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호원표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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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이종산이 선뜻 대답을 않기에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손지백이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문제가 있을 턱이 있느냐?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못 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까지 우리가 회의를 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고·”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내야죠· 이건 두 번 다시 오질 않을 기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건 살짝 선을 넘은 발언이다· 고작 스물두 살짜리인 내가 수십 년 경력의 장로들을 무시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지례를 올렸다·
“장로님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반드시 계약을 따내야 한다는 욕심에 소질이 너무 흥분하여 그만····”
일부러 소질이라는 표현을 썼다· 소질 즉 어린 조카가 실수를 한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는 뜻이다·
유지평이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무엇이 십칠각주를 그렇게 조바심 내게 했을꼬?”
“그것이····”
“내가 비록 천룡표국에서 가장 작은 당의 당주이지만 참관 각주에게 발언할 기회 정도는 줄 수 있다네· 편하게 말해 보시게·”
딱 내가 원하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형들과 달리 자신들을 깍듯이 대하는 내 태도에 강한 인상을 받은 장로들 그걸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이종산 곽석산 손지백 그리고 마지막에 호의가 느껴지는 세 장로 중 한 명의 질문까지·
이제 표사로서 내가 형들과 어떤 다른 능력을 지녔는 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돈 되는 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그래야 텅텅 빈 십칠각을 뛰어난 표사와 쟁자수들로 하루라도 빨리 채울 수가 있다·
“이화원을 호위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진왕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금룡표국이 항주의 여러 주루들과 계약을 할 수 있었던 건 보호비를 절반으로 깎아준 덕이 컸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화원과 진왕이 있었습니다·”
“쉽게 얘기해 주게·”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기루의 주인이라면 왕야와 그 일족을 보호했던 표국에게 한 번쯤 주루를 맡겨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마치 내가 왕야라도 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진왕을 이용해 소문을 내자?”
“분명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천룡표국은 이미 충분히 명성을 떨치고 있네만·”
“전통적인 표행에 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그러나 표국을 지금보다 더 키울 생각이라면 장원 보호 쪽으로도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로는 최고가 아니라는 말인가?”
“비룡표국(飛龍鏢局)이 있는 한 그렇습니다·”
비룡표국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종산을 필두로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식어 버렸다·
나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비룡표국 역시 장원 보호를 전문으로 하는 표국이었다·
사실 그들이 보호하는 장원의 숫자는 금룡표국의 장원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매출은 오히려 금룡표국을 앞질렀다·
금룡표국이 상대적으로 작은 장원과 대형 주루를 공략했다면 비룡표국은 고관대작이나 부유한 거상과 지주들의 거대 장원들을 사실상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항주의 장원들을 일(一)에서부터 백(百)까지 크고 부유한 순서대로 등수를 매겼을 때 이화원 하나를 빼고는 상위 네 개가 전부 비룡표국의 차지였다·
이건 절강성의 패자임을 자부하는 대 천룡표국의 입장에서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한 일이었다·
“또 다른 이화원들까지 전부 공략하자?”
“그러려면 진왕이라는 간판이 꼭 필요합니다·”
“허허· 이것 좀 보게· 난 여태 우리가 금룡표국과의 싸움을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금룡표국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군 그래·”
“소질이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생각나는 대로 다 말이 되는 줄 알고 그만···· 어린 각주의 치기로 받아 주십시오·”
겸손한 내 말투와 달리 사람들은 처음엔 비룡표국이라는 말에 놀라고 다음에는 내 배포와 통찰에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주장뿐인 말은 공허한 것이다·”
지켜보기만 하던 이종산이 뼈 있는 말로 다시 포문을 열었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싸워서 이기기는 쉬우나 이겨서 지키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금룡표국이 오랜 시간 이화원을 독점해 왔지만 반드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 겁니다·”
