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2화
하자드의 레어를 나오자 쨍한 햇빛이 눈을 어지럽힌다·
“날씨 한번 좋군·”
비밀을 꽤 오래 간직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막상 비밀을 공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하자드라면 비밀을 지켜줄 테고··· 남은 건 세 명 아니 두 명인가·’
로자리아 엘븐·
누구보다 김태현과 깊은 관계를 맺은 대공들·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돕게 해야 할지·
오리지널이 바깥으로 나갔고 이제는 자신이 김태현의 몸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걸 언제까지 숨겨야 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다·
콰아앙··· 콰앙··· 콰아아앙····
귓가로 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뒤늦게 자신의 마력이 무언가와 충돌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호오·”
태현의 두 눈에 자주색 마력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퍼스널 스페이스에 가둬 놓은 두 대공의 전투가 보였다·
휘몰아치는 마해 한가운데·
신력을 꺼내어 든 요르문간드가 폭주하고 있었다·
신력과 마력이 만들어내는 충격에 오르갈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모양새·
[카핫··· 막내가 제법 쌓인 게 많았구나···!!]
오르갈이 피를 토하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파괴와 재생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주먹을 내지른다·
지금과 같은 흐름이라면 머지않아 요르문간드가 승리하게 되리라·
등탑에 앞서 서열 정리는 필수다·
‘지금의 시간선은 가능성을 극대화시킨 곳이라 했다·’
그러니 오르갈이 완전히 무릎 꿇기 전까지는 전투를 말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쯧쯧· 막내를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로군·”
밀리기 시작한 오르갈의 혈투를 지켜보고 있을 때다·
[김태현·]
“···?”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길페르가 있었다·
대공들에 비하면 미약한 존재력인지라 다가오고 있는지도 몰랐던 듯하다·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군· 엘븐에게 치료받고 있다 들었는데?”
[본마의 상태는 치료를 받는다 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잘 알고 있군·’
고대 대악마 수준에서 악마왕으로·
성력의 일부를 육체에 담아 하계왕 수준의 힘을 회복했다·
하지만 결국 다시 한번 격락·
“····”
가만히 지금의 길페르를 쳐다보았다·
하급 악마·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볼품없어졌구나·”
[부정하기 어렵군· 대공들을 찾아다니며 만나고 있는 것 같던데·]
“보고 있었나·”
엘븐에게 치료받고 있다 했으니 그녀가 시야를 공유해 주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엘븐의 전언이라도 가져온 건가·”
[그녀가 할 말이 있었다면 직접 찾아왔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전능한 존재이니·]
“뭐 틀린 말은 아니군·”
지금의 엘븐은 김태현의 1회 차 회귀 때와 다르다·
상계왕 수준으로 힘을 회복하진 못했지만 과거처럼 죽임당하지도 않았다·
멀쩡한 신수와 하계에 퍼져 있는 분재·
단절되지 않은 정령계의 정령왕·
상계의 신수는 사용하지 못하나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그녀는 하계 최강을 논하기에 부족함 없는 존재다·
‘물론 이 몸이 없다는 가정하에나 그렇지·’
뒤늦게 대공들의 전투력을 평가해 보았다·
‘가장 강한 건 상계왕의 힘과 기억을 지닌 티폰인가·’
그에 비견되는 힘을 지닌 건 신마력을 다루는 루시퍼·
마기를 사용하는 하자드는 루시퍼에 조금 부족한 정도·
오르갈과 요르문간드는 자웅을 겨루는 중이고·
최강의 악마왕이었던 길페르는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나약해졌다·
요마와 포식자의 곁에서 함께 성장한 로자리아는 몽식이 회복되는 대로 최강자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다·
‘집 나간 뱀파이어 로드와 마계로 도망친 악마왕 넷· 대공급 전력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겠군·’
그때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탑의 관리자’가 자신도 잊지 말라고 귀띔합니다·]
‘아 그래·’
