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2화
이한은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숲의 회복을 위해서는 땅의 깊은 곳도 직접 살피셔야 하겠지요·”
“그런 것 같지는 않군·”
미친 분신이 옆에서 빈정거렸지만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여 여기는 무슨 일로··· 역시 이거 때문에 온 거지? 반신의 메아리···”
“네?”
이한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아! 그 유물 말씀이십니까!”
“?”
“???”
미친 분신도 일렌딜도 이한의 반응에 의아함을 표했다·
유물 때문에 온 게 아니라면 왜 여기 왔단 말인가?
“그럼 무슨 일로 온 거지?”
“파수꾼 클럽 회원에게 제 칭찬 좀 해달라고 부탁하러 왔는데요·”
“····”
미친 분신은 더 이상 경멸할 수 없을 만큼의 경멸을 담아 제자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는 건 일렌딜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반신과 관련된 유물을 연습하기 위해서 미친 분신을 데리고 방문하는 거라면 이해가 갔다·
그런데 고작 새로 들어온 발드로가드 놈을 속이려고 숲에 방문하다니·
그것도 해골 교장의 미친 분신과 함께!
“대··· 대체 왜 그런 짓을··· 나중에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지금 상대가 저를 너무 경계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두면 해결하기 어려울 거예요·”
“····”
그럼 그냥 내버려두면 안 돼?
일렌딜은 발드로가드 학생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에 쓸모가 있겠는가·
기껏해봤자 갖고 있는 재산을 뜯어내는 것 정도···
‘설마 그러려는 건 아니겠지?’
일렌딜은 문득 의심이 갔다·
예전에는 정령을 사랑하는 참 착한 후배라고 생각했었는데 미친 분신과 같이 다니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이 꽤 달라졌다·
미친 사람 곁에 계속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리 멀쩡해보여도 의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 빨리 일대일로 말을 걸어서 제가 나쁘지 않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걸 설득해주십시오·”
“나 나는 그런 거 자신 없는데···”
“무슨 말씀을· 4학년이시잖습니까·”
‘그게 뭔 상관이야···’
일렌딜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교우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1학년은 고학년이 올라가도 똑같은 것이다·
미친 분신은 시간 낭비를 막기 위해 끼어들었다·
“제자 너는 그 동안 인공 반신을 길들이도록·”
“선배님이 숲의 재생을 위해 쓰고 계실 텐데요?”
유물 <반신의 메아리>는 신성과 접촉하고 연결해 그 힘을 끌어내는 강력한 아티팩트·
일렌딜은 숲의 회복과 재생을 위해 이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었고 미친 분신은 제자를 괴롭히기 위해 아니 인공적으로 소환된 반신을 길들이기 위해 이 아티팩트를 사용하라고 하고 있었다·
“왕족이 직접 채널링을 열겠다· 이건 멜릿사로군·”
근처에 배치된 교단의 상징과 징표를 본 미친 분신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미숙한 제자면 모를까 미친 분신은 유물의 힘이 없어도 직접 신성의 힘을 끌어와 연결할 수 있었다·
“자르미스 교단 아닙니까?”
“이름이 바뀌었나보군· 흔한 일이다·”
사냥꾼의 신인 자르미스는 숲의 신으로서의 면모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친 분신이 살던 시절에는 멜릿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그 때도 사냥꾼과 숲의 신이었습니까?”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의 속성도 변하거나 추가될 수가 있는 거군요·”
“그런 셈이지· 제자 네가 인공 반신을 길들이려는 것도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훨씬 조악하고 거칠지만···”
대륙의 수많은 영혼들이 오랜 기간 동안 집단적인 무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힘과 마법사 한 명이 의식적으로 자아내는 힘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새로운 신을 탄생시킬 수도 있는 힘이었지만 후자는 기껏해야 인공 반신을 설득하는 정도인 것이다·
일렌딜은 클럽의 새 회원에게 접촉하는 일도 잊고 귀를 기울였다·
고대의 마법사에게 신성 변화의 역사를 듣는 건 이 드라이어드 혼혈 학생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과연··· 만약 신이 과거에 가진 다른 속성을 찾는다면 이 또한 활용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일렌딜은 후배가 그런 것까지 미리 생각하고서 질문한다는 것에 조용히 감탄했다·
저건 2학년이 할 만한 발상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스승님·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혹시 인공 반신을 길들이는 일을 피하려고 이렇게 길게 질문하는 것이냐?”
