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2화
종언의 운명(13)
서로 다른 형상의 갑주를 입은 두 거인이 성역의 중심에서 충돌한다·
휘황찬란한 순백의 갑주를 입은 채 스스로를 거인화시킨 아론바이거 카바힘·
서리가 낀 채 얼어붙은 갑옷 위로 금이 간 채 삐걱대는 차가운 혜성의 유해·
두 거신의 주먹이 막대한 중량을 품고 가속하며 공간조차 찢어발기는 충격량으로 화한다·
콰과과과과!!!!
방어 따위는 일체 신경조차 쓰지 않고 두 주먹으로 서로를 두들겨 짓뭉개는 난타전·
아론과 거신의 갑주가 충격파와 함께 찌그러지며 그 파편을 무차별적으로 터트렸다·
그때마다 얼어붙은 성역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밀려나며 막대한 눈보라를 흩날렸다·
“커억···!!”
“십정 기사단 전원· 자리를 지켜라!!”
“폐하께서 틈을 만들어주시는 순간 개입한다!!!”
제자리에 서서 충격파를 버티는 것만으로 기사들의 몸이 으스러지고 찢겨 나간다·
넝마가 된 갑옷·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칠게 숨을 토하며 사방에서 나뒹구는 기사들의 모습·
고위계 육체능력자인 기사들조차 버틸 수 없는 충격파 속에서 두 거신이 동시에 허리를 뒤틀었다·
부아아앙-!!!!
비행기의 엔진이 회전하는 듯한 가슴이 터질 듯한 강렬한 고동·
직후 아론이 쥔 얼음창과 차가운 혜성의 주먹이 동시에 서로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아론과 외신의 유해 등 뒤로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검고 푸른 충격파의 교차·
두 거신이 전신에 두른 중갑의 파편이 성역의 하늘 위로 쪼개져 비산한다·
흩날리는 무거운 갑주 파편 사이로 아론과 거신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춰서고·
오직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것을 직감한 고위기사들이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내달렸다·
“오오오오!!!”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
“조금이라도 시간을 끄는 거다· 전원 앞으로!!!!”
조작술사의 자성영역을 마주한 순간 고위기사들은 자신들이 이 전투에서 맡아야 할 역할을 이해하고 있었다·
위계를 초월한 8레벨의 대술사· 그것도 모든 계통술식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라는 특질계의 극에 다다른 괴물이다·
수백에 달하는 고위기사들 홀로 상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비현실적인 능력의 주인·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시간을 벌어주어야 했다·
아론이 손에 넣은 금기병장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온전한 출력으로 뽑아내기 위한 시간·
카가가각!!!!
죽은 거신의 유해에 올라탄 기사들이 금이 간 갑주 위를 수직으로 타고 질주했다·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어 접근해 온다·
레녹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번뜩이는 검광· 360도 전방향에서 피할 곳 하나 없이 쇄도하는 합공·
“아직 모르겠다면 몇번이고 다시 보여주지·”
찰칵·
톱나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거신의 어깨를 타고 달려드는 기사들의 위치가 뒤섞인다·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부딪히며 충돌하고 있는 힘껏 휘두른 칼날이 동료의 급소에 틀어박혔다·
“아 안돼···!!”
“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과 단말마를 토해내는 기사들이 허공에서 서로의 위치를 바꾸며 튕겨 나갔다·
자성영역 무점사약결의 능력을 이용한 공간좌표 재구성·
아론과 거신의 육체가 맞닿은 성역의 중심에서 수백 명의 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콰득!!!
거인화한 아론의 명치 부근이 박살나며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새로운 아론이 뛰쳐나왔다·
순백의 갑주를 두른 아론이 거인의 팔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질주하며 레녹을 향해 쇄도하고·
유리색 건틀렛을 들어올린 레녹과 동시에 검광을 부딫히며 충격파를 터트렸다·
콰앙!!!!
