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9화
“아아! 현장의 열기가 참으로 뜨겁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서 각 진영의 7번 대표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룬 리그 사회자가 확성 수정구를 들고 힘껏 목소리를 높였다·
“신성연방 7번! ‘고통의 심문관’ 워턴 슈프랭거 님과! 암흑연합 7번···!
사회자가 멈칫했다·
이 사람만큼은 이명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만큼 기록과 인지도가 부족한 인물이었다· 사회자가 얼른 머리를 굴리다가 되는대로 답했다·
“크, 크로비스 가문의 일라이저 크로비스 님이 입장하십니다!”
찰싹!
무대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신성연방 쪽에서 한 여성이 가죽 채찍을 살벌하게 바닥에 휘두르며 등장했다·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눈동자는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그녀가 깔깔깔 웃으며 한 손을 주먹 쥐었다·
절커덩!
까가가가각!
무대 위로 온갖 고문 기구들이 허공에 둥둥 뜬 채 돌아가고 있었다· 내부에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기구가 돌아가는 소리조차도 끔찍해서 괜히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우후후훗! 이번 룬 리그에서는 누굴 고문하게 될까?”
혀를 할짝댄 그녀가 옆을 바라보았다· 이미 일라이저 크로비스가 먼저 걸어와 자리에 서 있었다·
“귀여운 남자애네·”
그가 또각또각 다가와 허리를 굽혀 일라이저와 눈을 마주했다·
“널 고문하면 어떤 감미로운 비명을 들려줄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걸·”
그녀가 갑자기 일라이저의 아래에서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눈까지 덮여 있던 일라이저의 앞머리가 찰랑거리며 흩어졌다·
“그 잘생긴 얼굴을 보여주··· 응?”
사라라락-
앞머리가 바람으로 흔들리며, 그 안에 워턴을 노려보고 있는 눈부신 보석을 박은 듯한 형광빛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워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 뒤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라이저와 악수를 마친 뒤 물러났다·
“다, 다음 차례로 넘어가겠습니다!”
끔찍한 고문 도구가 하나둘 접히며 워턴 슈프랭거의 아공간으로 돌아간 뒤에나 슬금슬금 걸어 나온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소개합니다! 암흑연합 6번! ‘유령함대’의 엘리사 셀린 님과! 신성연방 6번! ‘천사의 성악대’ 하미엘 님을 룬 리그의 무대 위로 모시겠습니다!”
퍼어어엉!
퍼어어어어엉!
갑자기 들리는 포격음에 놀란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거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대 위로 바퀴 달린 대포들이 나타나 축포를 쏘고 있었다· 당연히 진짜 포탄은 아니었고, 종잇조각이나 꽃 장식 따위가 든 세리머니용 포탄이었다·
“꺄하하하!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여러분!”
전투복 위에 제독 코트를 두른 엘리사 셀린이 연합 측 관중을 향해 두 팔을 휘저으며 걸어왔다·
“수많은 재상들을 배출한 정치계 명문! 셀린 가문의 엘리사 셀린입니다! 셀린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인 저에게 많은 기대와 후원을 부탁드려요!”
그녀의 머리 위로 하늘하늘 꽃잎과 종잇조각이 쏟아졌다·
“아! 셀린 가문답게 공약을 하나 걸어볼까요? 제 손으로 최소 프리스트 세 명 아웃! 그 정도는 해줘야 셀린 가문의···!”
빰빠라라밤!
빰빠라밤!
엘리사의 말이 갑작스러운 나팔 소리에 묻혔다· 그녀가 인상을 팍 구기며 옆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망토를 뒤집어쓴 요정 같은 것들이, 젓가락 같은 팔로 나팔을 불고 있었다·
그 뒤에 북을 치는 요정들과 함께, 한 프리스트 소녀가 지휘봉을 휙휙 휘저으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웅장하면서도 경건한 ‘성전 행진곡’이었다· 미리 펼쳐둔 백마법진에서 조명처럼 빛이 쏟아져 소녀를 비추었다·
“소관 하미엘·”
차악!
그녀가 오른발을 무대 바닥에 쭉 미끄러뜨린 채 포즈를 취하며 고개를 절도 있게 들어 올렸다·
“위대한 데바 여신의 뜻을 부여받아 이 전장의 참전을 명받았습니다! 라우스!”
신성연방 관중 측에서 우렁찬 환호와 기도 소리가 쏟아졌다· 그녀는 가볍게 관중 쪽으로 경례해 보인 뒤 반대쪽에서 오만상을 찌푸린 채 팔짱을 긴 엘리사 쪽으로 다가갔다·
엘리사가 비웃음을 흘렸다·
“유치하게 나팔에 북에 조명까지, 민폐고 뭐고 어지간히 눈에 띄고 싶은가 봐?”
엘리사의 말에 하미엘도 인상을 팍 썼다·
“시끄럽게 대포까지 쏜 그쪽이 소관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포격은 내 상징이니 어쩔 수 없거든!”
