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5화
“내··· 내 숲에서 인공 반신을···?”
일렌딜은 마치 추가 과제를 받은 가이난도처럼 간절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물었다·
제대로 들었지만 마치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예? 유물에 대한 권리를 나누기로 하셨잖습니까· 기숙사나 다른 마탑에 두는 게 더 좋을까요?”
“····”
이한의 말에 아픈 곳을 찔린 일렌딜은 입을 뻐끔거렸다·
일렌딜이 유물을 탐낸 이유는 숲의 회복과 생장을 위해서·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유물은 숲에 둬야 했다· 그래야 꾸준히 지속적으로 작용이 가능했다·
후배도 그걸 알고서 배려한 거겠지만···
‘진짜 싫어!!!’
그것과 별개로 숲 한복판에서 인공 반신을 길들이고 사악한 고대 마법을 시전하는 건 정말로 원하지 않았다·
일렌딜이 아끼는 숲이 어느 순간 ‘귀신 들린 숲’이나 ‘파멸의 숲’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그··· 위험하지 않을까? 후배 너한테는···”
일렌딜은 굼뜬 동작으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핑계를 떠올렸다·
그 말에 이한은 감동했다·
유크벨티레 이하까지 내려갔던 평가가 살짝 다시 올라갈 정도로·
‘그래도 사람이 나쁘지는 않구나!’
이런 걸로 평가가 올라간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인로가드들의 선배들을 평가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기준이 내려가는 것이다·
자신을 걱정해준 것만으로도 이한은 일렌딜의 평가를 다시 올렸다·
“선배님· 절 걱정해주신 겁니까? 하긴· 너무 위험해보이죠?”
“조용히·”
못난 제자를 닥치게 만든 미친 분신은 일렌딜을 쳐다보며 물었다·
“왕족이 제자에게 마법을 전수하는 데에 있어서 고언이 있다면 어디 한 번 발언해봐라·”
“···없어요···”
일렌딜은 다시 쭈그러들었다·
해골 교장처럼 생긴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기에는 일렌딜이 그 정도로 무모하지 못했다·
이한은 안타까워했다·
‘저렇게 치사하게 구시다니·’
대놓고 ‘야 불만 있으면 말해봐’하는데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제가 말해 봐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
“····”
미친 분신은 제자의 말을 끊어버린 뒤 <반신의 메아리>를 다시 조작했다·
붉은 기운이 짙게 흘러나오더니 사이한 비명이 단말마처럼 터져 나왔다·
지켜보던 이한이 슬쩍 물었다·
“다 된 겁니까?”
“그렇다· 악신의 힘은 유물 안쪽에 봉인해뒀으니 반신을 다 길들인 뒤 사용해보도록·”
“?”
정화나 단절을 했을 줄 알았던 이한은 멈칫했다· 일렌딜도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널 기억하겠다···
“···스승님· 악신이 저 기억한다고 협박하는데요·”
“악신은 기억하지도 원한을 갖지도 않는다· 말에 의미를 두지 마라·”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따라할 때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따라하지 않듯이 악신이 사람에게 말을 걸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적 존재는 인격을 가지고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법칙과 원리에 따라 말을 거는 것이다·
악신이 지금 이한한테 널 기억하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진정 기억한다는 게 아니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식의 접촉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악신에게 속박된 용병들은 이미 영혼이 잠식된 상태였겠지· 하지만 제자 너는 어떤 굴레도 없다· 악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위협뿐· 그 위협에 두려움을 가진다면 모를까 아무런 소용도 없다·”
사악한 힘과 숭배로 태어난 악신은 자신의 탄생원리와 규칙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려고 했다·
어떤 속박이나 저주도 통하지 않는 이한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런 계열의 협박으로 마음을 물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이한은 스승의 말을 이해했다·
새삼 소름이 돋았다·
무심코 상대하다보면 인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웠는데 악신은 마력처럼 그저 존재만 하는 순수한 힘이라고 봐야 했다·
그 이상의 의미 부여를 하고 두려움을 가지는 순간 오히려 악신의 힘을 증폭시키고 아무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굳이 아예 정화를 안 시키실 이유는 없지 않나?’
