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589화
“한 곡이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더 큰 내러티브 즉 종합 컨텐츠의 일부로서 존재하는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OST는 후자입니다·”
끄덕끄덕·
“그렇기에 어젯밤 저는 ‘꿈과 희망의 방’에서 <인형 사냥꾼> 시즌 1을 전부 재시청하며 OST 프로듀싱을 준비했습니다! 결코 쉬는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남들이 삼겹살 김치찌개와 계란말이에 쌀밥 한 공기 뚝딱 비울 동안 저 말을 하느라 겨우 한 입 먹은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래빈아·”
“예?”
“지금 행복하지·”
“예!”
그럼 됐다·
출소 완료!
어젯밤 게임에서 이기며 극적으로 호캉스 지옥 방을 벗어난 김래빈은 열정과 워커홀릭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작곡과 격리되며 강제로 몸과 머리가 쉬어서 충전이 되긴 한 모양인데 도핑한 것처럼 과충전된 모양새다·
저거 눈 번뜩이는 것 좀 봐라·
“주저 없이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지금 당장이라도 업무에 종사할 만반의 준비가····”
“알지· 근데 밥은 먹고·”
“넵!”
그래· 먹는 게 남는 거다·
게다가 이게 어떻게 뜯어낸 밥이냐·
-다시·
-으아아 박문대 열한 번째 도전!
-Ohhhhh!!! 형 이겨요!
오늘 아침에 눈 뜨자마자 내가 율동 맞춰서 동요 외우는 짓까지 해가며 다섯 번이나 제비를 새로 뽑아서 딴 요리 당번 자리다·
그럼 본전을 뽑아야지·
“밥 주는 사람은 보호자예요· 형은 제 효도를 받을 자격 있어요·”
“오냐·”
이틀 전 나와 배세진이 급진적 면담을 추진한 그 밤 이후·
제작진은 다행히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았다· 다음 날부터 즉각 테스타의 환경을 개선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구성상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치 테스타가 따내듯이 좋은 대우를 받아내는 게 제법 재미있었다·
티 났으면 처신 잘하라고 다음 면담 잡으려고 했는데·
‘2차 면담은 안 잡아도 되겠군·’
거기까지 갔으면 손절이었다·
어쨌든 신나게 설거지까지 도운 김래빈은 기어코 자신의 애착 노트북을 꺼내 들고 발을 구르며 작업 방에 앉았다·
“그럼··· 시작합니까?”
“그래·”
파란만장한 이번 예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일감·
그리고 메인 일감이다·
-<인형 사냥꾼> 시즌 2의 OST 작곡입니다!
천연덕스럽게 ‘세상에 짐작도 못 함’ ‘이번 예능의 반전에 다시 한번 경악한 테스타’풍 반응을 해준 후 우리는 드디어 김래빈의 포함한 완전체로 둘러앉아 곡에 대한 토의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작곡을 하는지 드디어 체계적으로 보여주면서 전문적 면모와 색다른 재미를 어필···하는 걸 텐데·’
뭐 문자화하자면 단계는 간단하다·
-1단계· 자료조사·
“우선 지난 시즌에서 사용된 BGM이나 OST들을 좀 볼까?”
“예!”
<인형 사냥꾼> 시즌 1의 트랙 리스트가 탈탈 털려 나온다·
주로 강렬하고 무거운 비트감이 넘치거나 긴장감을 조성하는 류의 BGM이 많았다·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장면에서도 단조로 비장하거나 애처로운 선율이 뚝 떨어졌다·
‘무조건 강하게 때려 박는다 이거지·’
“그렇구나· 잔잔하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보다는 임팩트를 위한 BGM이 많은 것 같아·”
“으음~ <인형 사냥꾼>이 원래 재난 생존··· 이런 키워드에 초점을 맞췄잖아요· 그래서 재밌었죠!”
그래· 시청자들이 정신 나갈 것 같다면서 다음 편 누르게 만드는 데에 다 걸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드라마 제작자들의 OST 요청사항도 일맥상통했다·
“미쳤다 정이솔이다!! ···하는 느낌이었으면 좋으시겠대·”
“오·”
한마디로 ‘선생님들 기존 느낌이랑 비슷하게만 부탁드립니다’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깐깐하지 않다는 뜻이다·
‘기대치가 크지 않아·’
‘우리 작품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될 불후의 명작 세기의 갓곡을 빚어주세요’ 같은 것보단 테스타의 예능을 이용해 마케팅 좀 해보겠다는 심리 같다·
그리고 잘나가는 김래빈의 작곡 솜씨를 믿은 거겠지·
“그럼··· 정이솔이라는 캐릭터의 임팩트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면 될까···?”
