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9화
[‘탑의 관리자’가 움찔합니다·]
[‘탑의 관리자’가 형제의 몸으로 무서운 소리를 하지 말라며 분개합니다·]
“이건 이제 내 몸이야· 내가 김태현이다·”
[‘탑의 관리자’가 자신의 진실한 형제를 그리워합니다·]
“난쟁이· 네놈도 장단을 잘 맞춰야 할 거야·”
[‘탑의 관리자’가 자신은 형제의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다짐합니다·]
“그래· 이제는 내가 주인이니 부르면 재깍 튀어오는 게 네놈 신상에도····”
[‘탑의 관리자’가 바깥으로 나간 형제를 그리워합니다·]
[‘탑의 관리자’가 바쁜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이동합니다·]
[‘탑의 관리자’가 급한 일이 아니면 앞으로 자신을 부르지 말라 충고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가 사라졌다·
“쯧· 내가 김태현이라니까·”
태현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육체의 주인은 김태현·
심상 세계의 주인은 도플갱어·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던 시기는 지났다·
“····”
가만히 턱을 매만져 보았다·
그렇게 손에 넣고자 했던 육체인데 막상 손에 넣으니 허탈하기만 하다·
강탈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쥐여준 탓일 테지·
“당분간은 김태현을 연기하는 게 낫겠어·”
난쟁이의 반응만 보아도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다른 대공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야 뻔하다·
털썩·
마력으로 의자를 만들어 몸을 기대었다·
심상 세계에서 사용하던 옥좌에 비하면 밋밋하나 이런 식의 활용은 육체가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생각해 보았다·
“등탑·”
탑을 올라야 한다·
100층까지 올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가능성을 쟁취해야 한다·
“중급 성좌 수준만 되어도 육체의 소유권이 뒤바뀐단 말이지·”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목표는 높게 잡을수록 좋은 법·”
김태현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상급 성좌·
최소한 그 정도의 격은 이루어야 고생하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삼천세계의 모든 가능성을 강탈해 상급 성좌의 격을 이룩하고·
바깥으로 나가 하급 성좌 상태인 김태현과 중급 성좌인 요마를 먹어 치운다·
포식의 권능과 맞닿아 있는 그들의 격을 탐한다면 기회를 봐 상급 성좌인 용을 먹어 치우는 것도 해볼 만할 테지·
“끝까지 가면 이 몸이 이기는 그림이군·”
태현이 만족스러워하며 웃음을 흘렸다·
이전에는 심상 세계에 갇혀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거슬리는 녀석이 있다면 직접 제거할 수 있고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볼 수도 있다·
“남은 건 악마족과 흡혈족 아스모데우스인가·”
잠시나마 최강의 악마왕이었던 길페르는 하급 악마가 되었고 네 명의 악마왕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흡혈족은 수장인 이그문이 버리다시피 하여 이미 로자리아의 영역에 흡수된 상태·
아스모데우스는 몸을 숨긴 탓에 당장 추적하는 게 불가능하다·
사실상 영역전쟁은 자신이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
“탑을 오르기 위해 도움 되는 녀석들을 선별해야겠군·”
의자에서 일어난 태현이 밖으로 나왔다·
요정의 숲·
자신의 심상 세계 못지않게 드넓은 공간·
신수가 무한한 마력을 공급하고 있는 공간인 만큼 가만히 걷고 있는 것만으로 체력과 마력이 회복되고 있었다·
조금 걷자 요정의 샘에서 온천욕 중인 티폰이 보였다·
“거인왕· 첫 대화상대로 나쁘지 않겠어·”
태현이 주저 없이 그의 곁으로 걸었다·
* * *
쿠구구· 쿠구구구·
태현이 거체를 들썩이는 거인왕을 올려다봤다·
“···”
코를 골고 있는 것뿐인데 주위로 마력이 흩뿌려진다·
대기 중엔 전류가 흐르듯 스파크가 튀고 몸을 담고 있는 요정의 샘은 해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밀물과 썰물이 반복된다·
요정의 샘 주변은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뒤집혀 산맥을 이루었고 몇 개의 구덩이에선 화산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용암이 들끓었다·
휘이이이이· 휘이이·
거인왕의 벌어진 입을 통해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대원소의 권능을 각성했다더니··· 설마 자고 있는 순간에도 발현되는 것이었나·”
태현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합적인 재해에 헛웃음을 흘렸다·
“티폰·”
조용히 거인왕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다섯 가지 재해가 일시에 멈췄다·
스륵·
감고 있던 거인왕의 두 눈이 뜨여졌다·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형제· 깨어난 건가·]
“그래· 조금 전에 정신이 들었다·”
