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산적, 수적 그리고 쟁자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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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이 작다고 해도 범선이다·
돛이 바람을 잔뜩 머금었다고는 하나 비조선 삼십 척으로 하여금 범선을 끌고 범람한 강물을 오르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그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돛대의 꼭대기에 달려 펄럭이는 깃발이었다·
삼각형의 깃발 안에는 붉은 이무기 한 마리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저건!”
“저것들이 여긴 왜?”
“이리로 오는 것 같은데!”
“산채에 남아 있는 식구들을 전부 불러라· 어서!”
마지막 외침은 염왕도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슈슈슉 펑! 펑! 펑!
수십 장 높이로 솟구친 세 발의 폭죽이 굉음을 내며 터졌다·
그때부터 녹림들은 무장을 점검하고 대열을 정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체 뭔데 그러는 거죠?”
남궁소소가 내게 물었다·
“교룡채(蛟龍砦)라고 장사강을 비롯해 인근 수로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수적들이오·”
“수적들이 여긴 왜?”
“물속에 사는 이무기가 물 밖으로 나올 때는 무언가 물어서 끌고 들어갈 게 있다는 뜻이오· 오늘 아주 재밌는 구경거리가 벌어질 것 같소·”
교룡채 배들의 목적지가 너무나 분명한 터라 녹림들은 녹림들대로 표행단은 표행단 대로 잔뜩 긴장한 채 기다렸다·
잠시 후 비조선들과 범선이 차례로 도착했다·
온갖 괴상한 날붙이로 무장한 수적 이백여 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적의가 있고 없고를 떠나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중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두꺼운 목에 쩍 벌어진 어깨가 예사롭지 않은 그는 무려 이백 명의 수하를 거느린 교룡채의 채주 독각망(獨角蟒)이었다·
“장 표두 오랜만이외다!”
독각망이 먼저 장량기를 알아보고 호탕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교룡채의 채주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천룡표국에서 장사강 물길을 건너지 못해 쩔쩔 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우러 왔소이다· 껄껄껄·”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군요· 저희는 장사강을 건널 계획이 없습니다· 다만 강물이 범람하여 물에 잠긴 길을 지나려 했을 뿐이지요·”
“길을 덮고 있는 물은 장사강 강물이 아니랍디까?”
“무슨 말씀이신지?”
“장사곡 협도는 이제부터 우리 교룡채에서 관리할 것이오· 천룡표국은 어려운 점이 있으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되오·”
말인즉슨 이제부터는 자신들이 장사곡 협도의 통행세를 받겠다는 소리다·
장사곡 협도의 본래 주인인 대별채 채주 염왕도가 가만있을 리 없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염왕도가 허리춤에 매달은 대도를 덜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이백여 명의 수적들이 갑자기 이유도 없이 도검을 뽑아 들었다·
채채채채채채챙!
대별채의 산적 삼십 명도 도검을 뽑아 들었다·
채채챙!
눈 깜짝할 사이에 개 삶는 가마솥을 가운데 두고 대별채의 산적들과 천룡표국의 표행단과 교룡채의 수적들이 삼각형을 이룬 채 대치했다·
“귀하가 염왕도구려· 오래전부터 명성은 듣고 있었소이다· 난 교룡채의 채주 독각망이라고····”
“독각망이고 나발이고· 장사곡 협도는 오래전부터 우리 대별채의 영역이었소· 강물이 불어 길을 덮었다고 갑자기 수채의 영역이라니 이게 무슨 뱀장어 뭍에 오르는 소리란 말인가!”
“아시다시피 이곳 장사곡 협도는 연중 절반 이상 물에 잠겨 있소· 지금처럼 갈수기에 고작 하룻밤 폭우가 왔다고 범람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하면 당연히 장사강의 주인인 우리가 관리하는 게 맞지 않겠소?”
“어디서 통하지도 않을 궤변을! 당장 수하들을 물리고 배를 빼시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위쪽 산비탈에 숨어 있던 산적 삼십여 명이 활을 당기며 일어섰다·
산채에 남아 있던 병력을 싹싹 끌어모아 만든 매복조였다·
“쯧쯧쯧· 곤산에 산짐승이 한 마리 있어 말귀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귀하가 바로 그 산짐승인 모양이군· 뭣들 하느냐!”
이번엔 수적들이 각 열 명씩을 짝을 짓더니 돌연 뭍에 반쯤 끌어 올려놓은 비조선을 번쩍 들고 뒤집어 방패처럼 썼다·
“단언컨대 저 산비탈의 매복자들은 많아야 화살을 두세 발밖에 쏠 기회가 없을 것이오· 그 사이 우리가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이 산을 왜 곤산이라 부르는지 아시오? 그건 예로부터 곤(蜫)이라는 독물이 이따금 발견되기 때문이오· 우리는 아예 터를 잡고 살다 보니 보통 사람들보다는 좀 더 자주 보지·”
“곤산곤독!”
