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호원표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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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사공자님께서도 장로회의에 참석하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표왕부의 무사가 와서 전하더라고· 아버지께서 그리 하라셨다고·”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사공자님께서도 천룡표국을 떠받칠 기둥감으로 인정받게 되셨군요·”
“언젠가 나도 참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부르실 줄은 몰랐는걸·”
“빠르다뇨· 다른 공자님들은 아홉 살 때부터 장로회의에 참석하셨습니다· 그런데 사공자님은 무려 스물두···· 지금도 많이 늦으셨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가시면 꼭 기회를 만들어 장로님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십시오· 훗날 공자님의 행보에 어떤 도움을 줄지 모르는 분들입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왜 장로님들이지?”
“국주님은 어떤 식으로든 자주 뵙게 될 수밖에 없지만 장로님들은 그렇지 않잖습니까? 기회가 있을 때 점수를 따야죠· 무엇보다 장로회의는 다른 공자님들과 비교당하기 딱 좋은 곳입니다·”
“장로회의에 가봤어? 어떻게 그리 잘알아?”
“천룡표국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제가 모르는 게 있는 줄 아십니까? 공자님께선 저 없으면 어떡하실 뻔 했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십칠각에 있는 방이랑 회랑은 다 청소했어?”
“그건 아직···”
“탁자랑 의자랑 필요한 집기들은 다 들어갔고?”
“그것도 아직···”
“아침부터 표왕부의 어린 시비들이랑 노닥거리느라고 많이 바쁘셨나봐요· 장삼 책사님?”
“죄송합니다·”
“잘하자·”
“예·”
“그리고 조심하자·”
“예?”
“네가 날 위해 애써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해· 내가 너의 뒷배가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너의 일상적이지 않은 행동 하나하나가 다 나의 의지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천룡표국에는 이제 너와 나를 지켜보는 눈이 아주 많아졌다는 걸 잊으면 안돼·”
“죄 죄송합니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한 줄 알면 가서 곽 숙부님 오시는지 망이나 좀 봐· 난 어제 배운 보법이나 좀 더 연습해야겠다· 뭔 놈의 진퇴로가 삼백쉰다섯 식이나 되냐· 미치겠네·”
“그런데 그 보법은 대체 누구에게 배우신 겁니까?”
“있어· 귀신같은 인간이·”
***
장로회의는 천룡표국의 모든 중요한 일들이 결정되는 곳이었다·
참가 자격은 국주를 중심으로 오당의 당주와 총표두 그리고 대장궤에게만 주어졌다·
다만 국주의 아들들은 예외였다·
어려서부터 장로회의를 지켜보며 경영자로서의 안목과 식견을 쌓으라는 취지였다·
일종의 후계자 수업인 셈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국주의 아들들이라고 해도 당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면 누가 물어보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말을 해선 안 된다·
참관은 하되 발언권이 없는 것이다·
지금은 칠각주인 이병룡과 십칠각주인 내가 그랬다·
우리는 탁자의 맨 끄트머리에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이병룡은 나를 보자마자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냈다·
저만치 앞쪽에 앉은 이갑룡과 이을룡의 눈빛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녀석이 갑자기 활약하고 주목을 받기 시작하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급기야 오늘은 장로회의에까지 참석했으니·
이종산이 손지백에게 말했다·
“시작하시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나쁜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첫 번째 안건입니다· 녹원루에서 우리와의 계약이 끝나는 대로 금룡표국(金龍驃局)과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겠다고 통보해왔습니다·”
“갑자기 다른 곳과 계약을 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랍니까? 그것도 하필 금룡표국으로·”
황룡당 당주 황자충이 말했다·
“금룡표국에서 기루의 보호비를 천룡표국의 절반까지 제시했다고 하네· 심지어 표사들의 등급과 숫자도 똑같은 조건으로 맞추고·”
