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3화
673. 악의(惡意) 2
“저 정 실장. 왜 왜 이래?”
단둘만 있는 탈의실 가건물 안.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오선국 기자의 안색이 하얘진다.
“고아에 후진데 사는 애들 성격이 그렇고 그렇다면서? 알잖아 나 보육원 출신인 거.”
오선국 기자는 겁이 좀 많은 편이었기에 난 일부러 더 과격하게 움직였다.
오선국 기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좁은 탈의실 건물 안에선 도망갈 곳이 없다.
결국 그는 소파 위로 올라가며 외친다.
“야! 이 이런다고 내 내가 말할 거 같······.”
그 순간 난 그가 앉은 소파 등받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쾅!
소파 앞다리가 들렸다 다시 떨어지며 육중한 소리를 낸다.
쿠웅.
오선국 기자가 비명을 지른다.
“으아아아.”
하지만 난 개의치 않고 연속으로 주먹을 내뻗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 바로 옆 소파 등받이를 향해서.
쾅!
“난 부모가 없어서 배우지도 못했고!”
쿠웅.
쾅!
“돈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쿠웅.
쾅!
“가진 게 없어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어. 그런데!”
쿠웅.
“그런데······ 말입니다. 부모도 있고 형제도 있는 당신 같은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럽니까? 무슨 권리로 남의 아픈 곳을 찢어놓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도 안 된 내용을 기사로 써서 또 한 번 사람 인생을 망가뜨리려 합니까? 대체 무슨 권리로!”
가슴속에 꽉 맺힌 분한 심정이 뿜어져 나온다.
난 보육원에서 엄마의 보살핌 안에 지냈어도 힘든 삶이었는데 덕배는 나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삶을 살았었다.
그런데 그 힘든 시절을 지나 이제야 간신히 웃으며 살게 된 덕배의 삶을 파괴하려 든다고?
난 절대로 그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오선국 기자가 말을 더듬거린다.
“저 정 실장······ 그······ 그게······ 그러니까······.”
“오 기자님. 우리 덕배가 정말 힘들게 살다가 요 몇 달 전부터 겨우 숨돌리고 삽니다. 농담도 가끔 하고요. 저는 절대 덕배의 그런 삶이 파괴되는 꼴 못 봅니다. 그래서 말인데······ 만에 하나 덕배의 인생이 뒤틀리면 그땐 오 기자님의 인생 역시도 똑같이 만들어 드릴 겁니다.”
오선국 기자가 바싹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전 웬만하면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누가 그딴 X소리를 제보했습니까?”
오선국 기자가 눈을 질끈 감고 말한다.
“한선명······”
“에이스의 한선명요?”
“그래.”
한선명은 올해 20살로 덕배와는 동갑인데 에이스 엔터가 야심 차게 키우는 신성이다.
키 180cm 정도의 다부진 몸에 잘생긴 외모의 그는 해외 유학파 출신으로 작년부터 각종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이번 <화란전>에서 국선 아래에 있는 네 명의 꽃미남 화랑 중 한 명인 태청랑 역을 맡아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최근 화랑 F4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인지도로 인기를 가진 멤버인데 뭐가 아쉬워서 제보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한선명이 제보했다 이거죠?”
“그렇다니까? 걔가 제보했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선명은 덕배가 다니던 용산 중학교가 아니라 하와이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걔 하와이 출신 아닙니까?”
“아냐. 걔 말로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최덕배에게 맞은 트라우마 때문에 학교 생활을 제대로 못 해 이민 갔다 하더라고.”
오선국 기자는 제보를 받은 뒤 추가 사실을 확인하러 경주 현장에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선명을 만나 내가 먼저 확인해야겠다.
난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오선국 기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선국 기자가 다시 한번 움찔한다.
“안 때립니다. 일어나세요.”
“진짜······지?”
“예.”
난 오선국 기자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시선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틈만 보이면 달아날 기색이다.
하지만 이대로 내보낼 순 없다.
탈의실을 나간 후 ‘정윤호 실장 기자 살인 미수.’ 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쓰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오 기자님.”
“어······ 어······.”
