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5화
[형제·]
김태현의 육체를 차지한 도플갱어·
그와 전투하는 엘븐과 로자리아를 지켜보았다·
대마력을 지닌 요정왕과 두 개의 권능을 지닌 서큐버스 퀸·
김태현과 함께 숱한 전투를 거치며 성장한 두 대공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양새였다·
[과연 통합왕의 육체로군·]
포식이라는 고유 권능을 사용하진 못하지만 이미 전성기와 비교해 뒤지지 않는 힘을 되찾았다·
무엇보다 그 힘을 사용하는 도플갱어의 활용법이 놀라웠다·
심상 세계에서처럼 압도적인 마력량으로 찍어누르지도 포식이라는 권능으로 상대의 저항을 무력화시키지도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이었다는 듯·
체내에 형성된 마정석을 이용해 대공들의 권능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엘븐과 로자리아는 폭력으로 굴복할 이들이 아니나 태현이 형성한 마정석에는 서큐버스 퀸의 것 또한 있다는 게 문제였다·
김태현의 육체를 지닌 도플갱어·
그라면 자주색 마력으로 대공들의 정신을 부분적이나마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
머릿속으로 이그문과의 대화가 스치듯 떠올랐다·
[성력· 그 거대한 힘 앞에서 우리 같은 미물이 발하는 힘은 활화산 앞의 물 한 모금도 되지 못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군·]
[[아바타·]
[[····]
[[하계에서 오직 대공의 격을 지닌 자만이 아바타가 되어 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 뭐 찰나의 힘을 사용하는 대가로 소멸을 각오해야겠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
생각에 잠긴 길페르를 쳐다보던 이그문이 말을 이었다·
[[두려워할 거 없다· 하계왕에 올랐던 너라면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니·]
[[본마가 무리하여 그 힘을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계왕의 힘을 회복하는 걸로도 족해·]
[[본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군·]
[[····]
[[그대가 회복하길 원하는 하계왕의 격은 시작에서 한발 나아간 정도에 불과하다·]
[[돌려 말할 것 없다·]
[[길페르·]
[[손을 잡자는 거라면····]
[[본귀의 손을 잡아라·]
그리하면·
[너에게도 아바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 * *
[너는 가짜다·]
길페르가 적안을 번뜩이며 읊조렸다·
나직한 말이었으나 깃든 힘은 가볍지 않았다·
쿠구궁·
퍼스널 스페이스가 흔들렸다·
흔들린 퍼스널 스페이스를 타고 흐른 파장이 태현에게 닿았다·
“등탑에 데려가지 않겠다 하여 뿔이라도 난 거냐·”
태현이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그녀를 보며 이죽였다·
길페르가 말없이 제 손을 펼쳐 보였다·
사아아아아·
진청색의 성력이 공간 곳곳으로 퍼졌다·
대충 그린 그림과 같았던 무색무취의 퍼스널 스페이스· 그 위로 음울한 공간이 덧씌워졌다·
‘하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태현이 공간을 재구성하는 성력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새롭게 펼쳐진 공간은 마계의 모습을 띠고 있다·
수많은 지옥들· 그리고 그 지옥을 지배하는 대악마들의 성들이 구현되었다·
타인의 공간에 이 정도 영역을 구현할 수 있는 건 권능을 지닌 로자리아와 신수 동화된 엘븐 정도·
‘이 녀석이 가진 권능 중에 그런 건 없었다·’
태현의 머릿속에 길페르에 대한 정보가 집약되었다·
법칙 때문인지 바깥에서 알고 지내던 성좌에 대한 정보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성력이라면 이 몸도 질릴 정도로 경험해 봤단 말이지·’
일전 세 성좌의 힘이 동시에 몰렸던 김태현의 심상 세계·
그곳의 주인이 자신이었으니까·
“의식에 기거하는 미궁·”
태현이 성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녀석의 힘이군·”
[····]
영역을 완전히 전개한 길페르가 말없이 손을 뻗었다·
사아아·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에서 기다란 가시가 늘어졌다·
‘독망과 포악·’
두 악마왕의 권능을 하나의 가시에 집약시킨 공격·
사아아아아·
찰나의 순간 악마왕으로 의태한 태현이 손을 뻗었다·검
지와 중지에서 두 개의 가시가 늘어졌다·
그리고·
두 쌍의 가시가 맞닿은 순간·
태현의 가시가 분쇄되기 시작했다·
“쯧·”
태현이 자신의 가시를 잘라내며 뒤로 물러났다·
그저 한 번의 공격을 회피한 것뿐인데 다 잡은 듯했던 로자리아와 엘븐이 풀려났다·
[길페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공간이 재구축되며 풀려난 엘븐이 물었다·
[성좌들의 힘· 아바타 상태다·]
[지금 그런 걸 묻는 게···!!]
