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8화
이한은 빠르게 포기했다·
생각해보니 요아넨 정도 되는 사람 앞에서 너무 안일하게 행동한 것이다·
‘젠장· 가이난도 흉내는 너무 어렵군·’
의외로 해골 교장 흉내보다 가이난도 흉내가 더 어려운 것 같았다·
포기한 이한은 요아넨의 자수정 안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 신분은 그걸로 확인하신 겁니까?”
“아니요· 워다나즈 님은 마력이 간섭을 일으켜서 안경으로 관측하기 쉽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논리적인 추측이에요·”
요네르의 언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법에만 몰두하는 마법사는 언제나 중요한 걸 놓치기 쉬웠다·
요네르 옆에 있는 지성 있는 친구라면 몇 명 되지 않았다· 그 중 가이난도의 이름을 빌릴 만큼 친한 사람은 워다나즈뿐이었다·
“워다나즈 님도 기억해두는 게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오늘 배운 걸 기억해두겠습니다·”
둘은 포기하고 순순히 변장을 풀었다· 문득 위화감을 깨달은 이한이 질문했다·
“그런데 메이킨 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로···?”
생각해보니 여긴 보가준 황자 휘하의 공방이지 요아넨의 공방이 아니었다· 요아넨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요아넨과 다른 연금술사들이 멈칫했다· 기분 탓인지 몇몇 연금술사들은 시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연금술적인 이유로 방문했지요· 연금술사들 사이의 교류란 참으로 근사하지 않나요?”
“그럼 여기 공방 연금술사 분들은 어디 계시···”
“워다나즈 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랍니다·”
요아넨은 거렁뱅이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우아함으로 말을 돌렸다·
어찌나 품위가 있었는지 이한과 요네르도 눈치 못 채고 넘어갈 정도였다·
“워다나즈 님과 요네르가 나고 가문의 시약을 갖고 왔다고요?”
“···앗· 네·”
“나고 님과 아는 사이였어?”
“···어 응·”
이한과 요네르는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새 교수야?”
“그··· 그럴지도·”
요네르는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친구는 언젠가 분명히 에인로가드의 교수가 될 테니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옆에 있는 붉은 머리칼의 마법사가 사악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이한은 입을 열었다·
“메이킨 님도 나고 님을 아십니까?”
“그랑덴 시로 오던 운송선들이 모조리 침몰한 것보다 더 파다한 소문인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당연히 들었죠· 그런데··· 혹시 그 시약이 염목근일까요?”
‘이 이상해· 무언가 이상해!’
이한과 달리 요네르는 등골에 서늘한 얼음조각이 닿은 것 같은 오싹함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무언가 이상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옆에 있는 친구는 위험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염목근 맞습니다·”
“혹시 잠깐 확인할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지요·”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기에 이한은 선선히 염목근을 하나 꺼냈다·
다른 공방은 정식으로 약속을 잡은 뒤에야 보여줄 수 있어서 꺼내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언제라도 보여줄 수 있게 염목근을 하나씩 갖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평범한 염목근과 전혀 다른 그 특수함에 연금술사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요아넨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도 살짝 짙어졌다·
“훌륭하네요·”
“과연· 역시 나고 가문이었나···”
연금술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원래 우연은 하나만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 그랑덴 시에 퍼진 괴팍한 마법사의 소문과 동시에 퍼진 특수한 시약의 소문·
이 두 소문은 연관성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법사의 가문에서 재배한 시약이 맞았다· 연금술사들은 득의양양한 눈빛을 교환했다·
드디어 찾았다!
“그러면 워다나즈 님·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왜 이 염목근을 제 공방에 갖고 오지 않으셨죠?”
요네르의 언니는 오늘 보여준 미소 중 가장 짙은 미소를 보여줬다· 뒤에 있던 연금술사들도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서운합니다· 워다나즈 님· 저희 공방에서 일하셨지 않습니까·”
“우리 공방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단 말이오?”
연금술사들의 비난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옆을 보니 요네르는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얘 왜 이래?’
친구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자 이한이 일단 대답했다·
“이 다음에 방···”
“···문하려고 했다고 하시는 건 설마 아니시겠죠? 지금 나고 가문의 시약 관련해서 방문을 받은 연금술 공방들의 위치는 다음과 같은데 경로상 제 공방을 굳이 지나치실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제 슬슬 이한의 등에도 식은땀의 맺히기 시작했다·
마치 미친 분신을 상대했을 때 느꼈던 압박감이 느껴졌다·
‘방심했다· 요네르의 언니라지만 교수급 마법사· 그것도 버두스 교수 같단 말을 듣는 사람인데·’
얼마나 됐다고 주변 연금술 공방을 돌면서 나고 가문 관련 소문을 수집해왔을지는 몰랐다·
아니 대체 그런 짓을 왜 한단 말인가?
‘혹시 할 일이 없으신가?’
“가장 중요한 곳이라 최대한 준비해서 마지막에 방문해보려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워다나즈 님· 저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어요· 혹시 누군가가··· 제 공방에 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닐까? 시약을 판매하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라고 헛소문을 퍼뜨린 게 아닐까··· 이렇게 말이에요·”
요네르는 히끅거리며 작게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한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앞으로는 어디 저택에 방문하기 전에 몰래 침입해서 인원 확인부터 하고 들어가야겠군···’
이한이 보기에 요아넨은 거의 반쯤 확신한 것 같았다·
솔직히 경로에 있는데 굳이 들리지 않고 마지막에 방문하려고 했다는 건 좋은 변명이 아니었다· 요아넨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바로 눈치 챘을 것이다·
“워다나즈 님·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좋은 물건에 대해서는 절대로 값을 아끼지 않아요· 저번에 저희 공방에서 일했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제가 값을 아꼈나요?”