레녹과 아론의 신형이 성역 중심부에 멈춰선 두 거인의 몸 위에서 거침없이 격돌한다·
사방에서 장난감처럼 내던져진 기사들 사이로 찰나의 순간 수십 번 넘게 술식과 소우주를 부딪쳤다·
마력사조차 없이 물질과 공간을 조작해 쏘아내며 얼어붙은 검기가 그 사이를 사납게 난자한다·
유리색 건틀렛이 공간을 쥐고 부수어 터트리면 짓이겨진 공간 사이로 저릿한 냉기가 폭발했다·
파바바바밧!!!
두 거신의 시체 사이로 튕겨 나간 수백에 달하는 기사들이 마구잡이로 위치를 바꾼다·
자성영역 무점사약결의 능력을 사용한 공간좌표 재구성·
사방에서 튕겨 나간 기사들의 신형이 찰나의 순간 수십 번씩 위치를 뒤바꾸며 번뜩이고·
그 기사들의 속에서 레녹의 신형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아론의 앞뒤로 술식을 휘둘렀다·
건틀렛을 휘두르는 찰나의 순간 레녹이 아론의 뒤에서 엄청난 속도로 위치를 바꿔가며 점멸·
아론이 반응할 새도 없이 냉기의 갑주를 짓뭉개고 그 옆구리를 관통해 살점을 뜯어냈다·
으드드득!!
창자를 뜯어내는 고통에 아론이 표정을 굳히면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속도나 반복횟수의 문제가 아니군· 알고 대처해도 사실상 반응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
무점사약결의 공간좌표 재구성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의 위치를 서로 뒤바꾸는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영역 내 공간좌표를 임의로 재구성해 배치하기에 그 대상인 기사들과 레녹이 어디에서 나타날 지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
초당 수십 번씩 공간좌표를 조작해 위치를 바꾸며 점멸술식까지 사용해 심리전을 걸면 초월자라 해도 공세의 시작점과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다·
자성영역의 힘을 전력으로 끌어다 쓰지 않는 지극히 간단한 공간좌표의 재구성만으로도 이 정도의 능력·
하지만-
콰직!!
옆구리를 쥐어 뜯어낸 건틀렛을 피범벅이 된 왼손으로 움켜쥐며 아론이 돌아섰다·
발목을 걷어차며 터져 나오는 파동· 중심을 잃은 레녹의 앞에서 아론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소우주 다중 개방·”
절단강화· 궤적은폐· 검광가속· 아론의 검기를 강화하고 보조하는 5종의 소우주가 동시 전개·
육체강화에 특화된 7종의 소우주와 무게중심을 보조하는 3종의 소우주를 더해 검을 휘두른다·
육체능력자의 소우주란 자신의 신체를 하나의 세계로 삼아 육신에 적용되는 물리법칙을 개변하는 힘·
왕가의 재산으로 보존된 소우주가 아론의 육신에 강림하며 잠시나마 그 몸이 반신의 경지에 달한 순간·
새하얗게 달궈진 참격이 레녹의 몸을 사선으로 양분하고 그 절단면까지 응축해 터트렸다·
[백와(白渦)]
[천람(天婪)]
쩌어어어엉!!!!
