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9화
[····]
로자리아가 침묵했다·
[××··· ×××····]
엘븐이 요정어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멍청한 것들·”
태현이 그런 두 대공을 조소했다·
[괜한 도발은 그만둬라· 로자리아와 엘븐은 계약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것뿐이니·]
“저것들은 틀렸어· 이 몸이 김태현임을 부정하는 것부터가 틀려먹었지·”
[길페르는 정말로 소멸한 건가?]
하자드의 물음에 태현이 몸을 두르고 있던 신수의 가지를 턱짓했다·
먼저 이것부터 풀라는 의미였다·
[능청스러운 것만큼은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군·]
하자드가 엘븐을 쳐다보았다·
[계약자 김태현은 자진하여 바깥으로 나갔다·]
[썅····]
[그리고 그가 이루어야 할 가능성은 이 남자가 이어받았다· 그것만으로 적대감을 거둘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다른 대공들도 알고 있는 건가?]
엘븐의 물음에 하자드가 고개를 저었다·
[계약자가 바깥으로 나갔다는 것까진 알지 못할 거다· 뭐 계약을 맹약으로 덮어씌운 걸 보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보이지만·]
[로자리아·]
엘븐이 생각에 잠긴 서큐버스 퀸을 쳐다보았다·
드래곤 로드가 자신의 격을 걸고 한 말이다·
거짓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들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리된다면 그들이 벌인 전투 또한 의미 없는 것이 된다·
[길페르만 헛되이 죽은 건가·]
[길페르는 소멸하지 않았다·]
자조 섞인 중얼거림에 하자드가 정정했다·
[조금 전 마정석에 마력을 채우며 확인한 사실이다· 안 그런가?]
하자드가 다시 한번 태현을 보며 물었다·
“그래· 소멸하기 직전에 그 빌어먹을 것하고도 맹약을 맺었지·”
[···!!]
[길페르와···?]
엘븐과 로자리아가 눈에 띄게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일단 이것부터 풀··· 쯧· 또 뭐냐·”
태현이 가만히 고개 젓는 하자드의 시선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그대가 등탑에 대공들을 필요로 한다면· 먼저 사실을 얘기해 주는 것도 중요한 법이지· 본룡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아····”
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티폰 루시퍼 오르갈 요르문간드·
말 몇 마디로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그들과 달리·
하자드 길페르 엘븐 로자리아·
그녀들을 상대하는 건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꼴에 여성형(女性形)이라 이거냐·”
[쌍놈· 아가리 여물어라·]
여전히 거친 어투·
하지만 특유의 욕설이 줄었다는 것만으로도 심경의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딱·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신수의 가지가 느슨해졌다·
스르륵·
그대로 신수의 가지가 본체 어딘가로 회수되는 모양새·
태현이 제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육신에는 문제가 없군·’
하자드가 채워 놓은 마정석을 제외하면 마력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계약을 맺은 대공들이 반응하면 마력은 급한 대로 회복할 수 있겠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엘븐과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는 로자리아를 쳐다보았다·
표정과 달리 조금 전까지 풀풀 날리던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대공은 대공이군·’
하계 최강 전력·
김태현이 삼천세계의 통합왕이 될 수 있게 도왔던 조력자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등탑에 활용해야 할 녀석들이었다·
“길페르는 소멸하지 않았다· 이 몸의 심상 세계에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중이지·”
분수에 넘치는 힘을 사용한 대가로 육체는 붕괴되었지만 자신과 맹약을 맺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
[불행 중 다행이로다·]
엘븐과 로자리아가 안도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심상 세계에 들어가게 해다오·]
로자리아의 말에 태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네년을 뭘 믿고·”
[····]
“이 몸은 심상 세계에 아무나 들일 만큼 무르지 않아·”
[아무나라····]
중얼거리는 로자리아의 눈이 가라앉았다·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이 몸을 김태현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태현이 조소를 숨기지 않으며 몸을 들썩였다·
[어쩌다 이런 경박한 놈이 계약자의 몸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삼천세계도 끝이구나·]
“요정· 같잖은 정원사 놀이라도 하고 싶다면 이 몸에게 복종해라·”
[××· 한 번 더 해볼 테냐?]
