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2화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참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넌 앞으로도 여러 번 더 많이 할 테니 기억해둬·”
‘농담한 거였는데·’
이한은 어이가 없어서 선배의 커다란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기부를 약속받는 기묘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았다·
“여하튼 선배님·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충당이 된 겁니까?”
“푸흐흐· 워다나즈· 정해진 양이란 건 없다· 사실 이런 일을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됐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양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진행할 수 있다지만 그게 싫어서 이런 일을 먼저 나와서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부담 갖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 거다· 그리고 워다나즈 넌 이미 기대보다 몇 배는 더 잘 해줬어· 다른 클럽 일 때문에 힘들 텐데 말이야·”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의 추적을 피하다보니 어쩌다가 돕게 됐다고 말하지 못했다· 대신 공을 돌렸다·
“힘드신 것만 따지면 선배님이 더 그렇죠· 심지어 지금 4학년이시잖습니까·”
“우하하하· 워다나즈· 다른 선배들의 엄살에 너무 넘어가지 마라· 미리 공부 안 한 놈들이나 징징대는 거지 평소에 준비해뒀으면 4학년이라고 딱히 힘들 게 없어·”
“····”
웃으며 말하는 팔크리우스의 모습에 이한은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선배님이 저 덩치가 아니었다면 몇 대 맞았겠구나’하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시감이었다·
왜 팔크리우스의 말에서 낯익은 느낌이 드는 것일까?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군·’
주변에 거울이 없었기에 이한은 결국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난 받은 은혜가 있거든·”
“받은 은혜라니요?”
“예전 이야기다· 남부 정령 대기근 때 이야기지·”
팔크리우스는 두둑한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푸흐· 워다나즈· 지금은 이렇지만 어렸을 때 나는 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해서 비쩍 말랐었거든·”
농사라는 게 기본적으로 불확실한 기후와 농부가 맞서 싸우는 일이라지만 불행히도 대륙의 농부에게는 적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대륙의 풍부한 마력을 먹고 자라나는 마법적인 존재들이었다·
마법사들에게 정령은 교섭 가능하고 가끔은 복종도 가능한 편리한 존재였지만 대부분의 제국 사람들에게 정령은 두렵고 예측 힘든 존재였다·
그리고 그 두렵고 예측 힘든 존재들이 우연과 필연을 겪고 거대한 폭풍으로 뭉치면 제국에는 천재지변이 찾아왔다·
남부 정령 대기근은 이한도 들어본 적 있을 만큼 규모가 컸던 기근이었다·
풍족하고 온화했던 곡창 지역이 초토화되고 그 지역 사람들이 대거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들었는데···
“혼자서 헤매던 날 도와준 게 플레맹 교단의 사제들이다· 그 때 속으로 맹세했지·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겠다고·”
“선배님···”
“그리고 다시는 배를 곯지 않겠다고도 맹세했는데 그건 에인로가드 들어가면서 깨지더군· 우하하·”
“···선배님·”
이한은 방금 느낀 감동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푸흐· 워다나즈· 내 맹세 때문에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내 맹세는 나를 위한 거니까· 넌 너를 위한 맹세만 신경 쓰면 되는 거야· 제국 마법 발전에 인생을 바치겠다는···”
“그런 맹세 한 적 없는데요?!”
“어? 워다나즈 가문은 다들 그런 맹세 하는 거 아니었나?”
팔크리우스는 당황했다·
워다나즈 가문에 관련된 소문은 워낙 많아서 아직도 이렇게 잘못된 걸 깨닫곤 했다·
“뭐 대충 비슷하겠지·”
“조금도 비슷한 게 없습니다만·”
후배의 항의에도 팔크리우스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목적지는 제국 서부 연합 상회에 소속된 행상인의 집이었다·
쿵쿵쿵-
“종서넌이라고 밀을 크게 들여오는 사람인데 이번에도 기부해주기로 했거든· 후배 네 덕분에 시간이 남으니 미리 옮겨놔야겠어·”
“과연·”
“짐수레하고 마차를 좀 빌려야겠는데···”
“그냥 제가 들겠습니다·”
“음? 손이 안 될 텐데?”
