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오지산 천지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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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천지령을 잡은 사람은 해남도의 평범한 약초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가 잡은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다가 그만 무림인으로 짐작되는 누군가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죠·”
귀물은 본래 피를 부르는 법이다· 경험 많은 늙은 약초꾼이었다면 분명 조심했을 터인데 젊은 약초꾼이 제 명을 재촉했다·
“이후 천지령을 손에 넣은 사람은 계속해서 보다 강한 고수에게 죽어 나갔습니다· 그러다 한 달쯤 전엔 강서성에서 어떤 마두가 마지막으로 차지했고요·”
“모산파의 도사께서 말씀하신 그 마두로군요·”
“그렇습니다· 이후 마두는 강서성과 절강성의 경계에 있는 선하령에 숨어 들었습니다· 선하령은 백 리에 걸쳐 뻗어있는 데다 대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수림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마두는 그곳에 은거하며 사람들을 눈에 보이는 족족 산 채로 잡아다 천지령의 먹이로 던져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을 지렁이의 먹이로 던져 주었다고요?”
“천지령의 독성이 너무 강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산채로 먹여 중화해야 한다더군요· 저도 그 방면으로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면 양민들이 백 명씩이나 죽었다는 게?”
“그렇다고 합니다·”
“이런 쳐죽일!”
“이후 마두는 백여 명의 고수들로부터 협공을 받았습니다· 무려 닷새 동안이나 숨고 싸우기를 반복한 끝에 절반이 넘는 무림고수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마두 역시 중상을 입고 선하령의 더 깊은 숲으로 숨어 버렸고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무림인들이 대거 몰려들었습니다· 흑도와 백도를 구분할 것 없이 난다긴다하는 무림인 천여 명이 선하령 일대에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편 채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지만 아직도 마두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게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입니다·”
“마두가 아니라 영물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군요· 가만 혹시 우리가 운송하고 있는 아홉 구의 강시들도···”
표사 하나가 조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사람들로 하여금 표행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들게 할 수도 있었다·
설사 사실이라 할 지라도 표행 중에 쟁자수도 아닌 표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건 좋지 않다·
내가 한마디 하려는데 남궁소소가 가로챘다·
“선배님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영물을 탐하는 사람들만큼이나 그것이 악인의 손에 들어가는 걸 우려하는 협객들도 많을 것입니다· 전 그렇게 확신합니다·”
장량기도 표사를 나무랐다·
“아홉 구의 강시와 그들이 속한 문파는 나도 잘 아는 곳이다· 그들이 영물을 욕심내 선하령을 올랐을 지는 모르나 과거 협의가 높았던 무인들인 것 또한 사실이다· 망자들에 대한 예의를 갖춰라·”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남궁소소에 이어 장량기까지 나서자 표사는 황급히 꼬리를 내려 버렸다·
내가 다시 장량기에게 물었다·
“그 마두는 도대체 어떤 인간입니까?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테니 이것이야말로 더는 비밀일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화조신옹(花釣神翁)이라는 늙은이입니다· 광동성 십만대산에서 홀로 초옥을 짓고 살던 자인데 풍류스러운 별호와 달리 반미치광이에다 수법 또한 잔인하여 광동 무림인들이 치를 떨었다더군요·”
“어떻길래 치를 떨기까지 했다는 겁니까?”
“그에겐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대꾸를 해도 죽이고 노려 보아도 죽이고 보지 않아도 죽인다고 합니다· 또한 제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그와 대화할 때는 최소 3장의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이는 3장 안으로 들어가면 이미 그에게 목숨을 맡긴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빠릅니까?”
“이미 선하령에서도 증명을 했다시피 마두(魔頭)라는 말이 전혀 부족하지 않을 정도지요· 초절정고수인 것만은 분명하고 특히 철판을 찢고 바위를 쪼갠다는 백골추명조(白骨追命爪)는 무림일절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적은 아닐 것 아닙니까?”