“아직도 공허하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원하는 대답은 남경상단주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이종산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내 말의 진의를 꿰뚫고 충분히 공감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결국 진왕이 쥐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왕이라면 저도 좀 안면이 있습니다만 왕비를 지극히 아끼시어 마음을 바꾸도록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황룡당주 황자충이 말했다· 금의위 장수 출신답게 황족과도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십칠각주의 말대로 그를 10년 넘게 이화원에 모셔온 남경상단주라면 알지도 모르지요·”
“저도 십칠각주와 생각이 같습니다· 이 정도면 무언가 흔들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남경상단주도 우리에게 입찰을 제안해 왔겠지요·”
적룡당주 양진각이 말했다·
“이제야 조금 장로회의답군·”
이종산이 흡족한 듯 말했다·
늙은 장로들은 겸연쩍기는 하지만 모두 공감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면서도 허구한 날 주루와 노름방만 드나들던 내가 표국의 사정을 어떻게 이리 잘 아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었다·
이갑룡 을룡 병룡은 어느 순간부터 그냥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 버렸다·
좋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국주와 장로들 앞에서 나를 면박 줄 수도 없고 속으로 난감할 것이다·
”누가 남경상단주를 만나 보겠나?“
이종산이 말했다· 질문의 형식을 띠었지만 이건 사실 결정이었다·
내 말대로 남경상단을 만나 진짜 협상을 하겠다는 결정·
이제 공이 장로들에게로 넘어갔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가 결정적인 순간 한발을 걸치고 들어간 다음 마부석을 차지하고 앉으면 된다·
반드시 내가 마부석에 앉아야 가장 많은 전리품을 챙길 수 있다·
“십칠각주에게 한번 맡겨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유지평이 말했다·
”노지량은 귀계와 암투가 난무하는 상계에서 오늘의 남경상단을 일군 거상일세· 언감생심 십칠각주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네·“
“이 모든 대화는 ‘제게 만약 결정권이 있다면’이라는 십칠각주의 한마디로 시작되었습니다· 실제 거래와 협상에서는 수많은 돌발상황이 발생하는바 우리 중 이 계획을 십칠각주만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듯싶습니다만·”
간단히 말해 나를 마부석에 앉혀야 한다는 뜻이다·
유지평의 말에 좌중의 공기가 요동쳤다·
이화원의 보호를 놓고 벌이는 남경상단과의 거래 협상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걸 일개 각주인 내게 맡기자고 했으니 다들 놀랄 수밖에·
이갑룡 을룡 병룡은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동시에 서늘함도 느껴졌다·
솔직히 내가 금룡표국을 제치고 남경상단과의 계약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유지평을 포함해 여기 한 명이라도 있겠나·
절대로 없다· 그런데도 기회를 준다? 이건 기회가 아니라 미끼다·
실패했을 경우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 기세를 억누르는 명분으로 삼을 미끼·
어쩌면 순전히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단언컨대 이종산은 내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한다·
유지평이 이종산의 그런 심중을 읽고 되든 안되든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일 수도 있다·
‘유지평 당신은 지금 누굴 도우려는 것인가?’
이종산이 나를 보며 물었다·
“한번 해 보겠느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나를 제거하려는 분명한 의도가 보이지 않는 이상 묵묵히 내 일만 하자
실패로 말미암아 져야 할 책임이 크다면 성공했을 경우 가져갈 이득 또한 큰 법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겁이 없어서야 원·”
이종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입가에 미세하게 어리는 것은 분명 기특한 자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미소였다·
***
장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 오작교가 놓인 연못 그림 같은 정자 지붕 위로 금방이라도 달이 떠오를 것만 같은 저택들·
이화원은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이었다·
진왕을 맞이하기 위한 대청소가 한창인 가운데 나는 조용한 연못가의 정자에서 백발의 노지량을 만났다·
늙고 독 있는 뱀 즉 노독사(老毒蛇)라는 별호를 가진 그는 쉰 살가량의 행수를 옆에 세워두고 화롯불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표왕의 넷째 아들이라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정룡이라고 합니다·”
“총표두나 대장궤가 올 줄 알았더니만·”
자리에 앉으라는 말도 없이 바로 면박부터 준다·
나는 선 채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전립성과 가불염이 마찬가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전권을 가지고 왔으니 대화를 하실 때 불편하신 점은 없으실 겁니다·”
“나는 지금 격(格)을 얘기하는 것이네·”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무어?”
“천룡표국을 끌어들여 금룡표국에게 주는 보호비를 깎으려는 생각이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허수아비 역할이라면 저로도 과분한 것 같습니다만·”
“···?”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신다면 모두 없던 일로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단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는 이화원을 두고 천룡표국과 남경상단이 할 얘기는 없을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일에 관한 한 제가 전권을 가지고 있어서요·”
“내가 천룡표국과는 계약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도 찾아왔다는 말인가?”