“오~ 풀어 말하면 딱 그거다!”
이게 마침 작곡의 다음 단계였다·
-2단계· 니즈 파악·
조사한 자료와 잘 버무려서 대체 어떤 곡을 만들 건지 방향성을 잡는 거지·
그리고 마침 우리에게는 이걸 판별해 줄 전문 판독기가 있다·
바로 정이솔을 연기한 본인!
정이솔의 행적을 속속들이 가장 잘 아는 사람!
“우리한테는 세진 형이 계시지·”
“으응···! 저기 형· 시즌 2에서는··· 처음에 어떻게 등장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기대에 찬 눈빛 속에서····
배세진이 시선을 피했다·
“죽어·”
“····”
“아 맞다·”
설산에서 하도 등장해서 착각했네·
배세진이 대본 연습할 때 기웃거리며 상대 역할을 해줬던 녀석들이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즌 정이솔···? 아 그건 주인공 뇌 내 망상이였구요·
“죽은 사람이라··· 흠·”
“그럼 좀 무섭게 만들어볼까요? 애초에 정이솔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좀 살벌한 캐릭터기도 하고요·”
“그렇지· 시즌 1에서 정이솔이 배신할 때 썼던 BGM의 멜로디를 샘플링해도 좋을 것 같아·”
“과연 탁월한 발상이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재밌는 구도가 발생한다·
‘안 밀리는군·’
테스타 멤버들이 CM송을 김래빈 없이 며칠 작곡하며 버릇이 들어서 그런가 태도들이 좀 변했다·
전엔 좀 더 조심스러웠다·
김래빈이 워낙 잘하니 혹시라도 자신이 악영향을 줄까 봐 말을 다듬고 고르는 티가 났다는 것이다·
떠오르는 말에 필터를 거는 거지·
‘경험이 쌓일수록 그게 더 굳어졌고·’
하지만 이 며칠 김래빈 없이 하루 만에 작곡해 보겠다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공격적으로 피드백을 받아치는 동안 그게 몸에 밴 모양이다·
“이거 이거 좋다! 여기 이거 무슨 곡이지?”
“오오오!”
“찾았습니다· 넣어보겠습니다!”
재밌는 건 김래빈도 그걸 더 신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재밌네·’
쉴 틈 없이 의견이 오가고 수정과 수정이 이어지며 곡의 면모가 갖춰져 갔다·
-3단계· 데모 제작·
그렇게 1분짜리 데모가 나오는데 얼마나 걸렸는 줄 아는가?
단 세 시간이다·
“Wooow·”
“와··· 진짜 래빈이가 있으니까 속도가 다르네!”
“감사합니다!”
파일을 앞에 두고 음료와 공치사가 오갔다·
워커홀릭의 기쁨을 느끼며 김래빈이 조교의 숙달된 솜씨로 마우스를 다시 움직였다·
“그럼 재생해 보겠습니다!”
“으응!”
달칵·
버튼이 눌린다·
그리고·
-···♪♬♬♬♬-♪-♪♬
현악기가 떨린다·
“···!”
-♪♪♪♩-
두꺼운 베이스를 차갑게 가른다·
조화 대신 육중한 존재감을 택한 메인 멜로디는 거침이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설산에서 전율처럼 밀어닥치는 날렵하고 매끄러운 첼로의 선율·
시즌 1· 정이솔이 동료를 죽일 때 썼던 클래식의 멜로디였다·
그것이 캐릭터의 연결점을 살리고 존재감을 극대화한다·
“····”
진짜 첼로 연주도 아니고 단지 프로그램으로 찍은 음일 뿐인데·
마치 머릿속에서 질주하는 연주자의 손이 보이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구성·
해상도·
“····”
클래식을 재구성해 강렬한 현대적 팝으로 만든 OST였다·
1분 12초의 재생이 끝난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어떠십니까?!”
