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57화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이런 힘의 회복이 완전하지 않았나 보군·]
시야가 되돌아왔음을 확인한 탑주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일전 ‘포식자’에게 기억을 보여주느라 힘을 꽤 소진한 듯하군· 자네도 알고 있지?]
‘알다마다·’
오리지널의 기억은 육체의 소유권과 함께 대부분 회복되었다·
“대성좌 ‘공허록을 관장하는 시조새’· 녀석의 대화를 엿보던 고통이라면 아직도 생생하다·”
탑주가 대성좌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이유·
그건 ‘창성’의 힘이 각인된 존재이며 아직까지도 이어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당신이 유일신의 조각 중에서도 특별하다는 의미도 되겠지·”
[조각 중에서 특별하다라· 어느 정도는 틀린 말도 아니군· 나는 조각이 떨어져 나간 뒤 남은 존재이거든· 자네들의 표현을 빌리면 본체인 셈이지·]
“····”
그 말에는 태현도 조금은 놀라고 말았다·
줄곧 베일에 싸여 있던 유일신·
스스로를 본체라 말하는 자를 마주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으니까·
‘아니 이제 와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대성좌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유일신의 본체라 밝힌 탑주가 그 길을 걸어가는 데 방해가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
“이 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지·”
[그렇군·]
“그러니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어째서 스스로 성좌의 격을 회복하여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는지·
[길게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네만· 자네라면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겠지·]
알다마다·
“요마와 용이 손을 잡고 당신을 사냥했다·”
영역전쟁을 완수한 ‘요마’가 하계왕이 되고 천계를 손에 넣은 ‘용’이 상계왕이 되고·
하계는 노네임의 개입으로 무수한 윤회를 반복하였다·
요마는 무수한 종족전쟁을 반복하며 용과 비슷한 수준으로 격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들의 격이 엇비슷해졌을 때·
용은 요마를 쓰러트리지 않았다·
“녀석은 요마와 함께 바깥으로 나가길 원했다· 단순히 하급 성좌에서 만족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겠지·”
[정확하군·]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듯 탑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전에 녀석들이 완전한 성좌로 각성하기 위해선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지·”
신살자(神殺者)·
삼천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한 존재를 끌어내리는 것·
“새로운 성좌가 탄생하기 위해선 당신을 다시 한번 죽여야 했다·”
[와하하하·]
탑주가 호탕하게 웃었다·
몸을 앞뒤로 꺾는 게 전에 없이 기뻐하는 모양새였다·
[바로 그렇다네· 아주 정확하게 맞추고 있군·]
그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사실 이미 중간계를 비롯해 수많은 조각을 뿌려 놓았기에 완전한 죽음도 아니었다·
본체라 할 만한 성좌의 격을 회복하기 가장 좋은 그릇이 치명적인 수준으로 해를 입었을 뿐·
잔재는 삼천세계 곳곳에 흩어져 나름의 권능을 가지고 세상을 관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중에는 미약하나마 창조의 권능을 지닌 이도 있었지·]
태현의 눈앞에 있는 탑주는 그렇게 탄생한 자아라고·
지금도 성좌의 아바타라 불릴 정도의 힘은 유지하고 있다며·
[‘포식자’까지 성좌가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어찌 되었든 본래의 목표대로 삼천세계에서도 성좌를 배출해 다른 성좌들이 점거하는 상황은 막아내었지·]
‘김태현’이 ‘포식자’로 각성하게 된 것 또한 변수였다·
노인이 강조하며 태현과 눈을 맞추었다·
[성좌를 배출한 우주가 되며 늘어난 용량· 그것도 이제 한계라네·]
삼천세계는 처음부터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우주·
다수의 성좌를 배출한 것도 모자라 다른 성좌의 권능을 이용해 여러 번 변형을 거쳤다·
[조각난 나의 존재력으론 더 이상의 성좌 배출은 무리일세·]
상급 성좌를 탄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지금의 시간선·
가능성의 탑을 올라 태현이 상급 성좌에 준하는 힘을 얻는다 해도·
[지금의 삼천세계는 붕괴되는 결과를 맞이하겠지·]
탑주의 대답을 듣고 나니 생각이 명료해진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군·”
[대답이 된 듯하니 다행일세· 그럼····]
이쯤에서 ‘용’에게 힘을 실어주는 건 어떻겠는가·
탑주가 그런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다·
“역시 삼천세계는 부서지는 게 낫겠어·”
갑작스러운 말에 탑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그냥 부서지는 걸로는 안 되겠지·”
탑주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태현이 말을 이었다·
“이 몸이 직접·”
산산조각·
“철저하게 부숴야겠어·”
[····]
한참이나 지나 탑주가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 삼천세계를 부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문자 그대로다·”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탑주· 솔직히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듣기에는 그럴듯했다만· 당신 말에는 맹점이 보인단 말이지·”
[···?]