뒤늦게 엘븐이 태현과 그들의 사이에 장벽을 펼쳤다·
대화가 새어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 힘을 사용하는 대가를 모르는 거냐!!]
[알다마다·]
히죽·
길페르가 평소답지 않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너····]
[어찌 그런 무모한 짓을··· 지금이라도 되돌릴 방법은 없는가·]
로자리아의 물음에 길페르가 고개를 저었다·
[육체에 새겨져 있던 성력의 잔재를 긁어모아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다· 모두 소진된다면 본마는 필시 소멸하겠지·]
[····]
[····]
두 대공의 침묵을 뒤로하며 그녀가 태현을 쳐다보았다·
[본마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건 가짜가 아니다·]
일전 성력의 충돌 속에서 운 좋게 건져낸 목숨·
태현이 도플갱어라는 이에게 몸을 빼앗긴 거라면·
[본마가 다시 한번 그 힘을 되찾아 줄 수밖에·]
사실 등탑은 미끼일 뿐·
처음부터 그녀는 도플갱어에게서 태현을 되찾아올 생각이었다·
콰과과곽·
무채색의 장막에 다섯 개의 가시가 박혀 들었다·
그 끝에 악마왕의 마력을 운용하는 태현이 있었다·
“이 정도 여력이 있었다면 등탑에 데려가 줄 수도 있었는데·”
[××· 주둥이 좀 닫아라·]
“요정· 조금 전 네 처지를 잊지 말거라·”
태현이 조소하며 엘븐의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오리지널 놈··· 어떻게 되어 먹은 관계더냐·’
김태현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몸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등탑이라는 사명을 대신 이어받은 건 자신인데·
육체를 차지하고 있는 게 김태현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이렇게 날을 세운다·
하자드 때처럼 진실을 말할 수도 있었다·
정신지배의 권능을 이용해 그들에게 사실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쉽게 믿진 않겠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
그럼에도·
“퉤·”
입 안에 고인 침을 뱉으며 세 대공을 노려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요마에게서 태어난 자신의 본질은 모든 걸 먹어 치우는 포식(捕食)·
과거에는 김태현의 안에 봉인된 포식자(捕食者)였고·
현재에는 포식자가 되어버린 녀석을 대신해 김태현이 되었다·
그 인과관계가 어찌나 우스운지·
자신을 끌어내리기 위해 기껏 부지한 목숨을 불태우는 꼴이 어찌나 우습던지·
“킥킥킥····”
태현이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였다·
성력(星力)· 바깥에 자리한 별자리들이 사용하는 힘·
삼천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힘보다 우위를 점하는 불가항력 에너지·
하지만 그건 상대가 온전히 사용하고 있을 때나 해당하는 말이다·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성좌의 아바타를 쳐다보았다·
피부 표면·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가느다란 실금이 그려져 있다·
“그런 힘을 사용하는 리스크가 없을 리 없지·”
자신의 퍼스널 스페이스에 마계를 소환한 건 대단한 일이나 단지 그뿐·
성좌를 직접적으로 마주한 적 없는 그녀의 성력 사용법은 마력을 사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자리아와 엘븐의 힘은 마력만 사용하는 자신에 미치지 못하고·
‘신력(神力)을 사용한다면 소멸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또한 가능하다·’
천계 주인들의 흉내를 내어 대처한다면 고루한 악마 계집은 개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
그리 생각했다·
띠링·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탑의 관리자’가 개입합니다·]
[고유스킬 ‘판도라의 상자(???)’가 발동되었습니다·]
[신력(神力)의 사용이 제한됩니다·]
“····”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태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김태현이 형성한 하나의 마정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채워져 있던 거대한 신력이·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이 빌어먹을 난쟁이 놈·