“곤산곤독이 뭐죠?“
남궁소소가 내게 물었다·
”곤산에서 드물게 사는 독사인데 물리면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죽는다고 해서 칠보사(七步蛇)라고도 하오·“
”그게 어쨌길래 독각망의 안색이 파래진 거죠?“
”녹림들이 화살촉에 바른 모양이오· 보통은 누르스름해지는데 시뻘건 걸 보면 떡칠을 한 것 같소· 저 정도면 스치기만 해도 즉사할 거요·“
“흑도는 흑도들이군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땅을 내놓으라는 놈들이나 상황이 다급해지자 화살에 극독까지 바르고 나서는 놈들이나·”
”괜히 도적놈들이라 하겠소·”
“그래도 다 나름의 수는 있군요·”
“원래 잔꾀는 도둑이 군자보다 나은 법이오·”
“그나저나 이러다 정말 전쟁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죠? 만약 그렇게 되면 이곳은 삽시간에 피바다로 변할 거예요· 화가 우리한테까지 미치지 말란 법도 없고요·”
전생에서는 남궁소소가 우려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 결과 대별채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장사곡 협도는 교룡채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승리한 교룡채에서는 범선에 표물과 마차를 실어 물에 잠긴 길을 건네주려고 했다·
하지만 범선과 땅을 연결하는 나무다리가 우지끈 터지는 바람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표행단은 다음 날 오후 물이 빠질 때까지 기다려서야 겨우 협도를 통과할 수 있었다·
애초에 전쟁을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죽는 사람도 다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표행단은 반드시 오늘 이 길을 갈 것이고 도적들은 한푼도 건지지 못할 것이다·
나는 표사들을 불러 모았다·
“장사곡 협도는 대대로 대별채의 영역입니다· 강물이 불어 범람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자신들 영역이라고 우기다니요· 이런 미친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우리로서는 어느 쪽도 편을 들어 주어선 안 됩니다· 만약 한 쪽을 편들어줄 경우 나머지 한 쪽과는 원수가 될 것입니다·”
“수채의 병력을 총동원한 걸 보면 대충 흐지부지 넘어가려고 뱃머리를 들이민 것은 아닌 듯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사공자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표사들이 한마디씩 의견을 피력하는 가운데 장량기가 불쑥 내게 물었다·
이 인간이 또 슬슬 약을 친다· 이번엔 또 어떻게 소몰이를 하는지 한번 들어나 보자·
“고약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오·”
“상황이 고약하다는 건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말씀인즉슨 사공자님께서 결정을 해주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게 표두의 역할이니까요·”
잔뜩 걱정하는 말투와 달리 입꼬리가 흔들린다·
이번에야말로 나를 골탕 먹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사흘 동안 표두 노릇을 하겠다고 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지금 이 상황 때문이라는 건 까맣게 모르고·
“장 표두께서는 짐작 가시는 바가 없으신가요? 교룡채가 갑자기 저렇게 나올 때는 분명 곡절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남궁소소가 갑자기 장량기에게 물었다·
교룡채가 저러는 이유를 알아야 해법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왜 하필 장량기에게 물을까?
그녀도 나를 표두로 인정하지 않는 건가?
“나도 황당할 따름이외다·”
“정말 모르십니까?”
“뭐요· 그 말투는·”
“궁금해서 여쭙는 것입니다·”
“내가 알면서 숨기기라도 한다는 뜻이오?”
“전혀 몰라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표행단을 이끌던 표두셨지 않습니까? 산채나 수채가 돌아가는 사정 정도는 파악하고 계셨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표두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오· 세상에 산채와 수채가 얼마나 많은데 그곳 돌아가는 사정을 다 파악하고 있단 말이오?”