“너무··· 멋진데·”
그 말이 정답이다·
‘이건··· 그냥 제작사가 원하는 걸 다 때려 넣은 맛이다·’
MSG가 철철 흘러넘쳐서 아주 사람 군침을 돌게 만드는 그거 있지 않은가·
이 위에 의미심장한 노랫말 같은 걸 외국어로 얹어버리면 완전히 의뢰한 측이 원하는 그 <인형 사냥꾼>의 정수 느낌이었다·
‘한 방에 뽑혔네·’
드라마 제작사의 배팅은 성공했다·
‘그거 아세요? 우리 OST 중 하나가 테스타가 만든 곡인데ㅎㅎ’ 같은 마케팅에 잘 써먹으실 수 있을 것 같다·
“와··· 전 너무 좋은데요? 이걸 바탕으로 볼륨 좀 키우면 될 것 같은데 다들 어떠세요?”
“찬성!”
그렇게 모두가 신나게 다시 음원 프로그램에 붙었을 때였다·
“저기·”
“예?”
배세진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멋지긴 한데···· 그래 류청우· 네 생각엔 이 곡을 어떤 장면에 쓸 것 같아?”
“···?”
“음··· 처음에 정이솔이 죽는 장면은 어때?”
배세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일부러 허무하게 연출할 거야· 이렇게 강렬한 곡과는 어울릴 수가 없어·”
“음····”
“그리고 내가 생각해봤는데”
배세진이 심호흡했다·
“이번 시즌에서 내가 연기한 시나리오 중에는··· 이 곡과 그다지 어울리는 장면이 없어·”
“···!”
찬물 맞은 듯이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그렇군·’
배세진은 정이솔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눈으로 보기에 이 곡이 들어갈 만한 장소는··· 그 장면들을 다 뒤져봐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멋진 곡이라도 말이다·
“오해하지 마! 곡은 정말 좋으니까· 그래도··· 말해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배세진은 자신의 데모 사망 선고를 더 견고하게 설명해갔다·
“아까 김래빈이 OST는 종합 컨텐츠의 일부라고 했잖아· 그래서··· 이 곡을 드라마의 구성요소로 한 번 더 고려해본 거야·”
“····”
“그러니까 어디에 넣어도 좀 어색했어·”
김래빈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직접 해당 캐릭터를 연기하신 형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신뢰가 갑니다!”
녀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설임 없이 음원 파일의 멜로디를 삭제····
“으아악!”
“지우지 마! 아깝잖아!”
“예? 아 완전히 지우는 것은 아닙니다! 따로 백업해 두었습니다·”
“휴·”
이 멤버 저 멤버 할 것 없이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럴 만했다·
‘곡 자체는 좋단 말이지·’
나는 확신했다·
이대로만 내도 드라마 제작사 측에선 냉큼 받아 갈 것이다·
일단 노래 좋고 어쨌든 캐릭터랑 어울리기도 하고· 테스타 예능을 통한 마케팅도 합격점을 내릴 테니까·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 짜내서 조금이라도 어울리는 이번 시즌 정이솔 장면을 찾아내겠지 뭐·
하지만 그건 진짜 ‘구색만 맞추는’ 방식이 될 것이다·
“···며칠 전에 CM송을 작곡하면서 생각했지만 역시 지금 내가 김래빈처럼 작곡에 기여할 수는 없을 거야·”
배세진이 단단하게 말했다·
“하지만! 드라마 OST잖아· 내가 잘 아는 분야야· 그러니까 날 믿고 곡을 수정해봤으면 좋겠어·”
“···!”
처음이었다·
배세진이 이렇게까지 자신감 있게 ‘책임지겠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건 말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겠다·
‘본인이 책임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제작진에게 무례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항의하고 좋은 결과를 얻은 경험 말이다·
그건 저 녀석에겐 새로운 도전이었겠지·
그리고 용기 낸 그 시도가 긍정적인 성과로 돌아왔으니 행동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
나는 자신감 있는 표정인 배세진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충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찬성이지·”
“···!”
“맞아요· 저희가 ‘이 정도면 됐지’ 이러면서 어중간하게 가는 그룹이 아니잖아요~ 그치 문대문대?”
