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4화
584. 폭우 속으로 2
MBS PD실 앞 복도.
이준수와 그의 보이그룹 익스텐션의 출연을 막은 결과 이준수가 사고를 당하는 미래가 사라졌다.
하지만 남은 일정 하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에브리데이 V12.2]
[날짜 : 2021년 1월 21일]
-PM 03:00 경부고속도로 양재IC 인근 25중 추돌사고 발생. (기타 : 100년 만의 겨울 폭우.)
회귀 전.
당시 언론은 운전기사의 졸음운전이 원인일 확률이 높다고 보도를 했었다.
하지만 운전기사가 현장에서 즉사해버린 데다가 워낙 폭우가 심하던 날이었기에 경찰도 직접적인 사고의 원인이 졸음운전인지 폭우로 인한 차량의 미끄러짐인지 정확히 밝히진 못했다.
심지어 버스 내부 CCTV도 먹통이었기에 사고의 원인은 끝내 추측으로만 남았다.
난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우선 가장 유력한 원인을 뒤쫓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9999번 버스를 운행하는 오산 제일 운송에다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역시나 보안 때문에 기사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이 들려온다.
전화를 끊은 난 다음으로 경찰 신고를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신고할 수도 없었다.
이후에는 직접 차를 몰고 차량을 뒤따르며 경고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또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우가 내리고 있는데 거대한 버스에 다가갔다가는 더 큰 사고에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확실한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건 바로 그 버스에 올라타서 그 끔찍한 비극을 막는 것이었다.
9999번 버스는 오산 차고지에서 출발하는데 사당역까지 대략 1시간 10분에서 20분 정도가 걸린다.
정체가 걸리면 소요 시간이 훨씬 더 늘어나겠지만 오후 시간이라 정체가 생길 시간은 아니다.
그렇다면 넉넉잡아 1시 40분까지 차고지에 간 다음 3시에 양재IC를 지나가는 차량을 골라 운전석 뒷자리에 타면 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지이잉~
조금 전 나로 인해 스케줄이 취소된 이준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 이준수]
MBS <쇼! 음악센터> 박영민 PD가 일정 취소를 한 까닭에 다시 날 만나자는 약속을 잡으려고 하는 게 분명하다.
MBS 음방에 못 나가게 되었으니 하나가 방송하는 너튜브 라이브에라도 출연시킬 생각으로 말이다.
나로 인해 스케줄이 취소가 된 터라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예. 형.”
-하하하. MBS PD랑 만나는 스케줄이 취소가 됐다. 아까 만나기로 한 거 다시 볼 수 있을까?
박영민 PD는 만나고자 하던 일정이 취소된 이유를 일절 알려주지 않았기에 이준수는 그저 다른 이유로 취소가 된 줄 알고 있었다.
“예. 형. 그러면 11시 30분에 뵙죠. 장소는 똑같이 수원 근본 왕갈비에서 보죠.”
-오케이~ 그럼 그때 보자.
“아 그리고 형 말할 게 있어요.”
-응? 뭐?
“죄송한데 MBS 취소가 된 거 저희 회사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너희 회사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어떤 사정이 있는지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화란전’ 드라마 홍보 때문에 ‘닿지 않는 마음’이라는 곡을 이번 주에 방송 내보내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형 순서가 취소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준수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려줄 순 없었다.
이준수가 잠시 말을 멈춘다.
인기가 가장 우선인 연예계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그래도 충격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성격 좋은 이준수는 크게 화를 내지 않고 마음을 추스르며 말한다.
-크흠. 그 그래? 아쉽지만 어쩌겠냐. 대신에 우리 애들 고기나 좀 팍팍 사주라. 그리고 하나 튜브에 출연 시간 좀 늘려주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이준수는 기운이 빠지고 아쉬운 목소리가 역력했다.
미안했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
“당연히 할 수 있죠. 아 그리고 ‘닿지 않는 마음’이란 곡을 부를 때 남자 보컬이 한자리 비어서 익스텐션의 리더 남궁혁을 추천했거든요? 형만 괜찮으면 같이 했으면 하는데 어때요?”
-우리 혁이를?
“예. 형네 스케줄 빠진 게 너무 죄송해서요. 병 주고 약 주고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 거 아는데······ 그래도 혁이가 출연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 순간 이준수가 웃음을 터트린다.
-자식. 그 와중에 미안했나 보네. 윤호야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으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라. 그리고 그런 무대면 내가 오히려 더 좋지. 너희 팬덤에 업혀서 우리 혁이 좀 띄워 보자.
그룹이 솔로보다 좋은 건 멤버 중 한 명만 인기나 인지도를 얻어도 그룹 전체의 인지도가 올라간다는 거다.
이준수는 그 점을 알아주고 있었다.
“예! 그리고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앞으로는 제가 형네 식구들 팍팍 밀어드릴게요!”
-우리 박수무당 정 스타의 지원이면 열 PD 안 부럽지. 암!
“아 진짜. 형도 참······.”
-그러면 11시 30분에 수원에서 보자고.
