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1화
종언의 운명(12)
성역 최심부에 잠든 죽은 신의 유해·
그 아래 전신을 찍어눌려 제압당한 채 수백의 기사들에게 포위당한 레녹의 모습·
하지만 레녹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기사들이 대비하고 있었으면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자성영역 전개·”
키이이이이잉-!!
레녹이 아니라 그의 소환수가 대신해서 전개하는 자성영역·
여덟 개의 팔을 모아 네 번의 합장을 반복하고 재단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무채색의 파문·
즉시 상황을 깨달은 기사들의 검이 레녹을 베어내기도 전에 영창은 끝나 있었다·
“무점사약결(無蛅嗣約結)·”
파앗!!
재단사를 중심으로 검게 물든 파문이 폭발하면서 성역의 최심부를 뒤덮었다·
검은빛이 번뜩인 순간 파문은 성역을 모조리 휩쓸고 시공간을 통째로 잡아먹고 있었다·
레녹의 손짓조차 극도로 경계하고 있던 기사들이 반응할 수 없을 만큼 찰나에 가까운 확장·
전장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숙련된 전투경험으로 방금 일어난 일을 동시에 이해했다·
‘당했다· 소환수를 사용해 영창을···!!’
‘처음부터 영역을 직접 전개할 생각이 없었어!!’
‘일부러 도망치는 척 이쪽을 유인해 냈-’
자신이 아니라 매개체를 사용해 현상을 조작하는 조작술식의 극치·
술자 본인이 아니라 소환수를 사용해 자성영역을 전개하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인외의 기예·
하나 그렇기 때문에 단장급의 기사들조차 순간적으로 저 기괴한 소환수의 존재를 놓치고 말았다·
조작술사가 작정하고 술식을 조작하면 어디까지 법칙을 무시하고 다뤄낼 수 있는지·
그렇게 펼쳐낸 자성영역이 얼마나 위험한 힘과 능력을 담고 있을지·
모든 기사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동시에 어둠속에서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쐐액!!
자성영역을 전개했다 해도 레녹이 포위당한 상황이나 구도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기사단장들을 필두로 하여 수십에 달하는 고위기사들이 레녹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
영역이 완성되기 전에 술자를 먼저 죽일 수만 있다면 술식을 취소시킬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기사들이 레녹이 있던 자리를 향해 거침없이 검을 내리찍은 순간·
자성영역 전개
조작위계 심상구현
[무점사약결(無蛅嗣約結)]
찰칵·
“···아?”
허공을 스치는 공허한 감각에 기사들이 퍼뜩 시선을 들어 올렸다·
방금 전까지 레녹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던 기사들이 수백 미터는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다·
성역 중심부로 다가오던 다른 기사단원들조차 한참을 멀리 밀려나 두리번거리고 있는 상황·
그제서야 레녹이 영역을 전개하며 자신들의 위치를 ‘조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사들이 경악했다·
“영역전개와 동시에 공간좌표를 조작한 건가···!!”
“말도 안 돼· 대체 언제부터!!”
기사들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전조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벽한 공간전이·
자성영역이 전개된 직후 기사들의 위치를 강제로 지정해 바꿔 버리는 신기·
그렇게 펼쳐진 자성영역의 중심에 레녹이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휘오오오!!!
어둠에 파묻힌 것처럼 기이하게 일렁이는 그림자 속에서 마력사를 뽑지도 않고 부유한다·
기존의 물리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아무런 소모값 없이 비행하듯 허공을 걷는 레녹의 모습·
그런 레녹의 뒤에는 기괴하게 비틀린 검은 어둠이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저건····”
“눈동자··· 인가?”
끼기기긱···!!!
거대한 블랙홀과 같은 암흑의 왜곡점이 어둠 속에서 자전하며 지상을 내려다본다·
사방에서 빨려 들어가는 무수한 빛의 선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복잡하게 회전했다·
레녹의 등 뒤에 펼쳐진 어두운 지평선을 따라 빛이 왜곡되며 거대한 눈동자처럼 펼쳐졌다·
자성영역 전개와 동시에 펼쳐진 암흑의 왜곡점과 어두운 하늘을 제하면 바뀐 풍경은 없다·
나유타신궁을 모방한 성역· 중심부의 설원과 죽은 신의 유해조차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뿐·
레녹이 토르번 마탑주에게 보고 배운 전개 직후 현실을 개변하지 않는 자성영역·
조작술식이라는 특질계의 힘을 레녹이 가장 원하는 형태로 구현하기 위한 변주·
“조작계의 자성영역· 개념조차 술식대상으로 삼는 특질계의 도달점인가·”
치이이익!!!