영문을 몰라 하는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며 태현의 비틀린 입가로 조소가 새어 나왔다·
“어째서 직접 성좌가 되어 바깥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나·”
그는 상급 성좌다·
존재력을 쪼개어 삼천세계에 수많은 조각을 뿌렸지만·
“마음먹는다면 그것들을 모두 회수하여 어느 정도의 격을 회복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삼천세계와 나의 존재가 결합되어····]
“웃기는 소리· 뻔한 변명을 듣자고 한 말이 아니다· 아무리 존재를 쪼개었다 해도 하급 성좌로 회복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겠지·”
실제로 ‘용’과 ‘요마’ 모두 하급 성좌로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창조의 권능을 지닌 노네임이라면 그 가치가 더욱 남달랐으리라·
“당신은 자신의 책무를 떠넘긴 것에 지나지 않아·”
[····]
“자신이 만든 놀이동산이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애새끼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다·”
태현이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내었다·
처음에는 적당히 조롱하고 끝내려 했는데 막상 입에 담고 보니 제어가 되지 않는다·
대성좌들이 벌이는 별자리 전쟁·
그건 수많은 성좌들을 제거하기 위해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좌들의 출신 행성과 우주는 수없이 파괴된다·
‘요마’와 ‘포식자’는 대성좌들에 반하는 영역에 섰고 ‘용’은 ‘괴이’라는 대성좌에게 붙어 그들을 배신했다·
“그런데도 당신은 ‘용’이 이겨서라도 삼천세계가 유지되길 바라고 있군?”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
그건 ‘용’이 삼천세계의 유일한 출신 성좌가 되는 것이다·
‘요마’와 ‘포식자’를 제물로 삼아 용이 대성좌가 된다면 더더욱 좋고·
[‘용’이 ‘요마’를 성좌로 만든 것 또한 그런 이유이리라 생각되는군·]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요마’의 근원을 빚어내 포식이라는 권능을 만들어 냈고·
‘포식자’의 심상과 육체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삼천세계를 철저히 부순다·]
조용히 읊조린 탑주가 고개를 들었다·
[탑의 가능성을 취한 다음 이곳이 붕괴되게 할 셈인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연쇄를 끊어내기 위해?]
후후후후·
[그 정도로는 부족할 것이네· 그런 파멸적인 선택으로는····]
“먼저 당신부터 먹어 치울 것이다·”
[····]
“당신뿐만이 아냐·”
탑의 관리자·
탑의 호민관·
이외에 아직 만나지 못한 탑과 관련된 다른 조각들·
“그 녀석들 모두를 먹어 치울 것이다·”
탑의 관리자들은 모두 상계와 하계 중간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들을 먹어 치운다는 건 삼천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을 먹어 치운다는 의미·”
이후에 남은 삼천세계는 어떤 희망이나 성장도 없이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더 이상의 회귀는 없을 것이며 새로운 가능성은 피어나지 않는 행성·
삼천세계가 맞게 될 최후였다·
“내키지 않는 얼굴이군·”
[‘요마’나 ‘포식자’가 그런 걸 달가워할 거라 생각되진 않는데?]
“어차피 이 몸이 성장하지 못하면 ‘용’이나 다른 대성좌의 개입이 시작될 운명이다·”
자신에게 기회라는 이름의 책임을 전가했던 두 성좌는 이미 위기에 처했다·
“모든 가능성을 소진해 상급 성좌로 만족한다? 그래 봤자 최후만 조금 뒤로 미루어졌을 뿐이잖아·”
대성좌가 되지 못한다면 결국 이 연쇄를 끊어낼 수 없다·
[정말로· 대성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창성의 힘이 깃든 당신과 다른 조각들을 먹어 치운다면 시도 정도는 해볼 수 있지·”
명색이 유일신의 본체였던 존재·
대성좌 ‘창성’의 힘이 각인되어 있는 존재·
소화시킬 수만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도박수다·
이제는 위험을 무릅쓰는 행위가·
도박수에 목숨을 거는 행위가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을 읽은 탑주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것만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조금 전 설전을 이어가던 노인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듯한 느낌·
[자네는 ‘요마’나 ‘포식자’와는 결이 다르군· 오히려 ‘용’을 더욱 닮았다 생각될 정도야·]
“완전한 소멸이 예정되니 심경의 변화라도 찾아온 건가·”
[나를 먹어 치운다 해도 지금은 안 된다네· 자네의 격으로는 당장 소화하는 게 불가능하거든·]
스륵·
탑주가 손을 펼치자 흔한 고목나무 지팡이 하나가 쥐어졌다·
[보기엔 이래도 톨킨이 다수의 시간선에 존재하는 신수를 압축해 만든 물건이라네·]
툭·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찍자 성력이 물결치듯 퍼져 나갔다·
“···!!”