이준수의 시원시원한 태도에 나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난 수원 근본 왕갈비에다가 11시 30분에 예약을 한 뒤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 * *
수원 근본 왕갈비.
50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은 한옥 같은 기와로 덮인 빌딩이었다.
난 안내원에게 안내를 받아 예약된 VIP 4번 방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통유리 창문으로 주차장이 한눈에 내려 보이는 방이었다.
4번 방 창가에 앉은 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빌딩의 맨 윗부분이 한옥의 기와처럼 되어 있었는데 기와의 골을 따라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폭우다 보니 고여 쏟아지는 물줄기가 마치 폭포수 같았다.
“비가 너무 많이 오네······.”
내가 막아야 할 사고 말고도 전국적으로 사고가 많이 생길 것 같다.
그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이준수와 그가 데리고 있는 5인조 보이그룹 ‘익스텐션’이 들어섰다.
“어 윤호야. 늦어서 미안.”
“고작 1분 늦은 거 가지고 늦다뇨. 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난 이준수를 상석으로 안내했다.
이준수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난 억지로 그를 상석에 앉혔다.
그러자 이준수가 웃으며 ‘익스텐션’을 향해 외친다.
“얘들아. 정 실장님한테 인사드려야지.”
그 순간 ‘익스텐션’은 줄을 맞춰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부끄러운 아이돌 인사를 한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갈 익스텐션입니다!”
다섯 명이 구호와 함께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회귀 전 사고를 끝으로 활동을 멈추게 되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자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격에 휩싸였다.
난 잠시 대답도 잊은 채 가만히 익스텐션 멤버들을 바라봤다.
올해 20살인 남궁혁은 리더와 메인 보컬을 겸하면서 작사 작곡까지 하는 만능형 아이돌이었고 19살인 한지성은 댄스와 랩을 맡고 있다.
이태명과 박안중은 18살 동갑으로 서브 보컬을 맡고 있고 막내인 17살 조재문은 예능을 맡고 있다.
이들은 이준수가 워낙 기본을 중시한 까닭에 다들 노래와 댄스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회귀 전 매년 이준수의 기일마다 모였던 인성 바른 아이들이기도 하고.
난 그런 아이들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하며 뒤늦게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반갑다. 배고플 테니까 일단 밥부터 먹을까?”
아이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이준수가 웃으며 말한다.
“오늘은 우리 정 실장님이 쏘신다니까 많이들 먹어.”
순간 남궁혁이 대표로 말을 꺼낸다.
“감사합니다. 정윤호 실장님!”
“잘 먹겠습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종업원이 들어온다.
“불 넣어 드릴까요?”
“예. 바로 넣어주시고 고기는 제일 좋은 걸로 좀 부탁드립니다. 일단 생갈비 5인분 양념 5인분만 먹고 추가로 주문하겠습니다.”
“맥주나 음료수 필요하세요?”
“아뇨. 됐습니다.”
문이 닫히고 종업원이 나간 후 난 특별 무대에서 부를 <닿을 수 없는 마음>의 음원 파일을 이준수에게 보냈다.
까톡.
이준수가 파일을 받고 묻는다.
“이게 그 곡이야?”
“네. 중간에 1절 중반 2절은 모두 혁이가 해줄 파트예요.”
이준수가 맞은 편에 앉은 남궁혁에게 다시 파일을 건네준다.
“혁이는 저녁때까지 이 곡 마스터해둬. 운 좋으면 이따가 밤에 강하나 너튜브에서 노래 부를 수도 있으니까. 이번 주말에는 음방 무대에서 부를 거고.”
“예. 대표님.”
남궁혁은 그 즉시 이어폰을 꺼내더니 눈감고 곡을 듣기 시작한다.
그 순간 ‘익스텐션’의 멤버들이 다들 입을 다물며 숨소리를 죽인다.
리더 혼자만이 서는 무대라도 빛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남궁혁이 곡에 빠져 있다 눈을 뜬다.
“와······ 진짜 노래 좋은데요?”
“다행이네. 그리고 그걸 네 곡으로 완벽히 소화시킬 수 있으면 앞으로도 연우랑 세리랑 같이 무대에 설 수 있을 거야.”
“예! 실장님. 죽도록 연습할게요.”
남궁혁이 더욱 각오를 다진다.
그때 다시 한번 문이 열리고 숯불 2개가 들어온다.
그리고 다양한 밑반찬과 고기가 들어왔다.
마블링이 꽃처럼 하얗게 핀 소고기를 보자 아이들이 군침을 흘리기 시작한다.
“자 일단 먹고 보자.”
남궁혁 역시 소고기 앞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어폰을 뺀다.
치이이익!
열에 익은 소고기에서 뚝뚝 흐르는 육즙이 숯불 위로 떨어진다.
육즙과 숯불이 맞닿자 하얀 연기가 위로 올라온다.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가 침샘을 자극한다.
치이익~
꿀꺽.
고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노릇노릇 익어가자 다들 젓가락을 쥔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고기를 구워 주던 종업원이 고기를 뒤집고 반대편을 굽는다.