“아직도 주제 파악이 안 된 것이로군·”
태현과 엘븐이 으르렁거리며 흑색과 무채색의 마력을 피어 올렸다·
[둘 다 그만하지·]
쿠구궁·
하자드의 몸에서 다시 한번 패기가 방출되었다·
그와 동시에·
키이이-
태현의 체내에서 마력을 발산하던 마정석이 회전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
무언가 이상함을 직감한 건 하자드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몇 번 마력을 방출하며 태현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그대의 몸이 자체적으로 생성하던 마력이 바닥난 듯하다·]
“뭐···?”
태현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대공들보다 격이 높은 하계왕·
그런 하계왕보다 격이 높은 존재가 통합왕이다·
비록 이곳이 아직 하계에 위치했다 해도 고유권능인 포식을 사용하지 못한다 해도·
태현은 일전의 전투에서 이미 통합왕 수준의 격을 모두 회복한 상태였다·
그런데 자체적으로 마력을 생성할 수 없다니?
문득 자신을 원망하지 말라던 난쟁이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 새끼가 설마····’
끓어오르는 분노에 몸이 떨린다·
지금쯤 들려올 법한 난쟁이의 메시지도 들리지 않았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엘븐이 조소했다·
[온갖 제약을 달고 다니는 것만큼은 계약자와 다름없구나· 가짜야·]
“요망한 것· 닥치라고 했을 텐데·”
태현이 다시 엘븐과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다·
[도플갱어·]
“이 몸은 김태현이다·”
[본녀에게 김태현은 계약자 한 명뿐이다·]
“자애롭다더니 이 정도면 광기로군·”
이죽임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대가 등탑을 완료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삼천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시간선의 가능성을 취하게 되면·]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바깥의 계약자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당연한 걸 묻는군·”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 몸이 진짜가 되는 거지·”
[····]
[····]
엘븐과 로자리아가 침묵했다·
하자드가 손으로 이마를 만졌다·
[맹약자····]
“이 몸은 오리지널과는 달라· 입에 바른 소리보다 힘으로 증명하는 걸 즐긴다만·”
[우선 그대는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겠군·]
“등탑에 필요하다면 못 배울 것도 없지·”
조롱과 조소· 이죽임에 가까운 답변에 반응한 건 로자리아였다·
[계약자를 쉽게 보고 있군·]
“····”
[본녀가 단언하지· 계약자는 그대가 이렇게 나올 것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라앉은 눈의 서큐버스가 웃음을 흘렸다·
[도플갱어· 본녀와도 계약을 맺거라·]
“하·”
[그대의 등탑을 도와주마·]
[××· 어쩔 수 없군· 본요도 어울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
바보 같은 계약자·
버러지 같은 가짜·
덧붙이는 말에 태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 몸을 가지고 노는군·”
말과 달리 기꺼운 미소가 그려졌다·
요정왕과 서큐버스 퀸·
돌고 돌아 기어이 그녀들이 협력하게 만들었다·
잠시 계약 위에 새로운 맹약을 덧씌우는 과정이 이어졌다·
키이이- 키이이이-
하자드의 것과 더불어 세 개의 마정석이 힘차게 회전했다·
조금 전 퍼스널 스페이스에서 사용하던 것보다 그 연결이 단단함을 알 수 있다·
고갈되었던 무채색과 자주색의 마력이 넘실거렸다·
[이제 우리들도 맹약자가 된 셈이로군·]
[설마 계약자와의 관계를 이렇게 재설정하게 될 줄이야·]
“계약과 맹약· 같잖은 말장난으로 위안 삼는군·”
코웃음 치는 태현을 보며 두 대공이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이걸로 세 명의 대공과 모두 맹약을 맺었구나·]
하자드가 조용히 화제를 돌렸다·
[오는 길에 보니 티폰과 루시퍼가 치고받고 있던데·]
“이 몸도 알고 있다· 대기의 떨림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니까·”
퍼스널 스페이스에서 빠져나온 뒤부터 느껴지는 파동·
그건 분명 신마력의 충돌로 인해 만들어지는 파동임이 분명했다·
“서열정리라도 하고 있는 건가·”
조금 전까지 자신도 하던 일이니 놀라울 건 없다·