“그것도 그렇군요·”
남궁소소는 간단하게 수긍해 버리고 대화를 끝냈다·
하지만 분위기는 마치 이 모든 게 장량기의 무능에서 비롯된 것처럼 되어 버렸다·
나는 그제야 남궁소소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 일로 내가 큰 곤란을 겪을 것 같자 나중을 위해서라도 책임의 비중을 슬그머니 장량기에게로 옮겨 두려는 것이다·
머리 하나는 정말 비상하다· 나중에 누군가와 싸울 일이 있다면 이 여자와는 꼭 같은 편을 먹고 싸워야겠다·
그리고 나도 가만있을 수 없지·
“아무래도 동사강(東沙江)의 일 때문인 것 같소·”
나는 슬며시 숟가락을 얹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작년에 황경산(黃瓊山)에서 녹림 오십여 명이 마차가 갈 수 있는 길을 닦았소· 그 바람에 이전까지는 회양지방으로 갈 때 동사강 수로를 이용하던 상단과 표국들이 전부 황경산 고갯길로 바꾸었소· 배로 짐을 옮겨 실었다가 내리는 수고도 덜고 시간도 하루나 절약할 수 있었으니까·”
가불염도 한입 보탰다·
“그 바람에 동사강 수채 하나가 작살 났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두고 장강수로맹에서 벼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다시 남궁소소가 이었다·
“이제 보니 교룡채를 앞세워 장사곡 협도를 먹은 다음 대별채를 아사시킬 작정이었군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더니· 곽연 흑도다운 발상이네요·”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한데 정룡 표두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표국 사람들이라면 전부 아는 유명한 사건이오· 다만 과거의 사건들을 조합해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하고 짐작했을 뿐·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오·”
“추측이 아니라 사실일 겁니다· 제가 장강수로맹의 맹주라고 해도 이런 일을 꾸몄을 테니까요· 정말 대단한 통찰력입니다·”
남궁소소가 필요 이상으로 나를 추켜세우며 장량기를 힐끔거렸다·
마치 ‘표두란 이래야 하는 것이오·’라고 말하는 듯·
나는 장량기에게 말했다·
“전낭이나 주시오·”
“···?”
“통행세를 주어야 할 게 아니오·”
장량기가 품속에서 전낭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보나 마나 동전 쉰 냥이 들어 있을 것이다·
산채를 만날 때마다 쉰 냥씩을 통행세로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쉰냥 짜리 전낭을 여러 개 만들어 놓는다·
“그걸로는 택도 없소·”
“이게 원래 액수입니다만·”
“평소라면 그랬겠지· 보시다시피 지금은 상황이 변했소· 설마 이걸로까지 날 골탕 먹일 생각은 아니겠지요?”
전낭 하나로 이 난관을 해결하라는 건 누가 보아도 억지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장량기가 전낭을 하나 더 꺼내 쥐고서 말했다·
“혹시 각 쉰냥 냥씩 나눠 주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라도 해결이 된다면야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만·”
이것 역시 누가 보아도 그렇게 해결될 턱이 없었다·
그래서 장량기도 흔쾌히 전낭을 하나 더 꺼내는 것이고·
“만약 분쟁도 깨끗하게 해결하고 오늘 중으로 길도 건널 수 있다면 전낭 하나를 더 쓰실 의향이 있으시오?”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야말로 누가 보아도 말이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장량기는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더니 결국 전낭 하나를 더 꺼내 도합 세 개를 땅바닥에 탁 내려놓았다·
그러나 전낭에서 여전히 손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이번엔 또 뭐요?”
“표사를 한 명 대동시켜 그로 하여금 전낭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표규에도 나와 있는 내용으로 분쟁이 생겨 적장과 마주할 때는 표사를 한 명 이상 대동하도록 강권하고 있습니다·”
사실이긴 하다· 전생에서 죽기 직전에 가불염이 정체불명의 적장을 만나러 나갈 때도 진평이라는 표사를 대동해 전낭을 들게 했다·
이는 표두가 하는 일을 한 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게하여 만에 하나 표두에게 문제가 생기더라도 표행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려는 조처였다·
전낭을 들게 하는 것은 일종의 안전장치고·
하지만 지금 장량기는 옆에서 대화를 모두 듣고 자신에게 말해 줄 쥐새끼를 붙이는 게 목적이었다·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권고이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칙도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제가 가야겠지만 그리하면 염왕도와 독각망이 저를 표두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 다른 표사를 한 명 붙여드리겠····”
“제가 가겠습니다·”
냉큼 나선 사람은 가불염이었다·
그는 장량기의 손바닥 아래에 있는 가죽끈을 홱 잡아당겨 전낭을 모두 빼앗아 버리는 신기까지 보였다·
부지불식간에 전낭을 빼앗긴 장량기가 눈알을 뒤집었다·
그러나 뭐라고 하진 못 했다·
가불염이 직급은 자신보다 아래지만 무려 총표두의 명령을 받고 나를 호위하기 위해 투입되었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함부로 반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건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량기가 붙여주는 쥐새끼보다야 입 무겁고 내 편인 가불염이 훨씬 낫다·
입 무겁고 내 편인 가불염 보다는 아예 입이 좀 가볍더라도 외부인인 남궁소소가 백번 낫고·
“나는 풍진양과 함께 가겠소·”
나는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를 좀 도와 주겠소?”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