“남는 건 마법으로 들면 충분합니다·”
“푸흐· 워다나즈 너는 가끔 미친 농담을 하는구나·”
“?!”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던 둘 앞에 나타난 건 새파랗게 질린 행상인이었다·
팔크리우스는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죄··· 죄송합니다· 팔크리우스 사제님· 약속한 밀을 드리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게···”
* * *
“빌어먹을 놈 같으니!”
팔크리우스는 씩씩대며 걸어갔다· 언제나 웃던 사제치고는 보기 드물게 분노한 모습이었다·
이한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행상인의 호소가 이한도 분노하게 만든 것이다·
종서넌이 확보해 둔 밀 포대를 가져간 건 그랑덴 시의 도시귀족인 바르단이었다·
권세 높은 그린벨 가문의 방계 귀족인 바르단은 최근 있었던 사악한 마법사의 습격으로 체면을 크게 구긴 상태였다·
자신의 체면도 회복할 겸 크게 연회를 열기로 결심했는데 이 준비 과정에서 행상인이 피해를 입었다·
원래 연회라는 게 귀족은 하하호호 즐겨도 아랫사람들은 준비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법·
심지어 사악한 마법사의 습격으로 재산을 크게 잃었어도 연회는 똑같은 규모로 열어야 했다·
바르단 휘하의 하인들은 헐값에 식재료를 사들이기 위해 종서넌을 찾아가 협박했다·
그랑덴 시에서 일을 하는 이상 바르단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만큼 결국 종서넌은 기부용으로 빼놓은 밀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워다나즈·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투명화를 걸고 문을 딸까요? 아니면 벽을 넘을까요?”
“···아니· 만약 내가 흥분하면 워다나즈 네가 날 말려달라고···”
혹시나 자신이 흥분해서 사고를 칠까 걱정했던 팔크리우스는 후배를 잘못 데려왔나 싶었다·
이 워다나즈 가문의 후배는 사고를 치는 데에는 뛰어나도 말리는 데에는 약해보였던 것이다·
“제가 선배님을 말입니까?”
“그래· 믿는다·”
‘가능할까?’
이한은 팔크리우스가 흥분하면 뒤에서 마법이라도 갈겨야 하나 싶었다·
“참· 선배님· 이쪽 골목길은 막혔으니 돌아가셔야 합니다· 저번에 바르단의 저택이 무너지면서 골목길도 막혔거든요·”
“워다나즈 넌 그걸 어떻게 알지?”
팔크리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신기해했다· 이한은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제가 다른 클럽 때문에 먼저 나왔잖습니까· 그 때 소문을 들었습니다· 웬 미친 마법사가 바르단의 저택을 습격했다더군요·”
“아· 나고 가문의 스테달? 나도 들었지·”
“····”
소문의 빠름에 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푸흐 혹시 교장 선생님의 제자는 아니겠지?”
“예????”
“왜 그렇게 놀라? 가끔 크게 사고치는 마법사들이 알고 보니 교장 선생님의 제자였던 경우가 종종 있었잖나·”
“아하·”
이한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팔크리우스가 이한을 의심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미친 건 자기 사치 때문에 기부용 밀을 강제로 가져간 바르단 놈이지· 스테달 같은 마법사는 미친 게 아니야· 워다나즈·”
선배의 칭찬에 이한은 쑥스러워했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팔크리우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흠· 그래도 위험한 마법사긴 하군·”
“예? 왜 갑자기?”
이한의 질문에 팔크리우스는 손가락을 뻗었다·
바르단의 저택은 아직도 폭주한 물의 정령이 남긴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마법사들과 석공 길드의 장인들을 불렀는데도 부서진 곳들이 곳곳에 보였으니 얼마나 날뛰었는지 짐작이 갔다·
“저걸 봐라· 아주 꼼꼼하게도 부쉈군·”
“···스테달이란 마법사는 그냥 평화롭게 저택을 방문했는데 실수로 저택을 지키던 정령이 폭주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우하하하· 워다나즈·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는 거지?”
