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8화
종언의 운명(9)
중절모를 쓴 노인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방에서 기사들이 쓰러진다·
피웅덩이 속에서 우아하게 시체들을 밟고 검광을 어루만지는 사도의 형상·
“엘 드리히··· 설마···!”
청사 주변을 포위한 기사들을 학살하는 노인을 보며 소류가 중얼거렸다·
“행방불명되었던 왕도 십정 2기사단장· 교단의 사도가 된 건가···!!”
토커퍼즈에서 소류도 함께 있었지만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가·
테러가 시작하기 직전 움직이며 전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던 모양·
“본인에 대해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분명 왕실 관계자겠구려·”
푸욱!!
저항하던 기사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은 5사도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돌렸다·
“그 눈매와 표정···· 그렇군· 폐하께서 남기신 왕자 중 하나인가?”
“····”
“왕족을 앞에 두고 예를 갖추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길· 깨어난 뒤로 기억을 많이 잃은 데다····”
창백하게 변한 소류를 보며 엘드리히가 우아하게 검을 돌렸다·
“이제는 왕실이 아니라 만신의 교리를 섬기는 몸인지라·”
“사도 주제에 아직도 인간인 척 어설프게 흉내를 내는 건가·”
레녹이 5사도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물었다·
“토커퍼즈에서 그따위로 날뛰어놓고는 이제와서 무슨 생각이지?”
“후후 너무 그렇게 꼬아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는데·”
레녹의 날선 대꾸에도 엘드리히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목표가 일치한다면 배교자의 힘이라도 빌려볼 법하지· 놀라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가볍게 한 손을 털어내는 것과 동시에 검에 꿰여 있던 시체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청사의 인간들을 닥치는대로 죽여놓고는 잘도 지껄이는군·”
“자네 역시 왕가의 적이 된 시점에서 나쁜 일은 아닐터인데·”
5사도가 껄껄 웃었다·
“자네를 보고 있자니 내 인간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서 말이야· 은원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도와준 것 뿐일세·”
“···”
교단 최고위 5사도 엘드리히·
8레벨의 육체능력자이자 카바힘의 전직 2기사단장·
왕가에 충성하는 기사였던 그가 교단의 사도가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긴 어렵지 않지만·
토커퍼즈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죽인 이 살인마가 애초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건 당연한 일·
광대나 접합술주의 광기와는 궤가 다른 신뢰 여부를 넘어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혼돈의 화신체·
“죽고 싶지 않다면 그 자의 제안은 거절하는 게 좋을거다····”
순간 복도 저편에 널브러진 시체 중 하나가 들썩이며 입을 열었다·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기괴하게 몸을 꺾은 채 시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시체를 본 소류가 표정을 찌푸렸다·
“···체비엔·”
“인형술사·”
레녹이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물었다·
“기척이 느껴진다 했더니 이 근처에 숨어있었나·”
“왕도 전역에 뿌려놓은 내 인형을 회수하고 있었다···· 이딴 소란 때문에 내 귀중한 인형을 망가뜨릴 수는 없지···”
체비엔이 음울한 웃음을 터트리며 5사도를 바라보았다·
“청사에 숨겨둔 인형을 회수하고 있는데 저 사도가 나타나더군···· 이곳에서 저지른 학살을 구경하고 있었지····”
“베는 와중에 묘하게 손맛이 약하다 싶었더니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 그 사이에 끼어있었구려·”
5사도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체비엔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카바힘의 기사들을 죽이는데 흥미가 있을 뿐 인형을 망가뜨리는 취미는 없으니·”
“···”
“폐하께서는 이미 [문] 안으로 걸음하신 것 같더군· 성역 주변은 그분께서 신뢰하는 기사로 채워져 있겠지· 어떻게 하겠나?”
피웅덩이와 시체더미 속에서 검을 쥐고 이쪽을 돌아보는 노신사의 우아한 자태·
소류가 무어라 말하려다 그대로 입을 다물고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광대가 자리를 비운 시점에서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론바이거 카바힘이 이미 [문] 안으로 들어간 뒤라면 그 위치를 찾는 건 요원한 일이 될 텐데·”
레녹이 물었다·
“네가 어떻게 아론의 앞까지 이쪽을 안내해줄 수 있다는거지?”