“일생에 단 한 번 패배를 했는데 그게 현 남궁세가의 가주이신 뇌검 남궁무룡 대협과의 일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제왕검(帝王劍)의 일초에 당한 검흔이 아직도 얼굴에 번개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더군요·”
슬쩍 남궁소소를 돌아보니 눈동자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역용을 한 처지에 마음 놓고 자랑도 못 하고 속이 얼마나 답답할까·
“만에 하나 그를 만나면 대꾸도 하지 말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면서 최소 3장 이상의 거리를 유지해야겠군요· 이걸 누가 완벽하게 지킬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 같습니다· 선하령에서 어떻게든 잡혔더라면 좋았을 것을·”
“예?”
“객잔의 무림인들에게서 또 다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선하령의 천라지망이 뚫린 것 같다고요· 천여 명의 무림인들이 번견(番犬)까지 동원해 선하령을 샅샅이 뒤졌지만 화조신옹도 천지령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답니다·”
마지막 말은 사실이지만 아직 이곳까지 전해지지 않은 다시 말해 내가 임시변통으로 앞질러 지어낸 말이다·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 정도면 만에 하나 화조신옹을 만나더라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우왕좌왕 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막상 그때가 되면 여전히 기절초풍하겠지만 최소한 머릿속의 혼란을 빨리 끝낼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전에서는 촌각의 판단과 결정에 생사가 갈리는 법이다·
“이런 벌써 밤이 깊었군요· 다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안전한 귀환을 기원하며 술이나 한 잔씩 들이켜고 해산하죠·”
나는 허리춤에 묶어둔 조롱박 호리병을 풀었다· 이어 한 모금을 쭉 들이킨 후 장량기에게 내미는 순간이었다·
쾅!
굉음과 함께 관을 실은 마차가 터져 나갔다· 예닐곱 개의 관짝이 반쯤 부서진 채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강시들을 토해냈다·
잠시 후 아무런 대책도 없이 텅텅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강시들에게선 더이상 망자의 존엄 따윈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때 아직 마차의 바닥에 남아있던 관 중 하나에서 늙은 강시 한 구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
“···!”
“···!”
강시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한차례 세차게 흔들었다·
이어 좁은 관짝의 좌우 판자를 양손으로 잡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마차에서 내린 강시는 주위를 한동안 둘러보다가 아무나 대답하라는 듯 말했다·
“여기가 어디냐?”
그러더니 만사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또 말했다·
“그냥 모두 죽어라·”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자기 강시가 관짝들을 부수며 깨어나 말을 하는 것도 미칠지경인데 밑도 끝도 없이 모두 죽으라니·
“다들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마시오!”
“육검진(六劍陣)을 펼쳐 강시를 제압하라!”
앞말은 내가 뒷말은 장량기가 외쳤다·
채채채챙!
오랜 세월 장량기와 함께했던 다섯 명의 표사들이 일제히 도검을 뽑아 들고 강시를 덮쳐갔다· 그런데····
뻐버벙!
세 명의 표사가 동시에 나가떨어져 버렸다· 나머지 두 명은 칼도 떨어뜨리고 강시의 양손에 목줄기를 잡힌 채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그때쯤엔 장량기가 장검을 뽑아 들고는 강시의 정강이를 질풍처럼 베어가고 있었다·
“죽엇!”
순간 강시가 양손에 쥐고 있던 표사들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후 허공으로 쭉 솟구쳤다·
이어 장량기의 뒤쪽으로 천근의 바윗덩어리처럼 뚝 떨어져 내렸다·
장량기가 벼락처럼 돌며 허리를 베어갔다·
하지만 그의 검은 궤적을 절반도 그리지 못해 뚝 멈추더니 갑자기 강시의 오른손으로 옮겨져 버렸다·
그 사이 강시의 왼손은 장량기의 목줄기를 움켜 쥐었다·
“컥!”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가불염의 다급한 전음이 들려왔다·
[조용히 넘어가긴 틀렸습니다· 지금 당장 사공자님만이라도 몸을 빼십시오· 더 늦으면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이 처음 나가떨어졌던 표사 세 명이 칼을 뽑아 들고 강시를 에워쌌다·
목줄기를 잡혀 버둥대다가 버려졌던 표사 둘도 역시 칼을 뽑아 들고 가세했다·
그 순간 가불염이 표사 한 명의 등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강시의 전권 깊숙한 곳으로 뛰어든 그는 칼끝으로 세 가닥의 빛줄기를 허공에 그려냈다·
훗날 그에게 금라도(金羅刀)라는 별호를 안겨주는 능공십팔도(凌空十八刀)의 절초였다·
“갈!”