“3개월 전에 신인 여배우 이준아 협박해서 돈 뜯어낸 거 6개월 전에 신인 남자배우 오정훈 협박해서 돈 뜯어낸 거 압니다. 만에 하나 오늘 이 안에서 있었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순간 전 오 기자님이 벌인 짓을 싹 다 터트려버릴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니 정 실장이 그건 또 어떻게······.”
“그것까지는 알 것 없고요. 아 그리고 두 사람 입을 막는다고 끝이 아니니까 잘 판단하고 움직이십시오.”
자신의 비리를 콕 짚어서 말해주자 오선국 기자가 하얗게 질려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저 절대로 오늘 일 새어 나갈 일 없어. 믿어줘.”
“알겠습니다. 대신 오늘은 그냥 돌아가십시오. 데스크가 물으면 제가 방해해서 인터뷰 못 땄다고 하시고요.”
“어······ 어······ 그래.”
“그러면 나가 볼까요?”
난 그 말을 하고 터벅터벅 문 쪽으로 향했다.
달칵.
탈의실 건물의 문을 열었다.
세트장의 밝은 조명 빛이 우릴 비춘다.
밖으로 먼저 나오자 내 뒤를 따라 오선국 기자가 나온다.
조명 덕분에 그의 바지 가운데에 묻은 얼룩이 보인다.
살짝 지렸나 보군.
하지만 모른 척해 줘야겠다.
쥐를 몰 때도 도망갈 구석 한 군데는 터줘야 하니까.
* * *
오선국 기자가 황급히 자리를 뜬 후.
난 즉시 에브리데이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2월 24일]
-PM 05:00 [NEW. 최덕배] 연예올타임즈 “신인 배우 최 모 씨 학교폭력 의혹. 배역 교체 예정.” (회의 내용 : MBS 내부 정보에 따르면 경영진 중 일부가 첫 방송 전 강제 하차 언급.)
현재 시각은 2월 23일 오후 7시.
내일 기사가 뜨기까지는 24시간도 채 남지 않았지만 아직 내용은 그대로다.
하지만 조금 전 도망친 오선국 기자의 태도를 보면 절대 기사를 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연예올타임즈는 다른 기자를 다시 보내거나 데스크에서 직접 기사를 쓰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단 하나.
제보자를 만나 입막음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보자는 지금 이곳 우리 촬영 현장에 있었고.
난 그 즉시 모든 스태프와 촬영진들이 모인 밥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끌벅적한 밥차 앞의 3번 테이블에 한선명과 그의 매니저 양성택 실장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같은 테이블에는 식사를 반 정도 마친 촬영감독이 함께였다.
당장이라도 한선명을 불러 따지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잠시 기다렸다가 따로 만나야 할 것 같다.
그때 9번 테이블에 앉아 있는 유진이가 날 발견하고 손을 흔든다.
“오빠. 여기요! 여기!”
유진이는 자기 옆자리가 비었다며 빨리 식판을 들고 오라고 손짓한다.
손놀림이 현란한 것이 오늘 맛있는 메뉴인 갈비찜을 잔뜩 가지고 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하지만 빈손으로 테이블로 다가가자 유진이가 살짝 실망하는 표정이다.
“오빠······ 오늘 갈비찜 완전 대박인데~ 밥차 아주머니가 오빠 좋아하니까 오빠는 갈비찜 더 많이 줄 건데~”
내가 갈비찜 캐리어니 유진아?
밥차 아주머니랑 친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 그런 걸 도와줄 겨를이 없다.
“지금 밥 먹을 여유가 없어.”
유진이가 눈을 부릅뜬다.
“아니 누가 우리 오빠 밥도 못 먹게 해요? 누구든 말만 해요. 내가 혼내줄게요!”
유진이가 숟가락을 들고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덕분에 치밀어 올랐던 화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고맙긴 한데 그보단 밥 많이 먹고 네 컨디션 관리나 좀 해. 오늘 밤늦게까지 쭉 촬영이던데?”
유진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그러고 싶은데······ 밥차 아주머니가 갈비찜을 3개밖에 안 줘서 밥을 많이 못 먹겠어요.”
주먹만 한 갈비찜 3개면 충분하지!
난 기운 빠진척하는 유진이를 내버려 둔 채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덕배를 쳐다봤다.
유진이의 식판은 아직도 반 넘게 차 있는데 덕배의 식판은 이미 깔끔하게 비어있다.