무력은 대공에 미치지 못하지만 능력만큼은 대공급으로 치부되는 마이스터·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종족은 이번 시간선에서도 노예 신세인가· 상계와의 전쟁에서 소모품으로 쓸모 있을···’
[‘탑의 관리자’가 침묵합니다·]
[‘탑의 관리자’가 울적해집니다·]
[‘탑의 관리자’가 조용히 모습을 감춥니다·]
‘이 쓸모없는 녀석·’
보아하니 자신의 생각도 얼추 읽을 수 있는 모양인데 떠보려는 생각을 알아채고 귀신같이 도망친다·
[본마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찾아온 용건을 물은 것 같은데?”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다·]
“앞으로? 뻔하지 않은가·”
태현이 요정의 숲 어디서나 보이는 거대한 신수를 턱짓했다·
“등탑이다·”
[역시 그런가·]
“어물쩍거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라·”
[기절한 사이····]
“이 몸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
“이미 다른 녀석들에게 질리게 들었으니 굳이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다·”
[그렇군·]
태현의 무심한 시선을 마주하길 잠시·
길페르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등탑에 본마도 함께하겠다·]
“거절한다·”
[격락했기 때문인가·]
“앞으로의 전투에서 넌 짐이다· 짐꾼 역할을 하기에도 벅차겠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존재력을 회복하는 건····]
“그것도 하계에서나 국한된 말 아닌가·”
삼천세계의 가능성을 한데 뭉쳐 놓은 100층 탑·
과거 김태현의 회귀에서 가장 큰 성장을 이루었던 하계 최심층부·
대공들의 영역전쟁이 일어나던 곳이 5층으로 배정되어 있다·
상계가 몇 층까지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당장 6층부터 상계가 아니라 다른 공간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런 곳에 너를 데려갔다간 발목이나 잡히겠지·”
그럼에도·
“그런 바보 같은 주장을 했다면 이 몸의 관심을 끌 만한 뭔가가 있는 거겠지?”
[성력·]
“····”
갑작스러운 언급에 태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성력은 심상세계에서 포식을 사용하던 자신조차 도망치게 만든 힘·
[한 줌이라 해도· 그 힘을 담은 그릇은 이전과 다른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이그문이 그러던가·”
[그렇다·]
“그 버러지는 어디에 있지?”
태현이 적의를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뱀파이어 로드는 미궁의 성력 일부를 다루고 있다·
의심되는 건 아바타 상태·
상계 정벌을 떠나기 전에 녀석의 힘을 취하면 등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녀석이 숨어 있는 곳이 탑의 다른 층일지도 모른다·
[본마가 왜 알려줘야 하나?]
“뭐···?”
[알려줄 이유가 없지·]
길페르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태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군·”
[본마와 맹약을 맺어라· 그리한다면 이그문이 있는 곳을 알려주지·]
“이 몸이 너의 뭘 믿고·”
[그건 본마도 마찬가지지·]
길페르가 팔짱을 꼈다·
[대화해 보니 확실히 알겠군· 그대는 본마의 형제가 아니····]
화아악·
돌연 태현의 주위로 퍼스널 스페이스가 펼쳐졌다·
삼중으로 펼쳐 오르갈과 요르문간드에게 펼친 것보다 밀도 높은 공간·
[역시·]
“····”
[그대는 본마의 형제··· 김태현이 아니구나·]
“흠· 이 몸은 이전 전투에서 성좌의 힘과 접촉하고 다소 성격이 변하였다·”
[엘븐과 로자리아에게도 그리 말한 셈인가·]
“····”
[다른 대공들이라면 몰라도· 아니 다른 녀석들 또한 마찬가지겠군· 알면서도 그대의 바보 같은 연기에 속아주었겠지·]
티폰은 보은을 위해 김태현이라는 육체를 지닌 존재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고·
루시퍼는 목적만 이루면 그게 김태현이든 도플갱어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며·
하자드는 제 선조와 관련된 운명을 벗어날 수 있으면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였다·
[오르갈과 요르문간드· 그 불쌍한 것들은 그대의 무력이라면 충분히 짓누를 수 있을 터· 형제의 진위보다 그 힘을 동경하는 녀석들이니 별달리 의심하지도 않겠지·]
짝· 짝· 짝· 짝·
가만히 듣고 있던 태현이 박수를 쳤다·
“놀랍군· 너무 놀라워서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야·”
[····]
“해서· 이 사실을 로자리아와 엘븐에게 말하지 않는 대가로 등탑을 요구하는 건가?”
[이그문의 거처에 닿는 방법까지 얘기해 주도록 하지·]
“어설프군· 이 몸은 오리지널처럼 물렁하지 않아·”
[···?]
