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3화
종언의 운명(14)
거대한 얼음혜성의 중심부에 떠오른 서리고리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올발라의 지옥을 구성하는 핵이자 아론바이거 카바힘이 사용하는 끝없는 마력의 원천·
현재가 아니라 다른 시간선에서 동력을 끌어다 사용하는 바다의 신들에게만 허락되는 특권·
차가운 혜성의 혼을 재료 삼아 만든 서리고리가 황금빛의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잉-!!!!
자성영역 무점사약결의 고유능력 ‘재구성’·
같은 조작술식을 다루면서도 반궁과는 다른 방향성을 선택한 레녹의 분기점·
유를 무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가능성의 끝에서 타인의 운명과 인과조차 재구성하여 손에 넣는다·
자성영역 전개 : 분기점 창조
파아아아아앗!!!!!
아론의 머리 위에 떠오른 서리고리가 황금빛으로 일그러지며 만화경의 형태로 개변한다·
동시에 레녹과 아론을 둘러싸고 회전하던 거대한 얼음궁전이 느릿하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아론이 거친 전성을 터트리며 미친 듯이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그 감각은 아까와는 달라져 있었다·
스스로도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아득한 과거에서 끝없이 흘러들어오던 마력이 끊겨있다·
남아있는 것은 인간의 모습을 잃고 얼어붙은 육신과 그 몸에 본래 존재하던 체내마력뿐·
죽은 신을 재료 삼아 만든 금기병장· 서리고리의 힘을 눈앞에서 빼앗기고 있다·
[아니 허락하지 않겠다···!! 이럴 수는 없어!!!!!]
온몸에 차오르는 섬뜩한 위화감을 느끼며 아론이 서리고리를 움켜쥐었다·
그 의지를 따라 얼어붙은 혜성의 중심부가 거칠게 회전하며 무너져 내렸다·
콰과과!!!!
[그건 과인이 반평생을 바쳐 손에 넣은 결실이다!!! 오직 과인의 손 안에 있어야 하는 권능이란 말이다!!!]
“그랬었지·”
찰칵!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아론과 레녹의 위치가 뒤바뀐다·
서리고리가 떠오른 팔한지옥의 중심부에 내려선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네가 보유한 양면성의 재능이 아니었다면 저 서리고리를 만들어낼 수단도 사용할 자격도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네놈!!!]
“하지만 저건 네가 사용해도 되는 힘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쓰이기 위해 남겨져 있던 물건은 더더욱 아니었지·”
만다라 안에 보존되어 있던 차가운 혜성의 죽음은 승천자가 남긴 안배·
그가 모든 것을 부수고 다시 빚어내려 노력하며 무수히 실패해 왔다는 증거다·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의미를 남기려 했던 초월자의 의지가 그곳에 있다·
반궁이 레녹을 기다리고 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가 레녹에게 남기려 했던 의미란 어떤 것인지·
정답은 알 수 없다· 가끔 때로는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억도 감정도 이 두려움조차도 결국 레녹이 가지고 가야 할 것이기에·
레녹이 언젠가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언젠가의 마지막 역시 레녹이 직접 정해주기 위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스르기 위해 아직 여기에 있다·
“아론바이거 카바힘· 네가 저것을 손에 넣기 위해 쌓아 올린 그 모든 노력과 결실을 이 자리에서····”
서리고리를 향해 손을 뻗은 레녹이 차갑게 말했다·
“가져가겠다·”
콰아아아앙!!!
얼어붙은 성역의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물드는 서리고리가 레녹의 손짓에 이끌려 추락한다·
영창을 더할 때마다 황금빛의 만화경으로 개변하며 아론에게서 멀어지고 레녹에게 가까워진다·
아론바이거 카바힘이 아카이브의 지식과 양면성의 재능을 사용해 손에 넣은 외신의 잔재·
신의 유해를 금기병장으로 가공하여 그 무구와 자신의 존재를 동화시킨 끝에 도달한 가능성·
그것을 통째로 ‘재구성’하여 레녹의 것으로 개변한다·
레녹 자신이 겪은 적 없는 레녹 자신의 것이 아닌 분기점을 끌어다 강제로 만화경에 편입한다·
우우우우우웅!!!!
