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4화
종언의 운명(15)
촤악!!
검을 뽑아내는 것과 동시에 아론이 그 자리에 쓰러진다·
가슴에 검흔이 새겨진 아론의 몸이 떨어지기 전 엘드리히가 움직였다·
“이런·”
조심스럽게 아론의 몸을 받아든 5사도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돌아섰다·
“귀중한 옥체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어·”
“···너·”
하지만 레녹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미간을 꿈틀거렸다·
갑작스럽게 아론을 죽여버린 엘드리히의 행동보다도 그가 한 말이 더욱 충격적이었기 때문·
1사도의 운명봉인을 풀기 위해 아론바이거의 시체를 열쇠로 사용하려 한다·
토커퍼즈에서부터 개입해 왔던 교단이 마지막 순간 드러냈던 계획의 정체·
그 말을 레녹 자신이 결코 흘려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왕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한 손으로 아론을 부축한 엘드리히가 레녹을 향해 중절모를 매만지며 인사를 건넸다·
“타고나길 의심이 많고 신중하신 분이야·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틈을 주시는 일은 없었겠지·”
“흠 이건 또 별일이군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상황을 구경하던 광대가 고개를 기울였다·
“교단을 믿을 수 없는 것 정도야 하루 이틀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사도가 움직이면 보통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겁니까?”
“우레카 신녀님께서는 현재 교단이 전쟁에 임하는 방식을 굉장히 불만족스러워하고 계시지·”
엘드리히가 느긋하게 말했다·
“전대 신녀님께서 사도전력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운용했다고 생각하시어 그 방향성을 조금 바꾸려고 하시네·”
“미친 화신체에게 전장에 던져놓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 말고 다른 응용방법이 존재하는 줄 몰랐군요·”
“교단에게 있어 사도의 광증이란 더는 해결할 수 없는 골칫덩이가 아니니까·”
두두두두!!!!
왕궁 곳곳에서 살아남은 기사들이 빠르게 집결하는 것이 느껴진다·
레녹이나 복마전의 손에 죽지 않은 단장급의 고위 기사들의 서슬 퍼런 기척·
하지만 엘드리히는 사방에서 다가오는 기사들을 알면서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우리 모두 한때는 인간이거나 그와 유사했던 존재였으니· 만신의 교리를 위해서라면 불신자와 어울리는 것도 감내할 일이지 않겠는가?”
“아까부터 헛소리만 줄줄 늘어놓기 바쁘군·”
촤악!!
마력사를 잡아당겨 알현실 파편 곳곳에 묶은 레녹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필요 없으니까 1사도에게 걸려 있다는 봉인에 대해 말해라· 너희들은 1사도의 봉인을 풀기 위해 [문]의 힘을 필요로 하던 게 아니었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을 풀어낼 수 있는 열쇠를 [문]에서 구하려 했던 것이지·”
엘드리히가 아론의 시체를 눈짓하며 미소지었다·
“우리는 왕도의 사태를 통해 폐하께서 열쇠의 인과를 갖추었음을 확인하였네· 그 과정에서 폐하의 생사가 중요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
“····”
5사도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레녹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는 양면성의 재능을 지닌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자물쇠와 열쇠가 존재하고 있었으니·
인도자의 반지를 구하는 과정에서 손에 넣은 자이로의 함궤 역시 그러한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가·
만약 양면성의 재능을 보유한 아론의 존재가 봉인의 열쇠로서 기능할 수 있다면 그 때문이겠지·
“1사도가 어떤 존재이길래 봉인을 풀기 위해 이렇게까지 손을 쓰는 거지?”
“무엇이 궁금한지는 이해하나 본인 역시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는 않네· 다만 그가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초월성을 타고난 존재라는 사실만을 전해 들었을 뿐이지·”
“초월성을 타고났다고···?”
“그분께서 이 세계에서 첫 번째로 ‘내정’한 사도라면 그만한 권능을 품었음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5사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레녹이 순간적으로 떠올린 추측과 모호하게 맞닿았다 빠져나가는 듯하다·
정답인지 오답인지 가늠할 수 없는 흔들리는 생각 속에서 엘드리히가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다만 이 모든 일이 본단의 계획대로 흘러가 이곳에 도달한 것은 아니야·”
“····”
“본래라면 폐하의 죽음과 동시에 봉인이 영향을 받으며 그 전조가 왕도에 나타나야 했건만··· 역시 무엇이든 생각한 대로만은 되지 않는 게지·”
철컥!!
