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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 이제 룬 리그는 마지막 5일 차 경기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시작의 동굴의 무수한 관중들 앞에서, 리그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암흑연합과 신성연방! 신성연방과 암흑연합! 과연 최후의 승자는 어느 팀이 될까요? 벤트레스 경! 마지막 5일 차의 양상은 어떻게 보십니까?”
사회자가 활기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옆에 다소 초췌한 얼굴로 서 있던 룬리그 협회장 벤트레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양측의 현재 점령지 수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대표들을 한번 정리해 보고 가시지요.”
<암흑연합>
1번, 시몬 폴렌티아.
8번, 쥴 빈체레.
10번, 카미바레즈 우르슬라.
<신성연방>
1번, 레테 샤르데나.
7번, 워턴 슈프랭거.
8번, 시그문드 아한델.
9번, 아렌디아 오르발로.
점령지 수.
<암흑연합 : 7개>
<신성연방 : 6개>
마나 스크린이 번쩍이며 여러 명단이 떠올랐다. 벤트레스가 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공교롭게도 양측 모두 시몬 대표와 레테 대표라는 최강의 1번들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외에는 하위 순번의 대표들이 여러 명 남아 있군요. 따라서 이번 5일 차는 각 1번 간의 결투 결과에 따라 세력의 승패도 좌우되리라 봅니다. 하위 순번 대표들은 1번 대표들을 보조할 수 있겠지만, 그들도 지쳐 있는지라 승패를 직접 좌지우지하기는 힘들겠죠.”
사회자가 얼른 끼어들어 말했다.
“역시 시몬 대표와 레테 대표의 싸움이 가장 중요하단 말씀이군요! 사실상 2번급이 아니면, 군단장과 성녀의 싸움에 영향을 미치기 힘든 건 매한가지 아닐까 합니다!”
“예, 그 말도 맞습니다.”
“그렇다면 벤트레스 경은 5일 차는 어느 쪽 세력의 우위를 예상하십니까!”
벤트레스가 사회자를 한 차례 흘겨보았으나, 결국 관중들의 눈초리에 못 이겨 대답했다.
“암흑연합의 우위입니다.”
예에에에!
암흑연합 관중 측에서 들썩거리는 함성이 쏟아져 나오고, 신성연방 측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벤트레스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의외로군요! 암흑연합 측이 점령지가 하나 앞서 있다고는 하나 신성연방은 암흑연합 측보다 한 명 더 많은 4명의 대표가 살아남아 있습니다! 어째서 암흑연합의 우위를 점치시는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인간이.
벤트레스가 사회자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아주 중립지대의 체면을 가지고 놀고 있군.’
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 그가 피곤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1명 정도의 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레테 대표를 제외하고, 살아남은 신성연방 멤버들의 정신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시그문드 대표는 제 목에 검을 가져다 대어 룬 리그를 포기하려고 했었죠! 멘탈이 위태로워 보이던데요!”
8번 ‘성검 사용자’ 시그문드는 쥴과의 싸움으로 믿음이 꺾였다.
7번 ‘고통의 심문관’ 워턴은 룬 리그 초장부터 크게 흔들린 데다가, 승리 플랜인 발라 모르티페르를 발각당했고 이제 이를 보조해 줄 치유사제나 수호사제도 없다.
9번 ‘성벽 위 현자’ 아렌디아 오르발로는 축성 전문이지 대인전 능력은 부실하다. 시설은 대부분 파괴당했고, 이미 모제가 아웃당한 뒤라 축성이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
“특히 시그문드 대표와 워턴 심문관이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벤트레스가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성연방은 아주 어려운 경기를 하게 될 겁니다.”
* * *
“···.”
신성연방의 본진 저택.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시그문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편지들을 읽고 있었다.
<몬스터로 어지럽던 마을이 시그문드 님의 도움으로 평화를 되찾았소! 이 감사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지···!>
<잡혀갔던 우리 딸이 무사히 집에 돌아왔어요! 내년부터는 시그문드 님을 위해 기도드리겠다며 수도원에 다니기로 했답니다!>
신성연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활약한 시그문드에게 보낸 수많은 주민들의 편지들.
멘탈 회복에 도움이 될까 해서 아공간에서부터 끄집어내 읽어보고 있었지만.
“···.”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번엔 그 편지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노란색 리본으로 장식된 편지 뭉치들을 손에 들었다.
바로 시그문드의 조력자인 제이지의 편지였다.