칼을 휘두르는 순간 공간을 찢어발기는 서늘한 냉기·
성역의 하늘 위로 꺾인 순백색의 참격이 회전하며 강렬한 북풍을 불러온다·
레녹의 몸이 그 자리에서 조각 나 흩어지며 순식간에 건너편에서 재구성을 거쳤다·
거인화한 분신의 어깨에 올라탄 레녹과 거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아론의 모습·
“거인화시킨 육체는 버리고 얼음으로 새로운 육신을 조형해 낸 건가·”
대번에 아론이 사용한 기술의 원리를 이해한 레녹이 고개를 기울였다·
“오시엔이라고 했었나 네 아들이 보여주던 혈계이능의 응용과 많이 닮았군·”
“····”
소우주를 사용해 빠르게 신체를 수복하던 아론의 움직임이 멈췄다·
레녹이 그 이름을 언급하는 시점에서 오시엔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해했겠지·
“혈육의 정 같은 건 느끼지 않는 편일 줄 알았는데· 애도라도 해야 할까?”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아론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투구 사이로 엿보이는 그의 표정에는 감정의 편린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왕가의 피를 이었음에도 재능을 그 정도밖에 물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뿐·”
“····”
“결국 이 시대에 혈육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과인은 이 과업을 무책임하게 후대에 넘기지 않을 것이다·”
레녹을 바라보는 아론의 얼굴은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국의 지식을 쥔 존재로서 과인은 신의 힘을 취해서라도 그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세계를 손에 넣으리라·”
“그렇군· 제국이라····”
레녹이 흐릿한 웃음과 함께 시선을 들어올렸다·
“공감할 수는 없지만 세계의 결말을 그런 식으로 마주하는 자도 있는 거겠지·”
아론바이거 카바힘은 레녹이 그동안 상대해 온 초월자나 구도자와는 꽤나 다른 부류에 가깝다·
그는 홀로 구도와 승천을 추구하거나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다음으로 가고 싶다는 꿈을 꾸는 자는 아니었다·
자신이 손에 넣은 것보다 더 위대한 영광을 탐하며 그 수단으로서 결말을 위해 남겨진 안배들을 이용하려 할 뿐·
아론이 여느 초월자나 구도자와 같았다면 아무런 기반이 없는 카바힘에서 이렇게까지 해낼 수는 없었겠지·
중앙도시와 교단· 우물의 방법마저 차용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허락되지 않는 힘을 탐했기에 그는 여기에 있다·
신의 유해를 금기병장으로 만들어 손에 넣고 만다라를 쥐기 위해 싸우는 이 순간조차 그에게는 과정에 불과할 뿐·
결말을 앞두고도 남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방향성· 끝없는 과정의 연속에서 결과에 초연한 그 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의 방식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 간절함까지·
레녹은 그렇기에 아론에게서 누군가를 희미하게나 비추어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오래전에는 너와 같았을지도 모르지·”
“···무슨 뜻이지?”
“우연히 태어나 살아온 시간 속에서 너와 같은 순간이 한 번쯤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력사도 없이 허공을 걸으면서 레녹이 중얼거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능성이 되고자 인간을 공양하고 신의 힘마저 빌려 가며··· 망가질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있었을까?”
“···”
아무런 기반도 비밀도 기원도 알지 못하고 홀로 눈을 뜬 세계선의 자신은 어떠했을까·
레녹 자신과 같이 다음을 꿈꾸고 소망하며 구하려고 노력했음에도 결국 이루어지지 않고·
끝내는 용납할 수 없는 금술에 손을 대어 외신들을 숭배하며 그렇게 망가져갔을까·
정답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지금 이 생각조차 우연에 닿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 아론바이거 카바힘의 방식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언젠가의 레녹이 맞이한 결말과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레녹은 생각했던 것이다·
두 번째 세계에 존재했던 교국· 그곳에서조차 끝내 실패해 버린 구세주·
세계와 함께 멸망한 천사들의 증오와 사랑을 한몸에 받는 실패한 신·
하지만 그렇기에-
“네가 선택한 방법이 옳고 그른지를 내가 정해줄 수는 없겠지·”
가면을 고쳐 쓴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건 누군가 이미 ‘두 번이나’ 실패했던 방법이다·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까?”
“말했듯이 그것을 정하는 것은 그대의 일이 아니지·”
순백의 갑주를 걸친 아론이 싸늘하게 말했다·
“왕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곧 과인의 소유물이니· 옳고 그름조차 과인이 직접 정하는 기준일 뿐·”
“····”
“황제가 그리했던 것처럼 과인은 이 세계를 과인의 안뜰로 삼아 관리할 자격을 손에 넣으리라·”
콰직!!