“제 성악대도 소관을 상징하는 요소입니다만!”
두 사람이 신경질을 부렸지만, 관중들은 마냥 재밌는 듯 떠들썩하게 웃거나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사회자도 눈을 빛내며 손을 비볐다· 바로 이런 자극적인 걸 대중들은 원한다·
“소관의 성악대와 당신의 유령함대·”
하미엘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느 쪽이 더 우위인지 승부해 보죠· 결과는 뻔하겠습니다만·”
엘리사는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살짝 분위기가 날카로워진 걸 눈치챈 사회자가 얼른 두 소녀를 악수하게 하고 돌려보냈다· 관중들이 가십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중립지대 높으신 분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두 세력의 화합이다· 적대 분위기가 계속되면 중립지대에 좋을 게 없었다·
“바, 바로 다음 대표들을 보시죠!”
땀을 뻘뻘 흘린 사회자가 손에 든 자료를 본 뒤 목소리를 높였다·
“신성연방 5번! ‘선향의 주인’ 디아나 멀레이니 님과 암흑연합 5번! ‘엘리멘탈 마스터’ 메이린 빌렌느 님입니다!”
오오오!
양측 관중 전체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이전 6번들과는 대비되게 조용하면서도 우아한 등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대에 꽃과 풀이 피어나고, 그 위로 디아나 멀레이니가 숫사슴 위에 올라탄 채 관중들을 향해 우아하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얼음 결정이 내리고, 부드럽게 깔린 빙판 카펫으로 얼음 구두를 신은 메이린이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서리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붙잡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이내 두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와 서로 마주 보았다·
“디아나 멀레이니라고 하옵니다·”
“메이린 빌렌느야·”
두 사람이 손을 맞잡으며 생글생글 웃었다·
“상아탑의 길고 찬란한 역사에 대해서는 늘 존경하고 있사옵니다· 가시는 길에 진보의 빛이 함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신성계에서 3대 가문이라 불렸던 멀레이니 가문에 대해서도 많이 들었어· 과거 유명한 성녀들을 많이 배출했더라? 대단해·”
두 사람의 웃는 눈꼬리가 더더욱 길어졌다·
“수많은 대마도사를 배출한 상아탑에 저희 가문이 비할 수 있을는지요? 봄이 오면 눈이 녹아내리고 지면에 움튼 씨앗에 싹이 트듯, 귀문의 미래 또한 새로운 싹이 틀 것을 기원하옵니다·”
“계절이 바뀌면서 꽃이 지는 건 자연의 섭리지만, 창창한 봄날에 예쁘게 뽑혀서 꽃다발로 다른 이의 품에 안기는 건 어떨까? 우리가 다시 교류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멀레이니 가문에 장미꽃을 바치고 싶네·”
두 사람이 우후훗 웃었다·
“진보의 변천을 기도합니다·”
“영광의 존속을 기원할게·”
그녀들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등을 돌린 뒤, 서로의 관중에게 인사하며 멀어졌다·
관광객 신분으로 들어와서 조금 멀리서 지켜보던 말콤이 팔짱을 꼈다·
“지금까지 등장 중에서는 처음으로 덕담도 주고받고 좋아 보이는군· 그렇지 않나?”
말콤이 그렇게 말하며 옆을 보았다· 예비 멤버 제이미가 제 팔을 붙잡은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수, 숨을 못 쉬겠어· 두 쪽 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
말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제이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짧은 대사 안에 아마 여섯 번은 치고받고 싸웠을 것이다·
“아, 여러분! 놀랍습니다! 지금부터는 정말로 대단한 거물들이 등장하는군요! 양측 4번입니다!”
사회자가 앞으로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암흑연합 4번! ‘흙의 형상술사’ 샤텔 마에르 님! 신성연방 4번! ‘치유의 거인’ 르바임 메델 님입니다!”
각 세력의 4번이 등장했다·
두 사람은 특별히 다른 연출 없이 담백하게 성큼성큼 서로를 향해 걸어왔지만, 그것만으로 무대가 꽉 차 보였다·
샤텔의 경우 압도적인 덩치, 르바임의 경우 건강미 넘치는 외모와 빛을 반사시키듯 번쩍번쩍거리는 황색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이내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사실 악수라기보다는 르바임이 샤텔의 손가락을 하나를 붙잡고 흔드는 정도였지만·
그때·
“···너·”
샤텔이 입을 열었다·
“크다· 상당히·”
르바임이 희미하게 웃었다·
“숙녀에게 건네는 말치고는 실례되는 말 아닌가? 뭐가 크다는 걸까요·”
“내 눈은· 속이지 못한다·”
그렇게 말한 샤텔이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르바임도 어깨를 으쓱한 뒤 되돌아갔다·
바로 이어서 사회자가 외쳤다·
“신성연방 3번! ‘철벽의 광자’ 테르곤 코룸 사마르칸드 님! 그리고 암흑연합 3번! ‘돌풍의 모험가’ 에이젤 브링어 님입니다!”
