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3화
제갈세가의 분가가 웬 괴인에게 무너졌다더라·
본가의 가주가 전력을 정비하여 괴인을 쳤으나 그들 또한 처참히 짓밟혔다더라·
그런 소문이 호북성에 잠깐 퍼졌다·
하지만 소문이 으레 그렇듯 신뢰를 잃고 새로운 소문에 묻혀 사라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림의 나날이었다·
* * *
태현이 잔을 들어 올렸다·
잔에 담긴 건 무림에서 탁주라 불리는 술이다·
잔을 비웠다·
몇 잔이나 비웠을까?
테이블 위로 내용물을 비운 수십 개의 탁주가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치사량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양·
물론 삼천세계의 정점을 노리는 태현은 일반적인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 하여 취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흐음····”
생리적 욕구는 육체를 가진 필멸자가 해결해야 할 귀찮은 문제 중 하나·
심상 세계에 머무를 때의 그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적당한 음식 섭취는 물론 어느 정도의 휴식도 필요하다·
그 정도가 하계에 있을 때보다 심한 걸 보니 층을 옳기면서 육체에도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피곤하군·”
중얼거린 태현이 마정석을 일깨웠다·
키이이-·
마정석이 회전하며 체내에 쌓인 취기를 날려버린다·
그렇다 하여 정신적인 피로까지 가시는 건 아니었다·
“쯧·”
혀를 찬 태현이 잔을 내려놓았다·
무림에서의 제약은 포식과 신력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필멸자로서 가진 한계가 한층 부각되는 차원이란 말이지·’
그 차이를 알게 된 건 제갈세가의 분가주를 굴복시킨 뒤였다·
그에게 로자리아의 권능을 사용하던 중 체내에 상당한 피로가 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력량은 충분했지만 육체가 쉼 없이 권능을 사용하기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어찌나 어이없던지·
태현은 다 잡아놓은 분가주와 그 일원들을 놓치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도착한 제갈세가의 가주와 본가 병력과 충돌했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였다·
가주 제갈선이 손꼽히는 초절정고수라는 것과 그가 데리고 온 무림인들이 괴상한 진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권능의 출력을 높이는 것만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찝찝한 상태에서 제갈선과 녀석의 병력을 모두 굴복시켰다·
그리고 녀석에게 자주색의 마력을 사용했을 때·
띠링·
[피로도 수치가 정점에 달했습니다·]
[자주색의 마력이 봉인됩니다·]
제멋대로의 메시지와 함께 로자리아의 권능이 봉인되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던지·
이미 무릎 꿇려 놓은 제갈선마저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챌 정도였다·
그는 타고난 협상가였다·
태현과의 격차를 알아본 직후 그에게 예를 표하며 가문의 손님으로 모시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다·
찾고 있는 게 있다면 가문의 무인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해주겠다고·
가주의 권한으로 정보가 새어 나가는 일 없이 필요한 정보만 공유해 주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잠깐의 행보와 찰나의 감정을 드러낸 것만으로 태현이 원하는 바를 특정한 것이다·
약속하는 그의 곁에는 한번 목숨을 건졌던 분가주도 함께였다·
과거 심상 세계의 그였다면 단칼에 거절하고 먹어 치웠을 제안·
지금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지금과 같은 술상이 차려졌다·
“····”
마정석을 운용해 보았다·
키이이- 키이이이- 카아아-·
다른 마정석은 곧바로 반응하는데 자주색의 마력을 담은 마정석이 반응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몸뚱이냐·”
새삼 오리지널이 빈번히 심상 세계로 도망쳐 오던 게 납득될 정도로 제약의 갑갑함이 와닿는다·
매 순간이 제약의 연속·
등탑을 통한 성장에 인내심이라는 항목도 포함되어 있다면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지·
“술을 먹으면 정신이 맑아질 거라더니· 개소리였군·”
술상을 들이고 웃으면서 나간 제갈선을 떠올리며 태현이 으르렁거렸다·
눈꺼풀이 무겁다·
마정석으로 틈틈이 취기를 날리지 않았다면 분명 정신이 끊어졌으리라·
소모된 마력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가주의 손님으로 들어온 지도 어느새 이틀째다·
푹신한 침대에서 수면이란 것도 취해 보았고 만찬을 즐기며 인간들의 식문화도 경험해 보았다·
그럼에도 소모된 마력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 본론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가주를 불러와라·”
중얼거리길 잠시·
“찾으셨습니까 대인·”
60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은 얼굴·
새하얀 머리를 단정하게 늘어뜨린 제갈선이 웃으며 들어왔다·
얼굴과 기운에 선함이 가득하다·
“역겨운 웃음 집어치워라·”
“대인 같은 손님을 모시는 데 어찌 사사로운 마음을 품겠습니까·”
제갈선이 웃음을 거두지 않으며 태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력은 형편없던데· 역시 그 처세술이라는 걸로 세가의 반열에 오른 건가·”
“본가는 예로부터 진법과 의학에 집중하였습니다· 무력이라면 남궁가의 가주가 으뜸이지요·”
싱긋·제갈선이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고 남궁세가를 추켜세웠다·
“역시 역겨워· 이 몸이 명령한 건?”
