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0화
590. 지리산에서 1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1월 26일]
-AM 10:00 [NEW. 이태풍] 진주 K 병원 응급실로 긴급 헬리콥터 이송. (기타 : 태풍이 부모님께 긴급히 연락할 것.)
난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어 눈을 끔뻑였지만 변하는 건 없다.
그동안 <지리산>의 한겨울 그 힘든 촬영을 다 끝내고 살인자들이 천왕산장에 온 것도 무사히 넘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촬영이 끝나는 마지막 날 헬리콥터로 이송해야 할 정도로 다친다는 내용이 떠버렸다.
부모님께 긴급히 연락한다면 심각한 부상이라는 걸 의미할 거고.
현재 시각이 오전 8시 20분이니까 앞으로 1시간 40분 뒤에 사건이 일어날 예정.
당장이라도 촬영을 미룰까 싶었지만 이미 <지리산>은 촬영 감독이 바뀌고 살인자를 잡고 폭우 때문에 여러 번 촬영이 미뤄진 터라 더는 일정을 미룰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선제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일으킬만한 요소들을 배제하는 수밖에 없다.
난 우선 폰으로 오늘 촬영 일정이 담긴 큐시트를 확인했다.
10시 촬영은 주인공 강대현과 주인공의 딸 강영아가 팔이 묶인 채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는 씬 122였다.
그 순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오늘 촬영을 취소할 수 없다면 촬영 순서를 바꿔버리는 것이다.
9시부터 천왕산장 안에서 찍기로 되어 있는 씬 120과 씬 121은 장소가 어두컴컴한 산장 안이었기에 낮과 밤에 상관없이 찍을 수 있는 장면이니까.
그때였다.
“정 실장님? 뭐 하세요?”
천왕산장을 향해 가던 박선재 감독과 신종기 대표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있다.
난 기회다 싶어 즉시 내 계획을 설명했다.
“감독님 큐시트를 봤는데 씬 촬영 순서를 바꾸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촬영 순서요?”
“예. 씬 120 121을 바로 찍는다고 되어 있던데 어두컴컴한 산장 안에서 탈출하는 씬은 사실 언제 찍어도 문제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날이 밝을 때 야외 씬을 찍고 120 121은 밤에 조명 켜놓고 찍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박선재 감독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하긴 그렇게 하면 야외 촬영 시간을 조금 더 벌 수 있겠네요. 그러면 일단 촬영 감독이랑 이야기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예. 감독님.”
난 대답을 하고 슬쩍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아직 씬 변경이 확정되지 않아서인지 일정이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촬영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난 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두 사람을 따라 천왕산장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생기든 반드시 막아내겠다고 다짐하면서.
* * *
천왕산장의 문을 열기 전 발판에 신발을 비비며 붙은 눈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박선재 감독이 신발을 털고서 내게 말한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현장에 자주 못 와서 죄송합니다.”
“하하하. 탓하려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고재수 씨의 연기가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그걸 못 보신 게 아쉬워서 드린 말씀입니다.”
“재수 씨가요?”
박선재 감독은 흥분에 찬 표정으로 말한다.
“예. 정말이지······ 저렇게 배역에 몰입하는 배우는 처음 봤습니다. 진짜 사이코패스 살인마처럼 되었다고나 할까요?”
“재수 씨가 한이 많아서 그럴 겁니다.”
늘 조연과 단역만 하다 보니 고재수는 연기에 대한 갈망이 상당했다.
더군다나 이태풍이라는 연기 광인과 한 계절 통째로 호흡을 맞춘 탓인지 요즘은 아예 차원이 다른 배우가 되었다고 한다.
끼이이익.
박선재 감독이 천왕산장의 문을 열었다.
난 찢어지는 듯한 경첩 소리를 들으며 박선재 감독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박선재 감독의 말처럼 산장 안 한쪽에는 완벽히 극 중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된 고재수가 보였다.
‘뭐야 저거?’
고재수는 천왕산장의 구석에 홀로 앉아 온몸에 눈을 잔뜩 묻힌 채 두 손으로 다리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소품용 플라스틱 단검을 꼭 쥐고선 입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홀쭉한 볼과 길게 내려온 다크서클은 섬뜩한 눈빛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있던 눈이 녹았는지 머리카락은 곳곳이 뭉쳐진 채로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과거에 천왕 산장에서 진짜 살인자들과도 싸웠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고재수의 눈빛이 딱 그 사람들과 같았다.
그런데 촬영은 9시부터인데 30분 전에 벌써 배역 몰입이라니!
그때 이영진이 내 곁으로 다가와 속삭인다.
“실장님. 오셨어요?”
“어. 영진아. 재수 씨는 언제부터 저러고 있어?”