아론의 손이 자신이 올라탄 차가운 혜성의 유해를 강하게 붙들었다·
“오직 그것만이 아르스노바의 아카이브가 존재하며 결말 이후에도 존속하는 이유일 테니···!!!”
쩌저적···!!!
갑옷에 새겨진 균열이 깊어지며 흔들리고 아론의 뒤에 떠오른 서리고리가 팽창했다·
아론이 순간적으로 피해를 입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외신의 유해 위에 올라탄 이유·
차가운 혜성의 안에 남아 있는 잔재를 모조리 흡수하여 그 힘을 ‘완성’시킨 그 순간·
“팔한지옥(八寒地獄) 개방·”
서리고리를 한 손으로 움켜쥔 아론이 선언했다·
“올발라(嗢鉢羅) 현현·”
쩌저저저저적!!!!
아론을 중심으로 펼쳐진 냉기의 폭풍이 성역의 시공을 찢어발기고 잡아먹는다·
시공간을 침식하고 반영구적으로 개변하며 레녹과 아론이 서 있는 성역마저 무너뜨린 그 순간·
거대한 얼음의 구체가 레녹과 아론을 휘감고 성역을 박살 내며 하늘 위로 거세게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
장대한 빛의 고리를 두른 얼음의 혜성이 성역을 부수고 현실의 왕도 상공에 현현했다·
고도가 높아질 때마다 순식간에 기압이 떨어지고 온도가 낮아지며 환경이 격변한다·
꼬리가 늘어진 거대한 얼음혜성 안에 레녹과 아론만이 남아 왕도의 하늘 위로 상승하고 있었다·
“이건-”
무점사약결은 전개 직후 현실을 개변하지 않는 자성영역·
영역 자체가 술자를 중심으로 운용되는 만큼 전장을 바꾼다고 능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재구성’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다른 기사들을 치우고 일대일 구도를 만들려 한 건가·
대번에 아론의 의도를 간파한 레녹이 얼음혜성 내부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우주선?”
고오오···!!
얼음으로 이루어진 혜성· 거울처럼 투명한 벽 안에 비치는 공허한 우주선의 환상·
차갑게 얼어붙은 복도· 무수한 실험관에 담겨 냉동된 채 잠든 인간의 모습·
팔한지옥 올발라·
신의 유해를 재료삼은 금기병장· 그 힘을 극한까지 끌어다 펼쳐낸 마경의 현현·
교단의 사도들이 사용하는 성역과는 궤가 다른 종류의 이계구현화· 그 정체는 바로-
[이건 차가운 혜성의 혼 안에 남아 있던 오래된 기억이다·]
얼음혜성 안에 펼쳐진 우주선의 환상 속에 아론이 레녹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순백의 갑주 사이로 냉기를 거세게 분사하며 천천히 떠오른 아론이 말했다·
[그가 암흑의 바다를 방황하며 매듭지은 여러 세계··· 외신이 기억하는 언젠가의 결말 중 하나지·]
“····”
차가운 혜성 안에 기억으로 남아있는 멸망을 맞이한 다른 세계의 마지막·
하지만 혜성 안에 비춰진 우주선의 풍경은 레녹이 생각했던 결말과는 느낌이 달랐다·
얼어붙은 죽음이 내려앉은 납골당처럼 느껴지는 공허하고도 적막한 우주선·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대비’하고 동면하려다 끝내 종말을 맞이한 듯한 풍경·
그건 세계의 결말보다는 마치-
[과거의 시간선에서 끌어오는 종말의 인과· 과인의 역량으로는 그 편린을 환상의 형태로밖에 펼쳐낼 수 없다 하더라도-]
쿠우웅···!!
레녹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론이 나직하게 물었다·
[이 정도라면 그대가 품은 자성영역과 대등하게 겨루어볼 만하지 않겠느냐?]