그리고 성역의 저편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아론이 눈을 떴다·
서리고리의 안정화 공정을 마치고 온전한 출력을 뽑아내며 무한에 가까운 동력을 움켜쥔다·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뿜어져 나와 회전하며 등 뒤에 떠오른 서리고리를 밀어 올린다·
마력이 서리고리를 타고 회전할 때마다 섬뜩한 냉기로 변환되며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소환수를 사용해 영역을 전개하는 기예는 경이롭지만 결국 소모되고 고갈되는 유한의 공능일 뿐·”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아론이 차갑게 뇌까렸다·
“정면에서 짓밟아주마·”
[빙정보고(氷鄭寶庫) : 일만병기(一萬兵器)]
쿠과과과과과!!!!
얼음을 압축해 만들어진 창검· 다양한 형태의 무구가 사방에서 형태를 갖추고 솟구쳤다·
고성에서 보여준 적 있는 혈계이능으로 만든 무구에 인간의 재능을 더해 금기병장을 모사하는 금술·
아카이브에서 손에 넣은 지식을 사용해 보존한 인간의 재능을 뽑아 휘두르고 난사하는 무구의 군세·
“전군 앞으로·”
아론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수천 종에 달하는 무구들이 하늘 위로 떠오르고·
설원 위로 거대한 나선을 그리며 회전하는 무구들을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통제하며 아론이 차갑게 말했다·
“왕가의 뜻에 거역한 반역자를 처단하라·”
콰과과과광!!!!
음속의 속도로 사출된 무구들이 레녹을 향해 폭격처럼 쏟아진다·
성역의 하늘 위로 떠오른 수천종의 무구가 제각기 마력을 뿜어내며 미사일처럼 사출·
레녹을 향해 거대한 원을 그리듯이 펼쳐졌다 수렴하며 빨려 들어가듯이 가속해 폭발했다·
퍼버버버버벙!!!!
“오오오오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카바힘 왕가에 영광 있으리!!!”
지평선의 일각이 마력광의 폭발로 뒤덮여 시야가 가려지는 압도적인 경관·
장엄하게마저 느껴지는 빛의 바다 속에서 고양된 기사들이 전력으로 마력을 뿜어내며 질주했다·
검을 휘둘러 참격을 쏘아내고 소우주를 운용하며 하늘과 땅 사이에 남겨진 여백을 메운다·
포탄과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오르며 화력을 더하고 궁정마법사들이 제각기 술식을 영창했다·
광대한 성역의 하늘 위를 빼곡하게 메우고 쏟아지는 불과 빛의 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군·”
하지만 레녹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천 발의 폭격을 앞에 두고 손을 들어올렸다·
마력사를 뽑아 손목에 감는 일체의 준비동작조차 없이 허공을 연주하듯 느릿하게 손을 쥐었다 펼친 그 순간·
“성질분해·”
파앗!!
레녹의 머리 위로 쏟아지던 수천갈래 폭격이 그 자리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뭣-”
“···!!!”
아론이 휘두른 수천종의 무구 그에 비견되는 화살과 포탄·
기사들이 쏘아낸 참격과 소우주· 궁정마법사들의 화력마법까지·
레녹을 향한 그 모든 폭력이 영역 내에서 거짓말처럼 분해되어 자취를 감춘다·
정면에서 목격하고도 시인할 수 없는 초인들의 사고를 뛰어넘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기사들이 얼어붙은 찰나·
“과연· 매개체에 의존하지 않는 대규모 술식조작은 이런 느낌인가·”
한 손을 뻗은 채로 눈을 감고 있던 레녹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더 난해하군· 건틀렛으로 미리 감각을 잡아두지 않았다면 애를 먹었을 거다·”
“네놈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위상보존· 출력통제· 공간좌표 변경· 방향제어 수정·”
촤라라락···!!