사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악신과 접촉할 수 있는 창구도 어떻게 보면 가치가 있긴 했으니까·
굳이 부수지 말고 나중에 활용할 수 있을 때 활용해보란 소리 같은데···
‘별로 좋은 소리 같지는 않다·’
일렌딜은 경악 충격 좌절 ‘대체 왜 나한테 이러세요’의 표정으로 미친 분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대 유물에 악신이 잠들어있다는데 찜찜함을 안 느끼기가 힘든 것이다·
미친 분신을 아무리 쳐다봤자 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일렌딜은 이한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한도 별 방법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아까 미친 분신이 무시하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마법 관련해서 스승을 설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한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미루는 것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반신을 길들인 다음 나중에 생각나면 한 번 말이나 걸어보겠습니다·”
“그러도록·”
“····”
두 사제의 모습에 일렌딜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후회했다·
이번 고대 유물 사냥은 득보다 실이 많은 것 같았다·
* * *
“그래도 선배님· 파수꾼 클럽에서 제 편 들어주시는 건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응··· 알겠어···”
미친 분신이 돌아가고 난 뒤 일렌딜은 부쩍 기운이 없어졌다·
에인로가드 학생은 원래 자주 우울해하고 기운이 없어지는 만큼 이한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참· 에인로가드로 바로 돌아가십니까?”
“맞아·”
“혹시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다른 학생의 도움을 받았어·”
일렌딜의 말에 이한은 속으로 신기해했다·
‘아니· 친구가 있으셨군!’
매우 무례한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렌딜은 유크벨티레처럼 친구가 없어 보였으니까· 휘하의 연금술 후배들 말고는 딱히 인간관계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유크벨티레도 디레트라는 친구가 있었다· 일렌딜에게도 충분히 친구가 있을 수 있었다·
‘혹시 디레트 선배는 아니시겠지·’
만약 일렌딜의 친구마저 디레트라면 이한은 살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떤 도움이요?”
“특수한 유리병인데···”
일렌딜은 느린 목소리로 설명해줬다·
유리병 안에 몸을 숨기는 비전인데 이 마법을 응용하면 에인로가드를 탈출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다른 학생들이 외출하는 기간에만 가능하단 단점이 있었지만 일렌딜은 애초에 외출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이 고대 유물 이야기만 없었다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연· 친구분은 그럼 어디 계십니까?”
“?”
후배의 질문에 일렌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데···?”
“···어 돌아가실 때 같이 만나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돌아가실 때는 다른 방법이 있어요?”
“다른 학생 찾으면 되는데·”
“···!!”
이한은 갑자기 섬뜩한 깨달음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혹시 아까 나올 때 학생도 잘 모르는 사이셨습니까?”
“으음? 응···”
‘도움을 받은 게 아니잖아!’
보통 남의 주머니에 몰래 들어가는 걸 ‘도움을 받았다’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한은 새삼 앞에 있는 사람이 에인로가드 선배라는 걸 깨달았다· 어딘가 뒤틀린 구석이 없다면 에인로가드 선배가 아니었다·
“과연· 그렇게 가시는군요· 혹시 저희 짐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한은 물론이고 친구들도 나름 물건을 숨기는 요령이 있었지만 언제나 절대는 없었다·
만약 데스 나이트들이 올해 학기 시작 때처럼 꼬장꼬장하게 굴면 일이 꼬일 수 있는 것이다·
미리 일렌딜한테 맡겨놓으면 위험부담도 줄고 다른 짐들도 옮기기 편해지리라·
“····”
일렌딜은 울상을 지었다· 선배의 표정을 읽은 이한이 다시 말했다·
“힘들거나 불편하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아냐··· 해줄 수 있어· 다만 문제가···”
“마법적인 문제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이한은 이번 의뢰와 별개로 필요하다면 얼마든 도와줄 생각이 있었다·
이한 일행의 짐을 옮기는 것이니 그냥 맡기기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후배들 다시 만나는 게 싫어서···”
“····”
익숙하지 않은 후배들 여럿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일렌딜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괜히 걱정했군·’
* * *
“감사합니다 선배님!”
