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첫 번째 싸움(연재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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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기면 표두를 하겠다는 말에 지켜보고 있던 표사와 쟁자수들은 눈이 가자미처럼 툭 튀어나왔다·
장량기도 말문이 막히는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싫소?”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듯 표행 중에도 표두를 함부로 바꾸지 못하도록 표규(鏢規)에 정해져 있습니다·”
“표두가 제 역할을 못 하고 표사나 쟁자수들을 위험에 빠뜨릴 때는 바꿀 수도 있다고 들었소만·”
“표사의 절반 이상이 동의하고 그중 한 명이 표두에게 비무를 요청해 꺾으면 가능하긴 하지요·”
“아깝네· 머릿수가 모자라네·”
머릿수만 맞으면 비무로는 얼마든지 꺾을 수 있다는 듯한 내 태도에 장량기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하면 사흘만 내게 표두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은 어떻소? 그 정도는 몸이 아프거나 할 때 표두의 직권으로 가능한 걸로 아오만·”
처음부터 내가 원한 게 이거였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사흘만 전권을 휘두를 수 있으면 된다·
장량기는 내 의중을 파악하느라 한참이나 눈알을 굴렸다·
그러나 결국 받아들일 것이다·
약을 바짝 올려놓는 바람에 어떻게든 내가 산적에게 맞아 쓰러지는 걸 보고 싶을 테니까·
“입표식을 치르다 행여 다치시기라도 한다면 이 몸은 당주님과 국주님으로부터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 싸움은 내가 고집을 피워 나선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모든 책임 또한 나에게 있소· 이 정도면 됐소?”
“사공자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고맙소·”
돌아서자 남궁소소와 가불염의 얼어붙은 표정이 보였다· 순간 머릿속에서 가불염의 목소리가 불쑥 울렸다·
[꼭 하셔야겠습니까?]
전음(傳音)이었다· 최소 30년 이상의 공력이 있어야만 펼칠 수 있는 기예·
나는 전음을 시전할 수 없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쩔 수 없군요· 만약 힘에 부친다고 판단되면 ‘갈!’을 외치십시오·]
유사시 자신이 뛰어들겠다는 소리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이갑룡의 사람도 아니고 이을룡의 사람도 아닌 가불염이 갑자기 지원조에 투입된 걸 보고 총표두의 배려라는 걸 알아차렸다·
십중팔구 가불염은 나를 보호하라는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필요 없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공터로 나아갔다·
장량기에게 신호를 받았는지 입산식을 하니 마니 하던 신참 산적놈은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처음부터 그런 놈은 없었으니까·
각양각색의 산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도를 든 놈 도끼를 든 놈 얼굴에 칼자국이 가득 한 놈 목덜미에 호랑이 문신을 새긴 놈 등등·
하나같이 피 냄새가 진동했다·
그 와중에도 약한 놈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누가 보아도 나약해 보이는 체구에 서열도 낮을 것 같은 자들·
나는 그런 자들을 모두 지나쳐 커다란 바위에 나른한 모습으로 기대앉아 있는 놈을 박도로 찌르듯이 가리켰다·
“거기 대가리 큰 놈!”
좌중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지목을 받은 사내는 주변을 두어 번 둘러보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
“그래 너· 나와!”
놈이 고개를 한차례 갸웃하더니 쓰윽 일어났다·
저게 인간이야 고목이야 싶을 만큼 거대한 놈이었다·
한 손엔 5척에 달하는 철퇴를 들었는데 끄트머리에는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쇠뭉치까지 달려 있었다·
장대한 기골과 칼자국 가득한 얼굴 그리고 큼지막한 철퇴에서 느껴지는 흉성은 오히려 채주인 염왕도를 능가했다·
녹림도 삼십여 명은 어처구니없음에 배를 잡고 낄낄 댔다·
반대로 표사와 쟁자수들이 있는 우리 쪽 진영에서는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하필 골라도 가장 강한 놈을 골랐기 때문이다·
그르륵 그르륵·
놈이 철퇴를 바닥에 끌며 다가왔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바보 아냐? 소개를 해야 알지·”
“난 우마왕(牛魔王)이라고 한다· 대별채에서 부채주직을 맡고 있지·”
“채주는 염왕도고 부채주는 우마왕이라· 누가보면 천하십대마인들이라도 모여 사는 줄 알겠군· 산채는 코딱지만하면서· 난 이정룡이다· 대천룡표국의 신입표사고·”
나는 초장부터 반말까지 해가며 거칠게 몰아 붙였다·
입산식도 그렇고 입표식도 그렇고 원래 이렇게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조롱에 욕까지 해가며 기싸움을 한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또 그런 재미로 보고·
“제법 큰 소리를 치는군·”
“벼락이 떨어지기 전에 천둥부터 울어대는 법이지·”
“왜 날 지목했는지 물어도 되겠나?”
“원래 제물엔 소대가리를 최고로 치니까·”
“버르장머리 없는 놈!”