레녹의 눈앞에서 분해되어 사라졌던 무구와 술식들이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난다·
한번 완전히 분해되었다 다시 조립된 것처럼 파괴와 창조를 거쳐 레녹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 떠오른 레녹을 중심으로 쏟아지던 수천발의 폭격이 다시 제 자리에 구현된 그 순간·
“재구성 완료·”
가면 안에서 눈을 뜬 레녹이 그대로 발 아래를 가리켰다·
“그대로 되돌려 주마·”
레녹을 향해 쏟아지던 폭격이 방향을 바꿔 그대로 기사들을 향해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아론이 만들어낸 무구와 기사들의 참격 마법사들의 술식이 시간이 되감기는 것처럼 역행한다·
처음의 속도와 뱡향으로 돌아가듯이 레녹을 중심으로 거대한 구체를 그리면서 펼쳐지고·
수천 갈래에 달하는 폭격이 성역의 중심부에 떨어지며 지상을 그대로 휩쓸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끄아아아아악!!!”
“술식을 중단해라!! 마력을 끊어!!!”
“안 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건···!!!”
아론이 만든 무구가 지상에 떨어지며 폭발하고 기사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비산한다·
폭격처럼 쏟아지는 무구와 술식의 난사에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광채가 연달아 번뜩이고·
빛의 파도 속에서 사람들의 시체가 장난감처럼 날아다니며 처참한 몰골로 나뒹굴었다·
콰아앙!!!
“이럴수가!!!”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단원들을 보며 6기사단장 유젤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레녹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마력사 없이 조작술식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까···!!!”
조작술식은 모든 특질계통을 통틀어 가장 난해한 원리와 난이도를 자랑하는 술식·
현상과 개념조차 조작할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만능에 가까운 응용성이 오히려 기준을 잡기 어렵게 만드는 힘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뛰어난 조작술사라 해도 마력사같은 매개체를 사용하지 않으면 술식을 다루기 어려워하는 바·
하지만 지금 성역 전체를 대상으로 자성영역을 전개한 저 괴물은 더 이상 마력사를 통해 술식을 휘두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모든 힘의 방향을 그저 바라는 것만으로 조작하고 개변하여 반대로 돌려 세운다·
힘의 성질과 속성·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수치에 손을 대어 망가뜨리고 변질시켜 빼앗아냈다·
단순하지만 실로 파괴적이고 어떻게 손쓸 방법조차 없는 압도적인 술식운용·
하지만 유젤은 그것이 자성영역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수천 가지 힘의 방향과 성질에 모조리 간섭해 변환조작을 행한다니 인간이 어떻게···!!”
자성영역의 보조가 있다 해도 결국 조작술식을 다루는 것은 술사 본인·
지금 성역에 거꾸로 쏟아지는 모든 힘과 법칙을 레녹이 모조리 조작하고 있다는 증거다·
술식에 대한 이해도 분석력 조작능력 복합연산을 통한 좌표지정과 방향제어· 다중사고와 의사분할능력까지·
저런 일을 해내기 위해 필요한 적성과 소질이 대체 어느정도인지 기사인 유젤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 바·
“집중하게 유젤 경·”
콰앙!!
유젤의 옆에서 검을 뽑아 들며 떨어지는 창극을 쳐내는 노인기사의 모습·
“바이언 경!!”
“지금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밖에 없으니·”
십정 예하 3기사단장 바이언이 유젤을 뒤로하고 검을 들어올렸다·
노쇠한 그의 눈동자가 검은 하늘 위로 떠오른 조작술사를 담았다·
“저 자성영역을 보고나서야 알겠군· 저자는 승천자의 혈족같은 게 아니야· 영역을 전개하기 전에 어떻게든 죽였어야 했어·”
“····”
“이 자리에서 십정 기사단이 모두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왕실의 안녕을 위해 저 자를 죽여야 하네·”
타타탕!!!
총알처럼 쏟아지는 폭격을 검으로 쳐내고 어렵게 빗겨낸다·
힘겹게 시선을 돌린 유젤이 저 멀리 떠오른 레녹을 보며 물었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저 괴물과 대등한 승부를 펼칠 수 있게 도와드려야겠지·”
콰과과과과!!!!
전신에서 냉기를 뿜어내 대기를 얼리고 쉴 새 없이 무구를 만들어 쏘아내는 아론의 모습·
아론이 그렇게 빚어낸 무구의 방향을 바꿔 자신의 힘으로 삼아 성역을 터트리는 레녹·
하늘과 지상을 사이에 두고 수천종의 무구가 교차해 폭발하며 불꽃을 터트린다·
그 여파로 죽어나가는 기사들의 숫자는 더 이상 셈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
“으 으아···!!”
