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릭 에반스
*전생
“맥라인의 시종, 릭. 시종의 본분을 잊고 후계자인 로니안 맥라인을 해하려 한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한다!”
예상했던 판결이지만, 막상 듣고 나니 마음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대공자께서 시키신 일이다.
나는 그저 명을 따랐을 뿐이다.
하고 싶은 말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감옥에 있을 때부터 몰래 찾아와 몇 번이고 눈물을 흘리던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으니까.
– 미안하다, 릭. 정말, 정말 미안해…….
신분을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친구로.
신분을 알게 된 후에는 주인으로.
평생을 함께해 온 사람이자,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에게만큼은 잘해 주었던 주인.
어느 순간부터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도, 종의 신분으로 차마 말리지 못한 죄가 이리 오는가 싶었다.
– 명심하거라, 아들아. 종의 신분은 그 주인과 함께 높아지는 것이다.
– 도련님을 잘 보필하는 것이 너를 높이는 일이다.
주인마님이 사고를 당하실 때 함께 돌아가셨던 전대 총관, 아버지의 말이 이 상황이 되어서야 가슴 깊숙이 와닿았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다. 대공자님이 삐뚤어지시지 않게 내가 잡았어야 했어, 이 바보 같은 놈아.’
쿵. 쿵.
돌바닥에 머리를 찧어도 마음속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할 말이 있느냐?”
이 가문의 주인이자 이 땅의 영주, 패드릭 맥라인 남작의 목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릭은 힘겹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축축하고 불쾌한 느낌의 정체를 알았지만, 억지로라도 눈을 크게 뜨고자 했다.
대전 아래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 주인을 위하여.
“……없습니다. 죗값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 말에 영주님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의외라는 생각이겠지.
그리고…….
쿵.
“릭!!”
다리가 풀린 듯 앞으로 뛰어나오려다가 쓰러지는 주인의 모습도 보였다.
일그러진 얼굴. 눈물이 가득 고인 눈과 마주치는 순간, 릭은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었다.
그에 주인의 얼굴이 영주님을 향해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릭은 잘못이 없습니다! 내가! 제가……!”
“대공자님!”
생전 내 본 적 없는 큰 목소리로 주인의 말을 막았다.
그러자 몰려드는 주변의 시선.
그중에서도 유독 애처로운 붉은 색 눈을 보며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 그러지 마십시오.
자신이 처벌을 달게 받아들였으니, 주인의 처벌은 줄어들 것이다. 어쩌면 장기 근신 정도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거면 됐다.
“릭! 너……!”
“더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공자님.”
쿵.
마지막 예의를 담아 고개를 숙이는데, 마주 보는 눈 속에 온갖 말이 오갔다.
– 후회하십니까?
– 미안하다. 미안하다, 릭.
– 그럼 앞으로는 실수하지 말아 주세요. 멋진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그 눈 맞춤의 끝에서 일그러지는 주인의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그런 주인을 보는 영주님의 표정이 더욱 굳어지는 것도.
어쩌면 이 눈빛의 대화가 자신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 아닐 거다.’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주인을 믿기로 했다.
– 종의 신분은 그 주인과 함께 높아지는…….
‘제가 잘한 거겠지요, 아버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차오르는 것을 애써 외면했다.
자신의 목숨으로 주인의 잘못을 덮을 수 있다면.
주인이 다시 귀족으로서의 삶을, 올바른 삶을 일궈 나갈 수 있다면.
죽은 자신의 신분도 같이 높아지는 것일 터였다.
그렇게, 그 하나만을 기대했다.
그리고.
– 대공자는 장기 근신 처분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죽을 놈의 표정이 좋아 보인다?”
“목숨값은 한 것 같으니까.”
빈정거리는 간수의 말에도 웃으며 대꾸할 수 있을 만큼 홀가분했다. 간수가 별 미친놈을 다 본다는 듯이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멀어지는 것도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죄인.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단두대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빼곡히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기대했던 한 사람,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근신 처분을 받았으니 당연히 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으면…….”
“종의 신분은 그 주인과 함께 높아지니……!”
“……뭐?”
“……부디 훌륭한 사람이 되십시오, 대공자님!”
발악처럼 지른 고함.
자신의 마지막 바람이 주인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릭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저 시끄러운 놈을 어서 처형하라!”
촤아아아악.
툭.
화끈한 느낌과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그리고 단두대에 꿇어앉혀져 있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
그것이 삶의 끝이었지만 미련은 없었다.
– 부디 훌륭한 사람이 되십시오, 대공자님.
부릅뜬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도 주인에게 같이 전해지기를.