우마왕이 철퇴를 끌어 올리며 날아들었다·
장대한 기골만큼이나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머리가 박살 나버릴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보통의 무인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힘이 엄청나지만 대신 팔다리가 워낙 커서 궤적도 컸고 궤적이 큰 만큼 빈틈 또한 컸다·
시간을 느리게 보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최적의 상대였다·
반면에 우마왕에게 나는 상극이었다·
호랑이가 멧돼지를 잡아먹지만 바로 그 멧돼지의 먹이에 불과한 독사에게 물려 죽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상이 맞았다· 일단 이능력이 발동되자 우마왕의 빈틈은 더욱 커졌다·
나는 솟구쳐 올라오는 철퇴를 향해 박도를 힘차게 내리쳤다·
꽝!
둔중한 금속성과 함께 손목이 시큰했다·
언제 떠났는지 모르게 내 손을 떠난 박도는 팽글팽글 돌며 허공을 날았다·
동시에 훅 덮쳐오는 놈의 쇳덩이 같은 주먹!
경황 중에도 나는 허리를 살짝 비틀어 놈의 주먹을 코앞에서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냈다·
이어 재빨리 두 걸음을 크게 물러났다·
그 순간 허공으로 솟구쳤던 철퇴가 이번엔 왼쪽 어깨를 향해 뚝 떨어져 내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이능력이 없었다면 내 어깨는 박살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이능력이 있고 우마왕의 철퇴 정도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쾅!
공연히 내 뒤에 있었다가 철퇴를 맞은 바위가 날카로운 파편들을 튀기며 부서졌다·
어처구니없게도 첫 합에 박도를 떨쳐 버려 한 번의 공방조차 벌이지 못한 나는 피하고 도망치기에만 급급했다·
최소한 우마왕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승기는 방심을 부르고 방심은 약이 바짝 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리한 공격을 하게 만든다·
“요 쥐새끼!”
우마왕이 크게 한 걸음을 다가가오며 철퇴를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려 왔다·
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내려친 일격이었다·
철퍽!
철퇴는 좀 전까지 내가 딛고 있던 곳의 진흙탕 속으로 깊이 처박혔다·
덕분에 비록 짧은 순간일망정 우마왕의 상체 또한 앞으로 한참 숙여졌다·
지금이다·
“죽엇!”
나는 몸을 던지며 우마왕의 머리끄덩이를 양손으로 덥석 잡아당겼다·
무르팍으로는 놈의 안면을 힘차게 쳐 올렸다·
쩍!
찰진 소리와 함께 묵직한 타격감이 전해졌다·
성난 우마왕이 상체를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나는 머리끄덩이를 앞으로 확 잡아 당겨 무게 중심을 무너뜨리는 한편 또다시 무르팍으로 안면을 쳐 올렸다·
쩍!
같은 동작으로 한 번 더·
쩍!
또 같은 동작으로 한 번 더·
사량발천근(四兩拨千斤)이라는 말이 있다·
넉 량의 힘으로 천 근을 움직인다는 뜻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딱 그랬다·
오늘 낮 남궁소소는 내게 일차로 열두 개의 중요 혈도들을 가르쳐 준 후 이렇게 말했다·
[잘 모르겠으면 그냥 얼굴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세요· 얼굴은 눈·코·귀·입이 다 모여 있어 아무데나 대충 찍고 때려도 전부 치명적이니까요·]
이것도 세 번을 하자 더는 통하지 않았다·
“으아아!”
우마왕이 괴성을 지르며 나를 멀리 떨쳐내버렸다·
씩씩거리며 나를 찾는 우마왕은 눈 주변이 피칠갑 되어 앞을 보지 못 했다·
나는 재빨리 다가가 우마왕의 옆무릎을 발등으로 힘차게 후려 찼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우마왕이 무릎을 털썩 꿇었다·
“다됐어· 조금만 참아!”
나는 마지막으로 옆에서 쓰러지듯 비스듬히 몸을 던졌다·
그러곤 오른쪽 팔꿈치로 우마왕의 관자놀이에 있는 상관혈(上關穴)을 죽기 살기로 까버렸다·
뻑!
남궁소소에게 배운 요혈 중 하나 이곳을 때리면 순간적으로 뇌가 진탕 당해 코끼리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고 했다·
세 번의 안면 강타에 이은 무릎차기와 상관혈 타격까지·
우마왕은 ‘꺽!’ 소리를 마지막으로 엎어지더니 그대로 감감 무소식이었다·
“씨발 이게 진짜 통하네· 헉헉····”
***
“분명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몸인데 어떻게 그처럼 빠른 속도로 피하다가 마지막엔 역전까지 할 수 있는 거죠?”
“무공을 모르는 건 어떻게 아오?”
“손발의 움직임이 딱 그래요· 형(形)도 없고 식(式)도 없고· 뭐랄까 그냥 본능대로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싸울 줄 모른다는 뜻이군·”
“천만에요· 타고난 싸움꾼이라는 뜻이에요·”
“······?”