바닥에 꽂아둔 검을 잡아챈 엘드리히가 아론의 몸을 조심스레 들쳐메며 웃었다·
“그러니 이만 오늘은 이 자리에서 웃으며 헤어지지 않겠나? 아무래도 자네들 역시 기존에 원하던 것은 전부 손에 넣은 것 같은데·”
“그걸 정하는 건 그쪽이 할 일이 아니지요·”
광대가 귀신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까닥였다·
“좋은 말로 할 때 들고 있는 거 내려놓고 물러나시죠· 토커퍼즈에서 아직 덜 맞은 겁니까?”
“토커퍼즈의 결전을 기억한다면 본인이 어떻게 할지도 알고 있을 텐데·”
엘드리히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조금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외면세계 소우주 : 이단화
[천중대검(踐重大劍)]
슈우우우우···!!!!
알현실 위로 뻥 뚫린 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핏줄이 기괴하게 얽힌 거검(巨劍)이 왕궁에 사선으로 떨어져 추락하고·
강렬한 충격파가 왕궁을 휩쓸고 폭발해 지면을 그대로 터트렸다·
콰과과과광!!!!
“안타레스!!”
아론의 시체를 들쳐멘 엘드리히가 비스듬히 내리찍힌 거검의 검면 위를 질주한다·
맥동하는 핏줄을 계단처럼 밟고 뛰어오르는 엘드리히를 안타레스가 거의 동시에 뒤쫓았다·
콰앙!!
“예지자· 그대는 본단과 깊게 엮여서 좋을 일이 없을 텐데·”
옆구리에 꽂히는 발을 검으로 받아낸 엘드리히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토커퍼즈에서도 그렇기에 환술사에게 예지를 선물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나?”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빚을 졌지·”
거검 위에 비스듬히 올라탄 안타레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마지막까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야·”
“그렇···군!”
엘드리히가 머리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하늘을 찢어발기는 거대한 참격이 폭발했다·
거검의 검면 위를 사선으로 내리그으며 인근의 공간을 통째로 베어내는 절기·
콰아아아앙!!!!
“아론이 죽었나· 계획은 실패했군·”
폐허가 된 왕도의 거리· 불타 무너진 청사 옥상에 무표정한 얼굴의 청년이 서 있었다·
“내 공간절단에 베이지 않았다면 소우주··· 그것도 나와 동급의 경지에 달한 심상인가·”
철컥!!
순식간에 검을 되돌려 검집에 꽂아 넣은 1기사단장 우르윈이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위력이 아니라 숫자를 늘려서 떨어뜨릴 수밖에·”
팟!!
우르윈의 손이 사라진 찰나 그의 머리 위로 일그러진 검광이 폭발적으로 솟구친다·
수십 번에 달하는 날카로운 검기가 폭발하듯 솟구쳐 하늘을 수놓았다·
공간절단을 제하는 대신 참격의 위력과 숫자에 집중해낸 검기의 폭격·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 폭격처럼 쏘아진 검기가 엘드리히의 거검 위로 쏟아져 내린다·
콰과과과과과!!!!
회전하는 거검 위에서 충돌하는 엘드리히와 안타레스· 수십 발의 검기를 난사해 저격하는 우르윈·
8레벨의 육체능력자 세 사람이 왕도의 중심부에서 동시에 격돌하는 삼파전·
“빅터·”
레녹이 지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광대가 옆에서 그를 불렀다·
“저거 넘겨줘도 괜찮겠습니까? 이대로 가면 빼앗긴다구요·”
“관심 없다·”
“저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역시 빅터는··· 엥? 뭐라구요?”
“5사도가 이 시점에 끼어든 것 자체가 처음부터 아론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증거겠지·”
광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녹이 대꾸했다·
“도주방향을 보니 도망칠 방법도 이미 마련해 둔 것 같고··· 이 상황에서 시체를 빼앗으려면 그를 죽이지 않고는 불가능할 거다·”
레녹이나 광대 모두 왕도를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마력과 심력을 거의 다 소모한 상황·
아론과 기사단을 상대하기 위해 자성영역까지 꺼내든 만큼 남아 있는 여력이 거의 없다·
이 시점에서 5사도를 죽이려고 하면 분명 필요 이상으로 무리해야 하는 부분이 생길 터·
“죽은 자의 시체 따위· 내가 이용할 것도 아닌데 크게 심력을 쏟고 싶지는 않군·”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네요· 저걸로 1사도의 봉인이 풀려도 괜찮겠습니까?”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이제 와서 후환이 남을 여지는 없어·”
레녹이 웃었다·
“설령 무언가가 내정되어 있었다 해도 그 결과조차 내 의지대로 조작하려 한다· 그러기 위한 자성영역이었어·”
어쩌면 아론바이거 카바힘의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일종의 트리거였을지도 모르지·
이 자리에서 1사도의 봉인이 풀리면서 아론을 상대하는 것 이상의 재앙이 안배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녹은 아론이 지니고 있던 인과와 분기점을 빼앗아 그로 인해 파생될 모든 가능성을 없애 버렸고·
그렇기에 아론의 존재로 인해 1사도의 봉인이 영향을 받을 여지가 소멸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후환은 없다· 가능성은 레녹이 쥐었다·
하지만-
가면 너머 차가운 시선으로 엘드리히를 보며 레녹이 시선을 젖혔다·
“다만 확실히 일이 이대로 끝나는 건 마음에 안 드는군·”
“예?”
