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오지산 천지령(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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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옴!”
화조신옹이 일갈을 내지르며 덮쳐왔다·
용의 발톱같은 그의 손가락에서 뭐라 말할 수 없이 무시무시한 기세가 느껴졌다·
고도의 집중력과 함께 이능력이 발동됐다·
화조신옹의 손은 여전히 빠르고 강맹했다·
하지만 이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만큼 빠르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천지령의 천년진기는 내게 가공할 힘 뿐만이 아니라 부적의 공능 또한 향상 시켜준 것 같았다·
안타까운 건 내 손발이 아직 그걸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 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나는 이능력으로 인해 느려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겨드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빠르게 주먹을 내질렀다·
뻐억!
화조신옹의 용발톱과 내 정권이 정면으로 격돌했다·
그리고 내 주먹은 용발톱을 그대로 밀어붙이며 화조신옹의 어깨까지 후려쳤다·
뻐억!
내게는 두 번으로 나눠 들렸지만 화조신옹에겐 그저 ‘뻐벅!’ 하고 들렸을 것이다·
화조신옹의 왼쪽 어깨가 크게 젖혀지며 상체가 흔들렸다·
초식이고 뭐고 없이 그냥 힘으로 때려 박아 버린 것이다·
나는 용발톱에 주먹 끝 살점이 찢겨 나갔지만 대신 화조신옹은 내 주먹에 왼쪽 어깨뼈가 박살 나 버렸다·
화조신옹이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나는 다른 쪽 손목을 덥석 잡았다·
동시에 겨드랑이 아래를 빙글 파고들며 팔 전체를 한 바퀴 크게 꺾었다·
우두둑!
순식간에 화조신옹의 뒤로 가게 된 나는 등을 폴짝 올라타며 사지로 몸을 휘감았다·
두 다리로는 신법을 펼치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감고 양팔로는 손을 쓰지 못하도록 어깨를 감았다·
그냥 감기만 한 것이 아니라 힘껏 조였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이어진 연결동작·
“끄헉!”
손과 발을 묶이고서는 천하의 그 어떤 인간도 용을 쓸 수가 없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화조신옹이 털썩 쓰러졌다·
그의 등 뒤에 물귀신처럼 붙은 나도 함께 쓰러졌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힘이 전신에서 느껴진다·
생각 같아선 이대로 화조신옹의 몸뚱어리를 전신의 뼈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화조신옹은 가슴 전체가 압박을 당하면서 흡사 목을 졸린 것처럼 꺽꺽 거렸다·
그 와중에도 삐져나온 손을 어떻게든 뒤로 뻗어 내 뱃가죽을 찢으려 했다·
나는 더 강한 조임으로 응수했다·
“가만있어!”
“끄흡!”:
화조신옹의 몸이 점점 작아지고 쪼그라드는 게 느껴진다·
죽음의 위기를 느낀 화조신옹은 사력을 다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움직임은 점점 둔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느껴지는 분절음·
뚝· 뚜두둑!
화조신옹의 허벅지뼈에 이어 갈비뼈가 차례로 부러지는 소리였다·
이대로 더 힘을 주면 부러진 갈비뼈들이 그의 심장을 찔러 죽일 거라 확신했다·
나는 화조신옹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살···려···줘····”
“살고 싶으세요?”
“살···려···줘···제···발····”
“노선배에게 죽은 사람들도 꼭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나머지 벌은 지옥에 가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후배는 이만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뚝 뚜두두둑!
남은 갈비뼈들이 시원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숨까지 완전하게 막힌 화조신옹은 마지막으로 맹렬하게 버둥거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잠시 후 나도 감았던 손과 발을 풀었다· 그리고는 곧장 토악질을 했다·
“우웩!”
먹은 게 없으니 쓴물만 잔뜩 넘어온다· 한바탕 게워낸 후에야 대(大) 자로 누워 숨을 헐떡거렸다·
죽어가던 화조신옹의 마지막 버둥거림과 떨림이 내 몸과 근육에 그대로 남아서 떨어지질 않는 것 같다·
아마 이 느낌은 오랫동안 잊히질 않을 것이다·
나는 전생에서도 두 번의 살인 경험이 있다·
쟁자수와 달리 표사는 싸움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이런 일도 이제 익숙해져야 한다·
숨이 좀 가라앉자 조용히 일어나 모닥불 가에 앉았다·
밖에서 찬 바람이 들어왔는지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남궁소소를 보니 앞섬이 풀어져 있었다· 다가가 손으로 앞섬을 여미어 주려고 하는데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뭐 하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앉으며 제 가슴을 가렸다·
“아니 나는 소저가 추워 보이길래!”