[푸흐흐흐· 예나 지금이나 한 번 기절하면 기약 없군·]
“그건 너도 마찬가지인 거 같은데· 부상을 회복 중인 건가·”
마몬과 메피스토·
두 명의 악마왕을 상대했으니 부상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물었지만·
[생채기도 부상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티폰이 보랗게 물든 새끼손가락을 보이며 말했다·
“독을 한곳으로 모았군·”
체내에 남아 있는 악마왕들의 독을 몸에 묻은 진흙 정도로 치부한다·
아무래도 티폰과 악마왕들의 격차가 기대 이상인 듯했다·
“무수한 시간선을 거슬러 왔다더니· 이름값은 하는걸·”
[흐흐흐· 회귀를 입맛대로 일삼는 형제에 비할 바는 아니지·]
태현과 티폰이 그윽한 시선을 교환하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형제· 자고 일어나더니 성격이 바뀐 듯한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
“시간선(時間線)의 장난에 놀아나고서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 것·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지·”
자신의 성격에 차이가 있다면 회귀와 시간선을 반복하여 거스른 대가라고·
태현이 대수롭지 않게 둘러대었다·
[틀린 말도 아니군· 본신 또한 대공들과 가족 놀이를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건 집어치우는 게 나을 듯한데·
부러 떠오르는 생각을 입에 담지 않았다·
‘티폰은 동맹 전력으로 둬야 한다·’
언젠가의 시간선에서 상계왕의 격을 이룩한 대공·
유일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은 거대한 조각 중 하나·
김태현과는 사사로이 호형호제하는 사이·
다양한 수식어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마음에 드는 건 그 단순함이다·
‘유희를 위해 죽음마저 받아들인 괴짜라면 추후 내 정체를 알게 된다 해도 배신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문제라면 서큐버스 퀸 로자리아·
오리지널의 첫 번째 계약 상대다·
“로자리아와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던데·”
[푸흐흐· 주책이라 생각하는가·]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나는 과거에도 두 종(種)의 결실을 응원하던 입장이야·”
[흐하하하하·]
티폰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흥이 많은 녀석이군·’
대화상대로는 나쁘지 않다·
[이전에도 지금도· 과분한 빚을 졌군· 형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시간선은 존재하지 못했을 거다·]
“정말?”
[음?]
“정말 내 덕분이라 생각하는 건가?”
[물론· 형제가 아니라면 누가 하계의 대공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겠나· 그것도 두 번이나·]
티폰이 기분 좋은 기억을 떠올리듯 말을 이었다·
[상계와의 격차를 이겨내고 종족전쟁에서 승리하기까지 했다· 그때의 떨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군·]
2천계 주인 제우스·
1천계 주인이 된 가브리엘과의 일전·
이외에 태현과 함께한 수많은 전투를 떠올린 티폰이 몸을 들썩였다·
앞으로 수많은 시간을 산다 해도 그때의 전투만큼은 결코 잊혀지지 않으리라·
[본신이 상계왕이었던 시간선과 달리 하나씩 이루어가는 재미가 있달까·]
‘재미라····’
가만히 듣고 있던 태현의 얼굴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말이야· 부탁 하나 들어주겠나·”
[부탁?]
“지금 당장 실행할 건 아니고·”
[푸흐흐흐· 그대답게 또 무언가 꾸미고 있군·]
로자리아와 자신의 관계에 해가 되는 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최강의 무력을 지닌 대공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기껍던지·
“단 한 번·”
태현이 검지를 들어 보이며 티폰과 눈을 맞추었다·
“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 줬으면 좋겠군·”
[····]
“····”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하길 잠시·
[어려운 일도 아니군·]
“호오·”
[본신의 격을 걸고 맹세하지·]
단 한 번·
어떤 상황이더라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걸도록 하겠다·
거인왕에게 약속을 받아낸 태현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 * *
요정의 샘을 지나 정처 없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서 마력의 충돌이 느껴졌다·
“오르갈과 요르문간드인가·”
마수왕과 마해왕·
과거 손을 잡고 티폰을 쓰러트린 적 있는 녀석들이다·
한때는 동맹이었으나 지금은 서로를 죽일 듯이 마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마력의 충돌과 달리 가까이 가보니 일방적인 폭행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콰앙· 쾅· 콰아앙·
근육을 압축시킨 오르갈의 주먹이 사슬에 묶인 요르문간드를 타격했다·
마력을 이용해 충격을 최소화하고 있지만·
콰앙!!!
