서 눈치를 볼 사이는 아니니까 말이오·”
“이를 말씀입니까· 이화원 이야기는 그만 잊고 가는 동안 저와 함께 오랜만에 옛날이야기나 도른도른 하시지요·”
“그럴까요?”
“아 두 분 마마는 마차로 모시고 전하께서는 저와 함께 말을 타고 나란히 걷는 것이 어떻습니까? 겨울에 보는 항주의 풍경이 제법 고즈넉하고 좋습니다·”
“그것도 좋지요·”
“뭣들 하는가· 어서 전하께서 타실 말을 가져오고 마마님들을 마차로 모시게·”
그러면서 황자충은 내게 덧붙였다·
“자네는 가 표사와 함께 마차의 좌우를 호위토록 하게· 마마님들께서 불편하신 점이 없는지 각별히 신경 쓰고·”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나는 마지막 순간 터져 나온 황자충의 노련한 기지에 속으로 크게 웃고 말았다·
황자충은 방금 나로 하여금 진왕비의 곁에 붙어 있을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이화원까지 가는 동안 어떻게든 한번 구워삶아 보라는 뜻이다·
이를 위해 함께 말을 타고 가자는 말로 진왕을 꼬드겨 제거해주기까지 했다·
“알겠습니다· 당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