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4화
요정의 숲에 위치한 하자드의 레어·
홀로 남은 하자드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화륵·
마력에 반응한 찻잔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한 모금을 삼킨 그녀가 조금 전의 만남을 떠올렸다·
김태현의 도플갱어·
이제는 자신의 새로운 계약자가 된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들·
[····]
그가 무언가 변했다는 건 처음 본 순간 간파했다·
성좌들의 성력과 접촉하며 성격이 바뀌었다고·
끝까지 잡아떼었다 해도 그녀로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김태현이라는 존재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새로운 계약을 원했다·
[계약이 아니라 맹약인가·]
단순히 탑을 오르는 데 협력하는 게 아닌 보다 농밀한 맹약을 제안했다·
궁금했다·
계약자 안에 숨어 오랜 시간을 관조자로 살아야 했던 자·
그가 욕망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무심하기만 하던 그녀의 용안(龍眼)엔 호기심이 떠올랐을 것이다·
제안을 수락하지 않고 뜸을 들인 건 그래서다·
[····]
달그락·
하자드가 비운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손을 휘저어 새로운 찻잔을 끄집어냈다·
삼천세계의 축을 이루고 있는 중간계·
그곳 어딘가에 존재하는 드래곤 ‘하자드’·
같은 이름을 지니고 드래곤 로드라 불리지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녀석을 통해 배운 취향이었다·
[등탑을 시작하면 중간계를 엿보는 것도 불가능하겠군·]
6층부터는 대공의 마력으로 아공간 게이트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전투적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건 그래서다·
그녀가 추가로 두 개의 잔을 비웠다·
[계약은 계약· 맹약은 맹약이다·]
오리지널이라 표현하던 김태현이 계약자라면 도플갱어는 맹약자에 가깝다·
김태현의 본질이 중간계 출신의 인간이라는 한계·
도플갱어의 본질이 삼천세계에 군림하던 자의 근원이라는 차이·
그 사소한 한계와 차이가 계약과 맹약을 구분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냈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후룩·
네 번째 잔을 음미하며 앞으로의 일을 예상해 보았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 다섯의 대공이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하였다·
모두가 자신처럼 정체를 캐묻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계약 또한 맹약으로 갱신되었겠지·]
이제는 그가 김태현이라는 존재임을 부정할 만한 이들은 몇 남지 않았다·
격락한 길페르를 제외하면 엘븐과 로자리아·
마계로 도망친 네 악마왕과 몸을 숨긴 이그문과 아스모데우스 정도·
요정의 숲 안으로 한정하면 로자리아와 엘븐·
두 대공뿐이다·
쿠구구구·
돌연 공간이 진동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찻잔이 달그락거린다·
[····]
그녀의 눈이 가라앉았다·
웬만한 마력 충돌에는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결계를 강화했다·
이 정도 파장이 느껴진다는 건 최소 대공급·
그것도 김태현이 가두어 놓았다던 오르갈과 요르문간드 이상의 존재가 충돌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로자리아와 엘븐이 움직인 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대처다·
그럼에도·
[그녀들의 승산은 희박하군·]
하자드가 결과를 단언했다·
스륵·
손을 젓자 테이블에 늘어놓았던 찻잔이 아공간으로 스며들었다·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걸었다·
초목이 우거진 들판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그녀가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몇 발자국이나 떼었을까·
찌르르·
[····]
체내의 드래곤 하트가 반응했다·
[맹약자· 벌써 본룡의 힘까지 꺼내어 든 것이냐·]
하자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퍼스널 스페이스에서 전투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콰앙· 콰아앙·
귓가로 전투의 여파가 명확하게 들린다·
용안에 부유하는 천공성이 보였다·
[본룡이 도착할 때쯤이면 결착이 나 있겠군·]
한 발· 한 발·
그녀가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 * *
요정의 샘·
드리워진 그림자에 티폰이 고개를 들었다·
루시퍼의 영역을 상징하는 천공성(天空城)·
그리고 자신의 거처에서 벗어난 성의 주인이 머리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별일이군· 타천사께서 직접 왕림하다니·]
[한가해 보이는구나 티폰·]
한 쌍의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은 루시퍼가 나직이 말했다·
툭·
그의 발끝을 중심으로 파문이 일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온천욕·]
[····]
[중간계 어딘가의 문화다· 전투 후에는 항상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더군·]
[알고 있다· 너보다는 중간계와 가까운 편이니·]
덤덤히 반응한 루시퍼의 적안이 티폰의 거체를 훑었다·
[상처는 모두 회복했군·]
[날파리를 상대로 상처라 할 게 있나· 그저 적당히 어울려줬을 뿐이지·]
푸흐흐흐·
티폰이 경박하게 웃으며 몸을 들썩였다·
그것만으로 물이 튀며 해일이 일었다·
화아아·
루시퍼의 잿빛 마력에 닿은 해일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잿빛··· 그 마력은 언제 봐도 재수 없군· 그래 형제에게 당한 상처는 모두 회복했나?]