<시그문드 님. 저예요, 제이지. 지금쯤이면 코르모바 지방에 당도하셨겠네요! 그곳에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타락한 사제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혹시 조사해 보시겠어요? 그들의 위치와 범행 증거를 동봉할게요.>
시그문드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뒤로 그의 팬을 자처하며 꾸준히 조력하던 제이지의 편지.
구해준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제이지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꿋꿋이 시그문드를 도와주었다.
<시그문드님은 진정한 영웅이에요!>
시그문드는 제이지의 편지마저 옆에 내려놓고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쭉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대표팀 리더인 레테가 믿음을 회복할 만한 것들을 꺼내보라고 지시했지만, 이 편지들을 보니 참혹한 진실만이 더더욱 명확해졌다.
‘나는 대의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었어.’
룬 리그 내내 계속 고민했다.
사람들의 믿음과 대의를 품고 싸우는 내가, 어째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싸우는 쥴을 넘어설 수 없는 걸까.
그렇게 고찰하고 또 고찰해 보는 과정에서.
-물론 내게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것도 있지만, 그 또한 깊게 고찰해 본다면 결국 나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오.
믿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랬다.
자신은 사람들의 행복과 미소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었다. 단지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는 게 좋아서, 감사와 환호를 받는 게 좋아서 싸우는 거였다.
어려움에 빠진 민중을 돕는 건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만족감과 자존감을 위해서였다.
납치당하거나 수탈당해 괴로워하는 백성을 위해 싸우는 건, 그 도움으로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며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기대해서였다.
결국 성검 사용자 시그문드 아한델의 진정한 정체는 ‘민중의 영웅’이 아닌 ‘나르시스트’.
모든 건 자신의 허영심과 자존감을 위해 하는 일이었고, 이를 위해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시그문드가 제 머리카락을 붙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러고 계시는 검까.”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문질문질 젖은 머리를 닦으며 레테가 나타났다. 그녀가 안쓰러운 듯 말했다.
“생각이 복잡하면 차라리 잠이라도 일찍···.”
“역시 저는-”
시그문드가 무엄하게도 레테의 말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
“신성연방을 대표해 이곳 룬 리그에 있을 인간이 못 됩니다. 사퇴를 허락해 주십시오.”
허리에 손을 얹은 레테가 한숨을 푸욱 쉬더니 팔을 가볍게 돌렸다.
“이건 물리적 충격요법이 필요해 보이네요.”
“···레테 성녀님.”
그때 얼굴에 기름때가 잔뜩 묻은 9번 아렌디아가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제가 그를 설득하게 해주세요.”
레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렌디아가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무너지듯 앉아 있는 시그문드 앞에 섰다.
“시그문드 형제님.”
“···아렌디아.”
“저도 신성연방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건 마찬가지예요.”
시그문드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소리야. 아렌디아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어.”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녀가 몸에 두르고 있던 긴 겉옷을 벗더니 탈탈 흔들었다.
후두두둑!
그러자 겉옷의 안주머니에서 무수한 편지들이 쏟아졌다.
“사실 저도 대의나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사적인 이유로 룬 리그에 온 거거든요.”
시그문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 편지들은···!”
봉인 마법이 걸려 있는 노란색 리본으로 묶여 있는 편지.
시그문드는 얼른 등을 돌려 방금 자신이 소파에 떨어뜨린 그 노란색 리본의 편지를 바라보았다.
“네, 제가 바로 제이지입니다.”
아렌디아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정체를 숨겨서 미안해요. 언제 사실을 밝힐지 고민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아···!”
“여신의 뜻, 민중의 책임감 같은 건 몰라요. 나는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 룬 리그에 왔어요.”
일순 그녀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그런데 지금 형제님이 보여주는 모습은 실망스럽네요.”
시그문드의 몸이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영웅이 아니야. 나 자신밖에 모르는 놈이고, 사람들을 구해서 내 얄궂은 자존감을 채우려는 쓰레기 같은 위선자야.”
덥석!
성큼 다가온 아렌디아가 그의 멱살을 붙잡아 올렸다.
“그게 뭐 어때서요!”
“!”
“당신의 의도가 개인적이었다고 한들, 당신에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사라져요? 당신에게 도움받은 사람들의 행복과 웃음이 사라지냐고! 무엇보다!”
아렌디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에게 구원받은 내가 지금 여기 서 있잖아!”
“···.”