“죽은 신의 기억을 현실에 구현할 정도로 강하게 발현하면 너도 멀쩡할 수는 없을 텐데·”
생각을 멈춘 레녹이 말했다·
“기억을 현실에 각인하는 만큼 네 육신 역시 신의 기억을 따라 인외의 형상으로 변하게 되겠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해도 괜찮은 건가?”
[인간의 몸으로 해볼 수 있는 일은 모두 시도해 보았으니· 육신에 집착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쿠우웅!!!
쩌저저적···!!!
얼어붙은 복도를 걸어내려올 때마다 아론의 몸이 녹아내리다 얼어붙어 형태를 갖춰간다·
서리고리의 힘과 아론의 존재가 완전하게 하나로 합일하는 과정·
그 막대한 인과의 변동을 버티지 못하고 아론의 몸이 방사능에 노출된 것처럼 붕괴되다 재생하고 있었다·
종말의 인과를 현실에 환상으로 펼쳐내며 아론바이거 카바힘의 기원마저 바꿔내는 탈태·
[그대 역시 이 정도로 초월적인 영역을 언제까지고 온전한 형태로 유지할 순 없을 터·]
솟구치는 얼음혜성· 광대한 우주선의 복도에서 레녹과 아론이 원을 그리며 걷는다·
[피차 서로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이것이 마지막이겠구나·]
“적어도 내 마지막은 아니겠지·”
서리고리를 중심으로 삼아 전개된 죽은 신의 힘을 동력으로 삼는 지옥의 기억·
얼어붙은 복도와 천장이 사방에서 쪼개지고 분해되며 거칠게 회전하기 시작한 순간·
서로의 간극을 파고든 두 사람이 동시에 마력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마력사도 없이 공간을 잡아벌리는 레녹과 한기를 흩뿌리는 아론의 권능이 교차한다·
아론의 발 아래서 얼음으로 만들어낸 수천종의 병장기가 솟구쳐 파도처럼 몰아치고
레녹의 신형이 공간전이를 난사하며 방대한 무구의 폭격 사이를 뛰어넘었다·
쿠과과과과과과!!!!
무점사약결의 영역과 올발라의 팔한지옥이 뒤섞이며 어그러지는 전장·
뒤틀린 흑색의 왜곡점과 얼어붙은 지옥이 복잡기괴하게 회전하며 이능과 의념을 흩뿌렸다·
그 사이로 레녹과 아론이 미친듯이 위치를 바꿔가며 충돌하고 거의 동시에 서로를 부수고 베어냈다·
쩌어어엉!!!
[그대의 영역이 초월적인 권능을 품었다 해도 틀림없이 그만한 대가나 조건을 동반하고 있을 터···!!!]
부서져 추락하는 우주선의 복도 아래로 떨어지며 아론이 말했다·
우주선의 복도 사방에 자리한 채 잠들어 있는 수천에 달하는 냉동인간·
그 환상을 주먹으로 깨부수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론이 사납게 시선을 젖혔다·
[짐작은 가는구나· 한번 재구성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반드시 다시 조립해 ‘구성’해야만 하는 것이겠지?]
“····”
[그대는 지금까지 온갖 개념을 조작하면서 한 번도 물질을 직접 분해하거나 파괴하지 않았지·]
침묵하는 레녹을 보며 아론이 시선을 비틀었다·
[역시 그대의 영역은 파괴에 특화된 공능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고도화된 술식의 극치에 가까울 터·]
영역 내 모든 물질과 법칙을 강제로 재구성하는 무점사약결의 공능·
하지만 그렇기에 한번 영역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반드시 ‘구성’하여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아론은 이 찰나의 전투를 통해 그 점을 간파하고 무점사약결이 파괴에는 특화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던 것·
조작술식이 만능에 가까운 범용성을 지녔음에도 술식 자체의 파괴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 것처럼·
무점사약결의 영역이 아무리 초월적인 능력을 지녔다 해도 아론의 몸이 강제로 분해되거나 소멸되어 사라질 일은 없다·
그것을 직감한 아론이 전력으로 마력을 분사해 전투기처럼 공기를 찢어발기며 레녹을 들이받았다·
타아아아앙!!!