“앞뒤를 따져보니 저희도 조금은 남는 게 있을 것 같더군요·”
노지량은 말은 않고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았다·
화조신옹 곽석산 북해투왕 같은 무인들이 통기(通氣)를 통해 내 몸 속을 속속들이 더듬어 보았다면 상계의 늙은 독사인 노지량은 눈빛을 통해 내 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상대는 하루하루가 전쟁터라는 강남 상계에서 오늘의 남경상단을 일군 거물·
까딱하다가는 껍질째 홀딱 벗기고 잡아 먹히는 수가 있다·
“음하하하!”
노지량이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역시 천룡표국 정도라면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줄 알았지· 음하하하·”
우리에게 문제를 내주고 이걸 맞추나 못 맞추나 혼자 가늠하고 있었다고?
이 늙은이 완전 변태다·
“이런 손님을 여태 세워두었구먼· 앉으시게·”
장년의 행수가 다가와 내 앞에 있는 의자를 쏙 빼준다·
전립성과 가불염은 계속 서 있고 나만 앉으라는 소리다·
“한 잔 하겠나?”
“술은 거래가 끝난 후 축배로 들겠습니다·”
“아니지· 이건 거래가 아니라 기회일세· 내가 천룡표국으로 하여금 금룡표국을 견제하고 월성교 주변의 기루와 주루들을 지킬 기회를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지·”
현재 천룡표국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이쯤 되니 시험이 아니라 마치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저희도 천룡표국이라는 이름을 빌려드립니다만·”
“무릇 좋은 상인은 두 가지를 정확히 할 줄 알아야 한다네· 첫 번째가 계산이고 두 번째는 저울질이지· 한데 이건 사실 표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
“경쟁 관계에 있는 금룡표국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고 나아가 언제 빼앗길지 모를 월성교 주변의 주루들을 지키게 되었네· 한데 이걸 단지 천룡표국의 이름을 빌리는 것과 같은 무게로 저울을 달면 곤란하지 않겠나?”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특별히 원하는 건 없네· 내가 돈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고· 정히 고마우면 부친께 말씀드려 술이나 한 병 사 들고 찾아오시라고 하게·”
필요하다면 표국의 국주가 상단의 단주를 찾아가 인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큰 건의 계약이 있을 때에나 해당하는 말이다·
더구나 상단의 단주가 표국의 국주를 오라가라하는 건 자신의 발아래 두고 길들이겠다는 수작이다·
지금은 공짜로 천룡표국의 이름을 빌려다 쓸 생각이면서 무슨 개소리를·
“그건 곤란할 것 같군요·”
“이해하네· 아무리 표왕의 넷째 아들이라고는 하나 그런 것까지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겠지· 한데 그렇다면 전권을 가져왔다는 말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러면서 노지량은 혼자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노회하기 짝이 없지만 미안하게도 내 머리와 가슴은 스물두 살이 아니다·
“제 말씀을 이해 못하신 것 같은데 국주님을 대신해 분명한 거절의 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전립성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립성이 노란 괴황지 봉투를 꺼내 장년의 행수에게 주었다· 장년의 행수가 다시 그걸 노지량에게 전달했다·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읽어 내려가던 노지량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당연할 수밖에· 그건 천룡표국이 남경상단에 제안하는 이화원 보호에 관한 정식 계약서였다·
액수는 석 달에 금전 이백 냥· 금룡표국 보다 무려 백 냥이나 적으니 조건도 좋다·
전권을 가지고 왔다는 내 말을 입증하듯 천룡표국주의 직인까지 미리 찍혀 있었다·
여기에 노지량의 직인만 찍히면 완벽한 계약서가 되는 것이다·
“이게 무엇인가?”
“단주님께서 잡은 저울의 접시에 천룡표국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걸 올려놓겠습니다· 이 정도면 무게가 맞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군·”
“대신 화근을 뿌리 뽑아드리겠습니다·”
“내 화근이 무엇인 줄 알고?”
“금룡표국주와 진왕비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금전 삼백 냥이라는 거액에 금룡표국과 10년 넘게 계약을 해왔다는 것도요·”
“그 정도는 아니까 이렇게 찾아왔겠지·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중언부언 하고 있는 것인가?”
“남경상단이 죽으나 사나 진왕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사정도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복건성은 요즘 소금이 풍년이라더군요·”
“···!”