“아·”
그때 머릿속으로 또 다른 서열정리가 떠올랐다·
“오르갈과 요르문간드· 그 녀석들도 지금쯤이면 승부가 났겠군·”
[××· 도대체 내 집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냐·]
잠깐 사이 요정의 숲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엘븐이 재차 으르렁거렸다·
[계약자의 육체로 괴상한 취미를 부리는구나·]
“헛소리들 집어치워라· 이 몸은 하계의 법칙에 충실한 것뿐이니·”
후욱·
태현이 손을 휘저었다·
공간이 일렁이며 오르갈과 요르문간드가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 또한 로자리아의 마정석이 없었다면 사용하지 못했을 힘이다·
‘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빨리 확인해야겠어·’
그러려면 맹약을 재확인해 마정석의 마력을 모두 채워 놓는 게 우선이다·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마무리하고 올 테니·”
[왜· 같이 가지 않고·]
엘븐이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태현이 그녀의 무신경함에 혀를 찼다·
“사내들이 목숨 걸고 벌이는 전투다·”
[····]
“괜한 훼방 놓을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결과나 기다리고 있어라· 요정·”
[××·]
엘븐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배웅 고맙군·”
자신을 쳐다보는 대공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태현이 퍼스널 스페이스로 걸어 들어갔다·
* * *
몇 겹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둘러 만든 공간·
두 대공의 결전 장소를 마련해 줬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많은 일이 있었군·”
길페르를 심상 세계에 들였고 엘븐과 로자리아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기존의 계약을 강화하여 새롭게 형성한 관계·
맹약(盟約)·
이제 오르갈과 요르문간드와의 계약만 강화한다면 자신의 등탑을 위한 기본적인 준비가 모두 끝나게 된다·
철썩·
붉게 물든 파도가 발목을 때렸다·
“결국 네가 이겼군·”
태현이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해(魔海)·
두 대공의 피로 물든 마해의 한 가운데·
한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초고속재생이 발현되지 않아 상처는 재생되지 않고 본체를 유지할 기력도 없어 인간형으로 폴리모프 한 상태·
상징적인 오드 아이에선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요르문간드가 핏물 흐르는 눈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본좌가··· 최강이다····]
“그래· 고생 많았다·”
태현이 대충 대꾸하며 오르갈을 찾았다·
서로 죽이라고 말했지만·
‘이 녀석의 몸 상태로 오르갈을 완전히 소멸시키진 못했겠지·’
아니나 다를까·
철써억·
핏물로 물든 마해가 파도치자 배를 뒤집고 쓰러진 마수가 드러났다·
“이건 송장에 더 가까운 몰골이군·”
자랑하던 양팔은 부러졌는지 기이한 각도로 비틀려 있고 허리는 반쯤 뜯어 먹혀 하체와 간신히 이어져 있는 모양새였다·
“이래서야 곧바로 계약을 진행하긴 어렵겠어·”
태현이 만신창이의 오르갈을 어깨에 들쳐 업었다·
[김태현····]
“왜?”
[본좌의··· 서열은····]
요르문간드가 핏물 흐르는 눈으로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 그거·”
태현이 히죽 웃어주었다·
“막내에서 탈출한 걸 축하한다·”
[···!!]
요르문간드의 오드 아이가 지진이라도 일듯 떨렸다·
“오르갈을 꺾었으니 앞으로 형님이라 부르는 걸 허락하마·”
[형···님···?]
오랜 시간을 대공으로 살아온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스스로를 본좌라 칭하는 이에겐 다소 어색한 호칭이었다·
“왜· 이 몸의 그늘이 싫은 거냐?”
콰아아아·
태현의 몸에서 세 개의 마정석이 회전했다·
로자리아 엘븐 하자드·
빈사 상태의 대공을 압박하기엔 충분한 힘·
요르문간드의 짓누르는 압박감에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알겠···다····]
“따라와라· 회복시켜 줄 테니·”
[형···님····]
용기 내어 중얼거려보았지만·
태현은 이미 퍼스널 스페이스를 빠져나간 뒤였다·
[×발·]
요르문간드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