“카바힘 왕가에 전해지는 혈계이능은 그들이 죽은 신의 잔재를 관리하기 위해 치른 계약의 증거· 그렇기에 왕도에서 그들의 힘은 절대적이지·”
엘드리히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천천히 납검하며 말했다·
“하지마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그 존재감은 태양과도 같아 어디서든 숨겨지지 않고 찾는 것도 어렵지 않네·”
“····”
“이 순간에도 본인은 폐하의 존재를 느끼고 있어· 조잡한 공양 따위로는 숨겨지지 않는 그리움이 그곳에 있지·”
노인의 인자한 미소가 순간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듯했다·
“오래전 그분께 아주 중대한 임무를 받았었지···· 비록 이런 몸이 되었지만 폐하를 뵙고 결과를 말씀드리려 하네·”
“크크큭 임무에 실패한 기사의 말로가 이런 것인가····”
체비엔이 느릿한 비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망가져 있군···· 이딴 것과 협력이란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문]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펼친 인신공양을 파훼하려면 금술의 전문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사도를 바라보았다·
“기사단이 숨겨둔 [문]의 위치를 찾아낼 방법이 있다면 말해봐라· 일단 듣고 판단하지·”
“그렇게 어려운 방법은 아닐세·”
자신을 비웃는 체비엔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노신사가 미소 지었다·
“공양에 바친 제물보다 더 많은 인간을 죽여 죽음의 의미를 덮어씌우는 거야· 사실 자네가 오기 전부터 본인이 하고 있던 일이지·”
“죽음의 의미를···· 덮어씌운다고?”
“인신공양이 왜 다른 술식이나 의식에 비해 압도적인 효율과 결과를 내는가·”
허리춤의 검 위로 손을 얹은 5사도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건 인간을 제물로 삼는 행위가 본래 인간에게 허락되어서는 안 되는 결말의 하나이기 때문이지·”
“····”
“제물로 사용된 인간보다 더 많은 숫자의 인간을 죽여 의식장소에서 공양의 의미를 중화시키면-”
그 직후 엘드리히의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발아래를 베어냈다·
카각!!
날카로운 검광이 시장실의 바닥을 베어내자 그 아래 숨겨진 피로 물든 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피로 덧그린 문양과 상징으로 작동하던 법진을 칼로 베어내 할퀴어낸 순간·
그대로 바닥이 부서지며 레녹과 5사도가 동시에 끝없는 구멍 아래로 추락했다·
콰아앙!!!
“이렇게 기사단이 몰래 숨겨둔 [문]의 좌표조차 알아낼 수 있는 걸세·”
“이건····”
떨어지는 구멍의 벽면에 수천 개에 달하는 또 다른 구멍이 빼곡하게 나 있다·
지하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통로· 그 벽면에 나 있는 사람 한 명이 드나들 법한 무수한 구멍·
“이쪽이군·”
턱!!
벽면에 나 있는 무수한 구멍 중 하나를 잡고 매달린 엘드리히가 발을 내디뎠다·
“왕도의 [문]은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어 통행 가능한 길이 극히 한정되어 있지·”
레녹과 소류가 따라 올라온 것을 보며 5사도가 앞장섰다·
“지하에 흐르는 냉기를 분산시키기 위해 환기구가 많아 사전 지식이 없다면 길을 찾는 것이 어렵네·”
“여기 나 있는 모든 구멍이 냉기를 흘려보내기 위한 환기구란 말이군·”
“왕도의 물길을 관리하는 하수도가 왕도 바깥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치지·”
소류가 대답했다·
“지하에 흘러넘치는 냉기가 강해서 환기 시설을 만들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 모든 원인이 저 [문] 때문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고오오오···!!!
엘드리히가 짚어준 방향을 따라 환기구 사이를 누빌 때마다 냉기가 강해진다·
차가운 바람은 피를 싸늘하게 만드는 한기로 변하고 공기와 마력마저 얼어붙어 둔중해지기 시작한 순간·
레녹은 복잡한 환기구 끝에서 얼어붙은 공허의 [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휘오오오오-!!!
왕도 지하에 존재하는 거대한 제단·
수백 개에 달하는 계단으로 이루어진 제단의 위에 얼어붙은 [문]이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다·
원보다는 사각형에 가까운 모호한 형태· 검은빛의 고리 안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휘감긴 공허·
[문]의 외곽을 잠식하고 쉴 새 없이 뻗어나오는 싸늘한 냉기가 제단을 새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계단이라····”
“왜 그러지?”
“신경 쓰지 마라·”
제단을 보자마자 얼굴을 구긴 레녹이 소류의 질문에 대꾸했다·
“편람의 우물에서 봤던 것과 형태는 비슷하군· [문]을 보존하기 위한 제단을 따로 만들어 관리하는 식인가·”
“정확한 설명일세· 저 제단은 우물에 사용된 보존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니까·”
엘드리히가 중얼거렸다·
“왕족의 혈통은 아르스노바를 [문]의 보존은 우물을 힘을 이용하는 건 교단의 방식으로· 돌이켜보면 왕실은 언제나 세계의 비밀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쪽에 서 있었지·”
“····”
“온갖 문명과 역사에 손을 뻗어 [문]을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 이것이라면 왕실을 위해 바친 목숨이 의미가 없던 것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5사도가 말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군·”
“···엘드리히 경·”
“가지· [문]을 지키는 기사들은 본인이 상대하겠네·”
자리에서 일어선 5사도의 표정은 중절모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자네들은 [문]을 넘어 성역에 진입하는 일을 우선하게나·”
탁!
