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너희가 강호를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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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오·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한데 왜 말을 그렇게 타십니까?”
”제 말 타는 게 어때서요?“
”엎드려 타고 계시잖습니까·”
“그게 그렇게 이상합니까?”
“매우 그렇습니다·”
“저기 장 표두님·“
”말씀하십시오· 사공자님·“
”이미 눈치채신 것 같은데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까부터 불알이 터질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안 됩니다· 표행을 할 때는 매일매일 가야 하는 구간을 미리 정해 놓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지기 전까지 장사곡에 도착해야 합니다· 사공자님 한 사람의 사정 때문에 지체할 수는 없지요·”
거짓말이다· 작년부터 새로운 길을 개척하면서 장사곡까지는 앞으로 세 시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한다·
나도 다 알고서 한 말이다· 장량기는 지금 날 골탕 먹이려 하고 있었다·
누굴 탓하겠나· 내가 말을 못 타서 생긴 일을·
말을 타고 균형을 잡는 게 이렇게나 힘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허리를 펴자니 아래로 떨어질 것 같고 엎드려 있자니 불알이 으깨질 것 같다·
“차라리 말에서 내려 끌고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끌고 가려면 말을 왜 가져 왔겠소?”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전 이만·”
장량기가 멋지게 말을 달려 선두로 나아갔다· 그러곤 다른 표사들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탔다·
망할 놈의 이정룡· 이 자식이라도 말타기를 잘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원래 그런 건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거니까·
장삼에게 듣기로 이정룡은 열세 살 무렵 말타기를 배우다 떨어져 팔이 부러진 일이 있었단다·
그 이후로는 무서워서 한 번도 타질 않았고 그 바람에 나까지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간 장량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표사들이 힐끔힐끔 돌아보며 낄낄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저것들을 확!”
남궁소소가 다가오더니 말머리를 나란히 붙였다·
말이 흔들리는 박자에 맞춰 엉덩이가 씰룩씰룩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면 힘들어서 얼마 못 가요·”
“아직은 참을만 하오·”
“귀하 말고 말 말입니다·”
“···!”
“등을 곧게 펴고 체중을 엉덩이 안쪽 좌골에 실으세요· 다리는 마체를 껴안듯이 자연스럽게 조이고요· 고삐는 두 주먹 사이로 통과시켜 양 젖 짜듯이 부드럽게 움켜쥐어야 합니다· 한번 해보세요·”
남궁세가의 영애이니 말은 기똥차게 탈 것이다· 지금은 자존심 같은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스승이 있을 때 얼른 배워야 한다·
“좋습니다· 잘했어요·”
“자꾸 떨어질 것 같소만·”
“네 발로 걷는 동물은 모두 특유의 움직임이 있어요· 지금은 그 움직임이 귀하의 몸에 체득되는 중이고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적응될 겁니다·”
“맛만 보여주고 빼는 거요?”
“짧은 시간에 다 가르쳐 줄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귀하가 국수 한 그릇 먹는 동안 장원급제한 비법을 모두 말해 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국수 여덟 그릇에 만두 추가·”
“만두는 원래 기본으로 까는 거 아닌가요?”
“죽엽청도 추가·”
“말머리의 흔들림에 고삐 쥔 팔의 움직임을 맞춰 보세요· 그러면 등과 허리로 이어지는 상체의 움직임도 자연스럽게 말에게 맞춰질 겁니다·”
나는 당장에 시키는 대로 했다·
맙소사· 무슨 해독제를 먹은 것처럼 단 한 방에 허리를 세우고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어때요?”
“만두값은 충분히 한 것 같소·”
“그럼 죽엽청 값도 해볼까요?”
남궁소소가 바싹 다가오더니 별안간 제 고삐로 내가 탄 말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끼랴!”
“어어엇!”
말이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잡았던 중심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뒤에서 표사와 쟁자수들이 왁자지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소소의 외침도 들려왔다·
“어깨를 낮추고 말에게 몸을 맡기세요!”
나는 빨리 시키는 대로 했다·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그러나 내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집중하자!’
시간이 느려지며 말의 움직임이 그대로 느껴졌다·
두 배나 빠른 속도로 생각을 하며 내 몸을 말의 움직임에 조금씩 맞춰갔다·
표행을 시작한 첫날 나는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리다 무려 다섯 번을 떨어져 굴렀다·
다음 날엔 네 번 그 다음 날엔 두 번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마침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엿새째 되는 날 나는 달리는 마상에서 안장의 이쪽저쪽을 타고 넘으며 길가에 핀 꽃까지 꺾을 수 있게 됐다·
“정말 빨리 배우시네요·”
“스승이 좋은 탓이오· 고맙소·”
“저도 웬만하면 생색을 내고 싶은데 이걸 저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군요· 이렇게 빨리 말타기를 배우는 사람은 정말 처음 봅니다·”
“뭘 그 정도까지나·”
놀란 사람은 남궁소소만이 아니었다·
표사와 쟁자수들은 단 엿새 만에 초보적인 마상기예까지 펼쳐 버리는 나의 습득력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제는 누구도 비웃지 않았디·
“말타기는 기본적으로 무공을 익히는 것과 같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몸놀림이 좋은데 왜 여태 무공을 익히지 않은 거죠?”