쪽방촌에서 살 때 하루는 먹고 하루는 굶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음식이 있을 땐 빨리 먹어 치우는 게 습관이 되어 있다.
조만간 몸에 좋지 않은 저 식습관도 바꿔줘야겠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우선이다.
“덕배야.”
“예?”
“너 한선명이랑 옛날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덕배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뇨. 한선명 선배님이랑은 별일 없었는데요?”
“아니 내 말은 이곳 현장이 아니라 중학교 때. 같은 중학교라며?”
“예? 한선명 선배가 저희 중학교라고요?”
덕배가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야?”
“아닌데요? 한선명 선배는 미국에서 중 고등학교 나왔잖아요.”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히 오선국 기자는 한선명이 중학교 때 도피 유학을 갔다고 했었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과거를 세탁한 건가?’
가끔 배우들 중에서는 과거를 세탁하기 위해 해외 쪽으로 나가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어서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 이름을 바꾸고 성형까지 해버리면 과거를 아예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게다가 현재 한선명은 국적이 미국인인 검은 머리 외국인이다.
즉 흥신소에 알아보고 싶어도 중학교 시절 본명을 알지 못하면 찾기 어렵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난 덕배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중학교 때 유학 간다고 중퇴한 애는 없었어?”
그때였다.
“아 맞다. 한 명 있어요.”
“누구?”
“봉필이요. 한봉필.”
“한······ 봉필?”
“예. 저희 학교 일진이었는데 다른 학교 일진들이랑 싸우다가 좀 크게 다치게 만들어서 뉴스에도 나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걔 아버지랑 할아버지가 해외로 보내버린 걸로 아는데······ 잠깐만 그러고 보니 봉필이랑 닮은 거 같기도 한 데······ 아~ 아닌가?”
덕배가 한선명의 얼굴을 보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고 있다.
“잠깐 한선명이 일진이었다고?”
“쟤가 봉필이가 맞다면······ 예. 맞아요. 학교 애들도 패고 그랬었어요. 저도 자주 맞았고요.”
어린 시절 부모도 모르고 쪽방촌에 버려진 덕배는 수녀님의 보살핌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그런 덕배를 상습적으로 때렸다고 한다.
즉 다시 말해 학폭 가해자인 한선명이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면서 언론플레이를 하려는 상황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화를 누른 채 되물었다.
피해자인 덕배를 가해자로 모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배야. 혹시 한선명이 왜 널 때렸는지 이유는 알고 있어?”
“글쎄요. 그냥 꼴보기 싫다는 이유부터 시작해서 돈 없다는 이유로도 맞아서······ 저도 딱히 왜 그랬는지는 기억 안 나요. 근데 한선명 선배가 진짜 봉필이 맞아요?”
이유를 모를 정도로 많이 맞았다고?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밥상을 뒤엎어버릴까 하는 상상을 하다 정신을 겨우 차리고 대답했다.
“아마도······ 맞는 거 같아.”
덕배가 가만히 한선명을 쳐다본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는다.
“걱정하지 마세요 형. 그냥 모른 척할게요. 이제 애도 아닌데 옛날 일을 따지는 것도 우습잖아요.”
피해자인 덕배는 의외로 흔쾌히 그 일을 넘겨버렸다.
이미 지난 일이고 자신은 한울이를 위해 앞으로 나가야 한다면서 말이다.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밥상을 뒤엎고 주먹질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덕배는 어른스럽게 참고 있었다.
한울이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작품을 위해서.
“저 때문에 기사라도 나면 저희 작품에 폐를 끼치게 되잖아요. 전 모른 척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형.”
사실 덕배의 말이 맞긴 했다.
기사만 내릴 수 있다면 <화란전>의 성공을 위해 우선은 모른 척하는 게 더 좋다.
하지만 이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다.
“덕배야. 네 마음은 알겠는데 문제가 좀 있어. 한선명 저 인간이 너한테 학폭을 당했다면서 기사를 터트리려고 하는 중이야.”
덕배가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다.
“저 아니에요. 형. 진짜 아니에요.”
덕배는 혹시라도 내가 의심을 했나 싶은 생각인지 두 손을 내젓는다.
“네가 안 한 거 알아. 그냥 상황이 그렇다는 거야.”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악플을 달아도 매니저만큼은 연예인의 편에 서야 했다.
