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1화
531. 배후 1
[백업 파일(2021년 1월 1일 AM 03:03)을 다운받으시겠습니까?]
처음 내가 회귀했을 때 받은 메시지와 비슷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 순간 난 생각하지도 않고 다급히 YES를 클릭했다.
“YES!”
[에브리데이 V12.1]
[백업 파일 복구 중······]
[두 번째 다이어리 폴더에 자동 저장됩니다.]
······
[저장 완료.]
백업 데이터가 저장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된 건가?”
그때였다.
알림 메시지가 연속으로 떠오른다.
[알림 : 에브리데이 V12.1은 하나의 폰에서만 작동합니다.]
[알림 : 에브리데이 V12.1을 사용하려면 유심을 넣어서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십시오.]
“됐다!”
에브리데이 버전 12.1
즉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에브리데이가 갤럭티카 노트 20에서 실행된다는 소리였다.
난 떨리는 손으로 갤럭티카 노트 10에서 유심칩을 빼서 갤럭티카 노트 20으로 옮겨 넣었다.
순간 또 한 번의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오르고 있었다.
[알림 : 에브리데이 V12.1의 사용자가 ‘정윤호’임을 인식했습니다.]
[알림 : 에브리데이 V12.1이 사용 가능해졌습니다.]
메시지들이 주르륵 올라오면서 에브리데이가 정상 작동된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미래 일정을 볼 수 있는 에브리데이 앱은 폰이 아닌 ‘내게’ 종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더는 배터리 걱정 따윈 하지 않아도 되었다.
덕분에 난 주먹을 불끈 쥐고 기쁨의 포효를 조용히 속으로 내질렀다.
층간 소음은 조심해야 하니까.
‘아자!’
* * *
새해 첫날부터 명절 특별 방송에 출연하는 스타들을 관리하느라 회사에도 출근하지 못하고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인 1월 2일이 되었다.
회사에 출근하자 엘리베이터 옆에 붙은 LCD 화면에 뜬 인사 발령 공지가 눈에 들어왔다.
[인사 발령 공지]
– 강지영 이사 (전 본부장)
– 백세기 배우 3 실장 (전 배우 3실 팀장)
– 정윤호 배우 4 실장 (전 배우 2실 팀장)
– 은지유 팀장 발령 (전 가수 2실 대리)
– 양태민 팀장 발령 (전 배우 3실 대리)
······
나는 공식적으로 배우 4실의 실장이 되었다.
강지영 본부장도 이사로 직위가 변경됐고 정 팀 식구였던 은지유 대리도 팀장이 되었다.
그런데 동시에 유진이를 처음 맡았던 매니저인 양태민 대리도 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공고에 적힌 이름 중 또 하나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백세기.
에이스 엔터 임성학 대표의 사주를 받고 이직을 한 그는 이번엔 최만식 대표의 지원을 받고선 실장이 되어버렸다.
최만식 대표가 백세기를 이토록 비정상적으로 승진시킨 건 그 또한 굴렁쇠 엔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김동수나 최만식 대표 혹은 그 누가 굴렁쇠 엔터를 노린다고 해도 난 굴렁쇠 엔터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난 다시 한번 인사 발령 공지를 읽은 뒤 팀장급 회의가 열리는 회의실로 향했다.
* * *
6층 회의실에 들어가자 팀장들이 반 정도 모여 있다.
새롭게 승진한 팀장들이 많다 보니 다들 들뜬 표정이다.
배우 2실의 구성철 실장이 자기 옆자리를 가리킨다.
“정 실장. 여기.”
난 구성철 실장의 곁으로 가서 고개를 숙였다.
“승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난 직후 강감찬 대표가 회의실에 들어왔다.
“자. 연말 연초 다들 바쁠 테니 짧게 이야기하지. 먼저 승진한 모두에게 축하한다는 말부터 전하고 싶다. 올해도 잘 부탁한다.”
“예! 대표님!”
모두가 힘차게 대답한다.
승진도 승진이지만 최만식 대표가 ‘우리 사주’를 살 수 있게 연말 인센티브를 20%씩 더 넣어준 까닭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 혜택을 받아서 무려 12억 8천 3백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최종 인센티브로 받았다.
세금을 내고 나면 실제로 받는 금액은 절반 정도겠지만 그래도 좋아서 웃음이 실실 나온다.
“그리고 다음 주에 관우 엔터 쪽 식구들이 오면 너그럽게 받아주도록.”
“예. 대표님.”
“자 그러면 일단 정 실장부터 브리핑 한번 해봐. 오늘 체리블라썸 애들은 어때?”
오늘은 음악방송 최초로 연속 11주 차 1등을 노리는 체리블라썸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지난주 콘서트 버프 때문에 이번 주에는 오히려 음원이랑 스트리밍 조회 수가 역주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내내 방송에 나간 덕분에 방송 포인트도 높은 편입니다. 이대로라면 음방 연속 11주 1위가 유력합니다.”