[형제라·]
루시퍼가 티폰의 적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어떤 형제를 말하는 거냐·]
[오호· 알고 있었군?]
[그대는 항상 장난이 지나쳐·]
[본신이 유희를 좋아하긴 하지· 그런데 말투가 거슬리는걸·]
쿠구구구·
잿빛과 오색·
두 개의 마력이 닿자 일대의 공간이 뒤흔들렸다·
치이이이이·
마력의 충돌에 대해와 같던 샘물이 증발했다·
[으음····]
예상치 못한 상황에 티폰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본신의 낙을 방해하는군·]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저 고고한 타천사에게 장난을 치려 했을 뿐인데 상대가 격하게 반응한 탓에 유일한 취미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서다·
[샘물이라면 엘븐이 복구해 줄 것이다· 그녀가 지금의 격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야·]
[푸흐흐흐· 이제야 찾아온 용건을 꺼내는군·]
루시퍼와 티폰의 적안이 마주쳤다·
[그와 ‘맹약’을 맺었겠지?]
[본신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장난칠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닐 텐데·]
루시퍼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했다·
우거진 초목· 들판· 광야·
다소간의 차이만 있을 뿐 겉보기엔 큰 차이 없어 보이는 공간의 연속·
하지만 그의 격은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공간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낮지 않다·
일렁이는 공간이 보였다·
그곳에서 대공급의 마력이 충돌하고 있었다·
[엘븐과 로자리아· 그들이 맹약자와 전투 중이다·]
[하계에서 싸우는 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담이 작군?]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라 말하지 않았나·]
쿠구궁·
루시퍼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흐하암··· 기껏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티폰이 하품하며 기지개를 폈다·
그의 머리 위로 구름이 몰려들었다·
파지직· 파직·
구름이 맞물린 자리에서 스파크가 튀고 뇌류가 흘렀다·
콰르릉·
[····]
루시퍼가 티폰의 손에 쥐어진 신기를 쳐다보았다·
우레·
본래라면 2천계 주인의 것이었어야 할 무구·
티폰은 유일신의 축복을 받은 자·
그가 신기를 다루고 있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저 지금의 시간선에선 상계와 접촉도 없었던 자가 지니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질 뿐·
파지직· 파직·
[····]
루시퍼가 자신에게 겨누어진 우레를 쳐다보았다·
[지금의 시간선은 가능성이 집약된 곳이라지·]
‘요마’와 ‘포식자’가 격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많은 시간선의 최선을 뭉쳐놓은 곳·
[달리 말하면·]
잠시 뜸을 들인 티폰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도 되겠지·]
[나와 전투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럴 시간에 엘븐과 로자리아를 설득····]
[엘븐과 로자리아는 형제와 누구보다 가까운 대공들이다·]
쿠르르릉·
우레에 신력을 흘린 티폰의 두 눈이 휘어졌다·
[충돌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지·]
[네놈이 말려줄 걸 기대하고 찾아왔다만··· 괜한 걸음을 했군·]
[푸흐흐흐··· 걸음은 무슨· 날아온 주제에 말은 바로 해야지·]
화아악·
루시퍼의 손에 광휘가 모여들길 잠시·
이내 광휘로 이루어진 장검이 쥐어졌다·
데카메론·
대천사 루시페르를 상징하던 무구·타천사의 마력과 대천사의 신력·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힘이 고르게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본신과 생각이 같구나·]
티폰이 웃으며 받아쳤다·
계약자 김태현·
그를 대신하게 된 맹약자 도플갱어·
루시퍼는 그가 실수하고 있다 말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날 터·]
몸을 일으킨 티폰이 기다란 팔을 휘둘렀다·
콰앙!