“죽고 싶어서 드디어 작정을 한 것이구나·”
[‘탑의 관리자’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탑의 관리자’가 무고함을 주장합니다·]
[‘탑의 관리자’가 ‘새로운 형제’의 분투를 응원합니다·]
[‘탑의 관리자’가 종적을 감춥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어라· 기필코 찾아내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니·”
태현이 씹어 내뱉듯 중얼거렸다·
[××것· 표정이 안 좋아졌군·]
[무언가 문제라도 생긴 것이겠지·]
잠깐 사이 전력을 정비한 엘븐과 로자리아가 판단을 마쳤다·
어느새 수십 개의 마력구가 태현을 포위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건 네년들 쪽 아닌가·”
태현이 턱을 까딱이며 길페르를 가리켰다·
“목숨이 얼마 붙어 있지 않은 거겠지· 아바타 상태라더니··· 잠시 격을 회복하고 영역을 비튼 것에 불과하군·”
[여전히 허튼소리를 하는 자로고· 계약자의 육체나 내놓거라·]
콰아아아·
로자리아가 게이트를 열어 촉수 다발을 꺼내 들었다·
‘저 게이트부터 부숴야겠어·’
촉수가 아공간 게이트에 보관되며 회복과 증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양적인 공격을 배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간째로 잘라낸다·’
네 개의 손톱에 자라난 가시를 한데 뭉쳤다·
독· 공포· 투쟁· 무욕·
네 개의 권능을 한데 뭉쳐 하나의 마력 덩어리로 결합했다·
그렇게 늘어난 가시가 게이트를 베어내려는 순간이다·
[어딜·]
공간이 일렁였다·
그리고·
콰아아·
“···!!”
태현의 눈앞에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촉수도 나오지 않으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게이트를 제외하면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한 눈 가리기····
‘···가 아니다!’
몸이 반응했을 때엔 가시가 반쯤 모습을 드러낸 뒤였다·
독망의 가시·
태현이 몸을 비틀어 보라색으로 물든 가시를 흘렸다·
그런데·
푸욱·
“···!!”
등 뒤에서 만들어진 게이트를 통과한 새로운 가시가 가슴을 꿰뚫는다·
“이····”
이를 악물며 삐져나와 있는 가시를 확인했다·
포악의 가시·
붉게 물든 가시를 통해 성력이 흘러들었다·
“큭····”
입가로 메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 몸이 신음을 흘린다고···?’
익숙하지 않은 행위에 얼굴이 일그러진다·
쑤욱·
몸을 움직여 가시에서 빠져나간 태현이 숨을 몰아쉬었다·
로자리아의 촉수 따위에 당한 것과는 피해가 남다르다·
그 예로 대공 이상의 육체를 지닌 자라면 손에 넣는 회복 기능·
‘초고속재생을 방해하는가·’
키이이이잉·
체내에 형성한 마정석 하나가 회전하며 잿빛 마력이 치솟았다·
루시퍼의 권능 ‘재생’·
잿빛 마력이 구멍 난 어깨에 스며들었다·
스스스스·
새살이 돋아나며 가시가 만들어 낸 구멍이 메워졌다·
‘부족하다·’
체내에 주입된 성력이 재생을 방해하고 있었다·
키이이이이·
요르문간드의 권능을 담은 마정석이 회전했다·
푸른색 마력이 잿빛 마력과 뒤섞이며 마력량이 배로 증폭된다·
‘폭주’의 권능을 이용해 권능의 위력을 배가시키는 것·
이미 오리지널이 사용한 적 있는 방법이었다·
‘부족해·’
카아아아아·
또 다른 마정석이 회전하며 갈색 마력이 치솟았다·
육체가 부담해야 할 충격을 상쇄하기 위해 필멸자의 신체가 한계까지 강화된다·
완전히 회복된 팔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깔끔하군·”
[저 ×× 놈이·]
[인정하긴 싫지만··· 계약자 이상의 마력 응용력이니라·]
가만히 지켜보던 길페르가 입을 열었다·
[엘븐 로자리아·]
그녀가 가빠지기 시작한 호흡을 다듬었다·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몰아치고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본마에게 길을 열어다오·]
그녀가 적안까지 확장된 실금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다음 공격으로 가짜를 처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