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45)
After Story 8· 공략 제의
선력 24년 9월·
이탈리아에서 회담을 요청했다·
20년 만에 이루어진 회담이었으나····
여론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탈리아가 한국에 저지른 만행 때문이다·
‘워낙 충격적이었어야지···· 잊을 수가 있나·’
〈세기말 디스트럭션〉의 발발 이후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까지·
이탈리아는 자국에 주재하던 한국인들을 억압하고 핍박했다·
그 수준이 얼마나 심했느냐면 그들에게서 인권을 박탈하고 노예로 취급하기도 했을 정도다·
한때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한-이 회담 당시 사절로 파견된 플레이어들이 폭거를 벌이기도 했었으니····
‘안 그래도 상해 있던 감정이 더 상했을 수밖에·’
그래서 여론을 헤아린 선녀 정부는 이탈리아와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고 있었건만·
‘웬일인지 그쪽에서 먼저 회담을 청해 왔다라····’
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는 사절단 대표로 트레디치를 임명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20년 전 한-이 회담 때처럼·
자연히 그때 일이 떠올라 한국을 조롱하는 것은 아닌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인선이었다·
‘의중이 뭐지? 놀리는 건가? 생각이 있으면 사절단 대표는 다른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트레디치는 호위로 동행했을 뿐이고 어차피 실무자는 따로 있을 텐데···· 지금 싸우자는 건가? ···아니 역시 그러지는 않겠지·’
달리는 차 안이었다·
은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저번처럼 정권 안정을 위해 내부 파벌을 정리할 목적으로 보내는 것도 아닐 테고····’
결국 다른 속셈이 있지 않다면 트레디치를 대표로 보낼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리라·
이를테면 20년 전의 회담에서 제2위계 오버랭크 몬스터 레비아탄의 토벌을 도와 달라고 했듯 한국의 플레이어에게 무언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라든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러고 보니····’
불현듯 기억이 떠올랐다·
은하는 곰곰이 날짜를 셌다·
‘···맞아 회귀 전에는 이제 곧 〈심해의 던전〉 공략에 도전했었지· 이탈리아 단독으로가 아니라 북대서양에 인접한 남유럽 국가들과 미국이랑 같이·’
은하의 회귀 전 기억으로는 세계 최초 흑색던전 공략으로 한껏 떠들썩했던 세상이 선명했다·
이번 삶에 이르러 그 업적은 한국 단독으로 달성하게 됐지만····
여하간·
‘〈심해의 던전〉 공략 소식은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라고 해도 여러 국가가 힘을 합치는 대규모 공략이 되는 만큼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을 텐데····’
더군다나·
원래라면 공략이 진행되고 있을 시기에 이탈리아의 전력이나 다름없는 트레디치가 셋씩이나 한국을 찾아온 것으로 추정컨대·
‘설마 공략과 관련된 일인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가령 〈심연의 던전〉을 공략한 플레이어들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것이라거나 혹은····
‘그나저나·’
조금 전부터였던가·
시야 끝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도중에 상념에서 깨어난 은하는 옆자리로 눈길을 주었다·
‘얘는 뭐 하고 있는 거지?’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아 곧 18세를 앞둔 하백련·
이제는 앳된 티를 벗어나 성인으로 다가서는 중인 그녀는 스마트폰 화면에 비치는 제 얼굴을 열심히 확인하는 중이었다·
“으음····”
“····”
얼굴을 찌푸렸다가 폈다가····
하백련이 알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러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침음을 흘린다·
은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백련아?”
“아···· 오빠·”
“지금 뭐 하고 있던 거야?”
“···봤어요?”
“그럼 봤지·”
“으으····”
스마트폰에서 고개를 돌려 은하와 눈이 마주친 하백련·
그녀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다·
귀 끝이 빨개지기도 했다·
‘귀엽네·’
은하는 피식 웃었다·
이내 평정심을 찾은 하백련이 겸연쩍어하며 설명했다·
“그게요···· 미리 연습 중이었어요· 얼굴 연습·”
“얼굴 연습?”
“네 선녀님한테 들었었거든요· 20년 전의 회담에서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행패를 부렸다고요· 특히 젠코 마이론이라 했던가? 그 사람이 말을 엄청 험하게 했다고····”
“쓰레기 같은 놈이기는 했지· 그 대가로 죽었지만·”
“오빠한테요?”
“응 나한테·”
은하가 회귀를 고백한 것으로 이제는 그가 걸어온 길을 잘 알고 있는 하백련이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서?”
“네 그래서 이번 회담에서도 행패를 부리지는 않을까 해서요· 게다가 저는 나이도 어리니까 그 사람들한테 더 얕보일 거 아니에요·”
물론 나이가 어리기는 해도 너무 어린 것도 아니지만요·
법적으로는 이미 성인에 가까운 대우를 받고 있기도 하고 앞으로 2년 하고 2개월 조금 있으면 정식으로 성인이 되기도 하니까요!