거친 숨을 내뱉은 그녀가 시그문드의 멱살을 놓은 뒤 등을 돌렸다.
“···따라와요. 찬 바람 좀 쐐요.”
아렌디아가 성큼성큼 걸어서 저택 밖으로 나갔다.
시그문드는 빈말로도 가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조용히 그녀를 따라 나왔다.
이내 두 사람은 풀벌레 소리가 나는 잔디밭을 걸었다.
“시그문드 형제님도 알다시피, 나는 이능을 가지고 있어요.”
아렌디아가 말했다.
“내 몸에 있는 소량의 지방과 신성을 섞어 하얀 금속을 만들어내는 이능. 가볍고 튼튼하면서도 가공이 쉬워서 며칠 만에 성벽을 뚝딱 만들어낼 정도죠.”
“···그래서 축성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생겼구나.”
“웃긴 게 뭔지 알아요?”
그녀가 자조 섞인 미소를 흘렸다.
“내가 이능으로 만든 금속은 햇빛에 녹는다는 거예요. 유지 기간은 4, 5일에 불과해요. 여기는 태양빛이 제한적으로 내려와서 오래 버틴 거지만 곧 녹을 거예요.”
“···아.”
“나는 반쪽짜리 건축가고, 축성의 달인이나 성벽 위 현자가 아니에요. 요새는 커녕 작은 창고 같은 거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해요. 하지만-”
그녀가 시그문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줄 수는 있어요.”
그녀가 앞을 가리켰고, 시그문드가 뒤늦게 저택 뒤에 커다란 뭔가를 발견하고는 입을 벌렸다.
거대한 갑주였다.
“셀레스티얼 프로텍터(Celestial Protector). 당신이 입을 갑옷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내 목적은 룬 리그 내내 이걸 완성하는 것. 신성연방 상부 측에서도 당신과 나의 조합을 높게 평가해서 나를 여기 보낸 거예요.”
“제이지!”
“아직도 자신을 위해 싸우는 자기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진다면-”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시그문드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나를 위해 싸워주세요.”
“···!”
시그문드의 눈에 비로소 감격이 차올랐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훔쳐보던 레테가 픽 하고 웃은 뒤 등을 돌려 걸어갔다.
“이 위중한 상황에 뭐 하는 거람.”
그래도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는 수습한 것 같다.
그녀가 이곳에 한참을 떨어져 있을 암흑연합 측 저택을 바라보며 씩 미소 지었다.
“이제는 서로 겨룰 시간이네요. 시몬.”
* * *
암흑연합 대표팀 본진 저택 <1-A>.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저택 밖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총총 흔들며 밤을 만끽하는 카미바레즈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일어났어? 카미.”
시몬이 다가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카미바레즈가 에헤헤 무안한 듯 웃었다.
“잠이 안 와서요.”
“사실 나도 그래.”
이내 시몬도 조용히 카미바레즈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킨 채 천장에 출렁거리는 호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믿어지지가 않아요.”
“뭐가?”
“바글바글하던 동료들 10명 중에 이제 셋만 살아남았고, 이제 곧 룬 리그 마지막 날이 열린다는 사실이요.”
카미바레즈가 시몬을 바라보았다.
“우리 어깨에 지금까지 동료들의 모든 노력의 결실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두근거려서 잠이 안 와요.”
시몬이 태연히 웃었다.
“걱정 마, 카미. 우리가 이길 테니까.”
“네! 시몬! 물론이죠!”
카미바레즈가 두 주먹을 꼭 쥐며 박쥐 날개를 파닥거렸다. 시몬이 말을 이었다.
“나는 상대 1번과의 싸움에 주력할 거야. 쥴은 시그문드와 결착을 내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카미는 워턴을 부탁해.”
시몬은 하필이면 신성연방 측에 워턴 슈프랭거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찝찝했다. 이제 더 이상 테르곤과 르바임은 없지만, 그녀는 어쨌건 확정적으로 상대를 탈락시킬 수 있는 강력한 자폭기를 보유했다.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미바레즈가 파이팅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맡겨주세요! 워턴은 제가 어떻게든 할게요! 시몬은 큰 싸움에 집중해 주세요!”
“응, 믿을게.”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웃어 보인 뒤 다시 밤하늘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어두웠던 지형이 밝아지고 있다.
<룬 리그 5일 차 1시간 전입니다.>
이제 결전의 순간이 왔다.
시몬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는 피차 피할 수 없겠네, 레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