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교육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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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하고도 동쪽 경향대운하를 옆에 끼고 세워진 천룡표국은 무려 십만 평의 대지를 자랑했다·
상주하는 인원은 일천여 명 하루에만도 수십 대의 마차가 표행을 떠나고 돌아오는 천룡표국은 절강성에서 가장 큰 부호인 동시에 패자로 군림하는 무림세력이었다·
금력과 무력을 양손에 나눠 쥔 몇 안 되는 무림세가· 나는 바로 그 천룡표국의 장원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표물을 분류하거나 마차에 싣거나 말을 돌보거나 하는 등의 일로 분주했다· 그 와중에도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서호에 뛰어들었다더니 멀쩡하네·”
“셋째 형수가 될 여자를 짝사랑했다지?”
“낯짝도 두꺼워라· 나 같으면 한 달은 부끄러워서 못 나올 것 같구만·”
“보나 마나 또 도박장에 가는 거겠지·”
“도박중독이 무섭긴 무섭군·”
나는 복룡당(福龍堂)이라는 간판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신나게 씹어대던 사람들이 움찔 놀라더니 갑자기 열심히 일하는 척을 했다·
‘예정대로라면 여기 있어야 하는데····’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것이 아니다· 전생의 나는 천룡표국으로 들어오고 난 후 한동안 이곳 복룡당 소속으로 지냈다· 만약 또 다른 내가 여기서 일을 하고 있다면····
벌써부터 무섭고 떨렸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요?”
“접니다만·”
얼굴에 칼자국을 두 줄이나 새긴 장한이 창고에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두 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허리까지 숙이며 굽실굽실 하지만 삐딱하게 올려보는 눈이 영 불순하다·
나는 이 자를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이 무엇이오?”
“고중태입니다만·”
“직책은?”
“상자수입니다만·”
상자수는 쟁자수들 중에서 가장 경험 많고 노련한 우두머리를 말한다· 전생의 내가 바로 저 상자수를 하다가 도적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 죽었다·
“한데 무슨 볼일이라도···?”
“1년쯤 전에 들어온 쟁자수를 찾고 있소· 이름은 조연생이라 하고 나이는 스무 살쯤· 특징으로는 왼쪽 다리를 조금 절며 얼굴은 평범하게 생겼소·”
“허허허·”
“왜 웃는 거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고중태는 뒤를 돌아보더니 구경하고 있는 쟁자수들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여기 누구 절름발이 조연생이라고 아는 사람 있어?”
모두 대답은 하지 않고 실실 웃기 바빴다· 고중태가 다시 날 돌아 보며 말했다·
“없는 것 같습니다만·”
“없으면 없지 왜 다들 웃는 것이오?”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쟁자수놈들은 제가 따로 단단히 교육을 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한데···”
“···?”
“공자님께서는 표국일을 너무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쟁자수 일이 간단해 보여도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한 달씩 걷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애초부터 다리 병신을 뽑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특별한 재주를 가진 자는 예외로 한다고 들었소· 그는 글을 많이 알아서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이오·”
“글공부를 많이 했어도 병신은 병신이지요·”
“····!”
전생에서 사람들이 날 어떤 시선으로 보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면전에서도 좋은 소리는 안 했는데 안 보는 데선 지금처럼 더 모욕적인 말들을 지껄였을 것이다·
어쨌든 또 다른 나는 없는 것 같다· 그걸로 충분했다· 고중태와 쟁자수들의 태도는 괘씸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지난 일은 빨리 잊는 게 좋다·
“혹시 그자에게 판돈을 빌려주셨습니까?”
돌아서 가려는 나를 고중태가 붙잡았다·
“그자가 자신을 천룡표국 복룡당 소속 쟁자수라고 하던가요? 그래서 공자님께선 믿고 빌려주셨고요· 다음부턴 속지 마십시오· 그거 사기꾼들이 가장 흔하게 쓰는 수법입니다·”
여기저기서 쟁자수들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는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를 얼마나 만만하게 보았으면 구태여 돌아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저런 조롱을 할까?