[저건-]
레녹의 등 뒤에 떠오른 황금빛의 만화경·
그 장엄한 광채를 마주한 아론이 순간 레녹을 막아서는 것조차 잊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론의 서리고리를 빼앗아 재구성한 새로운 분기점·
그 증거이자 상징인 만화경을 마주하는 순간 아론 역시 동시에 그것의 본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만물의 양면을 보는 재능을 지녔기에 아론의 눈에는 만화경의 앞면과 뒷면이 모두 비춰진다·
동시에 그것이 결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자 원리를 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현실의 시간선에 존재하지 않는 만화경의 분기점·
종말의 외신들이 그러하듯 이미 존재했던 과거에서 힘을 끌어다 쓰는 억지조차 아니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평행세계의 저편에서 끌어내는 가능성·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어 내리라 믿으며 다가오지 않는 미래를 그리는 기적·
부정하고 싶어도 이미 깨닫고 있다·
스스로 바라고 염원하는 것만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미래선의 근원심상·
그것이 초월자들이 감히 꿈꿔보지 못한 소망이자 저 바다의 외신들조차 흉내 낼 수 없는 비원임을-
으직·
[끄아아아아악!!!!]
그 순간 아론의 두 눈이 그대로 파열되어 흘러내렸다·
투구 아래로 흘러 떨어지는 얼어붙은 수정체를 두고 아론이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만화경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바라보고 그 진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버티지 못한다·
[아 아니··· 그런 대답이 있을 리가 없어···!!!!]
억지로 부정하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비현실적인 심상이 실재하는 기적임을 인정한다·
만화경을 마주해온 이들이 그러했듯 부정하고 거부하며 분노하고 끝내 경외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아론이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눈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안 돼 안 돼!!!! 아아아아악···!!!]
콰아아앙!!!
바다의 신에 가깝게 가공해낸 인외의 육신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엄청난 속도로 가속하고·
눈이 망가진 아론의 육신이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며 얼어붙은 혜성과 하나 되어 거칠게 공명했다·
아론의 육체와 동화한 팔한지옥 올발라 전역이 움직이며 레녹을 향해 입을 벌리는 기괴한 광경·
콰과과과!!!!
“환상이라 해도 상관은 없겠지·”
얼어붙은 천지가 갈라지는 듯한 마경 속에서 레녹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세계의 종말조차도 누군가에게는 한 줌 물거품에 불과할 테니까·”
[닥쳐라!!!!]
“하지만 그때까지는 가득 채워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담아보려 한다·”
일그러진 아론의 얼굴을 보며 레녹이 웃었다·
“나와 같은 것을 꿈꾸었던 이들이 그러했듯 마지막에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으니까·”
쩌저저저적···!!!!
레녹의 왼손에 잡힌 만화경이 강렬한 냉기를 내뿜으며 얼어붙는다·
유리색 건틀렛에 깃든 한기가 엄청난 광량과 함께 새하얗게 번뜩이며 공간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혜성의 잔재와 동화된 금단의 인과를 제허궤빙적(帝虛櫃氷積)의 분기점과 조합한다·
신의 유해를 재료 삼는 것으로 인과를 더한 빙결계의 권능을 무점사약결으로 재구성하여 아론의 기원을 쥐고·
마침내 그 인과와 운명조차 그 자리에 얼려 붙였다·
[운명봉인]
녹스 비블리오에서 마주했던 미래의 마도서·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을 술식의 이름으로서 자연스럽게 내뱉은 순간·
아론의 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으며 혜성이 박살 나고 무너진 왕도의 하늘이 활짝 펼쳐졌다·
쩌어어어어엉!!!!