환기구 바깥으로 몸을 기울여 멀리 솟구친 얼어붙은 제단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노인의 신형이 제단을 지키는 기사들 사이에 내려앉은 순간 손끝에서 뽑힌 검광이 사선으로 날뛰고·
중갑을 입은 기사들의 몸을 갑옷째로 썰어 육편으로 만들어버렸다·
촤아아악!!!
“꺽···!!”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몸이 절단되어 나뒹구는 기사들·
완전무장한 육체능력자· 왕도의 축복까지 받고 있는 기사를 힘으로 찢어발기는 괴력·
내장과 육편이 날뛰면서 피를 흩뿌리고 토막 난 시체가 제단 사방에 널브러졌다·
피로 물든 제단 위에서 중절모를 매만지며 인사를 건네는 사도의 모습·
“슬픈 일이군요· 엘드리히 경·”
카가각!!!!
그 순간 노신사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사복검이 채찍처럼 회전하며 참격을 흩뿌렸다·
반사적으로 검을 쥐고 돌아서며 이리저리 튕기는 사복검을 튕겨내는 것과 동시에-
4기사단장 플로리아가 제단 위에 서서 엘드리히를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던 당신이 이렇게까지 망가졌다니·”
“····”
“폐하께서 주신 임무에 실패하고 같은 기사들을 죽이는 괴물이 되어버린 건가요?”
“망가지다니 그건 틀렸네· 플로리아 경·”
5사도가 중절모를 고쳐 쓰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오히려 자유를 찾은 것뿐이라네· 오히려 본인은 폐하께 감사하고 있지·”
“감사라니 무슨····”
“그분께서 십정 기사단장을 새로운 인물로 채우려 했기에 본인 역시 만신의 교리를 깨우칠 수 있었으니까·”
파앙!!
뒤에서 달려드는 기사의 머리를 터트린 엘드리히가 걸음을 옮겼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이리 재미있는 일인 줄 몰랐네· 알고 지내던 기사들을 죽이는 건 경이로울 만큼 큰 희열이었지·”
“····”
“폐하께서 원하시는 인재를 이 대륙 안에서만 찾지 않았기에 본인 역시 종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으니·”
플로리아와 마주 선 엘드리히가 미소 지었다·
“이 모든 것이 위대한 왕의 은덕이 아니겠는가?”
“그렇습니까·”
차가운 표정으로 사복검을 움켜쥔 플로리아가 말했다·
“역시 이 자리에서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겠군요·”
“후배들을 상대로 힘 자랑을 하고 싶진 않네만·”
노신사가 허리춤의 검을 쥐고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는 걸음을 서두르도록 하겠네·”
외면세계 소우주 : 이단화
[천중대검(踐重大劍)]
콰아아아아앙!!!
엘드리히가 소우주를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대검이 나타나 내리찍혔다·
고층 빌딩만 한 검면에 뒤덮인 우둘투둘한 핏줄이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맥동했다·
“끄아아악!!”
“아 아학···!!”
거검 사이로 짓눌린 기사들의 몸이 뭉개져 피와 살점째로 으깨졌다·
절규하는 기사들의 몸을 검면에 두른 채 거검이 격렬하게 회전하면서 전진하고·
4기사단이 지키고 있던 얼어붙은 제단에 내리꽂히며 그 파편을 흩뿌렸다·
콰우웅!!!
회전하는 거검의 풍압을 딛고 부서진 제단의 파편을 건너뛴다·
천장에서 [문]을 향해 떨어지는 레녹을 날카롭게 뒤쫓는 사복검의 검광·
“혈족···!!”
“하하하핫!!!! 어딜 보는 겐가!!”
레녹을 포착하고 돌아서려던 플로리아의 신형을 5사도가 광소하며 걷어찬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방에서 기사들이 닥치는 대로 죽어나가며 육편이 흩날렸다·
콰지지지직!!!!
“폐하!!! 어디에 계십니까!!”