하백련이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은하에게는 여전히····
“지금 저 어리다고 생각했죠? 저 하나도 안 어리거든요?”
“···그래 너 안 어려·”
“정말이죠?”
은하의 생각을 읽기나 한 듯 뾰로통한 얼굴로 묻는 하백련·
순간 움찔한 은하는 눈치껏 그녀에게 호응해 주었다·
그제야 그녀가 얼굴을 풀고 따가운 시선을 거뒀다·
“아무튼 혹시나 그 사람들한테 만만하게 여겨지고 싶지 않아서 얼굴 연습을 하고 있던 거예요· 언젠가 제가 선녀가 되고 나서도 상대할 수 있으니만큼 첫 단추부터 잘 끼우는 게 좋잖아요?”
“맞는 말이기는 하네· 그럼 어떤 얼굴을 보여 주려고?”
“그건요···· 해 볼게요·”
“····”
하백련이 미간에 힘을 주고 입을 앙다문다·
은하의 눈에 보이기로는····
꼭····
‘아기 고양이가 삐진 느낌? 아 이제 아기는 아닌가····’
“어때요? 오빠가 봤을 때는 저 어려워 보여요?”
“아 어 음···· 그럴듯하네·”
“그쵸?”
어렵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참기가·
들썩이는 어깨를 참기가·
‘사실 재롱부리는 거 아니야? 그냥 귀엽기만 한데····’
“오빠?”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손으로 입가를 가린 은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백련에게는 미안하게도····
차대 선녀로서의 위엄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만 보면 모를까 저 얼굴을 이탈리아 놈들한테 보일 수는 없지·’
은하는 감정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슬며시 운을 뗐다·
“그런데 백련아 회담 내내 계속 그 얼굴을 하고 있으면 좀 불편하지 않을까?”
“음···· 아마 그러기는 하겠죠? 그래도 우리나라를 위해서라면 잠깐의 불편함쯤은····”
“부자연스럽게도 보일 텐데···· 역시 평상시 모습 그대로 자연스러운 게 좋지 않을까?”
“자연스럽게요? 그러다 만약 이탈리아에서 깔보면····”
“그때는 내가 처리해 줄게· 나한테 맡겨·”
은하는 진심으로 말했다·
하백련에게는 말을 순화했으나 만에 하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녀를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죽여 버리든 해야지·’
설령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 한들·
이 나라에 있는 한 상대는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자신의 신화가 그렇게 만들리라·
은하는 자신했다·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
“내가 지켜 줄게 반드시·”
이번 삶에서 다짐한 각오를·
은하는 솔직하게 내뱉었다·
“아····”
조금 전부터 대답도 없이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하백련·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탄성이 흐른다·
이내·
“네···· 고마워요 오빠·”
뺨이 발그레해지고·
입가가 호를 그린다·
하백련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는 오빠만 믿을게요· 오빠가 지켜 주는 거죠? 평생·”
“···어? 평생이지 당연히·”
“네!”
묘하게 어감이 이상했으나·
은하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이때는 아직 몰랐다고 한다····
* * *
사전에 한-이 회담 관련으로 임가을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청와대에 도착한 은하와 하백련은 그녀의 집무실을 찾았다·
집무실에는 그녀뿐만 아니라 프리시스 메모리와 송윤서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판도라 클랜 로드· 그리고 백련이도·”
임가을 송윤서 프리시스 메모리가 저마다 반겼다·
그리고 은하와 하백련이 자리에 앉자 임가을이 대뜸 운을 띄웠다·
“최근에 소식 들었어요· 웬일인지 난데없이 클랜회관 상공에 대규모 편재가 발생했었다면서요? 군단장으로는 4위계 오버랭크 몬스터가 출몰했다던데 그래도 큰 피해가 없었다니 다행이네요· 판도라 클랜 로드랑 클랜원들이 많이 고생했겠어요·”
“네 뭐····”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죠? 코쿤의 보호를 받는 서울에서 그런 대규모 편재가 발생하다니요· 그것도 아무 전조도 없이· 게다가 〈심연의 던전〉도 공략했었잖아요?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놀랐던지···· 저는 누가 또 테러라도 일으킨 줄 알았다니까요?”
“하하····”
“그런데도 판도라 클랜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만 보고하고····”
쉽게 말해·
최근에 일어난 사태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지 않으냐 숨기지 말고 고하란 추궁이었다·
그러나 은하는 시치미를 뗐다·
“글쎄요? 저희도 잘 몰라서요· 다만 클랜에서 올린 보고대로 아마 〈심연의 던전〉 공략에 따른 반발 작용이 아닐지 추측하고 있을 뿐이거든요·”
“판도라 클랜 로드 서운하게 이렇게 나올 거예요?”