데카메론과 우레가 닿으며 폭발이 일었다·
[그럴 바에야 즐기는 것이 어떠한가!]
흐하하하하·
티폰의 주위로 다섯 개의 원소가 휘몰아쳤다·
한데 응집된 힘이 조화를 이루어 대원소의 권능을 구현하였다·
스스스스·
적안이었던 루시퍼의 두 눈이 청안으로 변했다·
[거인의 피는 수없이 묻혔다만 거인왕의 것까지 취하게 될 줄은 몰랐군·]
[본신은 그대의 목을 꺾어 죽인 적도 있느니라·]
유일신이 빚은 삼천세계의 거대한 조각·
누구보다 찬란한 가능성을 지녔던 두 조각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 * *
“서큐버스· 겨우 이 정도였나·”
콰직·
태현이 로자리아의 머리를 짓밟았다·
치이이익·
보라색의 마력이 촉수에 닿았다·
재생하지 못한 촉수가 그대로 사멸한다·
푸욱·
기다랗게 자라난 가시가 로자리아의 가슴을 관통했다·
치이이이익·
[쿨럭····]
독망의 가시를 통해 주입된 독에 그녀가 피를 토했다·
푸욱·
또 다른 가시가 그녀의 어깨를 관통했다·
콰아아아아·
포악의 가시를 통해 주입된 공포가 그녀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몸을 떨기 시작한 서큐버스의 모습을 기꺼워하며 태현이 마력을 강화했다·
[카···아····]
“너는 요마의 충실한 개였지·”
하계왕이었던 요마가 준비한 안배·
“또한 김태현이 포식자가 되는 데 공헌한 누구보다 쓸모 있는 조력자였다·”
[계약자를···내···놓아라····]
비루한 인간이었던 김태현과 처음으로 계약한 대공·
그녀는 영역전쟁과 종족전쟁을 치르는 동안 끊임없이 성장했으며 끝내는 김태현을 통합왕으로 이끌었다·
“이제는 나의 차레다·”
츠즈즈즈·
태현의 몸에서 흘러나온 자주색의 마력이 로자리아의 것과 합쳐졌다·
그녀가 만들어 놓은 게이트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카하··· 카하악····]
로자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으나·
잿빛 마력이 그녀의 저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신지배는 너의 것만이 아니다·”
콰직·
태현이 발에 힘을 주어 그녀의 비명을 음미했다·
“공간도약은 너만의 권능이 아니다·”
강화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콰드득·
짓밟힌 로자리아의 몸이 지면을 파고들었다·
[××!]
저 멀리서 요정의 욕지거리가 들렸다·
태현의 시선이 정육방체의 결계에 갇힌 요정왕에게 향했다·
다중 퍼스널 스페이스·
수십 개의 공간을 압축시켜 만들어낸 결계다·
거기다 오르갈의 권능으로 공간 자체를 강화한 상태에서 요르문간드의 권능으로 폭주시켜 놓았다·
신수와 동화한 엘븐이라 해도·
[파괴하려면 꽤나 노력해야 할 것이다·]
태현이 그녀의 저항을 비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이 몸과 맹약을 맺어라·”
콰득·
발에 실은 무게에 힘을 가하며 태현이 제안했다·
“요마와 포식자· 그 녀석들에게 했듯·”
콰드드득·
“나를 위해 헌신해라· 몽마야·”
[로자리아!!]
엘븐의 외침을 무시하며 태현이 서큐버스의 머리채를 쥐었다·
“내 눈을 봐라·”
츠즈즈즈·
자주색의 마력이 결합을 이루기 시작했다·
“····”
기시감에 태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중 퍼스널 스페이스의 내부·
아무것도 없어야 할 그곳에·
[거기까지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힘을 발하는 존재가 있었다·
[가짜·]
“····”
현현한 성좌의 아바타·
성력을 두른 길페르의 모습에 태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