“몸이 마음대로-!!”
숨이 끊어지거나 전투능력을 잃은 기사들의 몸이 제 자리에서 삐걱거리며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육신을 잡고 조작하는 것처럼 무기를 주워들고 억지로 마력을 끌어올린다·
“안돼 나는-!!”
“피해!! 다들 피해라!!”
푸욱!! 서걱!!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 몸은 착실하게 동료들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폭격을 피해 살아남은 기사들의 등과 목을 찌르고 그대로 숨통을 끊는 상잔·
살아남은 기사들의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죽은 기사들이 그만큼 자리에서 일어난다·
검을 쥐고 남은 마력을 움직여 육체를 강화하며 같은 기사들을 죽이기 위해 배회한다·
콰르르르르릉!!!!
지반이 갈라지며 파편이 튀어오르고 황궁의 벽과 천장이 무너지며 폭발했다·
성역의 하늘이 열리면서 대기가 뒤틀리고 강제로 조작당해 폭풍을 일으켰다·
지옥 같은 열기가 넘실대는 녹아내린 설원 위에 쓰러진 기사들이 울먹이며 절규했다·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왜 가능한 거냐···!!”
“네놈이··· 네놈이 정말 신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내 영역의 능력은 그렇게 편리한 힘 따위가 아니다·”
레녹이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오히려 내가 신이었다면 이런 자성영역은 절대로 구상할 수 없었겠지·”
의념을 담은 무구와 마력으로 구성한 술식· 유기물과 무기물을 가리지 않고 빼앗아 조작한다·
마력사조차 없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영역 내 존재하는 물질과 법칙을 마음대로 다뤄낸다·
자성영역 무점사약결의 능력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한번 분해하여 다시 조립하는 힘·
레녹이 조작술식을 통해 손에 넣은 하나의 도달점이자 만물에 대한 ‘재구성’ 그 자체다·
레녹은 자성영역을 전개한 직후 영역 내 모든 공간좌표를 재구성하여 자신을 포위한 기사들과 거리를 벌렸고·
아론이 쏘아낸 빙련무구의 폭격을 재구성하여 그 방향과 속성을 강제로 조작해 되쏘아냈으며·
성역 내의 지형지물을 분해한 뒤 다시 조립하며 전장을 마음대로 개편하고 휘젓고 있었던 것·
마력사없이 술식을 사용하는 것은 전개 직후 현실을 개변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손에 넣은 대가·
그야말로 만물을 술식의 매개체로 삼아 영역 내 모든 물질과 법칙을 마음대로 재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것은 반궁의 기억을 본 레녹이 내놓은 조작술식의 또 다른 도달점·
파멸한 미래의 심상을 품고 모든 것을 해체하는 불가해의 술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해하고 분해해 조립하며 새롭게 창조하는 이해의 영역·
유에서 유를 창조하며 다시 유에서 유를 빚어내고·
그 무한한 순환을 통해 마침내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 나아가는·
반궁이 염원했던 만다라의 본질 그 자체·
쩌적!!!
그 순간 차가운 혜성의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은 구체가 금이 가며 천천히 요동쳤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튀쳐오른 검은 구체가 고리처럼 회전하며 레녹을 향해 떠오른다·
파앙!!
렌즈처럼 공간을 왜곡시키며 부유한 그것이 레녹의 손가락 사이로 휘감기며 흑색의 반지처럼 형상을 굳혔다·
위신권역 만다라의 핵심· 반궁이 사용하던 조작술식이 담겨 있는 정수·
레녹이 예의 승천자와는 다른 방향성을 선택했음을 보인 다음에야 비로소 레녹의 손 안에 들어온다·
“영역의 시운전은 이쯤이면 충분하겠군·”
흑색의 반지를 쥐고 시선을 내린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몸을 돌려세웠다·
“슬슬 준비가 된 것 같은데 이제 제대로 시작해 볼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상 아래쪽에서 어마어마한 냉기가 회오리쳤다·
쿠오오오오!!!