희열어린 표정으로 미친 듯이 기사들을 죽여나가며 엘드리히가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께서 버린 기사가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완전히 망가졌군····”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어·”
아연한 소류의 말에 레녹이 차갑게 대꾸했다·
“버린다· 지금부터는 알아서 [문]으로 진입해·”
플로리아와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 같은데 아는 얼굴을 보자마자 광증을 참지 못하게 된 건가·
하지만 어차피 사도와 마지막까지 정상적으로 일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문]의 위치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큰 수확· 여기서부터는 레녹이 해야 할 일이겠지·
촤아악!!!
사방에서 번뜩이는 검광을 피해 부서지는 제단 파편 위로 마력사를 잡아 당긴다·
레녹의 신형이 속도를 높여 [문]을 넘어 저편에 존재하는 공허를 빠져나간 순간·
화아아아악!!!!
주위의 풍경이 일변하며 그림자로브를 두른 레녹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단단한 바닥을 구르며 겨우 중심을 잡은 레녹이 퍼뜩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여기는···?”
황금빛의 파문이 무한하게 메아리치는 거대한 미로와도 같은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는 어두운 바다 풍경이 비치고 발아래로는 얼어붙은 왕도가 내려다보이는·
지상과 외해의 풍경을 동시에 위아래로 마주하는 장엄한 황금의 궁전·
카바힘의 왕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만큼 압도적인 규모의 복도·
[문] 안에 들어온 직후 소류나 5사도와는 다른 장소에 떨어진 건가·
“아르스노바 제국 황성· 나유타신궁(那由他神宮)·”
예상치 못한 광경에 레녹이 멈칫한 찰나 등 뒤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래전에는 대륙의 수도라고 불리기도 했던 낡고 고지식한 기억의 환상이지요·”
“····광대?”
황금빛 복도 위에 대자로 벌렁 드러누운 분을 하얗게 칠한 광대의 얼굴·
“푸우 분명 언젠가는 도착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너무 늦은 것 아닙니까?”
벌렁 드러누운 채 레녹을 내려다보던 광대가 히죽 웃었다·
“덕분에 이쪽은 왕실의 계획을 방해하면서 시간을 끄느라 걸레짝이 되어버렸다구요·”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불길에 그을리다 얼어붙어 뭉개진 것처럼· 머리칼은 불타고 뺨에는 서리가 어려있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무리를 한 듯 상처 입고 쩍쩍 갈라지는 피부·
이미 잔뜩 마력을 끌어다 쓴 것처럼 마모된 것이 역력한 기색·
마력사를 뽑아 한올 한올 손목 위로 감으면서 레녹이 물었다·
“지금까지 상황은?”
“아론바이거 카바힘이 죽은 신의 유해가 위치한 성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광대가 어깨를 으쓱였다·
“시선을 끌어볼려고 성역에 쌓인 힘을 [문] 밖으로 방출해 왕도를 개판으로 만들어봤는데 신경도 쓰지 않던데요?”
“····”
“요상한 고대의 지식을 이용해 성역을 장악하고 그 안의 풍경을 마음대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광대가 주변에 펼쳐진 황금빛의 파문으로 이루어진 궁전의 풍경을 가리켰다·
“지금 여기 만들어진 풍경도 그 결과지요· 진짜 황성이 아니라 성역 안에 만들어낸 환상의 일각입니다·”
쿵 쿵 쿵···!!
복도 저편에서 점차 무거워지면서 기세를 더해가는 굉음·
갑주를 입은 기사들의 발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가까워진다·
[문]의 작동· 혹은 성역에 침입한 외부인을 감지하고 기사단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겠지·
“제국 황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해야 할 일을 정리한 레녹이 물었다·
“직접 가본 적이 있는 건가?”
“이런 갑자기 그렇게 속이 보이는 유도심문을 하는 법이 있습니까?”
광대가 웃으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출신 같은 건 진작 잊어버려서 말입니다· 아닌가? 아직 이름은 남아 있던가?”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그냥 의미 없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충실하자는 이야기였죠·”
콰앙!!
복도 저편에서 황금빛 파문이 흩날리며 중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신에서 강렬한 냉기를 흩뿌리며 마력과 의념이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강렬한 기척·
성역 내부에서 그들 역시 모종의 방법으로 힘의 증강을 받고 있다는 증거·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레녹과 광대가 동시에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단검을 역수로 쥐고 돌리는 광대와 마력사를 손목에 감아 붙든 레녹의 모습·
“우리 이렇게 둘만 남은 건 또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살기 어린 기세로 이쪽을 포위해 오는 기사들을 보며 광대가 느긋하게 말했다·
“우물에서 어땠는지 기억하시죠? 그때처럼만 합시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레녹이 냉소했다·
“아까는 의미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아 그랬었나?”
광대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씩 웃었다·
“그럼 취소· 그냥 다 뒤집어놓는 걸로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