“절반이면 표사들의 몸값만 챙기고 전혀 남기지를 않겠다는 것인데 도대체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수향루와 경향루에 이어 녹원루까지· 이러다가 월성교(月星橋) 주변의 주루와 기루들을 전부 금룡표국에 빼앗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적룡당 당주 양진각이 우려를 표했다·
표국은 표물 운송뿐만 아니라 장원 보호 의뢰인 호위 피랍자 구출 실종자 추적 귀족의 외출 동행 등등·
칼이 필요한 일이라면 폭력과 살인청부 빼고는 무엇이든 다 했다·
그중에서도 표물 운송 못지 않은 큰 수입처가 바로 장원 보호와 부유한 의뢰인들의 호위였다·
한 발 더 들어가서 장원 보호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비도 많고 무림인들의 출입도 잦은 기루 다루 주루 같은 곳이었다·
유흥과 소비의 도시답게 항주에는 특히 지주나 상단이 부럽지 않은 대형 기루와 주루들이 수두룩했다·
그만큼 보호권을 따내기 위한 표국들의 경쟁도 치열했다·
풍부한 물자에다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답게 항주에는 수많은 표국들도 함께 성업 중이었다·
금룡표국은 그중 한 곳으로 파격적인 비용에 일을 해주면서 크게 세를 늘려 가고 있었다·
특히 천룡표국과 달리 중원 전역에 분타가 없는 금룡표국은 장원 보호에 집중했는데 그게 주효했다·
비용도 저렴한 데다 실력 출중한 표사들도 우글댄다는 소문이 돌면서 장원 보호 분야에서는 다른 표국들을 압도했다·
급기야 초대형 표국인 천룡표국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장원 보호 분야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말이다·
“금룡표국이 시장 질서를 크게 어지럽히는군요· 하지만 현재로썬 마땅히 제재를 가할 방법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역시 보호비를 내린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청룡당 당주 유지평이 말했다· 무림맹 군사부 출신이어서 그런지 대책을 세우기에 앞서 상황정리부터 먼저 한다·
“아시겠지만 보호비를 내린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오·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요구들이 빗발칠 것이오·”
적룡당주 양진각이 말했다·
“녹원루의 보호를 누가 맡고 있지?”
이종산이 물었다·
“저희 복룡당입니다·”
이을룡이 다소 위축된 목소리로 말했다· 진작부터 설치고도 남았을 그가 여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수향루와 경향루도 복룡당에서 관리했지?”
“그렇습니다·”
“대책이 있느냐?”
“지나치게 싼 것은 무엇이든 금방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금룡표국에 대한 루주들의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입니다·”
“그게 대책이더냐?”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이럴 때일수록 일희일비하지 말고 천룡표국의 명성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은 복룡당 소속 표사 누구를 데려와서 물어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당주라면 마땅히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죄송합니다·”
“사과는 필요 없다· 장로회의는 상벌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책을 세우고 보완하는 자리다· 대책을 내놓아라·”
“최대한 빨리 만들겠습니다·”
“그 자리가 힘에 부치느냐?”
“아 아닙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력하는 모습은 어렸을 때 무공수련을 하던 것으로 충분하다· 지금은 놀아도 좋다· 대신 그 자리가 네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인정할만한 성과를 보여라·”
“명심하겠습니다·”
잠깐 사이 이을룡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는 보고만 있는데도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것 같았다·
전생에서 쟁자수로 살던 시절에는 어떻게 하면 보급품으로 나오는 신발을 한 짝이라도 더 타낼까 어떻게 하면 장거리 표행에 한 번이라도 더 따라갈까 하는 궁리만 했다·
확실히 장로회의는 급이 다른 것 같았다·
한참을 몰아붙이던 이종산이 묵직하게 경고했다·
“보호비는 그대로 동결한다· 대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닷새 안에 녹원루주의 마음을 돌려놓아라·”
“닷새는 너무 짧습니다·”
“금룡표국의 홍원당주는 녹원루주를 단 사흘 만에 설득시켰다고 들었다· 너는 지금 스스로 금룡표국의 홍원당주보다 못 하다고 고백하는 것이더냐?”