“대기만성형이라고 해둡시다·”
“기루와 도박장을 전전하느라 그런 건 아니고요?”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오·”
“조영영 소저와의 일도요?”
“그건 또 어찌 아시오?”
“항주의 유생들 사이에 파다하더군요·”
“이건 뭐 업보도 아니고···”
“조영영 소저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나요?”
“그녀를 본 적 있소?”
“아뇨· 못 봤습니다·”
“다음에 한 번 직접 보시오·”
“왜요?”
“생각보다 별로요·”
“소문에는 항주 삼대미인이라고 하던데····”
“물론 용모야 출중하지· 하지만 벌이 향기 맡고 날아들지 꽃 모양 보고 날아드는 건 아니잖소·”
“조영영 소저에게는 향기가 없다는 말인가요?”
“한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우주를 좋아한다는 뜻이오· 생각 습관 목소리 눈빛 말투 인품 가치관···· 한데 이런 것들은 용모라는 말 속에 들어있지 않소· 그리고 이런 것들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마련이지·”
“···?”
“조영영이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것은 맞소· 하지만 그녀를 여자로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요·”
“단호하시네요·”
“그래야 같은 질문을 또 안 할 테니까·”
“알았어요· 다신 묻지 않겠습니다·”
“고맙소·”
“그리고 우리의 계약건 말입니다· 표행을 가는 동안 귀하가 향시에서 쓴 답문이라도 먼저 볼 수는 없을까요?”
“그건 곧 시중에 나돌 텐데·”
“항주에서 제일 큰 서점에 갔더니 보름은 지나야 뒤로 빼올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전 당사자를 잘 아는데 구태여 기다릴 필요도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게 다 기억날지 모르겠네·”
“설마 이제 와서 발뺌하는 건 아니겠죠?”
“혈도를 좀 가르쳐 주면 기억이 날 것도 같고·”
“혈도요?”
“그때 고사장에서 귀하가 갖고 있는 판관필을 봤소· 그거 무림인들이 적의 혈도를 찍어 거꾸러뜨릴 때 쓰는 물건이잖소·”
“저도 무관을 들락거리며 호신으로 약간 익힌 정도에 불과해요· 누굴 가르치고 말고 할 수준이 아닙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남의 무공은 함부로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아실 것 같은데·”
“점혈법(點穴法)을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니라 혈도의 위치와 보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거요· 찌르면 목숨까지 앗을 수 있는 사혈(死穴) 말을 못 하게 하는 아혈(啞穴) 사지를 마비시키는 마혈(痲穴)· 뭐 그런 거 말이오· 그것까지 사문의 비밀인 건 아니잖소·”
“정말 그 정도도 모르고 있었다고요? 명색이 천룡표국의 사공자인데·”
“없던 일로 합시다· 나도 통 생각이 안 나오·”
“알았습니다·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그런데 왜 자꾸 귀하는 전부 말로 때우고 저만 뭔가를 주거나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요?”
“기분 탓이오·”
***
이레째 되는 날 갑자기 표행이 멈추었다·
선두에서 천룡표국의 표기를 들고 가던 쟁자수가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표행을 책임진 장량기를 비롯해 표사들이 자연스럽게 앞쪽으로 모였다·
나와 남궁소소도 표사였으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길 한복판에 놓여 있는 가시나무 가지였다·
발로 툭 차버리고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작은 가지 뭉치·
“사공자님은 왜 나오셨습니까?”
장량기가 뒤늦게 나를 발견한 것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표사들은 전부 모이는 것 아니었습니까?”
별말도 아닌 것 같은데 표사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웃지 않는 표사는 남궁소소와 강시 호송을 위해 특별히 투입된 가불염 밖에 없었다·
가불염은 전생에서 나와 함께 죽은 바로 그 표두였다· 물론 지금은 천룡표국의 일개 표사 신분이다·
서른 살의 젊은 가불염을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한데 지금의 이 상황 왠지 어디서 본 것 같다·
“왜 다들 웃는 것입니까?”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공자님께서 표사들 세계를 너무 모르시는 것 같아 그랬을 겁니다·”
“모르면 가르쳐 주십시오·”
“좀 불손한 말일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정 그러시면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래 표사들은 거인표사를 진짜 표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표국 내에 머물 때도 그러할진대 표행 중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이유가 뭐죠?”