만약 자리에 두 사람만 있었다면 임가을은 하대는 기본에 막말도 서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언짢은 와중에도 은하에게 존대를 사용했다·
공적인 자리를 의식한 것이다·
“죄송한데 정말 모릅니다·”
한편 은하는 단호했다·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에서 내 아들이 찾아왔고 그 때문에 편재가 발생한 거라고 어떻게 얘기할 수가 있겠어? 이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 줄 알고···· 만약에라도 유성이를 이용하려 들면? 그럼 가만 못 있지·’
은하는 자신의 회귀 사실을 임가을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선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은하가 중심으로 두는 가치가 자신과 지인들의 행복에 있다면 그녀가 중심으로 두는 가치는 이 나라 그 자체에 있었으니까·
그녀는 때로는 국가를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서로의 지향점이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
은하는 꿋꿋이 태도를 고수했다·
결국 임가을은 못마땅해하면서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마침 〈별헤는 마녀〉 송윤서가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판도라 클랜 로드도 모른다면 모르는 거겠죠· 제 기프트로도 특별히 보이는 것은 없고요· 뭐 나중에라도 문제가 된다면 그때는 책임을 피할 수 없겠지만·”
“판도라 클랜 로드가 어련히 잘 처리했을 거예요· 그보다 할 이야기는 따로 있지 않나요?”
송윤서가 은하에게 책임을 넘겨 은근히 임가을을 달래 주었다면 〈시간의 마녀〉 프리시스 메모리는 은하의 편을 들어 주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갈등 없이 유화적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이윽고 화제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번에 이탈리아가 회담을 요청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아마 단순히 교류 증진을 위해 회담을 요청하지는 않았겠죠·”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송윤서가 뻔하다는 듯이 답하고 프리시스 메모리가 동의를 표했다·
임가을은 은하에게 눈길을 주었다·
“판도라 클랜 로드는요?”
“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은하는 이곳까지 오면서 정리한 생각을 입에 담았다·
“저는 〈심해의 던전〉 공략으로 회담을 요청한 게 아닐까 싶어요·”
“····”
“저희가 〈심연의 던전〉을 공략했으니 어쩌면 조언이라도 구하러 오는 것인지도 모르고····”
“음···· 일리가 없지는 않네요· 그러지 않아도 일본과 중국에서 접선해 오고 있으니····”
송윤서가 동조한다·
은하는 마저 말을 이었다·
“어쩌면 〈심해의 던전〉 공략에 참가할 의향이 있는지 확인하러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네? 참가 의향을요?”
이탈리아가 공략 의사를 물으러 구태여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을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르니 너무 비약적인 생각이 아닌가·
하백련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러자 은하가 설명을 덧붙였다·
“예전에 선녀님한테 들었었거든· 20년 전의 한-이 회담에서 맺은 밀약이 있다고· 그렇죠?”
“맞아·”
순순히 긍정하는 임가을·
하백련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밀약이 뭔데요?”
“언젠가 〈심해의 던전〉을 공략할 때 우리도 한자리 낄 수 있게 참가 권한을 달라고·”
“····”
임가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뭐라도 더 받으려고 즉흥적으로 제안한 거였거든· 흑색던전의 위험성을 아는 만큼 공략에 대한 기대는 애초 접고 있었지만···· 그래도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잖니? 여차하면 정적을 제거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 싶었고···· 무엇보다 어차피 공략 참가는 우리 자유니 딱히 손해도 없겠다고 생각했고·”
“····”
하백련은 물론·
밀약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던 송윤서 프리시스 메모리는 나직이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송윤서는 차분히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선녀님은 어쩌면 이탈리아의 회담 요청 목적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듣고 보니 가능성이 크기는 하네요· 마침 저희가 〈심연의 던전〉을 공략했었으니···· 그쪽에서도 흑색던전을 공략하자는 말이 나왔을 수도 있겠고요·”
“그렇겠죠?”
“그렇다면 저희는 최대한····”
“최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해야겠죠?”
“맞아요·”
서로 척척 말을 주고받으며 죽이 잘 맞는 모습을 보이는 송윤서와 임가을·
두 사람이 미소를 지었다·
입가가 길게 찢어진다·
이내 두 사람은 저희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편·
‘예전에 브루노 아저씨랑 함께 줄리에타 누나를 구하려 한 일이 설마 이런 식으로 이어지다니····’
자신으로 인해 바뀐 미래에·
은하는 새삼 신기하기만 했다·
* * *
그리하여 시간이 흘러 선력 24년 10월·
인천항으로 이탈리아 선박이 입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