“저흰 30분 전에 올라왔는데 올라오자마자 산장 뒤편에 가서 눈을 묻힌 다음 저렇게 구석에 틀어박혀 몰입하고 있습니다.”
“지난 며칠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원래도 고재수가 배역 몰입이 심한 걸 알았지만 이건 좀 과했다.
지금 날 보고도 아는 척을 하지 않을 정도니까 말이다.
이영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정을 말해 주기 시작했다.
며칠 전 폭우가 내린 것 때문에 촬영이 취소되자 그때부터 오늘 새벽까지 고재수는 산 아래 숙소에 홀로 틀어박혀 얼굴을 밖으로 내밀지도 않았다고 한다.
혼자 쓰는 방은 사방에 커튼이 쳐져 있고 TV도 켜지 않은 채로 어두컴컴하게 지냈단다.
그게 다 극 중 살인마 ‘오명진’이 완벽하게 되기 위해서였단다.
‘좀 심한데······.’
평소라면 배우의 몰입을 깨지 않기 위해 놔뒀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지금처럼 ‘진짜 살의’를 보일 정도로 배역 몰입을 하게 되면 잠시 후 ‘연기’를 할 때는 사고가 생길 가능성이 다분했다.
에브리데이가 경고한 대로 말이다.
만에 하나 이대로 놔뒀다가 고재수가 이태풍에게 상해를 가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배우 본인을 위해서도 이 정도 몰입은 좋지 않았다.
배역 몰입을 심하게 하는 배우들은 심각한 부작용을 겪기 때문이다.
특히 악인을 연기하다 보면 뜬금없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일도 있고 인지 장애가 오기도 할 정도였고.
“좀 말리지 그랬냐?”
“당연히 말리려고 했죠. 그래도 배우 본인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잘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라고요.”
보통 매니저들은 어디까지나 배우들의 서포터다 보니 배우가 연기를 하겠다고 작정했을 땐 사실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난 실장이 된 터라 어느 정도 배우의 선택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말릴 수가 있었다.
“알았어. 그럼 내가 할게.”
뒤 편에 선 박선재 감독과 신종기 대표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두 사람 모두 배우가 이 정도 몰입을 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을 잘 몰랐기에 난 두 사람의 시선을 무시해버렸다.
지금 고재수의 손에 들린 소품은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검인데 꽤 날이 서 있어 조심해야 했다.
자칫 찔리기라도 하면 피가 퐁퐁 날 수도 있고.
어떻게 아냐고?
회귀 전 성격 개차반인 배우가 날 세워 놓고 칼 연습을 하다가 내 머리에 구멍을 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는 인성 그른 인간들을 매니징하며 온갖 일을 다 당했구나 싶었다.
난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상처 입은 맹수를 향해 다가가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이라도 날 찌를 듯이 날 선 눈빛을 마주한 난 3m 정도 거리에 서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재수 씨.”
자기 이름을 불린 고재수가 날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을 잊고 극 중 사이코패스 ‘오명진’이 되려고 한 탓에 본명을 부른 것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난 물러서지 않고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랬다.
“재수 씨. 아직 촬영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배역 몰입은 나중에 하시죠. 그럴수록 실전에서 힘들어집니다.”
날 노려보는 고재수의 눈에 힘이 더욱 들어간다.
“재수 씨. 당신은 살인자가 아니라 연기자입니다. 연기자라고요. 아시겠습니까?”
난 연신 그를 달래며 지금 이건 실제 상황이 아닌 ‘연기’임을 주지시켰다.
그 순간 내 말이 듣기 싫었는지 고재수가 이를 갈며 말한다.
“꺼······ 져.”
대답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나아졌단 징조다.
2m 정도의 거리.
“연기라는 게 힘만 준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힘을 주고 뺄 때를 구분하세요.”
배역 몰입을 심하게 하는 배우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감정과 몰입에 빠지지 못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 한 경험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재수 씨는 충분히 다시 이런 연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절 믿고······.”
고재수의 눈빛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덜컹.
천왕산장의 문이 열리며 찬 바람이 휘몰아친다.
순간 고재수의 방어 본능이 작동했다.
고재수의 움츠렸던 몸이 마치 용수철처럼 펴지더니 오른손으로 플라스틱 칼을 휘두른다.
휘이익.
날카로운 칼날이 내 배 쪽을 향한다.
처음부터 피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칼이 다가오자마자 재빠르게 옆으로 피했다.
칼날이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옆구리를 지나간다.
옆으로 피한 난 플라스틱 칼을 든 고재수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는 고재수의 발을 걸어 중심을 무너뜨렸다.
휘청.