비산하는 얼음혜성의 잔재· 꼬리를 물고 떨어지는 서리파편 속에서 추락하는 레녹과 아론의 모습·
반쯤 기울어진 왕궁의 알현실 천장을 뚫고 내리찍혀 그대로 카펫이 깔린 바닥을 나뒹굴었다·
콰앙!!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직 살아남은 기사들이 황급히 알현실로 달려왔다가 아론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 안돼···!!”
치이이익!!
온몸이 얼음으로 변해버린 채 서서히 녹아내리며 아론이 절규하고 있었다·
혈액과 신경 근육마저 얼음으로 바꾸어내고도 동력을 빼앗긴 채 죽어가는 아론의 모습·
하지만 진정으로 아론을 절망케 하는 것은 몸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 따위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는단 말이다···!!!”
만물의 양면을 볼 수 있던 양면성의 재능이 아론의 내면에서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재능 자체를 봉인당해 강탈당한 것처럼 절망스러울 정도로 공허한 상실감만이 가득할 뿐·
“폐하!!!”
“어찌 이런···!!”
온몸이 녹아내리고 있는 아론의 처절한 모습을 본 기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검을 강하게 움켜쥔다·
알현실 뒤켠 왕좌가 자리한 곳에 올라 서 있는 레녹을 기사들이 섬뜩하게 노려보았다·
“네놈이 기어이 폐하의 옥체에 손을 대어 대계를 망쳤구나!!”
“가만두지 않겠다···!!”
“····”
하지만 레녹은 그런 기사들을 무시하고 알현실 아래 엎드려 절규하는 아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지막 순간 아론의 운명을 정해주며 스스로 고했던 그 말에 대해서·
세 번째로 이름 지어진 운명의 이름은 종언·
종언의 운명이자 운명의 종언이었던 이유·
[운명봉인]이라·
어둠의 서고에서 마주하고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의미에 대해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일까?
“끝났군·”
“···예지자·”
얼어붙어 무너지는 궁전의 복도 끝에 안타레스가 힘없이 벽에 기대 서 있었다·
1기사단장 우르윈을 붙잡아 시간을 끌었음에도 조금 지쳐 보이기만 할 뿐 별다른 상처는 없는 모습·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긴 안타레스가가 복잡한 눈빛으로 쓰러진 아론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이··· 내가 예지할 수 없었던 우리의 마지막이야·”
“안타레스···!! 거기 있었느냐!!”
아론이 안타레스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휙 돌렸다·
녹아내리는 손을 뻗은 아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다시 다시 내게 예지를 빌려다오· 내게 아카이브로 향하는 길을 일러줘야 한다!!”
“아론· 알고 있잖아·”
안타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실수였어· 용병으로 일하면서까지 세상을 돌아보던 네가 인간을 이용한다는 틀린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내 과신이었지·”
“나는 누구보다 아카이브의 지식을 잘 활용해 왔어!!!”
아론이 분노해서 소리쳤다·
“신의 힘을 쥐고 승천자의 안배를 연구하고 대륙 바깥에서 가능성을 찾았다···!! 이 이상으로 무엇이 부족했다는 말이더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아론·”
안타레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와서 너를 멈춘다고 해도 네가 사용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겠지· 하지만 그래도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아론과 시선을 맞춘 예지자가 말했다·
“내가 순례길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하나씩 되돌려 나가려 한다· 크로켄이 내게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안타레스!!!”
“폐하를 지켜라!!”
섬뜩하게마저 느껴지는 아론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알현실의 벽과 바닥을 박차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검을 쥐고 미끄러졌다·
인원을 나누어 레녹을 막아서는 것과 동시에 아론을 부축한 기사들이 빠르게 후퇴하려던 그 순간·
허공에서 나타난 단검이 투구와 갑주 사이로 거침없이 틀어박혔다·
푸욱!!
“···아?”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려 하십니까·”
뻣뻣하게 굳은 기사의 어깨에 팔을 두른 광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일단 손에 들고 있는 것부터 내려놓고 이야기하시지요·”
우둑!!