“어·”
그렇다·
여기서 타협하면 테스타가 이 OST를 맡아서 드라마 제작사만 더 큰 이득을 당기는 구조거든·
‘우리도 너희로 마케팅 맛 좀 보자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드라마를 본 사람들도 이 OST가 나오는 순간 ‘와 X발 이거 뭐야’하고 곡을 찾아보게 만드는 것·
그래서 테스타의 이름을 보고 기함하는 거 말이다·
그거야말로 테스타가 이 딜에서 뽑을 수 있는 최대 이득이다·
“사람들이 드라마에서 OST 딱 흘러나오는 순간 소름 돋아서 경악할 만한 걸 뽑아봐야죠·”
“···! 좋아·”
답변 좋고·
나는 내심 피식 웃었다·
“그럼 OST 수정에 참고하게 형이 추천하시는 ‘정이솔의 인상적인 장면’도 있을까요·”
예전이었다면 배세진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한참 망설인 후에 ‘내 생각일 뿐인데’라며 말을 얹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한 장면이 하나 있긴 해·”
이제 배세진은 즉각 입을 열었다·
“어떤 건데요?”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번 시즌 정이솔의 진짜 클라이맥스·”
* * *
며칠 후·
“OST 도착했대요·”
“아 오케이·”
<인형 사냥꾼>의 감독은 스탭에게 음원을 하나 전달받았다·
‘왔구나·’
정이솔의 테마곡·
본래라면 데모부터 쭉 담당자들이 도맡아 보면서 서로 복잡한 피드백이 오갔어야 하는 OST였다·
그런데 이게 일종의 마케팅 방식이 되어버리며 ‘테스타가 알아서 해주세요’가 되어버렸다·
높으신 분들이 그편이 더 관심받기 좋을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흠·”
감독은 입맛이 썼다·
배세진은 훌륭한 배우가 맞았다·
하지만 그가 소속된 그룹 본 활동은 어디까지나··· KPOP 아이돌이다·
KPOP 아이돌·
상업성과 사업성에 목숨을 거는 현대 방송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정수였다·
당연히 예술보단 기업 논리를 따라 OST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물론 곡은 좋겠지·
하지만 무난한 선택을 했으리라·
스토리 장면에 딱 맞는 소위 영화 음악이 아닌 대중성 있는 곡을 뽑았을 것이다·
그게 뼈아팠다·
‘정이솔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데·’
물론 투자 자본이 자기 이름값보다 플랫폼 이름값으로 더 많이 들어온 시점에서 ‘감독 마음대로’ ‘작가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건 없다·
다 타협의 연속이라지만 그래도 감독은 여전히 입이 썼다·
‘어떻게든 끼워 맞춰 봐야지·’
그는 체념 속에서 결심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달칵·
그리고··· 가느다란 현악기의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
이게 뭐지?
강렬하려다 갑작스레 실패한 것 같은 묘한 불협화음·
그것은 삐걱거리며 올라가려다가 훅 내려앉는다·
그리고 침묵·
“····”
이런 게 정이솔 테마곡이라고?
감독이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살짝 부아가 치밀어 오르려던 순간·
♪♬♩-♪-♪♬···
다시 현악기가 흐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드러운 오케스트라의 조화롭고 안정된 소리다·
그리고 그 위로 유려하게 흘러가는 멜로디는····
-Um Ummum um···
사람의 목소리였다·
시즌 1에서 정이솔의 살인 시퀀스에 쓰였던 클래식의 멜로디가 미성의 아카펠라로 이루어져 현악기 위를 뛰어논다·
약간 섬뜩하게 똑 떨어지는 단조가 부드러운 현악기와 뒤섞이는 게 오묘하다·
‘음?’
그리고 사이사이 바람 소리 같은 관악기의 소음이 들리며 펜 부딪히는 것 같은 타악기의 소리가 들린다·
‘아하·’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설산 속 주인공이 상상해 낸 가상의 정이솔의 이미지를 OST로 구현한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네··· 으음 괜찮아·’
정이솔의 테마곡 답지 않은가·
그는 살짝 만족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을 가졌다·
‘잠깐·’
설산 속 정이솔을 표현한 거였다면 맨 앞의 그 이상한 불협화음은 무엇이었을까?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는 꽤 설득력 있는 추측을 해낸다·
‘오호·’
아무래도 그건 주인공이 정이솔을 살해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 아닐까?
허망하게 죽는 정이솔의 모습 말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귀에 집중했다·
대체 노래는 언제 시작하는 건지 고민하는 그의 속에서 흥미가 살아나고 있었지만 동시에 아직 심드렁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심드렁함은 곧 깨진다·
“···!”
아무리 기다려도 가사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신 아카펠라 허밍이 금관 악기와 함께 새로운 멜로디로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Aaaaaa—! Hummmmm-
그런데··· 그 멜로디가 매우 익숙했다·
바로 주인공의 테마곡이다·
유명한 클래식 행진곡·
“···!!”