“이그문이라는 자에 대한 소식 말씀이시군요·”
“그래· 찾았나?”
“찾지 못했습니다·”
제갈선이 허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전이라면 건방진 미물이라며 머리를 터트렸을 터·
“제갈선· 네놈은 목숨이 여러 개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부족한 노부가 거짓을 입에 담는 게 익숙지 않을 뿐입니다·”
능글맞은 웃음· 세 치 혀·
무언가를 숨긴 듯한 그 모습이 요르문간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녀석들일수록 쓰임새가 좋다는 걸 알고 있는 태현이었다·
“빈손이면 팔 하나를 날릴 것이다·”
“다행히 빈손이 아니랍니다·”
제갈선이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건넸다·
태현이 혀를 차며 턱짓했다·
“직접 읽어라·”
“혹 서역인이라 글을 읽지 못하시는 겁니까?”
“슬슬 가문에 피를 흘릴 때도 되었군·”
“대인의 말씀대로 혈마신교에 대해 알아본 내용입니다·”
혈마신교·
길페르를 통해 이그문 녀석이 그곳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 생각에서 내린 명령이었는데·
“혈마 이근문은 혜성처럼 나타난 마교의 거두이지요·”
“뭐?”
“마교의 거두라 했습니다· 혹 대인께선 마교를 경멸하시는····”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고자 하는 제갈선의 행동은 가상했으나 태현이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근문···? 이그문이 아니고?”
“그렇습니다만····”
“····”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는 제갈선과 눈을 맞추길 잠시·
“와하하하하·”
태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
영문 모를 표정의 제갈선이 몸까지 꺾으며 웃는 손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더욱 웃게 만들었다·
한참을 웃은 태현이 눈가에 고인 물기를 닦으며 호흡을 골랐다·
“어이가 없군· 그래··· 이런 게 필멸자의 육체를 지닌 재미라는 건가·”
몇 가지 사실만으로 감정이 동화되어 이런 즐거움을 선사하다니·
수백의 마물을 먹어도 느끼기 어려웠을 감정이 말 한마디로 전해지는 건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놈 이름 한번 신선하게 지었군·”
뱀파이어 로드 이그문과 혈마신교의 교주 이근문·
오래 생각할 것 없이 녀석이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제갈선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건 하계의 언어와 무림의 언어가 지닌 차이 때문이다·
“내가 찾던 이그문이 혈마신교의 교주다·”
“그렇습니까·”
제갈선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해졌다·
말을 섞으며 상대에 대해 알게 된 건 그뿐만이 아니다·
태현의 입가가 비틀렸다·
“이 몸이 그들과 한패가 될 가능성을 생각해 본 건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일전 제갈선은 그에게 화경의 경지를 이룩한 무인이라 했다·
그 정도 되는 인물이 적으로 돌아선다면 흘리는 피 또한 가볍지 않음을 모르지 않을 터·
“그렇다면 새로운 제안으로 이 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겠군?”
