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2화
‘그랬을 것 같진 않은데·’
요네르는 속으로 생각하며 열쇠로 탑의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 잠긴 탑의 문이 철커덕 소리와 함께 열리더니 따뜻한 공방의 공기가 훅 흘러나왔다·
“교수님이 계시진 않겠지?”
“이 시간에는 에인로가드 사막에서 선인장 돌보시지· 들어가자·”
교수의 스케줄을 시간 단위로 파악하고 있는 친구의 철두철미함은 가이난도도 놀라게 만들었다·
“이한은 어떻게 저런 걸 다 외우는 걸까?”
“너도 마법사 카드 글자 하나하나 다 외우잖아·”
“그··· 그게 왜 나와!”
뒤에서 둘이 떠드는 동안 이한은 재빨리 1층부터 확인했다·
아무리 교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마탑 안에서 방심해서는 안 되는 법·
혹시 모르는 사이에 추가된 경계 마법이나 함정부터 확인해야 했다·
‘없군·’
이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우레걸음 교수의 안일함 때문이었다·
아무리 제자들을 믿고 열쇠를 맡겨도 그렇지 이런 안일한 보안 의식이라니·
‘교수님도 참 허술하시다니까·’
물론 본인도 덕분에 편하게 털고 있긴 했지만 이건 이거고 제자로서의 본분은 또 다른 법이었다·
주변을 확인하던 이한은 탁자 위에 놓인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 위에 적힌 글씨체는 상당히 낯이 익었다·
‘···잠깐· 배그렉 교수님 편지잖아?’
이한은 여러 가지로 놀랐다·
먼저 볼라디 교수가 편지를 썼다는 사실에 놀랐고 우레걸음 교수한테 썼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원래라면 충성스러운 제자답게 교수님들의 비밀을 지켜줘야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편지지는 봉투 안에서 빠져나와 탁자 위에 대놓고 펼쳐져있었다· 이 또한 우레걸음 교수의 안일함 때문이었다·
‘교수님도 참· 정말 허술하시다니까· 어쩔 수 없군·’
이한은 편지지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붙잡고 그 내용을 우연히 읽었다·
수도· 긴급· 호출· 고나달테스 공· 강의 교환 부탁·
볼라디 배그렉
“????”
순간 암호인 줄 알았던 이한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 그러니까 교장 선생님이 수도에서 급히 부르셔서 떠났다는 건가?’
이건 이거대로 놀라운 일이긴 했다·
안 그래도 지금 몇몇 교수들이 해골 교장과 같이 수도에 가있는 상태인데 여기서 볼라디 교수까지?
‘···수도에서 반란이라도 났나??’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저히 무슨 이유 때문에 에인로가드 교수들이 저렇게 여럿 수도로 모여야 하는지·
만약 황제의 종족을 몰랐다면 정말 해골 교장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나 싶었을 것이다·
‘혹시 조우린이 사고쳐서 그런 건 아니겠지·’
찜찜해하던 이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해골 교장과 교수들이 수도로 올라간 건 그것보다 이전이었다· 조우린의 탈주가 원인일 리 없었다·
···아마도!
‘그보다 이 강의 교환은 뭐지? 설마 휴강 때문에 나중에 바꿔서 강의하겠다는 건 아니실 테고·’
무심코 정답을 짚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한은 고민에 빠졌다·
급하게 수도 가시는 분이 한가롭게 휴강 고민을 하고 계시진 않았을 텐데···
“이한?”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이한은 친구들의 목소리에 고민에서 깨어났다·
볼라디 교수가 수도로 간 건 간 거고 그들은 그들이 할 일을 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행운일 수도 있었다·
볼라디 교수와 미친 분신이 같이 강의를 한다면···
“····”
상상만 해도 오싹해지는 구성에 이한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한이 이상해· 혹시 마법에 당한 거 아니야?”
“하지만 여기 있는 물약들이나 향(香)들은 이한한테 영향을 못 주는데···”
가이난도와 요네르가 소곤거리자 이한은 미안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미안· 정말 괜찮아· 배그렉 교수님이 수도로 가셨다고 해서 놀랐을 뿐이야·”
“헉· 모르툼 교수님도 가셨어???”