목을 찌른 단검을 비틀어 경동맥과 목뼈를 동시에 끊어낸다·
“꺽···!!”
두 눈을 까뒤집고 피거품을 물면서도 아론을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는 기사의 투혼·
광대가 혀를 차면서 기사의 손목을 잘라내 저항조차 무력화시키려던 그 순간·
탁!!
다른 기사가 그의 품 안에서 아론을 부축해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론을 업은 기사가 알현실 밖으로 달리는 것과 동시에 다른 기사들이 광대를 향해 달려든다·
“이쪽이다!!!”
“폐하께서 회복하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목숨을 아끼지 마라!!”
“허어 이것 참·”
콰직!!
달려드는 기사의 미간에 단검을 박고 발로 걷어찬 광대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에서 돌진해오는 기사들의 품 안으로 파고든 광대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몸을 비튼 순간·
광대를 중심으로 피보라가 몰아치며 육중한 초인들의 몸이 바닥에 고꾸라져 숨이 끊어졌다·
순식간에 남아있는 기사들을 학살한 광대가 그 시체를 밟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살려주려 했는데 꼭 이렇게 손뼉이 안 맞는다니까요·”
“광대· 늦었군·”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녹이 힐끗 시선을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물건은 제대로 챙겨 왔겠지?”
“이를 말이겠습니까·”
광대가 흐뭇한 표정으로 쥐고 있던 주먹을 활짝 펼쳤다·
한 손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를 가진 작은 유리구슬· 눈이 내리는 구슬 안에 축소되어 담긴 얼어붙은 기사의 모습·
그것을 보며 광대가 히죽 웃었다·
“[문]의 성역 안에 남아있던 죽은 신의 유해· 제대로 회수했습니다·”
아론과 맞붙기 직전 광대와 논의했던 일련의 작전· 레녹과 광대가 각자 움직이며 시선을 끌고 소환수가 자성영역을 전개한다·
영역을 전개한 레녹이 아론을 상대하는 도중 광대는 기존의 작전대로 신의 유해를 훔치기 위한 작업을 진행·
레녹이 만다라를 습득한 시점에서 광대 역시 신의 유해에 개입하는 일에 문제는 없었을 터·
전투가 끝나며 성역이 붕괴하기 직전 신의 유해를 훔쳐 나오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혼은 아론바이거가 사용해버렸지만 이번 작전에서는 이걸로도 충분할 겁니다·”
광대가 웃으면서 쥐고 있던 유리구슬을 흔들었다·
“이제 왕도 전역에서 기사단이 몰려오기 전에 후환을 없애고 탈출하면 되겠군요· 아주 깔끔합니다·”
“후환이라····”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도망치는 아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바힘 왕도를 이렇게 뒤집어놓은 이상 역시 아론을 저대로 놔두고 갈 수는 없겠지·
레녹이 그 능력과 재능을 통째로 빼앗긴 했지만 살아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후환이 될 여지가 있는 자다·
“아무래도 안타레스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손으로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광대가 태평하게 말했다·
“제가 할까요?”
“···아니·”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그런 걸 일일이 논의하는 시간조차 아깝군·”
피잉-!!!
검은 마력사가 복도를 관통해 왕궁의 구조물 사이를 주파· 아론을 업고 도망치던 기사의 목을 움켜쥐고 수축한다·
기사의 몸이 뒤로 홱 쏠리는 것과 동시에 왕궁 벽을 십수 번 넘게 부수고 알현실로 끌려 나왔다·
콰과과광!!!!
“커컥···!!”