대체 정이솔의 테마곡에 왜 주인공의 테마곡이 들어온단 말인가?
‘작곡 의뢰를 착각했나?’
당혹스러움·
그러나 복잡하게 섞이며 날카로운 현악기의 줄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OST를 들으며 그는 깨달았다·
그 파괴적인 소리·
‘아·’
이건··· 그냥 정이솔의 출연 장면을 시간순으로 쭉 나열한 곡 같은 게 아니었다!
하나의 장면을 표현하고 있었다·
바로 정이솔의 하이라이트 장면·
“····”
하지만 그건 정이솔이 진짜 등장하는 게 아니다·
주인공·
시즌 2의 마지막 화 그는 순간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지난 삶에서 동료였던 사람들에게 쫓기게 된다·
그리하여 허겁지겁 길을 거슬러 돌아간 그는 결국 본래 자신의 집이 있던 층의 편의점에까지 도망치게 되는데····
거기서 본 것이다·
자신이 죽이고 간 정이솔의 시체를·
그리고 그 시체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의 망상 속 정이솔을 말이다·
-····
-감상은?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정이솔의 시체를 보며 주인공이 떠올리는 회상 시퀀스·
그 짧고 강렬한 컷들·
살해부터 설산 속 대치 그리고 대화 혼동 증오 위로····
모든 것들이 빠르게 쏟아진다·
마치 주마등처럼·
‘맙소사·’
그게 바로 이 곡이었다!
그 사이 곡은 더욱 깊게 몰아친다·
아카펠라가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현악기 주변에서 불쑥불쑥 현대적이며 날카로운 소리가 전기처럼 번뜩인다·
주인공의 죄책감 붕괴하는 멘탈 신체적 피로 분노 동질감 따위가 몰아치며····
달려간다·
-아아악!
주인공이 편의점을 뛰쳐나가 자신을 노리는 전 동료들의 공격 속으로 자진해서 뛰어들 때까지·
설산 속 정이솔이 사라지기까지·
♩! ♩! ♪♬!
“····”
강렬한 고음과 찢어지는 첼로 드럼의 끝·
회상은 끝났다·
고오오오···
백색 소음만이 남아 느리게 흘렀다·
“····”
감독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곡의 길이를 확인하는 순간 그는 전율했다·
8분 14초·
가사 하나 없이·
‘그러니까····’
그는 정리했다·
테스타는 과감히 보컬 트랙을 버렸다·
그 대신 정말로 전통적인 OST 가사 없는 연주곡인 Original Score를 내놓은 것이다·
작사라는 파트를 아예 과감히 배제하고 오로지 드라마의 청각적인 요소만을 공략해서!
장면의 임팩트를 살리기 위해·
“이····”
이런 위험한 도전을 했다니!
그러나 안다·
가사는 없지만 음율로 이루어진 전개와 스토리가 있다· 아주 매끄럽고 강렬하게·
그래서 부분부분 끊어 쓰면 심지어 이번 시즌의 모든 정이솔 장면에 다 대입할 수 있기까지 하다·
‘말도 안 돼·’
대중성?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곡이 배세진이 연기한 정이솔과 만났을 때 어마어마한 임팩트를 줄 것이다·
그게 바로··· OST의 대중성 아닌가!
“맙소사·”
이 OST가 공개됐을 때 대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알 수 없었으나 감독은 하나는 확신했다·
최소한 그게 드라마 마케팅 팀에서 예상했던 범주의 반응은 아닐 거라고 말이다·
‘정말··· 상상 이상인데·’
어떤 분야든 어떤 경지를 넘어서면 예상을 벗어나는 사고방식을 가지는 모양이었다·
그게 산업성의 끝판왕인 아이돌이라도 말이다·
“대단하군·”
다시 음원을 처음부터 들으며 감독은 확신했다·
테스타도 분명 어마어마한 각오와 긴장 속에서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 * *
그러나 같은 시각·
드디어 산장에서 퇴소하던 테스타는 OST보다 먼저 공개된 이번 예능의 1 2화 반응을 드디어 접하게 되었는데····
“혀 형! 큰일이 났습니다!”
“왜·”
“예능 제작진분들과 저희에게 의뢰를 주셨던 CM송 담당자분을 비방하는 욕설이 인터넷에 난무····”
“오·”
“···?”
“아 괜찮다·”
“···??”
“그냥 둬·”
박문대는 역풍 없는 정의 구현의 참맛을 즐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