고재수가 앞으로 두 팔을 뻗으며 마치 슈퍼맨이라도 된 것처럼 넘어진다.
순간 난 넘어지는 고재수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덥썩.
극 중 배역 때문에 바짝 말라 있어 그의 몸무게를 지탱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난 온몸에 힘을 줘서 쓰러지던 고재수를 일으켜 세웠다.
“시 실장님?”
고재수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다.
눈빛에서도 광기가 사라지고 순박함이 돌아왔다.
“재수 씨. 괜찮으십니까?”
“죄 죄송합니다. 실장님. 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꼭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습니다.”
당황한 고재수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난 그를 안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웃으며 격려했다.
“괜찮습니다. 다친 곳 없이 말짱하니까 조금만 쉬다가 연기하시죠.”
“이러면 안 되는데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압니다. 알아요.”
단역만 하던 고재수였기에 영화 개봉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잘해야 한다는 심적인 부담이 컸나 보다.
그러다 보니 오늘처럼 극단적인 배역 몰입을 한 거고.
난 고재수를 달랜 뒤 뒤 편에 있는 이영진을 향해 말했다.
“영진아. 재수 씨 1층 휴게실에 데려가서 조금 쉬게 해드려.”
“예. 실장님.”
수도 없이 배역 몰입이 위험하다고 들었던 이영진이지만 이런 장면은 처음 보는 터라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고재수는 힘이 쭉 빠진 터라 이영진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간다.
난 혹시 고재수의 심각한 배역 몰입 때문에 이태풍이 다치는 건가 싶어 곧장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1월 26일]
-AM 10:00 [NEW. 이태풍] 진주 K 병원 응급실로 긴급 헬리콥터 이송. (기타 : 이태풍 부모님께 긴급히 연락할 것.)
아쉽지만 배역 몰입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는 아닌가 보다.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가라앉힌 채 고개를 돌렸다.
박선재 감독과 신종기 대표 그리고 스태프들이 모조리 바싹 얼어 붙어있다.
배역에 몰입해 메소드 연기를 펼치다가 사고를 쳤다는 건 영화판에서 늘 도는 이야기였지만 직접 확인한 것은 다들 처음이기 때문이다.
박선재 감독이 침을 꼴딱 삼키며 묻는다.
“정 실장님. 재수 씨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난 일부러 더욱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본인도 처음이라서 몰입을 조절하지 못해서 저러는 겁니다. 태풍이도 저러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알아서 조절하잖아요. 재수 씨도 충분히 조절하면서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배우는 아니지만 회귀 전 이와 같은 배우를 다뤄본 경험은 있다.
그렇기에 난 자신 있게 대답한 뒤 대화를 돌렸다.
“감독님. 그런데 태풍이랑 시아는요? 아침에 헬리콥터 타고 올라왔다고 들었는데요.”
“아 서로 안 마주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2층에 있습니다.”
오늘 찍을 씬들은 다 죽고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남자 주인공과 딸이 고재수가 연기하는 오명진을 피해 도망치며 싸우는 씬들이다.
그렇기에 고재수와 이태풍 그리고 아역배우 강시아는 만나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다 싶었단다.
몰입에 방해될까 내린 조치라는데 나름 세심한 결정이다.
“잘하셨습니다. 그럼 이따가 뵙죠.”
난 고개를 끄덕인 뒤 이태풍과 강시아의 준비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2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2층에서도 이태풍과 강시아는 각각 남자 주인공 강대현과 그의 딸 강영아로 배역 몰입 중이었다.
하지만 고재수 같은 배역 몰입을 경험해 본 이태풍이었기에 배역 몰입은 하되 다른 식으로 하는 중이다.
“영아야~ 이거 맞지?”
이태풍이 다정하게 웃으며 실뜨기를 한다.
그러자 아역배우 강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냐 아빠! 이렇게 해야지!”
극 중 아빠와 딸이란 유대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이태풍은 놀이를 하며 그저 관계에만 한정해서 몰입을 유지하고 있었다.
순간 이태풍이 나를 발견하고 살짝 눈웃음을 짓는다.
고재수와는 달리 현실과 연기를 구별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한때는 연못 다비드라고 불리던 이태풍이 이제는 이 정도 수준이 되었다는 것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1층에 있던 안유주 제작실장이 2층으로 올라왔다.
박선재 감독의 아내가 된 그녀도 겨울 내내 산에서만 지내 머리카락이 예전보다 길어져 있고 피부가 살짝 타 있었다.
“정 실장님. 말씀하신 대로 씬 순서 바꿀 거예요. 씬 122부터 찍을 테니까 준비 좀 해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와 동시에 난 이태풍이 다치는 일정이 지워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에브리데이를 실행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