다소 독특한 이름의 테르곤이라 불린 신성연방의 프리스트는, 프리스트 대표들 중에서 가장 큰 체격과 풍채를 자랑했다· 반면 단신에 소심한 성격의 에이젤은 바람을 일으키는 둥 마는 둥 연출하며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가 샤샤삭 다가왔다·
테르곤이 손을 내밀자, 에이젤이 쭈뼛쭈뼛 손을 잡았다·
“그대의 명성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네·”
테르곤이 고개를 쭉 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빠르다지? 에이젤 브링어· 나는 내구력에 자신이 있는데·”
“아, 아· 그러시군요·”
“자네의 속도와 나의 내구력· 어느 쪽이 우위인지 궁금하군!”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에이젤이 조용히 말했다·
“···아니, 그야 당연히 제가 우위죠·”
키젠의 유약한 최강·
작은 악마 에이젤의 본성이 드러났다·
실력에 대한 확신과 천재성은 에이젤에게 있어 숨 쉬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이미 자신감이 필요한 영역이 아니다·
테르곤이 입가가 히죽 벌어지더니 더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악수한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에이젤이 ‘힉’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약한 걸 약하다고 한 것뿐인데요·”
그 순간 빈틈없이 달라붙었다고 생각한 서로의 두 손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에이젤의 작은 손에 바람이 휘감기자, 역으로 뿌드득 소리가 나며 테르곤의 손이 꺾였다·
“암흑연합에 물건이 있었군!”
테르곤이 손에 힘을 주려고 하는데 사회자가 얼른 다가와 말렸다· 테르곤이 픽 웃으며 먼저 손을 떼어낸 뒤 두 팔을 벌렸다·
“전장에서 기대하겠네·”
두 사람이 물러나고, 안도의 한숨을 쉰 그가 얼른 다음 명단을 불렀다·
“벌써 양측의 2번을 볼 차례입니다! 아아! 이번엔 특히 좋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이 나오는군요! 암흑연합 2번, ‘제6군단장’ 헥토르 무어 님과! 신성연방 2번, ‘신의 손’ 모제 델 베아투스 님입니다!”
공포 효과를 없앤 순수한 드래곤 피어가 수 차례 울려 퍼지며 용의 비늘을 휘장처럼 두른 헥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세상만사를 아득히 초월한 듯한 표정으로 태연자약하게 걸어오는 모제가 보였다·
신성연방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한 헥토르를 겁에 질리거나 경계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고, 암흑연합의 주민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모제를 보고 있었다·
“저자가 그 유명한 모제인가·”
“···전 교황의 아들· 성인이 되는 내년에는 사실상 차기 교황 후계자 등극이 유력하다던데·”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헥토르가 오른손을 내밀었고, 모제가 왼손을 내밀었다·
헥토르가 인상을 확 구겼다·
“연방 교황청의 쓰레기들은 예의도 모르나· 오른손을 내밀어라·”
“너·”
모제가 헥토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 오른손을 만지면 여기서 죽어·”
헥토르의 표정이 싸늘해지며 목덜미의 혈관이 꾸득꾸득 올라왔다· 격분했을 때 나오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가 오른손을 쫙 펼쳤다·
“그럼 이 자리에서 시험해 보면 되겠군·”
킥·
모제가 조용히 웃음 짓더니 왼손으로 헥토르의 오른손을 툭 치고는 등을 돌렸다·
“어차피 안에서 다 죽일 건데, 지금 하면 리그가 취소되잖아·”
빠드드득·
헥토르가 이를 갈았다· 금방이라도 드래곤 브레스를 사용할 듯 입을 벌리던 그가 이내 열기가 후끈한 숨을 토해내고는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돌렸다·
마력 촬영구로 이 모습을 촬영하던 딕이 웃었다·
“저 자식, 3학년이 되고 참을성 하나만큼은 늘었단 말이야·”
이제는 마지막 차례·
사회자가 아직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양측 관중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시몬! 시몬! 시몬!”
“나와라! 7군단장!”
암흑연합 주민들은 시몬의 이름을 연호했다·
“별의 성녀님!”
“위대한 여신의 가장 가까운 딸이시여!”
신성연방 주민들은 단체 찬양에 들어갔다·
사회자는 뜨거운 분위기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확성 수정구를 들어 올렸다·
“자, 여러분 모두 각 대표들의 리더인 1번이 누군지 이미 아시는 모양입니다! 미래의 시대를 이끌어갈 최고의 주역들을 이리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두 팔을 벌렸다·
“신성연방 1번! ‘별의 성녀’ 레테 샤르데나 님과! 암흑연합 1번! ‘제7군단장’ 시몬 폴렌티아 님을 모시겠습니다!”
함성이 쏟아졌다·
그런데 잠시·
‘응?’
‘무슨 일 있나?’
두 사람의 등장이 지연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딕이 슬쩍 마력 촬영구를 메도우에게 주고는 말했다·
“제가 찾아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