“아니·”
“힝·”
가이난도는 시무룩해졌다·
왜 모르툼 교수님은 이것도 초대 받지 못하신 걸까?
“그보다 우레걸음 교수님이 뭘 하고 계셨는지 확인해야 해· 둘 다 도와줄 수 있겠어?”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조심스럽게 우레걸음 교수가 사용하는 공방 구역으로 접근한 뒤 단서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고급 종이 물병 붓 담뱃잎 아카시아 나무 수액··· 이건 무슨 마법일까 이한?”
“···그건 그냥 교수님이 궐련 만드시던 거다·”
“아·”
가이난도는 투덜댔다·
왜 사람 헷갈리게 공방 구역에서 담배를 손수 만든단 말인가?
“독환초를 쓰신 거 같은데·”
“새로 비약을 두 개 만드셨군···”
그래도 두 연금술 학파의 수재들이 있었기에 단서 추리는 빠르게 진도가 나갔다·
둘은 최근에 사용했던 재료들과 물약들을 빼놓고 그 중에서 강의에 썼을 것 같은 것들은 또 따로 빼놨다·
“코카트리스 독은 강의용일까 아닐까?”
“그거 강의용이야· 4학년 강의에서 썼다고 들었어·”
‘괜히 물어봤어···’
요네르는 후회하며 종이에 깃펜으로 선을 죽 그었다·
불운한 미래를 알게 되니 생각보다 더 불행해지는 기분이었다·
“유홍(硫汞) 세 살짜리 까마귀의 날개깃·”
“천둥새의 울음소리 구울 거인의 발톱·”
“수정 골렘의 핵 악공 버섯 만드라고라···”
“···단사(丹砂) 잠깐만· 이거 아를칸의 영절(永絕) 아니야??”
요네르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가문의 선조가 만든 제작법인 만큼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소 갖고 다니던 아를칸의 비전서를 꺼낸 요네르는 빠르게 책장을 넘기며 비교했다·
“맞는 것 같은데?”
“미안· 요네르· <메이킨 가문의 달콤한 판 초콜릿>이나 <메이킨 가문의 마법 같은 초콜릿 에클레어>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영절은 잘···”
“···그 그래·”
보통은 초콜릿이나 에클레어도 잘 모르는 법이었지만 요네르는 당황하지 않고 설명에 나섰다·
“독이야· 영혼 쪽으로 작동하는 독인데···”
말 그대로 영혼의 연결을 영원히 끊어버리는 지독한 독이었다·
살이나 피에 높은 독 저항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독은 버티기 쉽지 않았다·
‘이걸 왜 만드신 거지?’
이한은 우레걸음 교수가 이 독을 왜 만들었나 싶었다·
가이난도는 겁에 덜컥 질려서 외쳤다·
“혹 혹시 이한을 노리고 만든 거 아니야? 이한이 독 안 통하니까 화가 나서···”
“····”
“···아냐· 이것도 이한한텐 잘 안 통할 거야· 마력이 높으면 영혼 계통 접근도 안 통하거든·”
‘다른 방식으로 부정해도 되지 않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침묵했다·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은 우레걸음 교수가 미친 분신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가설이었다·
미친 분신이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렸고 도저히 못해먹겠다 싶었던 우레걸음 교수가 독을···
“···일단 해독제만 알아놔야겠다· 요네르· 비전서 좀 보여줄래?”
“여기·”
“고마워·”
요네르가 이런 걸 숨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가문의 비전서를 이렇게 선뜻 내주는 건 친구에 대한 믿음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한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책을 받아들었다·
“····”
“····”
“···이한 혹시 지금 초콜릿 에클레어 제작법 보고 있는 거 아니지?”
“미 미안· 너무 비범해서··· 과연· 산딸기가 비법이었군· 커스터드 크림만 생각했었는데···”
“궁금하면 나중에 보여줄 테니까 해독제 부분 보라고·”
요네르는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친구를 재촉했다·
가문의 비전에 감탄하는 건 솔직히 뿌듯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에클레어 제작법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는 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요리가 연금술의 일부라지만···!
