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4
헥토르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황폐화된 대지였다.
암벽을 개조해 만든 날개 달린 공중 요새는 바닥에 추락하여 산산조각 나 있었고, 그 근방에는 데스와이번들의 잔해가 나뒹굴고 있었다.
바로 그 중심에, 헥토르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힘겨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머리로부터 이마까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으며, 한쪽 눈은 감겨 있고 왼쪽 팔은 힘이 빠진 듯 덜렁거렸다.
사실상 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건 의지뿐이었다.
그런 헥토르의 전면에는 백발의 여자가 꼿꼿이 서 있었다.
휘이이이잉!
허공에는 순백의 마법진들이 배경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는 밤하늘의 별들이 금방이라도 내려와 모든 걸 집어삼킬 듯 반짝이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검까.”
신성연방의 1번 별의 성녀.
그녀 또한 쉽지 않은 싸움이었는지 목소리에 숨이 차는 게 느껴졌다.
“단순히 룬 리그의 승리를 위해 싸운다기엔,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갈망과 집착은 지나쳐요.”
핏물을 줄줄 흘리던 헥토르가 눈동자를 굴려 레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굴하지 않고 멀쩡히 당당하게 서 있는 자태.
냉정한 이성.
차분하게 전황을 관조하는 눈동자.
자꾸만 분노가 치밀었다.
“너와 싸우다 보면-”
지쳐서 그럴까. 반쯤 정신이 나가 있어서 그럴까. 헥토르는 불쑥 내뱉었다.
“시몬 폴렌티아가 떠오른다.”
레테가 ‘엥?’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뭔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느낌.
하지만 헥토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와 싸우는 내내 압도적인 벽을 느꼈다.
실력은 물론, 특유의 적을 동정하고 마음을 헤아리려는 듯한 눈빛까지. 그 모든 게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보이는 모든 행동이 그놈을 연상케 했다.
“아, 뭐. 그러니까.”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이내 한숨처럼 말했다.
“당신의 눈에는 제 방식이 시몬처럼 느껴진다는 거네요.”
“타국 군단장을 쉽게도 부르는군.”
“시몬 폴렌티아를 꺾고 싶으심까.”
헥토르는 다 죽어가는 몰골인 와중에도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일생의 목표다.”
레테는 피곤한 표정으로 전투복 재킷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기만이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건데, 혹시 시몬 폴렌티아가 당신의 원수라도 되나요? 아니면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거나, 사람들 앞에서 심각한 망신을 줬다거나.”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헥토르가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이 생을 걸고 시몬 폴렌티아를 꺾는다. 내가 그렇게 정했을 뿐이다.”
“···.”
가만히 헥토르의 눈을 바라보던 레테가 피식하고 김이 샌 미소를 지었다.
‘시몬, 이상한 사람한테 잘못 걸렸네요.’
헥토르와의 전투를 돌이켜 보면, 처음엔 단순한 호승심으로 덤벼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레테가 슬슬 실력 발휘를 하며 벽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그때부터 헥토르의 눈동자가 해까닥 돌아가며 감정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부터 이 남자는 자신을 시몬에 빗대어 보고 있었으리라.
“당신.”
레테가 입을 열었다.
“아마 이대로는 평생 시몬을 못 이길 검다.”
헥토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악담이냐.”
“사실이 그래요. 자신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지도 못하는 자가 시몬 폴렌티아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슴다.”
빠득 빠득!
역린을 대차게 찔리고 만 헥토르의 목에 혈관이 불거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한계를 받아들이고 현실에 안주하란 소릴 하고 싶은 건가.”
그의 입가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가 꺾여 위만 볼 수 있는 인간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희를 꺾겠다!”
그가 손끝을 들어 올리자, 레테가 서 있는 흙 밑에 파묻혀 있던 용의 비늘이 표창처럼 날아왔다.
결투의 세계에선 비열한 종류의 기습. 레테가 팔을 들어 비늘을 막기 무섭게, 등 뒤로 파괴된 줄 알았던 베히모스 전함의 용머리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드래곤 브레스>
화아아악!
용머리에서 발사된 거대한 브레스가 레테를 등 뒤에서 덮치려는 순간.
쐐애애애애애애애액!
기다렸다는 듯 혜성 하나가 일직선을 그으며 날아와 브레스를 찢어발기며 베히모스 전함에 충돌했다.
광풍이 몰아친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눈발처럼 흔들린다. 완전히 박살 나는 베히모스 전함을 등지고, 레테는 태연한 얼굴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곤 고고하게 헥토르를 응시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목표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어요. 우선 당신의 몸.”
레테가 헥토르의 몸을 가리켰다.