“알겠습니다·”
끙! 소리를 삼키며 눈을 감는 이을룡의 정수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 같았다·
불똥은 맞은 편에 앉은 이갑룡에게도 튀었다·
“너도 마찬가지다· 월성교 북쪽 구역의 주루와 기루 네 곳을 강룡당에서 관리하는 것 알고 있다· 녹원루가 무너지면 다음엔 네 차례다·”
“그렇지 않아도 부지런히 루주들을 만나며 신뢰를 다지고 있습니다· 불편한 것들도 그때그때 해결해 주고요·”
“금룡표국은 신뢰를 주지 않는다더냐? 상대는 항주 유흥가에서 잔뼈가 굵어온 백전노장들이다· 천룡표국이라는 이름이면 네 땅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평소에도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었지만 일에 관해서 만큼은 더욱 냉정하고 철두철미해지는 이종산이었다·
손지백이 눈치껏 끼어들었다·
“두 번째 안건입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금룡표국과 거액의 장원 보호 계약을 맺어왔던 남경상단(南京商團)에서 이번엔 우리 천룡표국과 계약을 맺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남경상단은 무역을 통해 큰돈을 벌어들인 거대 상인 가문으로 항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림 중 하나로 꼽히는 이화원(梨花園)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마다 겨울이 되면 황제의 친척인 진왕(賑王)과 그 일족에게 별장으로 내주었다·
진왕은 추위를 몹시 싫어했는데 그 때문에 겨울만 되면 일가족을 이끌고 따뜻한 항주로 내려와 이화원에서 느긋하게 지내다 봄이 되면 돌아가곤 했다·
해서 남경상단은 진왕이 머무는 동안 거액을 주고 금룡표국에 이화원의 보호를 맡겼다·
첫 번째 안건과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었다·
첫 번째는 오랜 거래처를 금룡표국으로 빼앗기기 직전이고 두 번째는 금룡표국의 오랜 거래처를 오히려 우리가 빼앗아 올 판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워했다· 남경상단의 제안이 너무나 갑작스럽기 때문이다· 상황도 매우 공교롭고·
“함정입니다·”
단호하게 서두를 뗀 사람은 이을용이였다·
“금룡표국이 헐값에 주루를 보호해 주면서도 이곳 이화원의 보호비만큼은 절대로 깎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식 이상으로 비싸게 받았습니다· 석 달간 무려 금전 삼백 냥이었습니다·”
삼백 냥이라는 액수에 잠시 공기가 출렁였다·
듣고 있던 나도 깜짝 놀랐다· 아무리 진왕과 그의 일족이 와서 석 달을 머문다고 해도 그렇지 금전 삼백 냥이라니·
“그래서?”
“남경상단이 황실 종친들과의 인맥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물 쓰듯이 쓰긴 하나 석 달에 금전 삼백 냥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상계의 늙은 구렁이가 천룡표국을 끌어들여 금룡표국에게 지급하는 보호비를 낮추려는 속셈입니다· 함부로 들어갔다는 계약도 놓치고 천룡표국만 우스운 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추측만으로 대책을 세울 수는 없다·”
“금룡표국의 국주가 진왕비의 친척이라고 합니다· 보호비를 한 번 깎아볼 수는 있겠지만 계약 자체를 무산시키기에는 부담스러운 관계이지요·”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이을룡의 말처럼 함정일 확률이 매우 높다·
장내의 공기가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바뀌는 듯 하자 이을룡이 얼른 덧붙였다·
“직접 값을 깎기가 난처하니 우리를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해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 계약에 적극성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을 겁니다· 오랜 거래처를 바꾸려면 자신들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이종산이 손지백을 바라보며 확인을 요청했다·
“사실입니다·”
이을룡이 또 덧붙였다·
“제가 남경상단의 단주라면 천룡표국이 계약에 뛰어들 거라는 소문부터 낼 것입니다· 소문이 나기 전에 서둘러 거절 의사를 밝혀야 합니다·”
이번엔 곽석산이 확인해 주었다·
“이미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소문을 가라앉힐 생각이라면 더 늦기 전에 입장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을룡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감이 비쳤다· 이만하면 앞서의 실수를 충분히 만회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를 한 걸 보면 이을룡은 두 번째 안건에 관한 내용을 누군가로부터 먼저 들은 것 같았다·
만약 세 당주들 중 한 명이라면 그는 이미 이을룡의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이을룡이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은 일부러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칠각주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종산의 목소리가 흡사 천둥처럼 들렸다·
나를 향해 콧구멍을 벌렁거리고 있던 이병룡이 한순간 움찔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저도 둘째 형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남경상단이 이런 수법으로 거래처들의 단가를 후려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까지 당하면 무림과 상계 모두에서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병룡은 간만에 찾아온 기회에 제 몫을 다했다는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도 자부심이 가득하다·
상계의 일이라면 아무래도 이병룡은 귀가 밝을 수밖에 없다·
그의 외가가 바로 상계의 소식에 정통한 만금전장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을룡에게 언질 준 것이 이병룡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소식이었던 첫 번째 안건에는 뚜렷한 대비책이 없고 좋은 소식인 줄 알았던 두 번째 안건 역시 헛바람에 지나지 않았군· 한데 말이야 우리가 고작 이런 얘기나 하자고 모인건가?”
이종산의 뼈있는 일침에 모두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 한명 한명을 눈에 담던 이종산이 내게서 멈추었다·
“십칠각주의 생각은 어떻느냐?”