“좋네. 그러면 애들 컨디션은 좀 어때? 지난번 ‘Hurry Up’ 때는 10주 차에서 애들 컨디션이 엉망이었잖아.”
“박선녀 안무가가 애들 체력을 잘 관리해서 그런지 아직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12주 차까지도 가능하겠어?”
“그건 주말이 지나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도 최대한 밀어줘 봐. 아참 그러면 세리 솔로 데뷔는 어떻게 할 거야. 체리블라썸 활동이랑 겹치게 할 건가?”
“아니요. 세리는 솔로 데뷔 무대를 조금 늦출까 합니다. 최소 2주는 쉬어줘야죠.”
“생각 잘했다. 아무리 실적이 중요하다지만 길게 봐야지. 다들 잘 들어. 무엇보다도 소속 연예인들 건강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강감찬 대표는 나와의 대화를 이끌어가며 새롭게 팀장이 된 이들에게 일종의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체리블라썸은 됐고 그러면 화란전 제작 발표회 준비나 보고해봐.”
<화란전>의 제작 발표회는 모레인 1월 4일에 잡혀 있다.
“모레 삼성동 H 호텔 연회장에서 오후 2시에 발표회를 할 겁니다. 기자들은 최대 200명까지 몰릴 예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200명이라······ 규모가 생각보다 크구나.”
평소 제작 발표회장에 모이는 기자들의 수는 100명이 채 넘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이뿐 아니라 S급 여배우들이 여럿 출연하는 드라마다 보니 다들 참석하겠다고 회신을 해왔다.
그때 백세기가 대화에 끼어든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맞은편 삼성동 I 호텔에서 KBC의 ‘정희왕후’도 제작 발표회를 진행한다고 하던데. 알고 있어?”
KBC의 박찬식 대표는 ‘<화란전> VS <정희왕후>’의 대결 구도를 위해 같은 시각에 바로 맞은편 호텔에서 제작 발표회를 잡았다.
화제의 중심인 화란전에 맞서서 경쟁 구도를 만들어 가겠다는 뜻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화란전>의 제작팀들이 준비한 것들이 있답니다.”
백세기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게 뭔데?”
“죄송합니다만 보안이라며 저에게도 비밀로 하더군요.”
실은 그날 현장 제작 발표회 말고도 너튜브 라이브로도 동시 제작 발표회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발표회장에서 짤막한 공연도 할 예정이었고.
하지만 난 그 정보를 백세기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백세기에게 말했다간 외부로 이벤트 내용이 새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보안이라니?”
“화란전 제작팀들이 알아서 준비한다고 해서 저도 못 물어봤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정 실장은 오복희 PD랑 꽤 친한데 그것도 안 알려줘?”
“친하긴 해도 자체 제작 드라마의 발표회는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행사 아닙니까? 저흰 그저 참석자들이고요.”
“아니 그래도 뭘 하는지는 알아야 우리도 준비를 하고······”
순간 강감찬 대표가 대화에 끼어든다.
“백 실장. 그건 정 실장이 알아서 할 문제지 자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지 않나?”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실장들은 다들 독립 권한이 있고 대신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게 굴렁쇠 엔터의 방식이라는 걸 우리 백 실장은 못 들었나? 분명히 실장들한테는 별도 공지도 갔을 텐데.”
백세기가 아차 하고 고개를 숙인다.
“죄송······ 합니다.”
“말로만 말고 앞으론 행동으로 보여줘. 행동으로!”
백세기가 찌푸려지는 얼굴을 가리느라 고개를 숙인다.
그래.
나댈 때부터 혼날 줄 알았다.
실장이 된 백세기는 날 방해해보려다 본전도 찾지 못하고 꼬리를 말아 버렸다.
난 이어서 이태풍의 <지리산>에 관하여 브리핑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알림 : 2021년 1월 4일에 ‘정유진’의 새로운 일정이 등록되었습니다.]
‘1월 4일?’
1월 4일이면 <화란전>의 제작 발표회가 있는 날이다.
난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다급히 1월 4일의 일정을 확인했다.
그런데 다이어리에는 어이없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에브리데이 V12.1]
[날짜 : 2021년 1월 4일]
-PM 12:00 [NEW. 정유진] H 호텔 <화란전> 제작 발표회 연기. 호텔 소방 긴급 점검. (긴급회의 : MBS 본관으로 오후 5시. 호텔에서 고의로 연기했을 가능성.)
‘제작 발표회가 소방 긴급 점검 때문에 연기가 된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엄연히 돈을 받고 영업하는 호텔이 제작 발표회를 고의로 방해하기 위해 긴급 소방점검을 하다니.
이 일이 밝혀진다면 소송도 소송이거니와 그런 짓을 한 호텔을 방송국이나 제작사들이 다시 찾을 리가 없다.
그 누구보다 호텔리어들이 위험을 잘 알 텐데 이런 일정이 뜬다면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호텔 쪽에서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 혹은 금력이 개입한다는 뜻이다.