남궁소소가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 자신도 거인표사로 고용된 처지이다 보니 살짝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야 당연히 표행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다못해 쟁자수들은 궤짝도 지고 마차도 밀며 쉴 때는 밥도 짓고 빨래도 하는 등 표사들의 수발까지 전부 들지만 거인표사들은 말만 표사지 하는 일이 없으니까요·”
나는 전생의 버릇대로 욕이 목구멍까지 나오려는 걸 꿀꺽 삼켰다·
표행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표두의 말은 곧 법이다·
심지어 출발할 때 내려졌던 국주의 명령보다도 앞선다·
온갖 돌발상황이 발생하는 표행길을 수백 리 밖에 떨어져 있는 국주가 모두 알 리 없기 때문이다·
표두의 위엄을 훼손하는 건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까지 놀고먹은 건 우리 두 사람이나 다른 표사들나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제가 표행에 대해 잘 아는지 모르는지 다들 어떻게 아시고 미리 결론부터 내려버리시는지?‘
”그럼 장난삼아 저와 내기나 하나 할까요?“
”내기라고요?“
”사공자님께서 좋아하시는 거잖습니까?“
이정룡이 한때 도박에 미쳤던 것을 꼬집는 말이다·
이 인간 말하는 뽄새 봐라·
말투만 깎듯이 하면서 슬금슬금 선을 넘어오네·
“장 표두님·”
“예 사공자님·”
“혹시 지난번 호백구 건으로 제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으십니까? 듣자 하니 그 표행에서도 배제되었고 둘째 형님께 불려가 고초도 겪으셨다고 하던데· 만약 그렇다면 죄송하게 됐····”
“천만의 말씀을요· 그때 일은 전적으로 수하들 관리를 소홀히 한 제 책임입니다· 사공자님께서는 전혀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럴 일도 아니고요·”
악감정이 남아 있는 게 맞다·
표사된 도리로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했더니 안 되겠다· 싹퉁머리를 고쳐 놔야지·
”그래서 무슨 내기를 하자는 겁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두 가지 질문에 정확하게 답을 하시면 무엇이든 사공자님께서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대답은 사공자님과 친우분 중 누가 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대답을 못 하면요?“
”오늘 저녁은 두 분이서 하십시오· 표사와 쟁자수들 몫까지 전부· 아 콩을 삶아 말들에게 먹이는 것까지도요· 어떻습니까?”
표행은 총 여섯 대의 마차에 여섯 명의 일반표사와 두 명의 거인표사 그리고 열두 명의 쟁자수로 구성되어 있었다·
말은 모두 열네 필· 이것들 모두가 먹을 밥과 콩을 단둘이서 삶으려면 아마 땀 좀 뺄 거다·
게다가 저녁밥을 짓는 것도 그렇지만 콩을 삶아 말에게 먹이는 것은 표사가 아니라 쟁자수들의 일이었다·
장량기는 거인표사인 내게 쟁자수들이 하는 일을 시킴으로써 모욕을 줄 속셈이었다·
봐라· 너의 위치는 고작 이 정도다··· 라는 가르침과 함께·
괜찮다· 하면 된다·
까짓거 30년을 했는데 오늘 하루 더 못 할까· 그러나 질문부터 들어보고·
”질문이 무엇입니까?“
”여기 길 한복판에 놓여 있는 가시나무는 강호인들이 뒤 따라오거나 마주오는 사람들을 위해 남기는 표식으로 통칭 흑화(黑話)라고 합니다· 흑화는 업계에 따라 방회에 따라 수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이건 표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흑화로 표사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 흑화의 이름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시겠습니까?“
‘표사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준다·
듣고 있던 남궁소소가 발끈하며 끼어들었다·
”표두님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정룡 공자와 저는 이번이 첫 표행입니다· 한데 표사들끼리만 아는 흑화를 어떻게 알····“
”악호난로(惡虎攔路)·“
장량기를 비롯해 표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뒤 쪽에서 흥미롭게 내기를 지켜보고 있던 쟁자수들도 뜨악했다·
”··· 고 있었네요·“
남궁소소가 뒤늦게 자신이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장량기가 다시 물었다·
”무슨 뜻인지도 아십니까?“
또 남궁소소가 끼어들었다·
”표두님 그것까진 솔직히 무리···“
”앞에 녹림들이 매복해 있다는 신호입니다·“
”··· 가 아니었네요· 푸하하·“
남궁소소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녹림이 있다는 데도 놀라는 기색은 없고 그저 내기에 이겼다는 생각에 날아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장량기는 흙빛이 되었다· 표사들은 입이 쩍 벌어져 아무말도 못 했다·
이번엔 쟁자수들이 뒤돌아 낄낄 거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궁뎅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저녁은 표두께서 지으십시오· 표사와 쟁자수들 것까지 전부· 아 콩을 삶아 말들을 먹이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새끼들이 까불고 있어· 지들이 표사질을 했다면 얼마나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