물론 나 역시 그럴 생각이었고.
그러자 덕배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진다.
그런데 그때였다.
쉭쉭.
옆에서 거친 콧김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유진이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양손에 쥐고 한선명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
“오빠. 저 오늘 사고 한번 거하게 칠 거니까 말리지 마세요. 아오~ 저걸!”
한울이를 홀로 키운 덕배에게서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는 유진이었다.
그렇기에 마치 친누나라도 된 듯 유진이가 한선명에게 당장이라도 뛰어가려 하고 있었다.
괜히 유진이의 일정이 다음 주에 뜨는 게 아니었다.
난 즉시 유진이의 팔을 잡고 앉혔다.
털썩.
쉭쉭.
유진이가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날 쳐다본다.
“응? 왜요? 오빠가 싸운다고요?”
이젠 척하면 척이네.
“어.”
“그러면 오빠가 싸우고 있을 때 제가 몰래 다가가서 뒤통수를 날릴게요. 콜?”
콜은 무슨 콜이야.
“안돼. 네가 쟬 때리면 9시 뉴스에 나. 드라마는 아주 끝장이 날 거고.”
“그럼 복면을 쓸까요?”
“안돼. 복면도 안 되고 덫도 안 되고 하여간 아무것도 안 돼.”
“덫은 말 안 했는데······ 괜찮을거 같은데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난 콤비플레이로 혼내주자는 유진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 그때 연소희 팀장 역시 유진이의 말에 동조하며 말한다.
“실장님. 제가 아는 기자들 동원해서 싹 파묻어 버리는 건 어떨까요? 교묘하게요.”
연소희 팀장은 계산적이고 냉철한 성격이지만 자기가 관리하는 연예인들을 건드리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란 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폭탄 둘부터 진정시켜야지.
“유진이 넌 지금부터 기자들이랑 인터뷰 절대 금지. 특히나 덕배에 관한 질문은 무조건 노코멘트. 알겠지?”
“헐! 왜요? 덕배에 대해서 기자들이 잘못 이야기하면 바로 잡아줘야죠! 지금 피해자가 가해자로 몰릴 판이라면서요?”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유진이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린다.
“네······.”
난 이어서 연소희 팀장도 진정시켰다.
연소희 팀장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는 포크를 몰래 테이블 아래로 숨긴 채 꼭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 팀장님도 포크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진정하세요. 일단은 이야기부터 해볼 겁니다. 그런 다음에 상황을 봐서 대처할 거예요.”
“예······.”
덕배의 말대로 본인 잘못을 뉘우치고 에브리데이 일정도 없어지면 정말 내키지는 않지만 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경험상 이런 일들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선명의 맞은 편에 앉은 촬영감독이 자리를 비운다.
허겁지겁 식판을 비운 스태프들도 촬영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차 앞에 남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한선명과 그의 곁에 앉은 매니저 양성택 실장은 여전히 식사 중이었다.
기회가 찾아왔다.
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
난 덕배를 지키기 위해 곧장 한선명의 테이블로 향했다.
* * *
털썩.
한선명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를 하던 한선명이 흠칫하며 나를 올려다본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 같은 표정이다.
하지만 긴장된 표정도 잠시.
한선명이 표정을 관리하며 웃기 시작한다.
“왜요?”
말 짧은 것 좀 보소.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강남 유명 로펌 HANS의 대표와 설립자다 보니 오만하기 짝이 없다.
“선명아. 우리 잠깐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바로 촬영해야 해서 시간 없는데요?”
시간은 나도 없어 이 자식아.
그때 옆에서 식사하던 양성택 실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양성택 실장은 에이스 엔터가 반으로 쪼개질 때 리버스 엔터에 데려오지 않은 인물이다.
모략을 잘 짜고 음습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정 실장. 그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나랑 해. 용건이 뭐야?”
난 양성택 실장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음습한 양성택 실장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어수룩한 한선명을 상대하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선명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래야지 덕배의 부탁대로 조금은 용서할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덕배가 받은 그 이상을 돌려줄 거고.
그렇기에 난 한선명의 입에서 대답을 듣기 위해 조용한 목소리로 나긋나긋 말했다.
“왜 그랬니 봉필아?”
고해성사할 시간이다 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