한순간 늙은 거상의 동공이 천적을 만난 고양이의 그것처럼 좁아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전립성과 가불염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기색이 어렸다·
노련한 노지량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내가 저들과 공유하는 정보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챘을 것이다·
“고집이 쇠심줄 같을 것처럼 생긴 장년인은 전립성이라는 장궤이고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을 것처럼 생긴 중년인은 가불염이라는 표사입니다· 둘 다 장원을 보호하고 살피는 일에는 전문가들이죠·”
졸지에 쇠심줄 같은 고집에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전립성과 가불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의 동행들이 장원을 돌아볼 수 있도록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표사들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 숫자는 또 몇 명으로 맞춰야 할지를 보아야 하니까요·”
이번에는 내가 도발했다· 아직 계약하겠다는 의사도 밝히지 않았는데 견적부터 뽑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지량은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입에서 폭탄이 터져 나오기 전에 일단 주변 사람들을 물려야 할 테니까·
“모시고 가게·”
“예 단주님·”
의자를 빼주었던 장년인이 가불염과 전립성을 데리고 나갔다·
이제 정자 안엔 나와 노지량만 남게 되었다·
“어떻게 알았나?”
지금으로부터 5년쯤 후 남경상단은 복건성에서 위장 상단을 하나 차려 놓고 국법으로 금지된 해상 밀무역을 오랫 동안 해온 것이 적발되어 큰 곤욕을 치른다·
그리고 배후에 진왕비가 있어서 그동안 남편인 진왕조차 모르게 크고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는 소문이 돈다·
나는 남경상단이 이화원을 보호하는 문제로 천룡표국에 계약 입찰을 제안해 왔을 때 바로 그 일을 떠올렸다·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 누가 알지?”
“현재로선 저 혼자입니다·”
“발설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믿지?”
“칼은 칼집에 들어있을 때가 무섭고 비밀은 나만 알고 있어야 비로소 힘을 발휘하지요·”
“···!”
“아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지금 협박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단주님을 도우러 온 것입니다·”
“내 목줄을 쥐고 돕겠다고? 상인이 아니어서 그런지 계산이 둔하군· 이젠 자네가 어떤 제안을 하더라도 평범한 제안이 될 수가 없네·”
“제가 목줄을 쥐면 목숨이 위험하기는 합니까?”
“···?”
“단주님께서 진왕비를 따로 만나 금붙이를 바치며 하소연 한 마디만 얹으시면 저와 천룡표국은 상당한 곤욕을 치를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노지량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날 어떻게 돕겠다는 건가?”
“진왕과 그의 왕비께서 더는 금룡표국을 신뢰하지 않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면 단주님께서도 어미 없는 호랑이 새끼의 눈치를 더 이상 볼 필요가 없겠지요·”
“어떻게 말인가?”
“단주님의 성품을 보아하니 지금은 제가 어떤 말씀을 드려도 믿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어떤 핑계를 대시든 금룡표국과의 재계약을 열흘만 늦추어 주십시오· 하면 그사이 제가 그림을 하나 그려 보겠습니다·”
“열흘이면 진왕이 도착하는 날이군·”
“그렇습니다·”
“금룡표국주는 바보가 아닐세· 그리고 항주에는 진왕과 그 일족을 자신들의 원림에 모시고 싶어 하는 거상과 지주들이 줄을 섰지·”
“무릇 노련한 표사는 두 가지를 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싸움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말타기로 말미암아 하루가 멀다하고 엉덩이에 생기는 종기를 짜는 일입니다·”
“···?”
“대신 싸워 드리고 종기도 짜 드리겠다는 데 그 정도 각오도 없다시면 저희야말로 더 얘기할 것이 없습니다·”
노지량은 또다시 나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번엔 눈으로 심장까지 후벼팔 기세다· 이윽고 그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삼 년 동안 날지 않았으나 날기 시작하면 하늘을 찌르고 삼 년 동안 울지 않았으나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한다·”
“···?”
“요즘 항주 상계에 떠도는 소문이라고 하네· 오늘 직접 그 당사자를 보니 아무래도 헛소문이 아닌 듯하군·”
“···?”
“계약서를 놓고 가게· 열흘 후 내 이것을 화로에 태워 버릴지 직인 하나를 더 추가해 다시 자네에게 돌려줄지를 결정하겠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