릭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 하나만을 바랐다.
*현생
“으아악!”
비명과 함께 깨어난 릭은 눈에 들어오는 익숙하고 화려한 방의 정경을 한동안 멍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마지막 순간의 감정이 꿈에서 깨어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이에요?”
부인 라일라가 슬며시 그의 손을 잡아 왔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어, 어…….”
“땀을 이렇게 흘리고…… 어!? 눈물까지? 대체 무슨 꿈이었는데 이래요?”
“어, 그, 그게…….”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생생했는데, 막상 떠올리려 하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진 듯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개꿈이었나 봐.”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오는데.
“당신도 참…… 나이가 들더니 몸이 허해져서 그래요. 마탑에 영약이라도 부탁해 봐요.”
“아니, 아니야. 그리고 그건 권력 남용이야. 모범을 보여야 할 황실 시종장이 그래서는 안 되지. 그냥 개꿈 가지고 뭘…….”
“폐하께서도 그 정도는 아무 말 안 하실걸요.”
라일라가 눈을 흘겼지만, 릭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돼.”
– 종의 신분은 그 주인과 함께 높아지는 것이다.
왜인지 죽은 아버지께서 남기신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날.
분에 넘치게 황실 시종장에 백작의 위까지 받은 자신이기에 더욱 몸가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황실의 의전을 챙기러 가는 길.
여전히 젊었을 적 외모에서 변함이 없는 주인, 아니 폐하께서 뜻밖의 말을 꺼냈다.
“마탑에 부탁해서 영약이라도 챙겨 먹어라, 릭. 벌써 주름에, 새치에……. 뭐냐, 그게.”
오늘따라 유독 대제국의 황제답지 않은 말투.
어쩐지 그 시절 대공자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에 릭은 일순간 멈칫했다.
간밤에 꾸었던 꿈의 영향일까.
이내 피식 웃은 릭은 바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폐하. 저도 이제 나이를 먹으니 자연스러운 변화 아니겠습니까.”
“그럼 나는 자연스럽지 않다는 거고?”
“……폐하께서는 신인이신데 어찌 평범한 저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챙겨 먹어. 내가 직접 손을 써 주고 싶어도 지금은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인과력이 감당이 안 되니까 당분간 약으로라도 기력 보충해.”
“……폐하.”
“이제 신들이 사라지고 20년이 막 지났어. 제국은 아직 반석이 다져지지 않았으니,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도와줘야 할 네가 벌써 기력이 달리면 곤란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왜인지 더욱 울컥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갱년기인가.’
릭은 한숨을 삼키고는 다시 정중히 예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따르겠습니다.”
“하여간, 네 녀석도 나이를 먹으니까 괜히 무게만 잡는다고.”
“예?”
“예전처럼 뭔가 톡톡 튀는 맛이 사라졌어. 갈굴 틈도 안 주고 말이야. 쯧, 그게 다 기력이 떨어져서야. 그러니 약 좀 먹어.”
이게 말인가 방귀인가.
갈구고 싶으니 체력을 챙기라는 말인가?
예전 같으면 순간적으로 욱했을 릭이지만, 이제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하하. 제 나이도 이제 불혹이 한참 넘었습니다, 폐하. 언제까지…….”
하지만.
“너 10살 때까지 오줌 싼 거 딸한테 말한다.”
제국 황실 기사단의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는 자랑스러운 딸, 이사벨의 이름이 나오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펄쩍 뛰어오르고 말았다.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제국의 황제가 채신머리도 없이!”
그리고 그제야 피식 웃고 있는 주인의 모습과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시종들이 보였다.
릭은 황급히 그 자리에 엎드렸다.
“아, 아니 폐하. 제가 잠깐 정신 줄을 놨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면 뭐든 해야죠.”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조아리자, 주변 시종들의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주인인 황제마저도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래야 너답지. 나이를 먹는다고 너무 무게 잡을 필요 없다, 릭. 그래서야 내가 재미가 없잖아.”
자꾸 이러니 오히려 불안감이 들었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지?’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
‘아니, 아니지. 우리 폐하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신인인데. 아직도 얼굴도 젊을 때 그대로고.’
기억이 나지 않는 간밤의 꿈 때문인지 괜스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릭은 손짓으로 주변의 시종들을 빠르게 물렸다.
이내 둘만 남은 방.
“폐하, 혹시나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시옵니까?”
자신은 진정으로 걱정되어 말을 꺼내는데.
“거봐라. 이 딱딱한 태도. 사도들을 박살 내고 돌아왔을 때 형, 형 하면서 울고 매달리던 놈은 어디 갔을까?”