레녹의 손에 끌려온 기사가 목이 졸려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한 채 힘없이 경련한다·
그런 기사의 등 뒤에서 떨어진 아론이 녹아내리는 몸을 힘겹게 부여잡은 채 쓰러져 있었다·
“네 네가····”
“이제 와서 네게 더 빼앗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레녹이 아론의 앞으로 걸어 내려오며 말했다·
“그렇다고 너를 여기서 살려둬야 할 이유도 없지·”
“···그렇군·”
핏물과 뒤섞여 녹아내리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던 아론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반쯤 재생되다 녹아내리는 눈동자를 들어 레녹을 바라본다·
“이제야 알겠구나· 너는 과인이 세우려는 새로운 제국보다 더 말도 안 되는 것을 만들어 내려하는 자였다·”
“····”
“하핫··· 어처구니가 없군· 세계를 손에 넣으려는 과인의 비원을 더 거대한 흐름 안에 담아 가져가려 하다니····”
아론이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을 감았다·
“인정할 수 없다·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구나· 하지만··· 이것이 천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
타인의 대답과 방식을 따라하고 흉내 보았기에 아론은 레녹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자신만의 구도를 찾아 나선 다른 초월자들에 비해 아론바이커 카바힘이 부족한 존재였을지언정
오히려 그렇기에 레녹의 만화경이 어떤 마음과 바람을 담아 만들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가능한 많은 것을 돌아보려 한다·
완전하지 않기에 가능한 모든 것을 담아내려 한다·
만화경을 이해하고 절망하며 거부했지만· 그렇기에 마지막에는 거울처럼 그 모든 순간을 되돌아보며-
“와라··· 이곳이 과인의 심장이 있는 자리일지니· 빗나가지 않게 제대로 노려야 할 것이야·”
아론이 녹아내리는 얼굴로 큭큭 웃었다·
“어디 한번 네놈이 쌓아 올린 원대한 소망에 국왕살해자라는 얼룩을 더해보거라···!!”
“아니요· 그건 안될 말씀이십니다·”
후욱!!
인자한 미소를 지은 노인이 아론의 옆에 나타나 그의 어깨를 짚었다·
“···엘드리히 경?”
“폐하의 결말이 이렇게 정해지면 아니 될 일이지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아론의 옆에서 엘드리히가 미소짓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5사도· 지금 뭘 하자는 거지?”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와서 나와 다시 싸워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처음 자네에게 말했던 대로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네·”
엘드리히는 그 말에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아론의 옆에 섰다·
“폐하를 뵙고 그동안 있던 일을 말씀드린 뒤 오랫동안 해내지 못한 임무를 마무리 지어야겠지·”
“····”
느릿하게 검을 뽑아 든 엘드리히가 아론의 옆을 지키듯이 천천히 기세를 끌어올린다·
마치 아론의 편에 나란히 나서 레녹과 대치하려는 듯한 단호한 모습·
“하 하핫· 그렇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론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아직은 과인의 명운이 다하지 않았던 건가··· 이곳이 과인의 마지막이 아니었느냐?”
죽음을 받아들였던 결연함이 희미한 안도와 기대로 변한다·
동시에 아론의 눈빛에 더할 나위 없이 강인한 의지가 깃들었다·
“엘드리히 경· 그대와 나 사이에 해야 할 말은 모두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지금은 저들을 피해 도망치는 게 우선이군·”
“····”
“아직 여기에 희망이 남아있다면 과인은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푸욱!!
그 순간 엘드리히의 검이 아론의 가슴을 비스듬히 꿰뚫고 튀어나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아?”
“폐하의 결말을 정해드리는 것을 제가 도와드리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자리에 굳은 아론에게 얼굴을 숙인 엘드리히가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 얼굴에는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희열 어린 미소가 얼룩져 있었다·
“의연하게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폐하께 어울리는 결말이 아니지요·”
“네 이놈····”
숨이 끊어져 가면서도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아론의 얼굴에 분노와 절망이 어렸다·
마지막 순간 손에 쥐었다고 느낀 희망에게 배신당해 죽음을 마주하던 의연함조차 잃고·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엘 드리히···!!”
“신녀님께서 폐하의 시체를 원하십니다· 시간봉인을 무시하고 결과를 내려 하시더군요·”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아론의 얼굴을 바라보던 5사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부디 1사도의 운명봉인을 풀기 위한 열쇠가 되어주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