“네년은 악마왕도 되지 못한 하급 악마· 마음먹는다면 최면을 걸어 부리는 것쯤 일도 아니다·”
하자드는 특기 전력이라 관계를 맺었지만·
길페르는 정보를 제외하면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이번 시간선에서 네년의 가능성은 새로운 악마왕을 탄생시키는 걸로 역할을 다했다·”
으드득·
태현이 목을 까딱였다·
“살려두고 있는 건 이 몸의 변덕일 뿐· 그 변덕이 어떻게 변화될지 모르겠군·”
겁박에도 길페르는 그저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성력의 그릇이 되어 변화를 경험했다면 이 몸이 먹어 치워주지·”
[로자리아와 엘븐을 적대하더라도 말인가·]
“그 녀석들을 어떻게 굴릴지는 추후 생각해 볼 문제다·”
[확실히··· 그대는 본마의 형제와는 다르군· 그는 어떻게 되었지?]
“질문은 허락하지 않는다·”
스스스스·
태현의 몸에서 자주색 마력이 피어올랐다·
“길페르· 넌 폐기처분이다·”
키이이이·
체내에 형성한 마정석이 회전한다·
‘정신지배로 이그문과 성력의 연관성을 알아내면 그뿐·’
콰득·
거리를 좁혀 뻗은 손에 길페르의 목이 잡혔다·
힘의 컨트롤에 조금만 실패해도 부러질 정도로 연약한 육체·
“내 눈을 봐라·”
콰아아·
번뜩인 적안이 길페르의 육체를 장악하려는 순간이다·
쿠웅·
돌연 공간이 진동했다·
쿠우웅·
진동한 공간을 타고·
쩌저저적·
퍼스널 스페이스에 금이 갔다·
[××·]
들려오는 건 거북한 욕지거리였다·
[더럽게 튼튼한 영역이로다· 이 튼튼한 걸 두 개로도 모자라 삼중으로 쳐 놓았구나· ××·]
쩌저적·
“····”
태현이 갈라진 공간에서 나타난 이를 쳐다봤다·
엘븐·
무채색의 마력을 두른 요정왕의 두 손이 공간을 벌리고 있었다·
[거기까지 해라 가짜·]
“함정이었나·”
[함정은 ××· 말 한번 ×같이 하는 종자로다·]
익숙하면서도 거북한 욕지거리·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예나 지금이나 입이 험한 녀석이군·”
[닥쳐라· 이 ××같은 ××·]
으드득· 으득·
엘븐이 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본요의 계약자는 어디에 팔아먹고·]
으드드득· 으드득·
팔을 돌리며 굳어 있던 육체를 조금씩 활성화시켰다·
[네놈 같은 ×××이 그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더냐·]
마력과 함께 발산되는 건 명백한 투기였다·
태현이 웃으며 길페르를 쳐다보았다·
“엘븐을 끌어들이다니· 귀찮게 하는군·”
[다른 이들은 어땠을지 몰라도· 본마는 그대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엘븐이라면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키이이이이·
두 번째 마정석이 회전하며 무채색 마력이 피어올랐다·
엘븐과 계약을 맺어 그녀의 권능을 담은 힘·
마음먹는다면 신수와 동화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익숙한 힘이다·
지켜보던 엘븐이 얼굴을 찡그렸다·
[×! 누구 마음대로 본요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야·]
“요정왕· 지금 수준으로 이 몸을 감당하는 건 무리다·”
이곳은 태현의 퍼스널 스페이스·
포식을 제외한 전력을 사용할 수 있다·
“고작해야 하급 악마와 대공 하나·”
길페르에게서 엘븐에게로·
태현의 시선이 이동했다·
“너희 정도로는 내게 상처 하나 내지 못해·”
히죽·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몰랐다·
어떻게 짓밟아야 저 성격 더러운 요정을 교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다·
푸욱·
“···!!”
제 배를 꿰뚫은 촉수에 태현의 얼굴이 굳었다·
[하나로 부족하다면 둘은 어떠할까·]
태현의 시선이 길페르에게 향했다·
그곳에 격락한 악마왕은 없고·
“···로자리아·”
촉수를 해방한 서큐버스 퀸이 적안을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