거울처럼 투명한 벽면으로 튕겨 나간 레녹이 사방의 얼음을 깨부수며 술식을 전개·
사방으로 비산하는 얼음파편을 재구성하여 방향과 성질을 바꾸어 조형하고·
아론의 폭격에 대항하는 새로운 탄환으로 만들어 무차별적으로 쏘아냈다·
[육찰아공쇄]
[빙하결 : 괴벽]
헤아릴 수 없는 얼음탄환과 무구들이 우주선의 얼어붙은 천장과 바닥에 꽂히며 부숴진다·
공간을 뛰어넘어 가속하고 전환하는 레녹과 아론의 신형이 박살 난 바닥 아래로 떨어졌다·
우주선의 복도 아래 펼쳐진 또 다른 복도· 끝없이 펼쳐진 냉동인간들의 보관소·
콰아아아!!!
아론의 뒤로 냉기가 거세게 분사되며 추진력을 더하고 얼어붙은 지옥에서 자유롭게 가속한다·
레녹의 등 뒤에서 흑색의 왜곡점이 회전하며 블랙홀처럼 빛을 빨아들이며 자신의 몸과 공간좌표를 재구성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와 천장 사이로 가속하면서 레녹과 아론의 신형이 교차하고· 사방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며 냉기의 파동이 번뜩였다·
음속을 넘어선 속도로 전장을 질주하며 찰나의 순간 공간조작과 변환으로 맞받아친다·
아론과 레녹의 무구와 건틀렛이 거의 동시에 서로의 육신을 무차별적으로 두들겼다 떨어지고·
강렬한 충격파와 마력광이 번뜩이며 두 사람의 등 뒤로 일그러졌다·
[하하하핫!!! 경이롭군· 정녕 믿을 수가 없구나!!!]
얼어붙은 투구 안쪽에서 들려오는 아론의 광소·
[지금 이 순간 과인에게 한계란 존재하지 않거늘···!!! 그럼에도 이 검무에 이렇게까지 어울릴 수 있단 말이냐! 조작술식이란 대체···!!!!]
콰직!!
창대를 역수로 쥐고 레녹의 어깨에 꽂아 넣으며 검을 휘둘러 허리를 베어낸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단검을 잡고 엄청난 속도로 레녹의 목과 심장에 때려 박는다·
위아래를 분간할 수 없이 추락하는 전장·
아음속으로 가속하는 무구들을 아무렇게나 잡아 레녹을 향해 미친듯이 휘둘렀다·
그때마다 아론의 끝없는 마력과 의념이 호응하며 무구에 맞는 소우주를 터트려 거세게 난사했다·
소우주 : 창절
소우주 : 극타
소우주 : 만근추
소우주 : 비익연리
[칠천나락(七千那落)]
쩌저저저저저정!!!!
절삭음이 끝나기도 전에 접합부가 얼어붙어 폭발하며 일그러진다·
한계를 넘은 냉기 속에서 수축을 거듭하다 붕괴하며 스스로 부서져 나간다·
영역 내의 물질과 법칙을 조작하고 재구성하며 공격을 뒤틀고 흘려내는 레녹과·
레녹의 조작술식을 만병의 무예와 신의 권능을 합일하여 짓누르는 아론의 폭거·
[과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구나···!!!]