“···예·”
“시작해라·”
“예·”
“····”
일렌딜은 황당하다는 듯이 후배를 쳐다보았다·
뭐 저런···?!
* * *
이펠드렘:진짜 무례한 사람이에요!
“····”
새 발드로가드 회원과 일대일로 대화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설득하는 건 훨씬 힘든 일이었다·
비버-펭귄-여우:고나달테스가 좀 괴팍한 마법사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이펠드렘:흥·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이 다 괴팍하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괴팍할 줄은 몰랐어요·
‘아니 이 새끼가·’
일렌딜은 발끈했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가장 선량한 사람부터 가장 사악한 사람까지 누구든 발드로가드 학생한테 욕먹으면 발끈하는 본능을 갖고 있었다·
예전에 일렌딜은 불사조 탑의 착하다고 소문난 사제 친구가 발드로가드 학생에게 욕설을 퍼붓는 걸 본 적 있었다·
상대가 음식을 낭비하고 버리긴 했지만 만약 발드로가드 학생이 아니었다면 그 사제 친구도 조금은 더 참았으리라·
이펠드렘:그보다 저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비버-펭귄-여우:뭐지?
이펠드렘:참· 에인로가드 학생은 맞으시죠?
‘여기 너 말고 다 에인로가드 학생이야···’
상대는 아직도 이 클럽이 제국 전역의 마법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 파수꾼 클럽은 에인로가드 학생들만이 모이는 곳·
지금 발드로가드 학생을 제외하면 다른 외부인은 있을 수가 없었다·
비버-펭귄-여우:물론이지·
이펠드렘:혹시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 학생분을 아세요? 6학년 학생일 거예요·
“?”
물론 에인로가드에 일렌딜이 모르는 6학년 학생이 있을 수도 있었다·
어딘가 지하 깊숙한 곳이나 창공 높은 구름성채에 갇힌 100년 전의 6학년 선배가 튀어나와도 전혀 놀랍지 않은 게 에인로가드였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6학년 학생이 워다나즈 가문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저 옆에 있는 후배를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물론 아무리 발드로가드 학생이라 하더라도 2학년 학생을 6학년으로 착각하는 건 말도 안 되게 느껴졌지만···
일렌딜은 자신도 모르게 힐끗 후배를 쳐다보았다·
사령관·내힘을너무못이용한다·그래서는대륙을지배못한다·
“대륙 지배가 아니라 그냥 연습하려는 건데요···”
그래·대륙지배를위한연습·
“아니··· 그냥 연습 말하는 겁니다· 혹시 제가 난이도 높은 마법 시전할 때 성공률을 높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런시시한···
‘으음· 전혀 이상하지 않군·’
마법적으로 소환된 인공 반신과 대륙 지배 어쩌구저쩌구를 떠드는 후배를 보니 일렌딜은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누가 착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비버-펭귄-여우:잘 모르겠는데· 그 선배는 왜 찾는 거지?
이펠드렘:저번에 알자드크 선배님이 만나셨는데 엄청 대단한 마법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에인로가드 마법사들과 달리 친절하셔서 서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고요·
비버-펭귄-여우:???