그러나 가불염의 번개같은 기습조차도 단정하게 묶은 강시의 상투를 자르는데 그쳤을 뿐이었다·
가불염은 두 번의 날카로운 초식을 더 펼쳤지만 세 번째에서 유령에게라도 당한 듯 순식간에 칼을 빼앗겨 버렸다·
그리곤 장량기처럼 강시의 다른 손에 목줄기를 잡힌 채 번쩍 들어 올려졌다·
서 푼의 힘만 주어도 목이 부러져 죽어 버리는 상황· 두 사람은 그저 강시의 손목을 붙잡고 몸무게라도 줄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사이 강시는 묶여있던 머리카락이 풀어 헤쳐지면서 산발이 되었다·
안 그래도 흉측한 모습이 더욱 섬뜩해 보였다·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무공이었다·
특히 장량기와 가불염은 일류라고 평가되던 무인들인데 오초지적 조차 되지 않자 사람들은 모두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다들 3장 밖으로 물러나라니까· 어서!”
내가 또다시 일갈했다· 표사들이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반대로 나는 3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늙은 괴물 강시를 향해 차분하게 포권지례부터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선배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표사와 쟁자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시를 향해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다렸다고 하니 다들 놀라 나자빠질밖에·
한데 놀라긴 강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화조신옹 선배님이 아니십니까?”
“···!”
나는 일부러 화조신옹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표사와 쟁자수들이 바로 직전 장량기에게 들었던 말들을 상기하고 행동에 각별히 주의하기를 바라면서·
이번에야말로 표사와 쟁자수들의 눈이 허옇게 뒤집혔다·
그런데 사실 내가 훨씬 더 놀라고 당황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직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진짜로 호랑이가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내가 운송하고 있는 관 속에서 튀어나올 줄이야·
“네 놈은 누구냐?”
“우선 선배님의 수중에 잡혀 있는 저의 두 동료에게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면 반드시 선배님께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지금 나와 협상을 하려는 것이냐?”
화조신옹의 두 눈동자가 노랗게 변했다· 양손에도 힘을 주었는지 장량기와 가불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선배님께서 마음만 먹으신다면 여기 있는 우리 모두 파리 목숨인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도망도 못 갈 텐데 서두르실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우선 목이나 축이시지요·”
그러면서 나는 그때까지 들고 있던 술 호리병을 서둘러 화조신옹에게 던졌다·
술병을 받으려면 최소한 한 명은 손에서 놓아야 할 테니까·
예상은 적중했다· 화조신옹이 장량기를 홱 던져 버리고는 공중에서 술 호리병을 낚아챘다·
그리곤 두어 모금을 들이킨 후 말했다·
“소홍주(紹興酒)라 항주 놈들은 돈도 많으면서 이런 싸구려 술을 좋아한단 말이야·“
그사이 나는 표사들에게 재빨리 눈짓했다· 표사들이 얼른 장량기에게 다가가 이쪽으로 끌고 왔다· 다행히 목뼈가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았다·
아직도 화조신옹의 다른 손엔 가불염이 붙잡혀 있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하신 노 선배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객쩍은 소리가 많구나· 내가 화조신옹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또 무슨 뜻인지 말해 보아라· 호리병의 술을 모두 비우기 전에 끝내야 할 것이니라· 술이 떨어지는 즉시 모조리 죽여 없앨 것인즉· 그리고····”
“···!”