“한방 크게 엿이나 먹여주고 보내주도록 할까·”
콰과과과!!!
쏟아지는 검기의 폭격 속에서 엘드리히의 신형이 거검의 검면을 타고 질주한다·
거검의 끝에서 엘드리히가 뛰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수십 미터 상공 위로 솟구치고·
동시에 하늘 저편에서 가위로 오려낸 듯한 기괴한 공간균열이 활짝 펼쳐졌다·
쩌저저적···!!!
10사도의 저울· 한때는 암리타 프라우벨의 것이었던 사도술식이 전개되며 도망칠 길을 열고·
“모두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네·”
엘드리히가 허공에 떠올라 상승하며 몸을 힐끗 돌려세웠다·
“그럼 다음에는 지금보다 더 결말에 가까워진 전장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지·”
“무언가 놓친 것이 있지 않나?”
레녹이 지상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토커퍼즈에서 교단이 잃어버린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음?”
“바로 기억나게 해주지·”
통신기를 들어 올린 레녹이 말했다·
“쏴·”
키이이이이잉-!!!!
그 순간 왕도 시가지 반대편에서 창백한 섬광이 번뜩이며 하늘을 어둡게 물들였다·
왕도 후문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크루즈 선박· 그 옥상에 설치된 창백한 포신에서 새어 나오는 빛줄기·
접합술주가 포신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조정을 마친 순간·
[비애 시동]
[고통 발포]
왕도의 하늘을 사선으로 가로지른 창백한 섬광이 엄청난 속도로 엘드리히를 후려갈겼다·
“···!!!!!”
마력을 끌어올려 피하거나 흘려낼 여유조차 없었다·
들쳐멘 아론의 시체가 훼손되지 않도록 몸을 틀며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을 뿐·
콰아아아아아앙!!!!!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튕겨 나간 사도의 신형이 하늘에 열린 공간균열을 넘어 사라진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폭발해 흩어진 ‘비애’의 열기가 왕궁의 하늘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주 화려한 작별인사로군요· 저 친구도 이 정도면 배가 부를 겁니다·”
광대가 그 모습을 보며 낄낄 웃었다·
“어쩌면 이미 배가 터졌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접합술주가 조정해둔 금기병장의 위력이 생각보다 상당하더군·”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빛줄기를 바라보며 레녹이 말했다·
“한 번쯤은 더 써먹을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 헤어지기 전 미리 말을 맞춰두었지·”
“이번 작전의 마무리로 딱 어울리는 불꽃놀이네요·”
“돌아가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공략작전은 여기서 끝이다·”
창백한 빛의 파편이 하늘에서 수십 발씩 떨어지며 하늘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기후가 바뀌고 얼어붙은 왕도의 날씨마저 순간적으로 따뜻하게 만드는 강렬한 열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애’의 폭격이 왕궁 위로 떨어지며 모든 것을 통째로 지워 없애버렸다·
콰아아아아앙!!!!
* * *
꿈을 꾸고 있었다·
끝나지 않는 꿈을 꾸며 영원에 가까운 바다를 유영한다·
어둠과 공허만이 가득한 차가운 암흑의 바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은 괴로워서 계속해서 잠을 잘 수밖에 없다·
깊게 가라앉은 무의식 속에서 따스한 온기를 찾아 헤맨다·
바다에 휩쓸리지 않은 별빛· 인과를 잃지 않은 세계·
아직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별·
부수고 먹어치운다· 원하지 않는 결말을 짓는다·
슬퍼하지 않는다· 애도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는다·
타인의 죽음도 자신의 죽음도 이 바다 속에서는 무한한 순환의 일부·
마음대로 먹어치우고 마지막에는 자신조차 거름이 되면 족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제안을 받아들였던 건-
철썩···!!