“고마워· 요네르· 확인했어·”
“만들 거야?”
“···아무래도 만들어놔야 할 것 같아·”
이한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레걸음 교수님이 정말 독을 쓸 지 안 쓸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마법사 모두의 제자인 이한은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재료 챙기자· 이건 창고에 있는 걸로 만들기 힘들어·”
“이한· 이한!”
“하지만 그러면 여기 방문한 게 들킬 텐데·”
“···이한! 야! 요네르!”
“선배들이 한 걸로 해야 하나···”
“여기 보라고!!”
둘이 무시하고 대화하자 가이난도는 발을 굴렀다· 그제야 친구가 부르고 있다는 걸 깨달은 둘은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데?”
“이거 교수님이 만든 해독제 아니야?”
“····”
이한은 가이난도가 들고서 흔드는 물약병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해독제가 맞았다·
“이걸 어디서 찾았지???”
“교수님이 담배 만드시던 탁자 위에 두고 가셨어·”
“···우리가 할 소리는 아니긴 하지만 교수님이 너무 허술하신 거 아니야?”
요네르의 말에 이한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 * *
“스승님· 누가 마실 거나 먹을 걸 바쳐도 드시면 안 됩니다·”
“···혹시 정신이 나간 것이냐?”
아침·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제국의 언어들> 강의실로 같이 향하던 미친 분신은 ‘제자가 대체 왜 이러나’의 시선을 던졌다·
평소에도 예측하기 힘든 제자긴 했지만 오늘 발언은 정말 난해했다·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요즘 에인로가드에 음식이나 음료에 독을 타는 유행이 돌고 있다는군요·”
말하면서도 이한은 너무 개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나 미친 분신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럴 수 있겠군·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잦은 일이지· 제자 너는 선천적으로 독을 걱정할 일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예!”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반대쪽에서 제국 법무관으로 132년간 근무하고 있는 악마 오리퓰라스가 걸어왔다·
교수와 함께 강의를 도와주는 든든한 도우미···
아아아아아악! 안 돼! 안 돼! 나는 아직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오리퓰라스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반대쪽으로 도망치려고 시도했다·
물론 계약의 족쇄가 악마를 그냥 내버려두진 않았다· 로지네 교수는 도망치려던 악마가 계약에 붙잡혀서 캑캑대자 깜짝 놀랐다·
“왜 그러세요? 어차피 도망 못 가는 거 아시잖아요!”
악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강한 타격을 입히더니 일시적으로 역소환됐다·
“····”
“····”
이한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미친 분신은 상관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차피 왕족이 있는데 악마의 조언이 무엇하러 필요하겠나·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 아니에요· 이한 학생· 저도 오리퓰라스 법무관이 저렇게 사라지실 줄은 몰랐네요·”
“원래 악마 분들은 가끔씩 이상한 짓을 하시잖습니까·”
이한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로지네 교수가 ‘그걸 진심으로 말하는 건가요’하며 힐난의 시선을 던졌지만 이한은 못 본 척했다·
그러는 사이 미친 분신은 강의실 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이미 익숙해진 2학년 학생들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대마법사 님·”
“어 악마 법무관은 어디 갔어?”
누군가 의문을 표하자 이한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은 스승님께서 대신 도와주실 거다·”
“···워다나즈 이 추세라면 이주일 안에 다른 교수님들이 모두 사라질지도 몰라!”
친구들은 흥분해서 속삭였다·
워다나즈는 우연의 일치라고 했지만 이번 학기 유독 교수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저 교장 선생님의 분신이 조금만 더 있는다면 올해는 정말 에인로가드 학생들만이 있는 쾌적한 한 해가 될지도···
“저번에 이야기한 비전기하학은 깨달음을 얻었나?”
“····”
학생들은 모두 침묵하더니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미친 분신은 제자의 동료들이 거둔 아둔한 성취에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하루가 넘는 시간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니· 제자는 그 자리에서 익혔다·”
“아니···!”
이한은 미친 분신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지금 스승은 친구들 사이에서 이한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고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