제갈선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태현이 돌려주었다·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가문을 내게 바쳐라·”
“····”
“그러면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제갈가만큼은 지켜주지·”
“····”
제갈선이 말없이 탁주를 집어 들었다·
그가 단번에 잔을 비웠다·
“대인께선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십니까?”
“일어날 수밖에 없겠지·”
이그문이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진 여전히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녀석이 순순히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대공급이 맞붙으면 그 순간 일대는 영역전쟁을 위한 무대가 되리라는 사실이다·
“곤란하군요·”
“뭐가?”
“정마대전이 발발하는데 본 문의 안전만 생각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제가 정무맹의 총사라는 과분한 직분을 맞고 있는지라·”
대의와 명분· 그리고 책임·
제갈선이 제갈가와 정마대전이 얽힌 상황을 입에 담았다·
“····”
그저 권능 없이 제갈세가를 수족처럼 부리겠다는 의미였는데·
정무문이니 정마대전이니·
태현과는 하등 관계없는 것들이었다·
‘뭐 영역전쟁도 전쟁이니· 바로잡아줄 필요는 없겠지·’
“서역에서 오신 분이 어째서 정마대전을 일으키려 하시는 겁니까?”
오해가 있는 듯하지만 이대로 두는 편이 제갈선을 다루기에 유리할 듯했다·
“이 몸의 제안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만?”
“고려할 것도 없이 거절입니다·”
“네놈과 식솔들· 그리고 가문에 속한 모든 인간· 정신이 붕괴되어 죽을 텐데·”
협박에 제갈선의 몸에서 투기가 치솟았다·
“비굴한 생존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해야겠지요·”
태현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미 수백의 무인이 죽거나 죽음보다 못한 상태에 빠졌다·
‘이 남자를 등지면 가문은 필시 운명을 다하겠지·’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서역인·
아니 서역인이라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지난 며칠간 알아낸 거라곤 그가 화경의 경지에 닿았다는 것과 정신을 무력화시키는 사술을 사용한다는 것·
본가와 분가· 절정고수와 초절정고수 모두를 동원한다 해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대제갈가를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한 건 부당한 무력에 대한 복종이 아니다·
‘정무맹주와 가주들이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
맹주와 세가의 가주급 전력·
그리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진을 펼친다면 화경에 오른 고수라 해도 쉬이 빠져나가지 못한다·
게다가 하루 내내 독주(毒酒)로 분류되는 술을 이렇게나 비웠다·
‘분명 몸이 성치 않다· 그러니 이런 제안을····’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태현이 히죽 웃으며 제갈선의 눈을 쳐다보았다·
초절정고수·
자주색의 마력이 갑작스럽게 봉인되지만 않았어도 많은 걸 알아낼 수있는 녀석인데·
아무래도 슬슬 관계를 끝내야 할 때가 다가온 듯했다·
“이 몸을 상대할 전력은 언제쯤 도착하지?”
“알고 계셨습니까·”
“너 같은 녀석을 상대하는 게 처음이 아니라·”
“오늘 밤을 넘기지 않을 겁니다·”
“빨라서 좋군·”
어차피 치를 전투라면 빠르게 처리하는 게 낫다·
“마지막 기회일 테니 싸그리 긁어모으는 게 좋을 거다·”
“물론 그리할 것입니다·”
“또한·”
“···?”
“이 몸은 패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두도록·”
“···명심하겠소·”
제갈선이 단단한 음성으로 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주· 이 대마두(大魔頭)를 막아낼 수 있으시겠소·’
정의를 위해 흘려야 할 피에 차오르는 씁쓸한 기분을 눌러 삼켰다·
그가 나가고 홀로 남은 태현이 탁주를 나발로 들이켰다·
“이리된 거 한꺼번에 정리하고 나머지 녀석들을 찾아야겠군·”
푸흐흐흐흐·
장차 무림에 새로운 대마두로 이름을 날릴 남자·
접객실에 그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