“내 허락 없이 한 놈이라도 도망치려 했다간 그 자리에서 이렇게 될테니 그리 알아라·”
말과 함께 화조신옹이 바닥에 있는 돌멩이 하나를 발로 툭 차올렸다·
돌멩이는 허공을 날아 어둠 속으로 사라지나 싶더니 ‘퍽!’ 소리를 끝으로 잠잠했다·
잠시 후 저만치 나무 꼭대기로부터 커다란 원숭이 한 마리가 뚝 떨어졌다·
한데 머리통이 박살이 나고 없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모두가 나를 보았다· 자신들의 생사가 나에게 달려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하령에서 있었던 혈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입장 바꿔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만약 노 선배님이고 중상을 입은 처지라면 어떻게 천라지망을 탈출할 것인가 하고요·”
“남 걱정을 했다고? 미친놈이군·”
“저라면 우선 번견들을 피해 천지령부터 빼돌리겠습니다· 그러려면 유일하게 천라지망 밖으로 나가는 무림인들의 시체만큼 좋은 숙주가 없었을 겁니다· 더구나 시체의 악취는 번견들로부터 천지령 특유의 고약한 냄새까지 감출 수 있지요·”
“그래서?”
화조신옹의 표정이 굳어졌다·
“홀가분한 몸이 된 저는 몸에 남은 천지령의 냄새를 지우고 선하령 깊은 곳에 숨어 부상을 치료한 다음 나중에 천라지망을 뚫고 나가 천지령을 회수하겠습니다·”
이는 내가 추론한 것이 아니고 전생에서 표사와 쟁자수들이 몰살당한 후 천룡표국의 일급 표사들이 현장을 조사하고 분석했던 내용이다·
표사들은 전부 화조신옹이 외부에서 나타났다고만 생각했다·
한데 그들이 틀렸다· 화조신옹은 강시로 위장해 처음부터 관속에 있었다·
그것도 모른 채 저 괴수를 마차에 싣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더 소름 돋는 건 처음 모산파의 도사에게 이끌려 강시들이 천룡표국으로 들어왔을 때 화조신옹은 내상을 입기는 했으나 멀쩡한 정신으로 강시 흉내를 내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나저나 대체 어떤 자극이 주어졌기에 저 인간은 전생에서 보다 이틀이나 앞서 깨어난 것일까?
“한데 제가 틀렸군요· 처음부터 이렇게 저희가 호송하는 관 속에서 강시로 위장해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로 미루어 아마도 지금 그 모습 역시 노 선배님의 진짜 얼굴이 아니겠지요?”
화조신옹은 실로 대단한 인간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체로 위장해 무려 이십일 가까이 관 속에 누워 지내려면 세 가지 상승의 공부가 필요했다·
첫째는 인피면구 제조술이고 두 번째는 근육을 일시적으로 변형하는 축근공(縮筋功)이고 세 번째는 심장박동을 멈추어 끝내는 체온까지 싸늘하게 떨어뜨리는 귀식대법(龜息大法)이다·
나는 지금 겉으로는 태연한 척 말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벌렁거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목구멍으로 올라올 것 같았다·
하지만 표사와 쟁자수들은 속도 모르고 나의 분석과 추리력에 그리고 당면한 현실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선하령 밖으로 나가는 시체는 많았다· 내가 하필 네 놈들이 호송하는 강시에 천지령을 숨겼을 줄은 어찌 알았느냐?”
“천라지망이 뚫렸다는 걸 알았을 때 천하인의 눈은 당연히 광동성의 십만대산을 향하겠지요· 그러니 저라면 반대로 장강을 건너 북으로 향할 것이고 그날 선하령에서 죽은 무림인들 중 강북 무림인들은 아홉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천지령이 네 놈들이 운송하는 강시들 속에 섞여 있다는 걸 알았으면 왜 배를 가르고 꺼내지 않았지?”