‘크윽·’
이한은 자신이 보기에도 설득력이 부족한 말에 속으로 신음했다·
어느 마법사가 저택에 침입한 뒤 처참한 파괴가 일어났다면 누구나 ‘아 그 마법사가 부쉈나보다’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정말로 억울했다·
이한은 그저 잠입해서 의뢰 받은 아이템을 위치 이동시켰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저택 주인을 만나 기절시키긴 했지만···
‘정령이 폭주한 건 내 탓이 아니지 않나?’
“계십니까?”
팔크리우스는 큰 목소리로 안의 사람들을 불렀다·
연회 준비로 하인들을 쥐 잡듯 잡아대던 시종장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행상인 종서넌의 밀 때문에 왔습니다·”
“누구요?”
“이번에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과 신전의 사제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려 하는데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팔크리우스는 웃는 낯으로 최대한 좋게 설명했다·
원래 기부하기로 되어 있는 밀이었고 약속도 되어 있었는데 착오가 있었는지 저택의 하인들이 가져가버렸다·
돈은 돌려줄 테니 밀도 돌려줬으면 한다···
그러나 시종장은 시큰둥했다·
“안 되오·”
“···예?”
“안 되오· 우리도 주인님의 연회 준비 때문에 바쁘단 말이오·”
“은화는 돌려드린다고 했잖습니까·”
“그럼 또 하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새로 찾고 사야 할 것 아니오· 그렇게 시간 낭비할 순 없소·”
이한은 슬쩍 한 걸음 내딛었다·
혹시 상대가 격구에 미친 사람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상대는 날카롭게 쏘아붙일 뿐이었다·
“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제가 워다나즈 가문인데요·”
말하면서도 이한은 살짝 자괴감을 느꼈다·
평생 가문의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선배의 일을 돕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수치심은 감당할 만했다·
격구가 통하지 않는다면 가문이라도···
“···지금 협박하는 거요? 에인로가드의 마법사에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라고? 우리 주인님이라고 뒷배가 없는 줄 아시오?”
정작 주인인 바르단이 들었다면 ‘내가 만만한 놈들은 자주 협박했지만 워다나즈 가문까지 건드리는 건 조금···’하는 반응을 보였겠지만 원래 잘 모르면 용감한 법이었다·
아랫사람들 상대로 거만하게 부려먹는 데에만 익숙한 시종장은 힘의 크기가 어느 정도 차이나는지 잘 파악하지 못했다·
덕분에 수치심은 이한의 몫이었다·
꺼낸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웠는데 통하지 않으니 두 배로 리바운드가 돌아왔다·
“썩 물러나시오· 거지새끼들 배 채워줄 밀은 없으니까· 도시에서 쫓아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지·”
순간 이한은 팔크리우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걸 보았다·
아까 팔크리우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이한은 황급히 끼어들었다·
“선배님! 진정하시죠!”
“고 고맙다· 워다나즈·”
팔크리우스는 후배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후배 앞에서 사고를 칠 순 없었던 것이다·
“제가 괜히 말렸습니까? 그냥 습격할까요?”
“푸흐· 안 돼· 워다나즈· 저렇게 건방지게 군다고 다 습격하면 일 년을 통째로 써도 모자랄 거다· 돌아가자·”
마음 같아서야 정문을 부수고 싶었지만 팔크리우스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원래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저렇게 무례한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저 정도면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
둘이 물러나자 시종장이 문 뒤에서 중얼거렸다·
“하여간 사제들이란 거지새끼들하고 구분이 안 간다니까·”
“가자· 워다나즈· 저런 놈들하고 엮일 시간 없다·”
“선배님 먼저 가시죠· 저는 잠깐 들릴 곳이 있어서·”
이한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게 넘어가주려고 했는데 방금 말로 상대가 선을 넘은 것이다·
···아무래도 스테달 나고가 다시 한 번 나타나서 저택을 박살내야 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