“····”
파도 소리를 들으며 레녹은 눈을 떴다·
울렁거리는 속과 지끈거리는 머리·
온몸에 알이 배긴 것처럼 욱신거리며 배가 아파 토할 것 같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으며 힘겹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페인트 칠이 벗겨지고 이곳저곳이 손상된 크루즈 선박이 파도 위로 넘실거린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한복판을 나아가고 있는 크루즈의 모습·
그제서야 레녹은 자신이 배멀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표정을 찌푸렸다·
“빅터 일어났습니까?”
갑판의 바카라 테이블에 앉아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광대가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아니 영역까지 사용한 걸 생각하면 회복이 빠르다고 해야 하나?”
“···여기는 어디지?”
왕도에 폭격을 퍼붓고 선박에 올라타 탈출한 것이 레녹이 기억하는 마지막·
강을 타고 왕도를 벗어난 다음에야 간단한 결계를 치고 휴식을 취하다 잠들었던가·
하지만 눈을 떠보니 주변은 어느새 강이 아니라 바다로 변해 있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왕도 바깥에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둑이 있었거든요·”
광대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걸 타고 바다 쪽으로 나왔습니다· 지금쯤은 북대륙 위를 빙 돌아가고 있겠군요·”
“····”
“이쪽 바다에는 따로 이름이 없습니다만 굳이 따지자면 북극해 근처라고 해야 할까요?”
침묵하는 레녹을 두고 광대가 히죽 웃었다·
“여행을 나왔다고 생각하시지요· 모처럼 모험을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지 않습니까?”
“추운 곳을 탈출해서 또 추운 곳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나?”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철컥!!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묘하게 왼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린다·
둔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시선을 돌리자 왼팔에 장착된 유리색 건틀렛이 비춰졌다·
“···그렇군·”
차가운 혜성의 혼을 빼앗아 건틀렛에 담은 뒤 아직 장착을 해제하지 않았던 건가·
텅 비어 있는 갑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왕도의 기억이 하나둘씩 돌아오는 것 같다·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는군· 무점사약결의 반동인가·’
무점사약결은 만화경의 분기점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고능력을 요구하는 자성영역·
조작술식을 사용한 ‘재구성’은 영역의 힘이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연산 습득과 조작은 오롯이 레녹이 해야 할 일이다·
정신적인 역량의 요구량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 레녹도 순간적으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있을 정도·
만다라 안에서 세계 10법을 손에 쥐었을 때 비슷한 감각을 느꼈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연관이 없는 반동은 아니겠지·
레녹이 갑판으로 걸어 내려오며 말했다·
“내리겠다· 배를 멈춰·”
“엥? 갑자기요?”
광대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여기서 어디로 가겠다는 말입니까?”
“죽은 신의 유해를 훔쳐낸 시점에서 공략작전은 끝났을 텐데·”
레녹이 가면 옆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대꾸했다·
“더 이상 여기서 볼 일은 없다· 난 이쯤에서 돌아가지·”
레녹이 이번 공략작전에 참가한 이유는 왕도 지하에 존재하고 있던 [문]의 힘을 조사하여 위해서였다·
반궁의 힘이 뒤섞이며 폭주하는 전격마법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문]을 조사해 반궁의 힘을 다룰 방법을 알아내야 했기 때문·
결과적으로 반궁의 기억과 만다라를 손에 넣으며 전격마법의 폭주는 더 심해졌지만 그럼에도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위신권역 만다라와 그 안에 담겨 있는 세계 10법의 지식·
그것들을 연구해 반궁의 힘을 모사할 수 있다면 전격마법의 제어를 되찾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니까·
오히려 왕도의 [문]이 아니라 레녹의 연구실에서 이러한 작업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호재일지도 모른다·
그 시점에서 레녹은 더 이상 판데모니엄에 용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자리를 뜨려 했던 것·
“빅터· 작전 회의 도중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광대는 그런 레녹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희가 죽은 신을 훔치는 건 소원을 빌기 위해서라구요· 이만큼 열심히 일해놓고 대가도 받지 않고 갈 생각입니까?”
“···소원이라고?”
광대가 왕도에 도착하기 직전 브리핑에서 설명했던 일련의 목적·
죽은 신을 훔쳐 소원을 빌겠다던 그 말이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였던가·
하지만 레녹은 대번에 그 말을 기억해내고도 오히려 표정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죽은 신의 유해는 단장을 위해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나?”
“예· 그러니까 그게 그 말 아닙니까·”
광대가 씩 웃으면서 북극해의 수평선 끝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단장에게 소원을 빌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