이게 다 제 놈들이 속한 복룡당의 당주이자 삼공자인 이을룡이 평소 이정룡을 개뼉다귀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죽은 이정룡에게서 나를 보았다·
“이런 씨발놈들이····”
나도 모르게 전생에서 닳고 닳은 쉰두 살 욕쟁이 상자수의 평소 말버릇이 그대로 나오고 말았다·
어린 내게서 느닷없이 쌍욕을 얻어먹은 쟁자수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고중태는 눈에 살기까지 돌았다·
“뭐라고요···?”
“예?”
“방금 저희더러·······”
“뭐가요?”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고중태와 쟁자수들은 어금니까지 빠드득 갈았다· 내가 안 했다는데 지들이 어쩔건가·
그때 주변에서 표행을 준비 중인 다섯 대의 마차가 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어디로 가는 표행이오?”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좀 물어보면 안 되오?”
“복건성 남평으로 갑니다·”
“표물의 종류는?”
“말씀드려도 잘 모르실 겁니다·”
“거 참 더럽게 말 많네·”
이건 실수가 아니다·
일부러 그런 거다·
나도 모르게 또 쌍욕이 나갈지 모르니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 당하기 싫으면 자꾸 토 달지 말고 순순히 대답하라는 암시· 고중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게 왜 가만있는 사람을 건드려?’
전생에서 거친 쟁자수들과 밥 먹듯이 싸워가며 30년을 버틴 나였다· 고중태 같은 애송이 상자수 따위는 점심 반찬거리도 안 되었다·
“여우가죽입니다·”
맞다· 그때 그 표물이다· 오늘 떠나는 이 표행으로 천룡표국은 큰 손실을 보게 된다·
30년 전의 일인데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실제 그 시절로 돌아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여우가죽이 확실하오?”
“표국에서 잔뼈가 굵은 접니다· 아무렴 여우가죽을 모르겠습니까?”
“내 생각엔 여우털인 것 같은데·”
“예에? 하하하!”
그가 동조를 구하듯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과장스런 동작으로 한바탕 웃어 젖혔다·
그러자 다른 쟁자수들이 금제라도 풀린 듯 함께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공자님께서 오해를 하셨군요· 여우털과 여우가죽은 본시 같은 말입니다· 여우 가죽엔 당연히 털이 있으니까요·”
이 새끼들이 조자룡 앞에서 작대기를 휘두르고 자빠졌네· 오냐· 내가 30년 경력의 진짜 상자수다· 오늘 교육 한번 제대로 시켜주마·
그때쯤엔 주변이 오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공자가 장원을 거닐다 말고 갑자기 표행단을 붙잡아 시비를 거니 여기저기서 구경을 하러 온 탓이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까·
그중에 쉰 살 가량의 장년인이 앞으로 나오더니 내게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해왔다·
“사공자님 나오셨습니까?”
“누구신지····”
“장궤 전립성이라고 합니다·”
장궤(掌櫃)란 본시 돈 궤짝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표국에서는 표물의 가치를 감별하고 비용을 책정하는 등 표행 전반에 걸친 일들을 관리 기록하는 회계 담당자들을 말한다·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전립성은 쟁자수가 되겠다고 찾아왔을 때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날 고용해 준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표국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배웠고 30년을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마흔 살 때쯤이었나? 전립성은 한 달을 시름시름 앓다가 일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미 죽은 그를 이렇게 다시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알고 보니 전립성 장궤님이셨군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표국의 체계 안에 있지도 않은 제가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 시비를 일으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천룡표국은 대대로 이씨가문의 것이고 공자님께서는 바로 그 가문의 직계혈족이십니다· 비록 표국의 체계 안에 있지 않아도 잘못을 보면 충분히 문제 삼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그리 말씀해 주시니 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본시 표물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건 장궤들의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전 장궤께서는 이 표물들 전부 확인하셨습니까?”