본능적인 방어 동작·
성력이 훑고 지나갔음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다·
[그리 두려워할 거 없네· 나를 삼켜 세계를 무너트리려는 자가 고작 한 줌의 성력을 두려워해서야 되겠는가·]
한 줌·
그 말이 어울리는 양이긴 하다·
퍼져 나간 성력은 그대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탐색? 탐지?’
어느 쪽이든 상대가 아무런 제약 없이 성력을 사용한다는 건 태현에게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당신은 평범한 상급 성좌가 아니잖아·”
출신은 대성좌가 탄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대우주·
창조의 권능을 지니고 있는 것도 모자라 대성좌인 ‘창성’의 힘까지 각인되어 있다·
[그래 봤자 조각이네· 다른 조각들을 모두 취한다 하여 대성좌가 되지는 않아·]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소우주도 되지 못하던 곳에서 세 명의 성좌가 탄생했다·
“이 몸은 한 번 정한 목표는 무르지 않아·”
[그건 ‘요마’가 했던 말이군· 그리고 이제는 ‘포식자’가 왜 자네에게 뒷일을 맡겼는지 이해가 된단 말이지·]
툭·
탑주가 다시 한번 지팡이를 내려찍었다·
눈앞에 하나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듯 거대한 산맥이 보였다·
그 사이사이로 갑옷과 로브를 입은 이들이 몬스터와 전투를 치르는 모양새·
“중간계?”
[너희들이 제국이라 부르는 곳· 그중에서도 ‘괴이’의 힘이 닿은 시간선이다·]
“뭐···?”
괴이·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성좌를 수집하여 신체를 갈기갈기 찢어 다시 조립한다는 소문이 떠도는 대성좌·
그렇게 재탄생한 성좌는 기존과 다른 정체성을 지니며 녀석에게 복종한다 알려져 있다·
‘용에게 당했다면··· 요마와 포식자도 녀석의 영역에 잡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성좌 정도 되는 녀석이 어떻게 중간계를····’
그들이 아무리 존재력을 숨긴다 해도 삼천세계가 감당할 정도는 아니다·
[자네도 순진하군· ‘요마’는 한때 ‘시조새’의 휘하에 있었고 ‘용’은 현재 ‘괴이’의 밑으로 들어갔다네· 그들에게 의탁하고도 출신지에 영향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가?]
“····”
영상에선 하나의 몬스터가 거대한 힘을 흩뿌리고 있었다·
성력의 잔재·
중간계에서 발휘되어선 안 될 힘·
그에 대항하는 건 은발의 남자였다·
그가 들고 있는 검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조각···인 건가·”
유일신의 조각·
일전 중간계에 흩뿌려 놓았다는 것 중 하나이리라·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탑주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냐?”
[단순한 변덕일세· 또한 ‘요마’와 ‘포식자’가 했던 것이기도 하지·]
“무슨····”
[자네는 기대받는 삶에 익숙한 것 같단 말이야·]
도플갱어라는 이름도·
김태현이라는 이름도·
[따지고 보면 그대를 나타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가·]
투욱·
들어 올린 지팡이가 태현의 가슴에 닿았다·
지팡이를 매개로 익숙한 힘이 흘러든다·
[노네임·]
가슴에 닿은 곳을 중심으로 탑주의 성력이 퍼져 나갔다·
화르륵·
타오르듯 발현되는 건 ‘요마’의 성력·
쩌어억·
아가리를 벌리며 발현된 건 ‘포식자’의 성력·
스르륵·
몸을 숨기듯 발현되는 건 이그문을 통해 먹어 치운 ‘미궁’의 성력이다·
그리고·
카르르르·
그 모든 성력을 어루만지듯 또 하나의 성력이 스며들었다·
[즐거운 대화였네·]
띠링·
[격락한 성좌 ‘이름을 가지지 못한 창조자’의 힘이 닿습니다·]
[중급 성좌 ‘운명을 거스르는 요마왕’과의 연결이 일시적으로 회복됩니다·]
[하급 성좌 ‘삼천세계의 포식자’와의 연결이 일시적으로 회복됩니다·]
[상급 성좌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이 새로운 성좌의 탄생을 반깁니다·]
[상급 성좌 ‘시간선을 거니는 십이지’가 놀랍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상급 성좌 ‘다섯 개의 심장을 가진 용’이 분노합니다·]
머릿속에 울리는 수많은 메시지 사이로·
[자네의 선택을 지켜보도록 하지·]
탑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