“아닙니다·”
“그렇죠?”
요아넨이 살포시 웃자 요네르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그··· 그런데 시약은 다르잖아···”
뛰어난 인재한테는 금화를 아끼지 않았지만 시약은 이야기가 달랐다·
요아넨은 주변의 시선이나 소문 때문에 억지로 금화를 더 내는 연금술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확한 값어치 이상을 지불하는 일은 절대 없는 연금술사·
그게 요아넨 메이킨이었다·
“요네르· 물론 시약은 다르지· 시약 같은 경우는 대체 가능한 경우가 워낙 많잖아·”
요아넨은 동생을 타이르듯 설명했다·
시약은 인재와 달랐다·
언제 어디서든 구할 수 있고 대체도 가능한데 필요 이상의 금화를 지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좋은 시약 그것도 한정적인 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요아넨은 값어치를 정확하게 따지는 것이지 절대 헐값으로 사들이는 연금술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시약이라면 다른 공방보다 얼마든지 더 가격을 지불할 수 있어· 자· 봐봐·”
천칭 저울에 금화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모습에 둘의 눈동자가 커졌다·
다른 공방과 이야기를 나눴던 가격대보다 두 배는 많은 금화였다·
“정말 이렇게 지불하셔도 됩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시약이니까요· 워다나즈 님· 저는 가치가 있는 물건에는 그만한 금화를 지불한답니다·”
이한과 요네르는 시선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요아넨에게 너무 손해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필요한 시약을 독점적으로 얻는 이득이 있긴 하겠지만···
“만약 누군가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말해주세요·”
요아넨의 눈동자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서는 차갑게 타오르는 의지가 느껴졌다· 요네르는 당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니가 시약이 진짜 마음에 들었나봐·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랑덴 시에 지금 염목근 물량이 없어서 그런가?”
그걸 감안해도 요아넨의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이한과 요네르는 그들이 만든 시약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나단 걸 깨달았다·
“요네르· 그랑덴 시 최고 거상이 정말 될 수 있을지도···”
“그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진짜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긴 하겠네·”
싱냥하게 미소지으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아넨이 입을 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예·”
“제 공방에 관해 안 좋은 말을 한 게 누군가요?”
기습적으로 들어온 요아넨의 질문에 요네르는 숨을 들이쉬었다·
질문을 던지면서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게 거의 범인을 확정한 듯한 태도였다·
‘당했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요네르 옆에서 이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메이킨 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군요· 비밀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가이난도입니다·”
“····”
이번에는 요아넨이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설마 동생이 아니라 가이난도였단 말인가?!
* * *
“투기 파동· 투기 파동···”
“넌 궁전에서 연극 볼 때는 그렇게 푹 빠져놓고 왜 이번에는 기억을 못 하는 거냐?”
살코는 의아하다는 듯 앙라고에게 물었다·
궁전에서는 그렇게 스테달 스테달 하던 놈이 왜 이건 기억을 못 하는 걸까?
“그거랑 그거랑 같냐?! 그 때 충격 받아서 기억이 날아갔다! 그리고 그 때도 투기 파동은 신경 안 썼어! 보물지도를 신경 쓴 거지!”
아픈 과거를 찔리자 앙라고가 벌컥 화를 냈다· 아직도 배신감이 드는 사실이었다·
스테달 나고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니·
매력적인 스테달의 이야기와 이한의 강제 공부는 같은 이야기여도 전혀 달랐다· 후자는 에인로가드 공부와 별 차이가 없었다·
‘희한한 놈이야·’
살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연금술 공방의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창 안쪽에서 불빛은 보이는데 대답이 없자 살코와 앙라고는 서로 쳐다보았다·
뭐지?
“계십니까? 이보세요!”
쿵쿵쿵-
문을 연신 두드리자 안에서 사람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죄 죄송합니다· 자고 있었군요·”
“한낮에 말입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
“별 거 아닙니다· 동료 연금술사들이 찾아와서 술을 좀 했는데 과음해버렸군요·”
살코와 앙라고는 열린 문 너머로 공방을 둘러보았다·
술에 취한 연금술사들이 잔뜩 널브러져있었다·
“음· 그럼 다음에 오겠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우웁···”
문을 열어준 연금술사는 어지간히 숙취가 심했는지 바로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어나왔다·
“그랑덴 시 연금술사들은 원래 낮에 술을 즐겼나?”
“그럴 리가 있겠냐·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우연이겠지·”
쿵쿵쿵-
둘은 다음 저택으로 이동했다·
여긴 공방은 아니었지만 연금술에 관심이 많은 상인의 저택이라 판매처로 적당한 곳이었다·
“주인님께서 술에 크게 취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돌아가 주십시오·”
“예?”
“아는 연금술사 분들이 찾아와서 작은 주연을 여셨습니다· 죄송합니다·”
“···???”
그 후로도 가는 곳마다 공방의 연금술사들이나 상인들이 취해 있자 둘은 슬슬 두려움을 느꼈다·
혹시 그들이 모르는 사이 그랑덴 시의 축제 같은 게 있었나?
“교 교장 선생님의 장난 같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불길한 이야기 같은 건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