주인은 또 장난스레 말을 받았다.
“그, 그거야 제가 소싯적에 잠깐 미쳐서 그런 거죠!”
다시 펄쩍 뛰는데,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는 군주의 모습이 또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야…….
“거참. 뭡니까, 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소싯적의 미숙한 모습 정도야 연기 못 할 것도 없다.
오랜만에 삐죽이는 태도가 어색했지만 걱정 어린 마음은 진심이니, 그를 보는 주인의 얼굴에도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다만, 그 후에 나온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그냥 옛 모습이 그리워져서 그런다. 나는 그대로인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변해 가는 것 같아서.”
“예?”
“나는 방금 이유를 말했는데?”
“……그러니까 그게 답니까?”
“응.”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걱정했잖아요! 폐하는 신인이니까 당연한 거지! 남들은 부러워서 죽겠다는 말만 하는데!”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이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
“혹시 제게 말씀 못 하시는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구요?”
“……문제는 없다. 다만 아쉬움이 있을 뿐이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체?”
어리둥절한 마음에 그렇게 되묻는데, 잠시간 침묵에 잠겼던 주인이 이내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나는 신들을 몰아내고 인간의 제국을 세웠다. 이제 그 반석을 다지는 일이 끝나면, 인간으로서 신이 된 사람은 어디에 있어야 옳을까?”
굳은 표정으로 뱉는 말에 릭은 급격히 불안감이 차올랐다.
“폐, 폐하께서 세우신 제국입니다! 폐하의 나라라구요! 그런데 폐하가 가긴 어딜 갑니까!?”
“……아직 간다고 안 했는데?”
그, 그런가?
“아, 아니 말투가 꼭 떠날 사람 같아서…….”
황급히 변명을 하다 보니 단어 하나가 또 마음에 걸렸다.
아직?
“폐하? 설마 진짜 떠나시려……? 아니, 아니죠?”
그에 주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것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헷갈렸다.
“저, 절대 안 됩니다! 폐하가 없으면 제국이 무너집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구요!”
“……걱정하지 마라. 정해진 것은 없으니.”
“그럼?”
“반석을 다 다진 뒤에야 운명이 나를 찾을 테니까.”
너무나도 애매한 말.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실제로 신의 경지에 오른 인간이자, 대륙에 새롭게 퍼지기 시작한 신교(敎)의 숭배 대상.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현인신(現人神) 로건 맥라인의 말이라면 절대 흘려들을 수 없었다.
“가, 갑자기 어디 가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그래. 나를 묶는 인연이 살아 있는 한, 어디 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러니 건강 챙기며 오래오래 살거라.”
그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불안감이 커졌다.
그래서 릭은 결심했다.
“마탑주님께 바로 영약을 신청하겠습니다. 제가 100살, 아니 200살까지 살 테니까 우리 증손주, 고손주가 손주 볼 때까지 삽시다. 아시겠지요, 폐하?”
“하하하. 그래. 그러거라.”
그 웃음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주인이 다시 손짓하며 그를 불렀다.
“사실 네게 해 줄 말이 있다.”
“예?”
“이십 년 전에 했어야 할 이야기인데 너무 늦었구나. 네 녀석이 이능이 없는 일반인이라, 인과의 작은 반동을 견딜 수 있게 되기까지 이십 년이 걸리더구나. 어제야 비로소 자격이 된 것 같다.”
이게 무슨 말일까?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주인의 말이 이어졌다.
“기억하느냐. 맥라인에 있을 때 말이다…….”
그렇게 제법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릭은 비로소 지난밤 꾸었던 꿈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삶의 끝과 현생을 아우르는 모든 퍼즐이 맞추어졌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그럼 그게 다……!”
“진실이지.”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군주가 그의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너에게 못 할 짓을 저질렀다. 용서해 다오, 릭.”
너무나도 과분한 예의.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릭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었다.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셨군요, 대공자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은 예상하지 못했을까?
굳어 있던 주인이 일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냐. 내가 미안하고, 또 고마울 뿐이지.”
두 주종은 실로 오랜만에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생에 걸친 충심이,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에 릭은 또 감사하고 감사해서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 * *
<맥라인 제국 인물전>
• 릭 에반스
현인신 로건 맥라인 황제의 몸종으로 제국 성립 시 에반스의 성을 하사받고 백작의 위를 얻었다.
제국 초대 황실 시종장으로서 100년을 재직. 그것은 제국 말기까지 깨지지 않은 기록으로 남았다.
딸, 이사벨 에반스는 제국 3대 황실 기사단장이자 오러마스터. 현인신 로건 맥라인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