“세상에 이런 무재를 지니고도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니· 왜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고 살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군요·”
칭찬인지 험담인지 모를 남궁소소의 말에 나는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졌다·
어쨌든 나의 실력에 감탄했다는 소리일 테니까·
한편 염왕도를 비롯해 녹림 삼십여 명은 그야말로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명색이 대별채의 부채주가 천룡표국 신입 표사의 입표식에 제물로 끌려나와 무참하게 발렸으니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얼마나 속이 끓겠나·
나무 그늘로 옮겨진 우마왕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긴 했다· 하지만 코가 내려앉고 앞니까지 대여섯 개가 쏙 빠져버려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덩치를 보아하니 먹성도 보통이 아닐 것 같은데 이제 고기는 다 먹었군요· 불쌍해라· 하긴 부채주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지금 고기가 문제겠어요·”
“······!”
살짝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싸우기 직전에 소대가리니 뭐니 하며 약이라도 올리지 말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표사와 쟁자수들은 산적들만큼이나 당황해 하고 있었다·
무공이라곤 일초반식도 모르는 자신들이 보기에도 개싸움을 하는 사공자가 그 무섭다는 대별채의 부채주를 곤죽이 되도록 팼으니 얼떨떨할 밖에·
그때 장량기가 다가왔다·
“무사히 입표식을 치르신 걸 축하드립니다·”
“모두 장 표두 덕분(?)이오·”
“실력은 충분히 증명하셨으니 지금부터 사흘 동안 표두의 권한을 사공자님께 위임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그러면서 장량기는 허리춤에 매어둔 조롱박 호리병을 풀어 내게 건넸다·
본시 표사건 쟁자수건 표행 중에는 호리병을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없다·
호리병에 물 대신 술을 넣어두고 다니다가 몰래 홀짝거리는 걸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단 한 사람 표두만큼은 예외였다·
표두는 술호리병을 허리춤에 묶어 다니다가 이런저런 응급상황에서도 쓰고 지친 표사들을 독려하며 한 모금씩 나눠 주기도 한다·
그런 규칙이 오랜 세월 이어지다 보니 평상시에는 아무것도 아닌 조롱박 호리병이 표행 중에는 표두의 권한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나는 호리병을 건네받아 허리에 차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가 많이 아프신 것처럼 보이오· 표행은 내게 맡기고 며칠 푹 쉬면서 맑은 정신을 되찾길 바라오·”
장량기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나는 감개무량했다· 표사가 된 지 불과 며칠 만에 비록 잠깐일망정 표두 노릇까지 해보다니·
기왕에 할 거면 제대로 해보자·
“가불염 표사·”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장 대별채의 채주에게 가서 입장을 확인하시오· 길은 터 줄 것인지 아니면 계속 시비를 걸 것인지·”
“알겠습니다·”
나는 이어 자리에서 쓰윽 일어나 표사와 쟁자수 전부를 쓸어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사흘 동안 표사들은 전부 말에서 내려 걸으시오· 대신 쟁자수들이 순번을 정해 한나절씩 표사들의 말을 타시오· 또한 표사들은 사흘 안에 모든 쟁자수들이 말을 능숙하게 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하오· 이는 표두의 명령으로 만약 거역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자가 있다면 천룡표국의 표규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오· 장량기 풍진양 가불염도 예외는 아니오· 이상 끝·”
밑도 끝도 없이 내려진 나의 괴상한 명령에 표사들은 모두 넋이 나가버렸다·
장량기와 남궁소소는 마지막에 자신들의 이름까지 거명되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쟁자수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가끔 전생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생각나곤 한다·
그때 내가 죽어가면서까지 시간을 벌어준 쟁자수는 모두 아홉이었다·
그중에 몇 명이나 살아서 도망쳤을까?
한두 명이라도 살아서 도망쳤다면 다행이다·
십중팔구 반나절을 도망가지 못하고 모두 죽었을 것이다·
평소에 말타기를 배워 두었더라면 절반은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일은 생각보다 꽤 자주 있다·
그때 염왕도를 만나러 갔던 가불염이 돌아왔다·
“내일 물이 빠지는 즉시 길을 터주기로 했습니다· 통행세도 그때 건네주기로 했고요·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숙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아직 모르는 거요·”
“예?”
그때였다·
둥··· 둥··· 둥···!
간헐적인 북소리에 사람들은 적아를 구분할 것 없이 소리가 난 강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강과 맞닿은 산모퉁이 아래로부터 등장한 것은 삼십여 척의 비조선이었다·
대나무 이파리처럼 좁고 기다란 비조선은 속도가 말처럼 빨라 수적들이 도망치는 상선을 추적해 에워싸거나 할 때 많이 쓰였다·
비조선엔 팔뚝 굵은 장정들이 서너 명씩 들어앉아 죽으라고 노를 젓고 있었다·
각각의 비조선 끄트머리엔 밧줄이 달려 뒤쪽에 있는 육중한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중이었다·
잠시 후· 또 다른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건 세 개의 커다란 황포돛에 선실까지 갖춘 내하(內河)용 작은 범선이었다·
둥! 둥!
북소리는 바로 그 범선에서 울렸다·
범선을 끌고 범람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삼십여 척의 비조선을 다그치는 소리인 것 같았다·
“저건 또 뭐야!”
“대체 저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