일렌딜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아티팩트를 멈추고 후배를 다시 쳐다보았다·
“제 마법 말입니까? 지금 연습해야 하는 게 많긴 합니다· 요즘 워낙 다른 일들이···”
이한은 인공 반신과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인공 반신은 이한이 연습하고 있는 마법에 대해 물었다· 요즘 워낙 소세계니 뭐니 정신이 없었던 이한은 손을 꼽아보며 다시 점검해보았다·
소세계가 주는 강력한 이름값과 별개로 마법은 꾸준히 기초를 다져나가야 했다·
대정령의 힘이나 소세계의 이름값에 취해서 안일하게 행동하다가는 결국 자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물 원소의 심화 속성을 좀 더 공부해야 하고요·”
꼭 이한이 5서클 마법에 환장해서가 아니라 수옥탄까지 완성한 이상 물 원소 마법을 더 익히려면 다른 심화 속성을 더 공부해야 했다·
수옥탄은 저서클 마법에서 할 수 있는 물 원소 응용 속성의 총집결 같은 마법·
유미디후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기화 응결 압축 등등 다양한 상위 심화 속성을 익혀야 더 어려운 물 원소 마법에 입문이 가능해졌다·
사실 이건 볼라디 교수가 예전에 지시해준 거였기에 더더욱 눈치가 보였다·
이번 학기에는 워낙 일이 많았던 만큼 볼라디 교수도 의외로 괜찮다고 기다려줬지만 원래 안 그러던 사람이 기다려준다고 하면 더 눈치가 보이기 마련·
차라리 예전처럼 될 때까지 괴롭히면 마음이나 덜 불편할 것 같았다·
우우우···구리다···
“····”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인공 반신한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상대가 강력한 존재긴 했지만 마법적 지식만 놓고 보면 갓난아기와 별 차이가 없을 텐데 감히 에인로가드 2학년 학생한테 훈수를?
“아니 물 원소 마법 심화 속성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십니까? 이게 사실상 5서클들은 대부분···”
“하찮기 그지없군· 그런 건 남는 시간에 조용히 혼자 익히도록 하거라·”
“····”
옆에 있는 미친 분신도 한 마디 얹자 이한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저걸 뭘 어떻게 조용히 혼자 익힌단 말인가?
인공 반신부터 미친 분신한테 도움을 받아도 될까 말까인데·
“···알겠습니다· 물 원소는 넘어가고· 번개 원소도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어느새 번개 원소 마법이 물 원소 마법의 진도를 넘어간 상태였다·
<워다나즈의 뇌화>는 <워다나즈의 수옥탄>보다 한 서클 높은 마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번개 원소 마법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했다· 나중에 번개로 육신을 변화시키다가 어디 한군데가 날아가기 싫으면 최대한 미리 익숙해져놔야 했다·
우우우···구리다···
“····”
이 새끼가?
이한은 혹시 미친 분신이 인공 반신을 조종하나 싶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화염 원소? 저 지금 청염 이후로···”
구리다
“···환상 마법 학파 쪽으로 가서 영체 관련은 어떻습니까? 영혼 관련 마법을 더 익혀야 하는데·”
구리다
“흑마법은? 상위 언데드 소환부터 시작해서 익혀야 할 게 쌓여 있습니다·”
구리다
“····”
이한은 인내심으로 버티며 다시 질문했다·
각종 예지 마법(액운 피하기와 그 방어법) 변환 마법(더 강한 생물 변신) 소환 마법(새 차원 연결) 부여 마법(보조 아티팩트 제작) 치유 마법(육신 보호와 회복 마법 준비) 등등 온갖 질문들이 오갔고···
인공 반신은 전부 다 야유를 보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다른 반신 소환하죠·”
사령관?!너무잔인하다···!
인공 반신은 크게 충격 받아서 항의했다·
어떻게 자신을 이끌어야 할 사령관이 저렇게 못되게 굴 수 있단 말인가·
이펠드렘:저기요? 왜 아무 말이 없으세요?
비버-펭귄-여우:앗 미안· 지금 잠깐 정신이 팔렸어·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이···
이펠드렘:무슨 일인데요?
비버-펭귄-여우:넌 말해줘도 못 믿을 거야·
이펠드렘:에인로가드 학생들은 다들 허풍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
일렌딜은 다시 고개를 돌려 후배와 인공 반신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무도 믿지 못할 광경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