“추운데 웃통은 왜 벗고 있어요?”
그제야 나는 내 상체가 알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슴에 불이나 홀라당 타버렸다는 걸 그녀가 알 리 없었다·
“타버렸소·”
“불태웠다고요? 왜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소·”
남궁소소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과 이제는 둥굴 속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마른 낙엽을 차례로 찾아보더니 말했다·
“혹시 제 언 몸을 녹이려고?”
“···?”
“미안해요· 전 그것도 모르고·”
구태여 부인하진 말자· 여기서 부인하면 내 옷이 불탄 또 다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납득시키지 못하면 오해 사기 딱 좋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오·”
“어제도 고마웠어요·”
“어제?”
“화조신옹이 제게 천지령을 먹이려고 했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덤벼들었잖아요· 그때 귀하가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전 지금쯤 죽은 목숨일 거예요·”
하지만 나도 천지령을 못 먹었겠지· 정말로 감사할 사람은 오히려 나다·
남궁소소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목내이 같은 모습으로 죽어있는 화조신옹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아침에 들어와 보니 저렇게 되어 있었소· 아마 밤새 고통에 시달리며 발작을 하다가 혼자 숨이 끊어진 것 같소·”
화조신옹과 격투를 벌였다고 하면 내 손으로 죽였다는 말도 함께 해야 한다·
사람 죽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죽였다고 해도 믿지도 않을 것이고·
“다행이에요·”
“이게 다 곤산곤독 덕분이오·”
“대별채의 산적들이 보배군요·”
“그러게 말이오·”
“귀하는 괜찮나요?”
“보시다시피·”
“천지령을 삼켰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죠?”
“악으로 깡으로 소화시켰소·”
“농담하지 말고요·”
“소저의 말대로 손가락을 입에 넣어 토했소· 처음엔 손가락만 넣었다가 나중엔 소금물을 잔뜩 먹고 다시 손가락을 쑤시고 또 쑤시고·”
“···!”
“어차피 죽을 거 손가락으로 마지막까지 입이나 실컷 쑤시다 죽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쑤셨소·”
“그랬더니요·”
“한 백 번쯤 쑤셨더니 대장에 차 있던 똥물과 함께 올라옵디다· 개울물에 그대로 쏟아내고 쓰러졌는데 깨어나고 보니 아침이었소·”
남궁소소는 더는 묻지 않고 손으로 조용히 입을 가렸다·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됐다· 통했다· 하기사 천지령을 먹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내가 천지령의 천년진기를 취했다는 사실은 최대한 숨겨야 한다·
화조신옹의 말에 따르면 이걸 공력으로 변환하지 못하는 이상 내 피는 영약이고 나는 걸어 다니는 영물이다·
만약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졌다간 득보다 화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 웃통은 계속 벗고 있을 건가요?”
“옷이 없다니까·”
“저거라도 좀 벗겨 입으세요·”
남궁소소가 턱으로 죽은 화조신옹을 가리켰다·
어차피 옷이 있긴 있어야 했다·
나는 화조신옹에게 다가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장삼과 단삼을 차례로 벗겼을 때였다· 난데없이 번쩍번쩍하는 흉갑(胸甲)이 떡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또 뭐야!”
나만큼이나 남궁소소 당황한 얼굴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흉갑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얇게 두들긴 쇳조각 수천 개를 이어 붙여 만든 것이었다·
그 정교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수천 개의 비늘이 만들어 내는 백색의 광채 또한 어쩐지 예사롭지가 않았다·
분명 금속인데 설광(雪光)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가슴 한가운데 있는 유난히 큰 비늘에서 음각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용문양을 발견했다·
남궁소소가 목구멍을 쥐어짰다·
“설마···!”
“왜 그러시오?”
“운철검 어딨죠?”
“운철검이라니?”
“화조신옹에게 빼앗긴 그 단검 말이에요·”
“그게 운철로 만든 거였소?”
“세상에 그게 무엇인 줄도 모르고 여태 들고 다녔어요?”
이종산을 만난 첫날 얼렁뚱땅 챙긴 단검이 운철검이었다고?
말로만 들었지 운철을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알아볼 리가 있나· 누가 말을 해준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정말 운철검이라면 엄청난 귀물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운철검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운철검은 화조신옹이 가부좌를 틀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잠깐만 빌려주겠어요?”
남궁소소는 운철검을 건네받자마자 화조신옹의 배와 가슴을 휙휙 베고 그었다·
쇠를 두부처럼 자른다는 운철검이다· 한데도 흉갑은 생채기만 어지럽게 날 뿐 멀쩡했다·
“그래도 운철검이라고 생채기가 나긴 나는군요· 보통의 검이었다면 머리카락 같은 자국도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이게 뭔데 그러시오?”