모두의 시선이 이종산을 따라 내게로 향했다·
두 번의 장원급제에 이어 표행에서의 활약까지·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하다·
어쩌면 이것이 장삼이 말한 그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떠벌이는 것도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다· 이상하기도 하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종산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어렸다·
곽석산과 손지백도 그리고 당주들도 다들 아쉬운 표정들이었다·
반면 이갑룡과 을룡은 그러면 그렇지라는 얼굴이었다·
이병룡은 입꼬리까지 살짝 올라갔다·
“그렇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짧은 식견일망정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꺼져 벼렸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기대감 호기심 불신 질투···· 새삼 느끼는 거지만 표정과 어우러진 사람의 눈동자는 정말 많은 말을 한다·
“말해 보아라·”
“만약 제게 결정권이 있다면 지금 당장 남경상단을 찾아가 금룡표국이 받는 액수의 절반 가격에 이화원을 보호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겠습니다·”
“어째서?”
“기존의 액수가 금전 삼백 냥으로 워낙 크니 절반으로 깎는다고 해도 천룡표국으로선 손해날 게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건 금룡표국이 우리 거래처들을 빼앗아 가면서 썼던 방식이기도 하고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죠·”
그러면서 나는 어금니를 한번 빠드득 갈았다·
듣고 있던 이을룡이 불쑥 내 말을 받고 들어왔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무엇으로 들은 것이냐? 그렇다고 남경상단에서 우리와 계약할 리는 없다· 다만 금룡표국을 상대로 보호비를 깎을 명분만 챙기려는 것일 뿐·”
“하면 얼마나 깎을 수 있을까요?”
“무어?”
“우리가 절반을 치고 들어갔으니 차액이 금전 백오십 냥이고 여기서 단순계산으로 금룡표국과 남경상단이 실랑이를 하다가 절반씩만 양보하면 칠십오 냥이군요· 그럼 허수아비 노릇 한번 해주는 대가로 최소한 금룡표국으로 들어갈 금전 칠십오 냥은 막는 셈 아닌가요?”
사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이을룡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고작 생각한 것이 금룡표국에 타격을 입히자고 허수아비 노릇을 하자는 것이냐? 천룡표국은 그렇게 가벼이 쓸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허수아비 노릇도 필요하다면 해야죠· 돈 드는 일도 아니고 못 할 건 또 무엇입니까?”
“뭐?”
“금룡표국이 월성교 주변의 주루들을 상대로 보호비를 절반만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화원처럼 믿는 구석이 있어서입니다· 만약 우리가 남경상단을 이용해 허를 찌른다면 녹원루는 물론이거니와 당분간 월성교 주변엔 얼씬도 못 할 겁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데다 눈동자까지 커졌다·
이을룡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남경상단에도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안 되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죠· 그들이 이득을 보는 액수인 칠십오 냥에서 다시 절반인 서른다섯 냥 정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땡겨와야 합니다· 혹시 나중에 딴소리할지 모르니 처음부터 못을 박아 두어야 하고요·”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잘만하면 첫 번째 안건과 두 번째 안건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놀랄 수밖에· 거기다 두둑하게 돈도 챙기고·
이을룡은 뭐라고 반박도 못하고 아랫입술만 파르르 떨어댔다·
내가 자신의 실수를 대신 해결한 것도 모자라 작은 활약까지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지금쯤 약이 바짝 오를 것이다·
이병룡도 덩달아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이종산이 청룡당주 유지평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절묘한 수라고 생각됩니다·”
“그 정도인가?”
“실은 속하도 십칠각주와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 일로 남경상단에게서 절반을 받아 챙길 생각까지는 미처 못 했습니다· 실로 부끄럽습니다·”
“그거야 공명정대한 자네 성품 탓이겠지·”
여보세요· 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자는 뭐가 됩니까?
총표두 곽석산과 대장궤 손지백이 실무적인 면에서의 참모라면 유지평은 사실상 천룡표국의 책사 역할을 해왔었다·
유지평이 묘수라고 하면 더 볼 것이 없다·
이종산이 내게 말했다·
“수고했다·”
나는 살짝 뼈있는 말로 응수했다·
“저잣거리에서 물건값이나 깎으며 하던 짓을 말씀드렸을 뿐인데 괜히 국주님과 장로님들의 귀만 어지럽힌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노름방에서 갈고닦은 솜씨가 아니고? 푸하하·”
손지백이 밑도끝도 없는 농담을 하고는 저 혼자 꺽꺽대며 웃었다·
그러다 아무도 따라웃지 않는 걸 깨닫고는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종산이 다시 말했다·
“저잣거리나 무림이나 상계나 인간 군상이 부딪히고 얽히는 방식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오늘 너의 의견은 제법 쓸모가 있었다·”
“그럼 한 가지 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직 할 말이 남았느냐?”
“겨울 동안 이화원 보호하는 거 말입니다· 그거 이참에 진짜로 우리가 확 가져와 버리면 안 됩니까?”
“···!”
사람들의 눈동자에 또다시 횃불이 들어왔다·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