“순전히 추측만으로 아홉 구의 배를 전부 갈라 보라고요? 아무리 천지령이 욕심나도 협명이 자자했던 망자들을 욕보였다가 그들의 문파로부터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요·”
화조신옹이 한 손으로 지금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쫙 찢었다·
그러자 불꽃이 타오르는 것같은 노란 눈동자와 함께 창백한 얼굴의 칠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선명하게 가르고 지나간 번개 모양의 흉터도 있었는데 남궁유룡의 제왕검에 당했다는 바로 그 칼자국 같았다·
무시무시한 화조신옹의 진짜 용모에 표사와 쟁자수들은 ‘아!’하고 낮은 신음을 터드렸다·
“놀라운 놈이로구나· 선하령에 몰려든 무림인 천여 명을 속였는데 고작 일개 표사에 불과한 놈이 간파했었다니·”
“선하령의 천라지망이 뚫렸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서야 저도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고 의문을 품다가 세운 가설입니다·”
“그래서 나를 기다린 이유는?”
나는 대답 대신 품 속에서 재빨리 폭죽을 꺼내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슈슈슉 펑!
화살은 밤하늘에 긴 꼬리를 만들며 날아오른 후 터졌다·
“뭐하는 짓이냐!”
놀란 화조신옹이 외쳤다·
“기다려 보시면 압니다·”
잠시 후 수백 장 밖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산릉선으로부터 개 짖는 소리가 일제히 울려대기 시작했다·
컹컹! 컹컹!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는지 듣기만 해도 투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개 짖는 소리가 시작된 다음에는 난데없이 신호용 폭죽이 사방에서 솟구쳐 올라 밤하늘을 수놓았다·
슈슈슉 펑! 펑! 펑!
폭죽은 어림잡아도 서른 개는 족히 되었는데 전부 이곳 숙영지 쪽을 향해 비스듬히 쏘아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 쏘아진 신호용 불화살을 놓친 사람들에게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좌표를 알려주는 것처럼·
귀곡성림에 사는 용화교의 척후병들이 사냥감의 출현을 본진에 알리는 신호였다·
상상도 못했던 나의 행동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화조신옹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저것들이 다 무엇이냐!”
“천라지망입니다· 선배님께서 마침내 나타났다고 신호를 보냈으니 길어야 한 식경 후면 남직예의 서른 개 문파에서 동원된 고수 천여 명이 번견을 앞세우고 달려올 것입니다·”
“···!”
“선하령에서는 용케도 뚫고 나가셨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선배님께서 목숨을 보존하실 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무림인들을 따돌리고 빠져나가는 길을 압니다·”
“···!”
“자 이제 선택을 하십시오· 제 동료들을 모두 살려보내 주고 저와 얘기를 좀 더 해보시겠습니까? 아니면···”
“···?”
“여기서 천지령도 빼앗기고 일천 무림인들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끝내 개밥으로 생을 마감하시겠습니까?”
마지막 말은 어금니까지 빠드득 갈며 말했다·
혹시라도 화조신옹을 만나거든 대꾸를 하지 말고· 똑바로 보지 말 것이며 3장 안으로 들어가지도 말라고 했다·
한데 내가 지금 그걸 다 하고 있었다· 심지어 협박까지 하고 있었다·
기왕 협박하려면 목숨을 걸고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여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진짜라고 받아들이고 공포를 느낀다·
남궁소소 가불염 장량기를 비롯한 표사와 쟁자수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에 협박까지 하는 내 모습에 넋이 나간 얼굴들이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비록 돌발상황이 발생했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만약의 경우를 위해 준비한 계획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까지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지만·
화조신옹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나를 잡기 위해 천라지망을 펼쳐놓고 기다렸다면서 빠져나가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 건 또 무슨 이유이더냐?”
하나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세 개의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한다더니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만약 누가 들어도 그럴듯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지금까지 내가 쌓아 올린 거짓말이 전부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한 가지 좋은 구실이 있기는 한데 그게 모양새가 좀 그랬다·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한번 쓰윽 본 후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천지령을 반 토막만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