“용린신갑(龍鱗神甲)·”
“용린신갑?”
“과거 십만대산에 뿌리를 내렸던 옛 마교의 보물이에요· 100 세를 맞은 교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교의 장인들이 대설산에서 나는 설강금(雪鋼金)을 1년 동안 두들겨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말만 들어도 엄청난 물건이라는 게 느껴진다·
“화조신옹이 선하령에서 혼자 백 명도 넘는 무림인들을 상대하면서 잡히기는커녕 오히려 절반을 죽였다는 게 내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 건 천하십대고수라도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
“···!”
“하지만 이제 알겠어요· 이걸 옷 속에 숨기고 있었으니 어떤 도검이 그를 벨 수 있었겠으며 어떤 암기가 그를 쓰러뜨릴 수 있었겠어요·”
“···!”
“축하드려요· 이제 용린신갑의 주인은 귀하예요·”
“이걸 내가···?”
“독을 타서 화조신옹을 죽였잖아요· 전리품은 원래 전주인을 죽인 사람이 갖는 것 아닌가요? 혹시 양보하시겠다면 평생의 은인으로····”
“보물이고 뭐고 간에 일단 추워서라도 입어야겠소·”
나는 잽싸게 흉갑을 벗겨서 입었다·
비늘 형태로 만들어서 그런지 흉갑은 입는 순간 약간 늘어나는 듯했다가 이내 일부러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이것도 옷이라고 한결 낫네·”
남궁소소 앞이라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나는 속으로 만세를 백 번쯤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지령의 천년진기를 취한 것도 모자라 이런 귀물까지 손에 넣다니· 이번 표행은 완전히 남는 장사 했다·
나는 일단 밖으로 나가 운철검으로 땅을 팠다· 그리고 화조신옹과 걸레쪼가리가 된 강시를 감쪽같이 묻었다·
다시 동굴로 돌아오니 남궁소소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 중이었다·
옆에는 그녀가 토해낸 것으로 짐작되는 검은 피가 한 움큼이나 있었다·
‘내상!’
마혈을 짚인 채 밤새 추위와 사투를 벌였던 것이 결정적 원인인 것 같았다·
실제로 그녀는 반쯤 황천강을 건너다가 나 때문에 돌아왔다·
그 후유증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게다가 아직 마혈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 걷지도 못했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딜 가세요?”
“개구리라도 좀 잡아 오겠소·”
“추워서 다 들어갔을걸요·”
“토끼라도 쫓아다녀 보겠소·”
시원하게 잡아오겠다는 소리가 차마 안 나온다·
힘은 세도 무공을 모르니 토끼 한 마리도 마음대로 잡을 수가 없다·
차라리 느린 곰이라도 돌아다니면 등에 올라타 목을 졸라서 잡을 텐데·
“잠깐만 이리로 와서 앉아 보세요·”
말을 하는 게 꼭 잔소리하려는 마누라 같다·
곁으로 다가가 앉으니 남궁소소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이 며칠인지 아세요?”
“글쎄올시다·”
“닷새밖에 남지 않았어요·”
“뭐가 말이오?”
“회시 말이에요·”
“그 얘긴 왜 하는 거요?”
“서두르면 북경까지 충분히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소저의 다리가····”
“전 이미 가짜 신분을 들켜 버려서 회시를 볼 수 없어요· 만약 그랬다간 국법을 조롱한 죄로 큰 처벌을 받을걸요·”
“나 혼자 가란 말이오?”
“전 이 동굴에서 닷새 정도 더 쉬면서 운기행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마혈이 아직 풀리지 않은 것도 있지만 내상이 생각보다 심각해서요· 모르시겠지만 추위는 남궁세가의 내공진기와 상극이에요·”
“정그러면 내가 업고 인근에 있는 의원까지 데려다 주겠소· 하다 못해 마을까지만이라도·”
“여긴 진령(秦嶺) 한복판이에요· 온통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가장 가까운 화전민도 사흘은 가야 만날걸요· 화조신옹이 마지막에 이르러 일부러 이런 장소를 택한 거예요·”
“미안하오· 내가 일류 고수였다면 이럴 때 대법으로 진기라도 나눠 주었을 텐데 아시다시피 일초반식도 모르는 무식쟁이라····”
남궁소소는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귀하는 제게 무적의 고수예요· 백 명이 넘는 무림고수들도 어쩌지 못한 화조신옹을 쓰러뜨리고 저를 구해주었잖아요·”
“···!”