“조 조용히 좀 말해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일렌딜은 결국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돌아갔다· 2학년 학생들은 자신들이 사람을 잘못 봤다며 호평했다·
“저 선배가 이런 부탁을 들어주실 줄은 몰랐는데·”
“맞아· 숲에 인공 정령을 소환한 사람이잖아· 그런데 이런 부탁을 들어주실 줄이야·”
‘저거 평생 가는 건 아니겠지·’
이한은 나중에 졸업한 뒤에도 일렌딜의 이름이 나오면 ‘그 숲에 인공 정령 푼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다·
다른 선한 일도 제법 한 사람인데···
“요네르· 앙라고하고 살코가 안 보이는데 어디 갔어?”
“아까 외출한다고 잠깐 나갔어· ···잠깐· 넌 어디 가려고?”
요네르는 친구의 복장을 보고 의아해했다·
평소 에인로가드식 거지 복장도 아니고 외출 때 사용하는 일반 마법사 복장도 아닌 팔과 다리에 찬 보호대와 저 장비들은 마치 격구 선수 같은···?
“격구 연습하러 가는데·”
“뭐!? 왜!?”
친구와 가장 안 어울리는 말에 요네르는 깜짝 놀랐다·
“···격구 클럽이니까?”
“아·”
그제야 요네르는 친구가 여러 클럽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한은 씁쓸하게 말했다·
“사실 나도 크게 자신은 없는데·”
“2학년이면 굳이 출전 안 해도 되지 않아?”
“희귀한 탈것을 너무 데리고 있어서···”
그리폰부터 시작해서 여러 희귀 탈것들을 데리고 있는 이한이 출전하지 않는다는 건 격구에 목숨 건 몇몇 선배들을 심장마비 걸리게 만든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한은 격구 클럽 경기가 있기 전까지 나름 벼락치기를 해놓을 생각이었다·
“복장이 아주 잘 어울리는군· 경기장에서 봤다면 좋은 선수라고 생각했을 거요·”
“맞습니다· 도련님· 그리고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분명 격구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실 테니 말입니다·”
아무르와 아리언은 이한의 속도 모르고 옆에서 칭찬했다·
‘괜찮을지 모르겠군·’
에인로가드에서 몇 번 했던 격구는 사실 탈것의 힘을 빌리고 마법의 힘을 빌렸던 변칙이었다·
카르넬라 같은 선배들은 이한에게 꽤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격구 선수들은 그 기술이 다를 터·
그대로 농락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경기 응원하러 가고 싶은데 우리는 아마 그 전에 돌아가게 될 거야·”
“뭐야· 워다나즈가 경기에 출전해?”
친구들은 매우 아쉬워했다·
같은 2학년 친구가 클럽의 대표로 경기에 나간다니· 이럴 때 응원하지 않는다면 언제 응원한단 말인가·
그러나 연극 클럽 외출 기간은 끝나가고 있었고 이제 슬슬 데스 나이트들한테 돌아가서 ‘귀환 시간에 맞춰서 돌아왔습니다 휴 궁전에 나타난 괴물 때문에 사람들을 열심히 도왔네요’하고 우길 시간이었다·
“그냥 안 들어가고 버티면 안 돼?”
“그럼 100% 징벌방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아산 말이 맞아· 경기 때문에 징벌방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한은 친구들한테 제 때 돌아가라고 말한 다음 아무르와 아리언에게 속성 격구 강의를 들었다·
남은 친구들은 아쉬워하며 귀환 준비를 했다·
새로 사들인 물건을 챙기거나 숨기고 놓고 간 거 없나 확인하고 학교로 돌아가서도 시약 작업을 할 수 있게 도구와 장비들을 기억해놓고···
···그리고 그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앙라고와 살코는 돌아오지 않았다·
“····”
이한은 아티팩트를 꺼냈다·
-앙라고· 너 혹시 납치됐냐?
-뭐? 납치된 거 아니야! 일단 너희 먼저 돌아가· 남은 일이 있어서 그래·
-···설마 격구 경기 보려고 탈주한 거 아니지?
-아아아아닌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희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젤은 경악했다·
대체 밖에서 멍청이들이 뭘 하고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