제복이 뜯겨 나가고 드러난 헥토르의 전신은 근육질이었으나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했다. 근육이 잘 단련된 게 아니라 어딘가 움푹움푹 꺼진 듯한 느낌. 거기에 몸 곳곳에 혈관이 지나치게 도드라져 있고 근육이 꼬인 듯한 부분도 많았다.
“몸의 회복 속도가 훈련량을 전혀 따라오지 못하는 검다. 최근 제대로 휴식을 취한 적이 없죠? 오래 살기 힘든 건 자기자신이 더 잘 알 테고.”
“···.”
검사는 검을 잘 휘두르는 훈련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안 된다. 훈련에 소모하느라, 정작 실전에 날이 다 나간 검을 휘두르면 무엇하겠는가.
레테는 그런 가르침을 성투학 교수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멘탈.”
레테가 제 머리를 가리켰다.
“시몬 폴렌티아를 꺾는다는 목표를 스스로 정했을 뿐이다. 정말 그게 다라고 생각하심까? 그 정도의 목표 의식으로는 당신이 뿜어내는 그 감정이 설명이 안 돼요.”
그 말을 들은 헥토르가 입술을 꽈득 깨물었다.
목표 의식.
맞다. 처음에는 단순한 목표 의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젠 생활을 하면서 수없는 감정들이 덕지덕지 그 목표에 살을 붙였다.
1학년 시절 헥토르가 시몬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특례 1번이라는 위치에 대한 질투심.
A반을 자신이 장악하기 위해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시몬에 대한 경계감.
선행 학습도 안 해온 주제에 소환학 첫 시간에 자신을 능가한 것에 대한 굴욕감.
아버지의 꾸중. 교수들의 편애.
배신의 군단장에 대한 가문의 악연.
그 밖에 키젠에서 시몬의 행적을 보며 생긴 무수한 감정들.
그 안에는 분노도 있고, 모멸감도 있다. 어떻게 보면 동경 같은 것도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왜 한 번도 시몬을 이겨야 하는지 제대로 고찰해 본 적이 없어요. 이유나 까닭이 생기면 목표가 흐릿해질까 두려워서 그랬겠죠.”
시몬을 상대로는 너무 감정적이다.
그 감정을 제대로 헤아려 본 적도, 컨트롤해 보려 한 적도 없다.
“그 쓸데없는 분노가 시몬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된 적이 있던가요? 당신은 ‘근원’부터 찾아야 해요. 시몬에 대한 이상한 감정을 씻어내고 목표를 위해 차근차근 자기자신을 정립해야겠죠.”
“그딴 건 놈을 이기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헥토르의 그 말을 들은 레테가 ‘빠직’하고 표정을 왈칵 찌푸렸다. 그녀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날 선 목소리로 일갈했다.
“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면서? 자신을 돌이켜 보는 건 ‘방법’ 아냐? 너 이 새끼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있네?”
“!”
충격이 몸을 타고 흐른다.
헥토르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다 못해 머리가 터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점이.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 짜증이 나서 피가 거꾸로 솟고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헥토르의 목표를 들으면 단순히 응원해 주거나,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거나, 그 두 가지의 반응이 전부였다. 그런데 아무 상관 없는, 심지어 적대세력의 주적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근원.’
푸후.
헥토르가 긴 숨을 토해내고는 아공간을 열었다.
“좋다. 그 또한 수단이라면.”
촤아아아아!
아공간에서 나온 건 헥토르가 군단장이 되기 전에 주력으로 사용했던 시룡의 파츠였다. 비늘들이 빠르게 헥토르의 몸을 뒤덮고, 날개가 헥토르의 등 뒤에 연결된다.
“나는 무엇이든 하겠다!”
헥토르의 몸에 깃든 용의 인자가 반응한다. 즉각적으로 파츠와의 연동을 위해 몸의 모든 것이 움직인다.
<드래곤 폼>
처억.
시룡의 상태가 된 헥토르가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변화.’
꾸드드드드득!
용의 인자를 발동시킨 상태에서 ‘6군단’의 힘을 쓴다.
인간인 상태에서 악룡으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이미 용이 된 상태에서 악룡으로 변화한다.
꽈드드득!
꽈드드드드드드득!
헥토르의 몸이 한층 더 거대해진다. 주황색 눈동자가 일렁이고, 용이 날개가 더 돌출되고, 네 개의 머리가 튀어나온다.
크르르르르르!
<헥토르 오리지널 – 오두룡 폼>
다섯 개의 머리가 달린 새로운 개체가 레테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레테가 ‘오’ 하고 미소 지었다.
[보여주마!]
다섯 개의 머리가 쩌억 벌어지며 브레스를 발사했다. 그것이 중앙에 모이며 하나의 브레스로 레테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지금까지 사용했던 군단기 일악은, 단순한 흉내에 불과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군단기.
<군단기 – 일악(一惡)>
화아아아아악!