그러다 불판 위 소고기의 닿지 않은 면에 육즙이 고이자 불판 한쪽으로 몰아 놓기 시작한다.
작게 썬 소고기가 3층 탑을 이루자 그제야 종업원이 말한다.
“이제 드셔도 됩니다.”
그 순간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자기 앞에 펼쳐진 양파 간장에 소고기를 푹 찍은 뒤 단숨에 입으로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소고기가 입안에서 녹아내리자 다들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나 역시 그 모습을 보고선 구워진 소고기를 먹기 시작한다.
고소한 생갈비의 맛이 느껴지자 사고를 막아야 한다는 걱정마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우린 1인분에 450g이 정량인 갈비를 무려 20인분이나 먹어 치운 뒤 배를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개인 카드로 결제를 마친 뒤 이준수와 약속을 잡았다.
“이따 저희 회사에서 봬요.”
“그래. 9시 30분까지 굴렁쇠로 갈게.”
“예. 형님.”
난 다른 스케줄이 있다고 인사한 뒤 차를 몰고 오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배 속이 소고기로 찬 까닭인지 가는 동안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역시나 소고기는 위대했다.
* * *
쏟아지는 빗속을 천천히 서행해 오산에 있는 9999번 버스 차고지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1시 10분.
난 50m 떨어진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려 9999번 차고지로 걸어갔다.
출발지에는 9999번 버스가 무려 네 대나 정차해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버스의 출발 간격이 고작 10분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1시 30분 1시 40분 1시 50분 2시.
자칫 잘못하다간 다른 버스를 타버리는 수가 있었기에 고민스러웠다.
그때였다.
버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사 대기실]의 간판이 보인다.
커다란 조립식 건물인 기사 대기실에는 자그마한 유리창이 여러 개 달려있었다.
유리창으로 기사들 몇 명이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기사 대기실을 덮고 있는 지붕의 처마 밑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나무 의자와 커피 자판기가 놓여있었다.
‘아무래도 대기실에 가서 물어봐야겠네.’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기사에게 물어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대기실 앞에 도착하자 머리가 하얗게 센 운전기사가 대기실을 나오고 있다.
가슴에 [채문동]이란 명찰을 단 기사가 커피를 마시려고 주머니 속을 뒤진다.
난 그 즉시 내 돈으로 커피 2잔을 뽑았다.
“기사님. 이거 드십시오.”
“아······ 안 이러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은 채문동 운전기사가 사람 좋게 웃었다.
호로록.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슬그머니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기 몇 분에 출발하는 차를 타면 양재IC 부근을 3시쯤 지나갈 수 있을까요?”
목적지인 사당역이 아니라 경부고속도로 양재IC를 지나가는 시간을 묻자 채문동 기사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내 질문에 대답해준다.
“평소보다 비가 많이 오니까 1시 40분 차를 타면 3시쯤 양재IC를 지나갈 겁니다. 저기 보이는 번호판 7942번 버스가 1시 40분에 출발하는 9999번 버스니까 저 버스 타면 됩니다.”
채문동 기사 덕분에 3시에 사고가 날 지역을 지나갈 버스를 알 수 있었다.
그때 기사 대기실의 문이 열리더니 기사 한 명이 검은 우산을 들고 나타났다.
가슴팍에 안전무라는 명찰을 단 40대의 기사가 기운찬 목소리로 말한다.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저 동전 있습니다.”
난 재차 커피를 뽑아준 뒤 미소를 지었다.
기사와 친분을 다져야지 이따가 사고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그런데 같이 커피를 마셨지만 즐겁다기보다는 불안함이 깃들기 시작한다.
‘이 사람이 맞는 건가?’
내 경험상 이렇게 쉽게 운명을 바꾼 적이 없었기에 오히려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경력 20년이라는 채문동 기사의 말이 틀릴 리가 없지만 그래도 뭔가 불안했다.
여전히 내 다이어리의 일정은 그대로인 데다가 운전기사가 피곤한 상태였다는 기사 내용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안전무 기사가 커피를 다 마시고 우산을 펼친다.
파앙.
“차 탈 거면 같이 가시죠?”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왠지 듣기 좋게 들린다.
마치 7942번 차량을 선택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정황이 이 차를 가리켰기에 타야 했지만 내 기억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결국 난 이를 꽉 악물고 결단을 내렸다.
“아······ 친구가 오기로 했는데 아직 안 와서요. 죄송하지만 다음 차를 타야겠습니다.”
안전무 운전기사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안전무 기사가 우산을 펼치고 자신의 차량으로 향했다.
간단한 차량 체크를 마친 안전무 기사가 문을 닫은 뒤 천천히 차를 움직인다.
부우웅~
거대한 9999번 버스가 바닥에 고인 물을 튕기며 차고지를 떠나고 있었다.
난 떠나는 9999번 차량의 뒷모습을 보며 다음 차량을 택한 내 선택이 옳기를 간절히 기원하기 시작했다.
1시 50분 차량이 출발하기까지는 이제 10분.
난 떨리는 심장을 억누른 채 다음 차량의 운전기사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사 대기실 내부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내가 어떤 버스를 탔어야 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