“다른 신참 장궤가 확인하였습니다만 그 장궤 역시 저의 책임 아래 있으니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전 장궤께선 표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무엇입니까?”
“여우의 가죽입니다·”
“여우가죽입니까? 여우털입니까?”
순간 전립성은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걸 구별해서 말해야 한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는 듯·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조소를 띠었다·
“그렇게 물으신다면 여우털입니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뜨악해졌다· 놀라지 않는 사람은 마흔 중반 이상의 늙다리 쟁자수 두어 명뿐이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 표상(鏢箱-표물을 넣은 상자)에 든 물건은 요동으로부터 사흘 전에 도착한 흰여우의 겨드랑이 털가죽입니다· 강남의 부호들이 바로 이 털로 만든 호백구(狐白裘-모피 옷)를 좋아하는데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입니다· 해서 날씨가 쌀쌀해지는 이맘때면 호백구를 운송해 달라는 의뢰가 빗발치지요·”
“말씀인즉슨 흰여우의 모피라는 뜻인데 표국에서 흰여우의 모피를 구태여 다른 가죽과 구분하여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반 가죽과 털이 달린 흰여우의 모피는 운송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반 가죽을 담은 표상은 적당량의 마른 지푸라기만 넣어준 후 유지(油紙-기름종이)를 빈틈없이 발라 방수를 최우선으로 해야 하나 모피를 담은 표상은 유포(油布-기름 천)를 발라 방수처리를 하는 와중에도 반드시 바람이 솔솔 통하게 해야 합니다· 해서 일반 가죽과 흰여우의 모피는 품목 번호도 달리하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정이 길면 모근에 벌레가 생겨 털이 빠지거나 악취가 납니다· 따뜻한 남쪽으로 표행을 갈 때는 더더욱 조심해야 하고요·”
“이를테면 복건성 같은 곳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전 장궤께서는 이 표물들의 포장 상태까지도 최종 점검을 하셨습니까?”
내가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 노련한 전립성은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는 얼른 마차에 올라가더니 비와 햇빛을 막기 위해 1차로 덮어 놓은 거적들을 확 젖혔다·
그러자 유지를 바른 나무상자들이 잔뜩 모습을 드러냈다·
전립성의 눈이 허옇게 뒤집혔다· 그는 다른 마차들도 전부 올라가 표상을 확인하고는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전립성이 고중태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가 물었다·
“언제부터 포장을 바꾸었더냐?”
“오 오늘이 처음입니다·”
“한 번만 더 물을 테니 잘 생각해서 대답하거라· 그 대답 여하에 따라 네 놈 목숨이 달려 있은즉· 언제부터 포장을 바꾸었더냐?”
표국에서 장궤일만 30년 넘게 한 전립성이었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길에 고중태는 결국 체념한 듯 말했다·
“보름쯤··· 되었습니다·”
“어느 선까지 연관되어 있느냐?”
“예?”
“보름 동안 이곳 복룡당에서 운송한 호백구만 마차로 정확히 일흔아홉 대다· 이걸 고작 상자수에 불과한 네놈 선에서 독단적으로 했을 리 없을 터 어느 선까지 연관되어 있냐고 묻는 것이다·”
유지와 유포는 가격 차이가 스무 배 정도 난다· 물론 유포가 더 비싸다· 종이를 만드는 데 드는 품과 베를 짜는 데 드는 품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만약 유포를 발라야 할 곳에 유지를 발랐다면? 중간에서 누군가 해먹은 놈이 있는 것이다· 비싼 유포를 빼돌려 다른 곳에 팔아넘겼다거나 하는· 그런데 이걸 고작 상자수에 불과한 고중태가 혼자서 해 먹었을까?
“그건·······”
그때였다· 구경꾼들 틈에서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더니 고중태의 면상을 가격했다·
퍽! 소리와 함께 나자빠진 고중태를 그림자가 다시 무차별적으로 짓밟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