신의 힘을 안정화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전력으로 내뻗어 싸우는 순간 흘러들어오는 무한한 영감·
아론의 내면이 차가운 혜성의 잔재와 동화되며 점차 그 존재를 바꾸어나간다·
얼어붙은 살점이 떨어져나가며 투명한 얼음처럼 혈관과 신경을 비추었다·
골수 끝까지 뻗친 냉기가 세포와 유전형질을 완전히 고쳐쓰고 변질시켰다·
인간으로 태어난 아론바이거 카바힘을 암흑의 바다를 헤엄치는 종말 가깝게 뒤바꾸는 탈태·
[구도가 아니라 무한한 투쟁- 인과의 종말 앞에서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안ì‹�ì�´ 있으니-]
아론의 목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뒤틀리며 그가 다루는 수천종의 무구가 일제히 하나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서리고리가 빛을 발하면서 뒤틀릴 때마다 그 형상이 더욱 작게 응축되고·
새하얀 보석처럼 발광하는 한자루의 검이 되어 아론의 손에 잡혔다·
철컥!!
빙결권능을 극한까지 압축해 조형한 검을 움켜쥔 순간 아론의 위계가 완전히 인간을 벗어나 격변한다·
이미 죽은 차가운 혜성을 대신하듯 그 잔재를 이어받아 태어난 얼어붙은 백기사의 형상·
갑주 안에 생전의 모습을 일체 남기는 일 없이 탈태를 마친 아론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올발라 전체가 호응하고·
거대한 얼음혜성이 마치 짐승의 입처럼 쩍 벌어지며 레녹을 그대로 집어삼킬 것처럼 둘러쌌다·
[자신만의 답을 찾아 창세를 꿈꾸는 그 어떤 초월ìž�들보다 이 순간 과인이 바다에 더 가까이 서 있다·]
아론이 도취한 것처럼 느릿하게 속삭였다·
[이 세계에는 정론도 왕도도 정답도 없다· 오직 결과만이 있을 뿐·]
“····”
[그렇다면 과인은 다른 모든 과정을 무시하는 단 하나의 결과가 되리라·]
“그건 불가능하다·”
레녹이 눈을 감았다·
“과정을 무시한 결과라는 건 이미 존재하고 있거든· 그조차도 아직 성공하지 못해 다가올 결말을 기다리고 있지·”
[뭐라고?]
“신의 죽음을 보존해 남기는 것조차도 모자람이 있어서 고민하고 번뇌하는 거다·”
양 손으로 수인을 맺은 레녹이 중얼거렸다·
“그렇기 때문에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려 하지·”
쿤다라에서 승천의 비약을 마시고 손에 넣은 타락한 분기점은 모든 것을 해체하는 파멸의 힘·
실패한 미래를 근원심상으로 삼은 승천자가 조작술식을 통해 얻어낸 하나의 도달점이다·
무점사약결의 영역은 레녹이 ‘그’와는 다른 방향을 선택하여 여기에 섰다는 증거·
그의 영역을 다뤄보고 기억을 들여다보고 그가 남긴 안배를 쥔 다음에야 레녹이 선택한·
레녹이 조작술사로서 내놓은 반궁과는 다른 시간선의 분기점이다·
“자성영역 무점사약결의 능력은 조작술식을 사용한 만물의 재구성· 그렇기에 그 능력은-”
레녹이 속삭였다·
“타인의 운명조차 거둬들여 부수고 새롭게 구성한다·”
[무슨···!!]
“자성영역 전개·”
이미 영역을 전개한 뒤에 한 번 더 이어지는 자성영역의 영창·
하지만 수인을 맺은 레녹의 주변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화는 저 멀리서부터 찾아와 이곳에 이르렀다·
유에서 무로 돌리는 반궁의 조작술식과는 달리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무점사약결의 극의·
우로보로스의 해체를 극한까지 뻗어 반궁의 분기점에 닿았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행하려 한다·
우로보로스의 수렴· 습득과 흡수의 심상을 끝까지 펼쳐 도달한 조작술식의 극치에서·
신의 유해를 금기병장으로 삼은 그 인과마저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그 공능은 레녹이 기존에 사용하던 분기점의 ‘관측’이 아니라-
키이잉···!!!
눈을 감은 레녹이 아론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는 서리고리를 향해 손을 뻗은 그 순간·
나직한 레녹의 속삭임과 함께 서리고리가 황금빛의 만화경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분기점 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