일악의 브레스가 날아오자 이에 레테는 시크하게 검지를 휙 휘둘렀다. 즉각 그녀의 후방의 하늘에서 혜성 하나가 쐐애애애액 쏟아져 나와 브레스에 부딪혔다.
콰콰콰콰콰콰!
별과 어둠.
두 힘이 강렬하게 줄다리기하며 허공에서 격돌했다.
“이만 끝내죠.”
레테가 반대쪽 손을 슥 들어 올렸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헥토르가 양쪽 측면에 있는 두 개의 머리를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어느 틈에!’
헥토르의 곳곳에 작은 별이 그려진 돌 같은 게 일정 간격으로 척척 놓여 있었다. 그 돌을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다람쥐 모양의 신수가 후다닥 나무 뒤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레테가 생긋 웃었다.
“미안하지만 순수하게 상담을 해줄 의도로 시간을 끈 건 아님다.”
헥토르가 다급히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돌과 돌 사이가 별빛으로 연결되었다.
<봉인기 – 폐식(閉式)>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
[크윽!]
헥토르의 몸이 그대로 주저앉혀졌다. 레테가 두 팔을 내리그었고, 밤하늘에서 무수한 별똥별들이 헥토르에게 날아왔다.
레테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상담료로 이번 전투의 승리는 내가 가져갈게요.”
[별의 성녀!!]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무수한 별빛이 무력화된 헥토르의 몸에 연달아 틀어박히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레테가 흐음- 하고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렇게라도 해야 다른 신성연방 사람들이 납득할 테니까.’
쿠구구구구!
별빛으로 인한 자욱한 흙먼지를 지켜보며 레테는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은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는데 아직도 버틴 건가? 맷집 하나는 대단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뭔가 공기가 달라졌다.
흙먼지 속을 바라보고 있던 레테의 눈매가 좁아졌다.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헥토르가 아닌 낯선 여성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드래곤폼이 해제된 헥토르의 얼굴 살갗에, 또 다른 끔찍한 얼굴이 튀어나와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됐다! 됐구나! 약해졌구나 헥토르 무어!]
그것은 헥토르의 몸에 깃들어 있던 6군단의 관리자.
젤러시였다.
[네 근원인 집념과 질투를 포기하려 들다니 어리석구나! 이제 다 필요 없다! 네 몸은 나의 것이다!]
젤러시가 헥토르의 몸을 완전히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젤러시는 헥토르의 육체를 장악한 뒤 한 2차전을 하길 원했지만, 가만히 놔둘 레테가 아니었다. 그녀가 번개처럼 젤러시의 앞에 나타나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
“우리 대표팀이야말로 대륙 최고의 정신병동 모임이라고 생각했는데 네크로맨서들이 더 심하네요.”
중얼중얼 불만을 토해내던 그녀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젤러시를 바라보았다.
“단체로 강함에 심취해서 맛이 간 거야 뭐야. 다 몸에 뭔가를 심어놓고 있잖아.”
[무슨 헛소릴···!]
젤러시가 레테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봉인기 – 폐식>의 효과는 지속되고 있었다.
[놔라! 뭘 할 속셈이냐!]
레테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헥토르의 몸에 있는 이물. 처음에는 연방을 오랫동안 괴롭혀 온 흉악한 6군단의 관리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잔존사념에 불과해 보인다.
일라이저의 몸에 있던 ‘라그콘드리아’ 따위는 몰라도, 군단의 관리자를 완전히 정화하는 건 어렵다. 그래도 힘을 크게 억누르는 정도는 가능할 터.
“공훈이네요.”
연방에 있어서도, 연합에 있어서도, 서로 손해 볼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녀가 손바닥을 펼쳤다.
<아운더리 엑소시즘>
화아아아아아아악!
헥토르의 몸에 강렬한 정화 효과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젤러시가 고통스럽게 비틀거렸다.
[이 망할 계집이! 기껏! 기껏 몸을 완전히 차지했는···!]
화아아아악!
그녀의 강력한 정화 효과로 마침내, 헥토르에게서 튀어나온 젤러시의 모습이 사라졌다.
털썩!
정신을 잃은 헥토르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정화 효과라지만 네크로맨서니 타격은 있었을 터.
우웅!
헥토르의 몸이 파랗게 물들었다.
<암흑연합 대표팀 2번, 헥토르 무어가 탈락했습니다.>
서서히 흙먼지가 걷히고 있었다.
옵저버 아티팩트로 룬 리그를 보는 사람들은 연기가 걷힌 광경만 보인다. 목소리만 들렸을 뿐, 아마 관중들은 레테가 정상적으로 헥토르를 마무리한 것으로 알고 있으리라.
‘끝나고 맛있는 거 얻어먹을 거예요, 시몬.’
레테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