어쨌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화란전>의 제작 발표회는 엉망이 될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KBC <정희왕후> 측만 이익이고.
범인은 가장 이득을 보는 자라고들 하지만 KBC가 그랬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빈약했다.
방송국 정도로는 호텔에게 이 정도의 압박을 넣을 힘은 없기 때문이다.
내 심각한 표정을 봤는지 강감찬 대표가 묻는다.
“정 실장.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죄송합니다. 오 PD님께서 제작 발표회 때문에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하시네요.”
“PD가 부르면 가야지. 대충 이야기는 들었으니까 가서 일 봐.”
“예. 대표님.”
난 모두에게 고개를 숙인 뒤 급히 회의실을 나섰다.
* * *
삼성동 H 호텔.
지하 4층 주차장에 차를 대고 대관을 맡은 김택균 부장이 기다리는 사무실로 향했다.
김택균 부장은 회귀 전에도 종종 만났던 호텔리어였다.
내가 아는 그는 뒷돈을 받긴 했어도 최소한 선을 지킬 줄 아는 직장인이었다.
그러나 호텔에서 고의로 문제를 일으킨다는 일정이 뜬 이상 그도 용의선상에 둘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난 곧장 김택균 부장의 자리로 안내받았다.
“안녕하십니까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라고 합니다.”
“아~ 정 실장님. 이쪽으로 앉으시죠.”
김택균 부장이 사무실 한쪽 테이블을 가리킨다.
회귀 후에는 그와 처음 만났기에 테이블에 앉으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이어서 난 <화란전> 제작 발표회 행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슬그머니 ‘소방점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혹시 소방안전 담당자를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소방안전 담당자는 왜 보자고 하십니까?”
“회사 지시 사항입니다. 현장에 가서 잘 체크를 했는지 확인을 하는 절차 중에 소방 관리자를 만나야 하는 과정이 있거든요.”
김택균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을 가리킨다.
“전담 직원이 4일까지 휴가입니다. 그래서 제가 소방 담당도 겸직하고 있습니다. 뭐 사인할 서류라도 있으면 저한테 주시죠.”
“잠깐만요. 그러면 혹시 저희 제작 발표회 때 소방 담당 책임자가 김 부장님이시라는 겁니까?”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순간 그가 제작 발표회를 취소시킬 가장 유력한 사람으로 용의선상에 올렸다.
“아 아뇨. 그러면 혹시 최근에 받은 소방점검표라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사진만 좀 찍어가면 됩니다.”
모든 시설에는 언제 소방점검을 했다는 걸 기록한 기록지들이 있다.
그건 제작 발표회를 앞둔 관계자가 봐도 아무런 무리가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바쁜 사람 붙잡고 이거 뭐 하시는 겁니까?”
별것 아닌 일에 과도하게 화를 내는 것만 봐도 김택균 부장이 제작 발표회를 망치는 범인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젠 김택균 부장의 약점을 언급하고 실토하게 하는 수밖에.
“김 부장님.”
“아 됐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점검표 같은 내부 정보는 못 보여드립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럽니다.”
“뭡니까?”
난 파티션 너머의 직원들과 거리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조용히 속삭였다.
“작년 12월 말일에 연말 호텔 행사 주관사랑 식자재 납품업체에서 뒷돈 받으셨죠?”
H 호텔에서는 12월 31일과 1월 1일 양일간 대 연회장에서 대규모 행사를 한다.
신년맞이 행사가 제법 크기 때문에 대관과 행사를 주관하는 김택균 부장은 그때마다 적당히 뒷돈을 받아 챙긴다.
매년 해오는 행사였기에 작년에도 뒷돈을 받았을 게 틀림없다.
순간 김택균 부장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한다.
“다 당신 뭐야?”
역시나 내 생각대로였다.
난 주변 사람들을 가리키며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한 가지만 이야기해주시면 그 일은 덮어드리겠습니다.”
김택균 부장이 주변에 있는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날 밖으로 이끌었다.
“따 따라와요.”
복도로 간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저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어찌나 당황했는지 이젠 높임말까지 한다.
난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제가 오늘 부장님을 찾아온 건 호텔 측에서 ‘화란전’ 제작 발표회를 방해하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긴급 소방점검 같은 거로 당일날에 제작 발표회를 연기시키라고 하던가요?”
“그 그걸······ 어떻게?”
자신이 계획한 걸 단번에 맞추자 김택균 부장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다 알고 왔으니까 편하게 가시죠. 아니면 경찰을 부르고요.”
김택균 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진짜로······ 제가 한 짓은 덮어주실 겁니까?”
“예.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된 겁니까?”
김택균 부장이 모든 걸 포기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회사에서 시키긴 했지만······ 저희 회사에 압박을 넣은 곳이 따로 있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김택균 부장은 한숨을 푹 내신 뒤 진짜 배후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