[커헉····]
오드아이의 주인은 미처 상쇄하지 못한 충격에 고통스런 반응을 보일 뿐이다·
촤르륵·
오르갈이 사슬을 잡아 마해왕의 숙여진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이놈 막내야! 형님들을 쳐다볼 때엔 눈까리를 깔라고 하지 않았느냐!]
철썩·
오르갈의 두꺼운 손바닥이 요르문간드의 뺨을 후려쳤다·
[크학··· 미친놈··· 하자드에겐 꼼짝도 못 하는 것이····]
[그것과는 곧 서열을 정리할 것이다·]
콰직!
오르갈의 주먹이 요르문간드의 복부에 박혔다·
[쿨럭····]
요르문간드가 피를 토했다·
초고속재생으로 금세 회복되었지만 고통까지 다스릴 순 없는 법이다·
콰직· 콰득· 콰앙·
[풀려난다면··· 네놈을··· 죽여버리겠다····]
요르문간드가 고통을 삼키며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눈까리 그렇게 뜨지 말라고 했지!]
쾅! 쾅! 콰앙!
오르갈이 분개하며 발길질을 이어갔다·
너덜너덜해진 요르문간드의 몸이 사슬에 걸려 늘어질 때쯤이다·
[앗··· 마스터· 깨어나셨습니까!]
태현을 발견한 오르갈이 두꺼운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라····”
생소한 호칭에 태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나쁘지 않군·”
[하하핫· 마스터께서 드디어 제 마음을 받아주시는군요!]
굽신거리는 오르갈을 보며 태현이 고개를 까딱였다·
“뭘 하고 있었지?”
[막내 녀석의 정신을 개조하는 중이었습니다·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손한 언행을 일삼지 뭡니까·]
“···”
태현이 요르문간드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사슬을 쳐다보았다·
오르갈이 황급히 설명을 시작했다·
[아 이건 큰 누님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겁니다· 권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줄 테니 막내 교육에 전념하라 하셨죠·]
‘엘븐· 이 또라이 같은 년이 악취미를 전파하고 있었군·’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김태현은 표면적으로 엘븐의 가족 놀이를 말리지 않는 입장이었으니까·
잠시 지금의 상황을 분석하던 태현이 입을 열었다·
“오르갈· 네 권능은 ‘강화’였지·”
[그렇습니다· 마스터의 권능에 비하면 허접한 재주지요·]
오르갈이 자신의 권능을 폄하하며 두 손을 비벼 보였다·
“요르문간드의 권능은 ‘폭주’였고?”
태현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마해왕을 보며 물었다·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는 듯·
오드아이에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이놈!]
[컥····]
오르갈의 주먹에 요르문간드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눈까리! 조심하라고 했지!]
[×××··· ××··· ××××····]
요르문간드의 입에서 복합적인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이놈이 그래도····]
“그만·”
[마스터···?]
“주먹을 거둬라·”
[···알겠습니다·]
태현이 여전히 노려보는 요르문간드와 눈을 맞추었다·
“요르문간드· 불만이 많아 보이는군·”
[····]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지·”
[같잖은 소리··· 하지 마라····]
[이놈이····]
“오르갈· 끼어들지 말라니까·”
태현의 시선에 오르갈이 슬그머니 들어 올린 손을 내렸다·
“서열 정리의 기회를 주마·”
[···!!]
노기밖에 없던 요르문간드의 두 눈에 처음으로 빛이 반짝였다·
“그리되면 오르갈은 쓸데없이 교정에 힘쓸 필요가 없고 넌 계속 맞을 필요가 없지·”
[무슨 꿍꿍이냐····]
“아니면 우리 막내에게 계속 맞을 생각인가? 납득하지 못하는 역할을 강요당하면서?”
[····]
요르문간드가 침묵했다·
“오르갈 네 생각은 어떻지?”
[좋은 생각입니다! 마스터!]
“그렇다는군· 어때?”
[····]
침묵은 길지 않았다·
[받아들이겠다·]
“잘됐군·”
화아아악·
태현이 퍼스널 스페이스를 만들었다·
지면은 사막이었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다·
심상을 본떠 만든 공간이었다·
털썩·
자신의 익숙한 옥좌에 걸터앉으며 손을 까딱였다·
“자 서로 죽여라· 마지막까지 서 있는 놈이 승자다·”
[···!!]
[···!!]
갈색과 청색·
강화와 폭주의 권능이 맞부딪치며 공간이 일렁인다·
피와 살점이 튀었다·
“그래· 바로 이거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두 대공의 혈전을 감상하는 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