혈계이능을 휘둘러 무구를 빚어내고 레녹과 폭격을 주고받는 일조차 그만두고·
그저 자신의 내면에 심상과 마력을 집속시키는 데 집중한다·
“인정하지·”
새하얗게 일그러진 냉기의 중심부에서 고개를 젖힌 아론이 중얼거렸다·
“그대가 고작 반궁의 혈족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태생에 얽매이지 않고 대답에 도달한 초월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
“그대의 자성영역을 마주한 다음에야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과인의 부덕이자 불찰이라는 것을·”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아론이 말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과인의 모든 것을 끌어내 그대를 죽이는 일에 집중하도록 하지·”
쐐액!!
그 순간 아론의 발 아래서 엄청난 크기의 얼음이 솟구치며 레녹이 있던 자리를 꿰뚫었다·
수십미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얼음기둥이 초음속의 속도로 솟구쳐 충격파를 터트린다·
파아아아앙!!!
“소우주 개방·”
연달아 겹쳐 터져나온 소닉붐이 끝나기도 전에 얼음기둥을 움켜쥔 아론이 영창했다·
“거신병장 현현·”
내면세계 소우주 : 거신병장
쿠과과과과!!!!
아론의 몸이 그 자리에서 수십배 넘게 부풀어올라 거인으로 화하며 얼음기둥을 잡아채 뽑아든다·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 지진이 터져나오며 마력을 메아리처럼 울리고 걸음을 따라 폭발이 터져 나왔다·
허공에 떠오른 레녹을 내려다볼 정도로 거대화하며 얼어붙은 창을 쥐고 마력을 끌어올린 아론의 모습·
레녹이 그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꽤 낯이 익은 크기로군· 질리언 놈의 소우주를 훔쳐온거냐?”
“과인이 지닌 두 번째의 위계는 왕가의 재산과 재보를 마음대로 끌어다 쓰는 왕정권한 그 자체·”
무겁게 울리는 목소리로 아론이 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금기병장을 쥔 지금 과인은 과정을 생략하고 왕가의 재산으로 보존된 재능을 끌어다 쓸 수 있음이니·”
쿠웅!!!
거인화한 아론의 전신에 단단한 얼음이 둘러지며 순백의 갑주로 화한다·
순식간에 전신을 얼어붙은 중갑으로 휘감은 아론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 순간 수천의 재능과 수백의 소우주가 과인의 손안에서 회전하리라·”
양면성의 재능을 지닌 아론바이거 카바힘이 보유하고 있는 두 번째의 위계능력·
혈계이능으로 보관한 재능을 뽑아 얼음으로 빚은 무구에 각인하여 사용하는 힘·
아론은 그 능력을 사용해 질리언의 왼팔을 보존· 금기병장의 보조를 받아 그의 소우주를 펼쳐낸 것이다·
서리고리를 두른 지금 아론이 왕가의 재산으로 편입시킨 인간의 재능을 마음대로 끌어다쓸 수 있다는 의미일 터·
“수천 가지 재능과 소우주라 해도 실제로 도움이 되는 건 얼마 되지 않을 텐데·”
하지만 레녹은 그것을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냉소하며 술식을 영창했다·
“게다가 신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건 너 하나만이 아니지·”
이 광대한 전장에서 유일하게 거대화한 아론과 크기를 견줄 수 있는 물체를 향해 조작술식을 건다·
본래라면 레녹의 술식이 통하기는 커녕 애초에 의념을 뻗는 행위조차도 허락하지 않을 힘의 정수·
하지만 지금이라면-
“일어나라·”
콰아아앙!!!
흩날리는 눈보라를 헤치고 얼어붙은 기사가 삐걱대며 일어섰다·
검은 옥좌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우며 금이 간 채 얼어붙은 갑주를 움직이며·
죽은 신의 유해 차가운 혜성이 레녹의 의지에 따라 몸을 일으켜세우고·
굳은 표정의 아론과 시선을 맞추고 서로 마주본다·
“말도 안 돼!!!”
“카바힘을 지키는 신이···!!”
“폐하께서 분명 저것의 힘을 취하셨거늘!!”
살아남은 기사와 궁정마법사들이 경악어린 비명을 토해내는 사이 거신의 어깨에 올라탄 레녹이 술식을 운용·
삐걱대며 주먹을 들어 올린 거신이 느릿하게 팔을 회전시키며 전력으로 창을 휘두르는 아론과 거세게 충돌했다·
성역의 중심부에서 충돌한 두 거인의 힘이 서로 어긋나며 강렬한 충격파를 터트리고·
레녹의 영역 안에 펼쳐진 모든 것을 통째로 뒤집어 갈아엎었다·
콰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