“제 걱정은 마시고 빨리 북경으로 가세요·”
“그렇다고 해도 소저를 혼자 두고 갈 순 없소·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닷새 동안 혼자 무얼 먹고 지낸단 말이오· 혹시나 늑대같은 맹수가 나타날지도 모르고·”
“이틀이나 사흘 정도는 굶어도 상관없어요· 사흘 후에는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을 테니 밖으로 나가 뭐라고 찾아보면 되고요· 그리고 늑대는····”
남궁소소가 갑자기 돌멩이 하나를 주워 저만치 굴러다니는 쇠솥을 향해 던졌다·
따앙!
돌멩이는 부서져 버리고 쇠솥은 깨질 듯이 울어 댔다· 만약 저게 사람 머리였다면 그대로 즉사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늑대 몇 마리 정도는 감당할 수 있겠죠?”
말은 태연하게 했지만 배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내공을 끌어 올리느라 무리한 탓이다·
“정룡 공자 귀하는 확실히 소문으로 듣던 것과 많이 달라요· 그러나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회시는 귀하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표국 내에서 입지를 다지는데도 그렇고요· 꼭 좋은 성적으로 급제 하시길 바래요·”
“천룡표국에서도 그렇고 남궁세가에서도 그렇고 우리 때문에 모두가 걱정하고 기다릴 것이오·”
“그건 제가 닷새 후 남궁세가로 돌아가는 즉시 천룡표국으로 사람을 보내 무사함을 알리겠어요· 그간의 사정도 적당히 숨길 건 숨겨서 설명해 드리고요·”
“무얼 숨긴단 말이오?”
“천지령이 똥과 함께 냇물에 씻겨 내려갔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겠어요? 괜한 오해는 사지 않는 게 좋아요· 말이 나온 김에 서로 입도 맞추도록 하죠·”
“···!”
“화조신옹은 천지령을 복용한 후 황하(黃河)를 넘어 북쪽으로 갔어요· 우리는 인질로 끌려가던 중 황하를 건너기 직전에 화조신옹이 잠든 틈을 타 도망쳤고요·”
좋은 생각이다· 머리 좋은 여자랑 다니니 이게 편하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나는 그때부터 바빠졌다·
우선 밖으로 나가 마른 나뭇가지들을 잔뜩 구해와서 모닥불가에 쌓아 두었다·
그런 다음엔 황소대가리만한 돌들을 주워다가 동굴 입구에 차곡차곡 쌓았다·
예전 같았으면 굴리지도 못했을 돌인데 지금은 멀리 던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궁소소는 잠깐을 이용해 또 운기행공 중이었다·
동굴 입구를 거의 막은 다음에는 솥에 물을 가득 떠다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옷 속에 담아온 알밤을 와르르 쏟아 놓았다·
“이걸 어디서 구했어요?”
“근처에 밤나무 숲이 있소·”
“잘됐네요· 조금씩 나눠 먹으면 사흘은 충분히 버틸 것 같아요· 모닥불을 피우면 밤에 춥지도 않고요·”
나는 진짜 마지막으로 운철검을 건네주었다·
“혹시 모르니 갖고 계시오·”
“이걸 왜···?”
“오해하지 마시오· 어디까지나 빌려주는 거니까· 생각 같아선 그냥 주고 싶지만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거라 내 맘대로 할 수가 없소·”
“마음에 없는 소린 거 표나요·”
“지금부터 하는 말은 진심이오·”
“···?”
“내가 만약 회시에 급제한다면 그리고 무림의 고수가 된다면 훗날 귀하가 세우는 유가문파의 속가장로가 되고 싶소· 물론 허락해 준다면·”
“천룡표국은 어쩌고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귀하는 천룡표국의 사공자시잖아요· 어쩌면 훗날 꿈꾸시는 것처럼 명표로 이름을 날리다 부친의 뒤를 이어 국주가 될지도 모르고요·”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내가 국주가 된다고 해도 유가문파의 속가장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소· 참고로 내 아버지께서는 인근 선광사(善光寺)의 속가제자이시오· 물론 선광사가 소림사처럼 무림 세력은 아니지만·”
정말 못할 것도 없다· 천룡표국은 가업의 성격을 지닌 무림세가이고 남궁소소가 세우겠다는 유가문파는 소림사나 무당파처럼 종교에 기반을 둔 문파일 테니까·
다만 그렇게 되면 천룡표국과 남궁소소가 세운 유가문파는 혈맹의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유가문파를 세울 수 있을까?
내가 명표가 되고 천하십대고수의 말석을 차지하고 끝내는 새로운 표왕이 되어 천룡표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정말 꿈같은 이야기들이다·
“좋아요· 꼭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항주에서 봅시다·”
“건투를 빌어요·”
“소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